한국은 어떻게 경제를 일으켰나이자 한국이 겪고 있는 사회 문제의 원흉이기도 한 한강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국은 현재 선진국 반열에 올라와 있습니다.
gdp는 세계 11위, 무역 규모는 세계 8위를, 글로벌 시장 점유율이 에 달하는 반도체부터 핸드폰, 자동차, 화학, 철강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죠.
최근에는 한국의 문화 콘텐츠 역시 전례 없이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bts는 미국 빌보드 차트를 휩쓸고, 블랙핑크는 미국 최대 음악 축제 코첼라에서 아시아 가수 최초로 헤드라이너로 출연하며 kpop의 위상을 높였죠.
한국의 웹툰과 게임 산업 역시 세계 시장을 무대로 점차 영향력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조만간에 다룰 k뷰티, 화장품 분야에서도 한국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큰
차지하고 있죠. 갈수록 빈부 격차가 커지고 있긴 하지만 지표들만 보면 누가 뭐래도 현재 한국은 잘 사는 나라입니다.
개발도상국 국가들은 한국이 어떻게 경제 성장을 했는지 치고 있죠.
한국은 지독한 언더독이었거든요. 다들 아시다시피 한국은 까놓고 말해서 못 사는 나라였습니다.
1920년대 뉴욕과 한국을 비교해 보면 확연한 차이가 보이죠 사실 굳이 뉴욕이 아니더라도 서양 국가들과 비교해 보면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20년대가 아니라 50년대, 70년대를 봐도 비
하지만 지금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아이 오히려 가슴이 웅장해지는 외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뭐 그 아래에 사는 우리들의 행복지수 같은 경우는 또 다르지만 어쨌든 겉으로 봤을 때 한국은 선진국이자 경제 대국이죠.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 망해가는 독일이 선진국으로 솟아오르던 일을 라인 기적이라고 부르던 것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6.25 이후 황폐한 한국에서 1980년대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의 부상 그리고 현재까지 전 세계의 역사를 다 뒤져봐도 한국과 같은
사례는 거의 없죠. 외국에서도 한국의 경제 발전은 동아시아의 기적 미라크 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빠른 경제의 성장에 성숙하지 못한 시민의식, 경제 제일주의로 인한 사회 문제와 낮은 개인의 행복도 여러 가지 문제도 있죠.
뭐 스코틀랜드의 속담인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지만 자전거 탄 채로 웃는 것보다 벤츠 단체로 우는 게 편하다는 말처럼 옷 사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도 드네요.
불과 약 60년 전인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은 일명 보리고개를 겪으며 굶주리던 나라였습니다.
5에서 6월만 되면 지난해 가을에 수확한
이 바닥나서 국민 대다수가 풀뿌리나 나무 껍질로 끼니를 떼웠죠.
70년대까지는 쌀 소비량을 줄이기 위해 혼분식 장려 운동을 펼쳤습니다.
베이비붐으로 인구가 크게 증가했으나 쌀 생산량이 이를 따라가지 못해 쌀 부족과 쌀 상승 현상이 일어났고 당시 박정희 정부는 국민들이 쌀에 여러 가지 곡과 밀가루를 섞어 먹게 해줘 최근에는 웰빙을 위해 또는 취향에 따라 잡곡을 먹지만
시절의 선택지가 아니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잡곡을 먹나 안 먹나 도시락 검사까지 할 정도였거든요.
식당에서도 쌀밥 대신 밀가루로 만든 국수나 수제비를 판매해야 하는 날이 정해져 있었죠.
곰탕이나 설렁탕에 국수나 당면을 넣어 먹는 것은 이때 생겨났을 거 아닙니다.
이렇게 쌀 하나도 마음껏 먹지 못할 만큼 가난했던 한국은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을까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요?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에 패배하고 항복을 선언하면서 조선은 비로소 35년간의 참혹했던 일본의
집에서 해방됩니다. 민중은 환호했죠.
일본의 식민 잔재를 청산하고 독립국가를 건설의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기쁨은 잠깐이었죠. 미국과 소련은 조선의 의사와 관계없이 한반도를 둘러 분할해 버립니다.
38도선을 기준으로 북쪽 지역은 소련군이, 지역은 미군이 분할 점령하였죠.
당시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냉전 구도가
잡던 시기였습니다. 미국과 소련에게 한반도는 반드시 차지해야 할 안보상이 지역이자 전초기지였습니다.
아시아의 패권 자지우지하는 자리였죠.
38선이 처음 생길 때까지만 해도 분단이 일시적일 것이라 예상했지만 미국과 지배 아래 한반도는 점차 격렬한 이념 대립에 놓이게 됩니다.
자유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 심화되는 양극화 속에 1948년 결국 남과 북에 각각
독자 정부가 수립되고, 이는 2년 뒤 한국 전쟁으로 이어지죠.
소련과 중국을 설득하여 한반도를 적화 통일하려는 계획을 김일성은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통일을 명분으로 기습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3년 동안 이어졌죠.
이 과정에서 한국은 정치, 사회적, 경제적으로 총체적인 난국계에 직면합니다.
약 60만 채의 가옥과 함께 산업시설과 공
시설의 80%가 파괴되었죠. 한반도 전체가 그야말로 폐허가 된 것입니다.
미국과 소련 역시 적잖은 비용을 치러야 했고, 생각보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휴전과 협상에 성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정 협정이 체결되죠.
비로소 전쟁이 끝났으나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현실이 너무 암울했거든요. 앞서 말했듯 한국은 전쟁의 여파로 전국이 쑥대밭이 되었고, 휴전 이후 세계에서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1953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고작 7달러에 불과했죠.
아프리카의 가나보다 낮은 수치였습니다.
한국은 미국의 경제 원조에 의존해야 했죠.
경제 부흥을 위한 투자에서는 총금액이 60% 이상을 원조화해 차입에 의존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금을 직접 조달하고자 했던 정부는 무차별적으로 산업 금융채 및 산업 부흥채를 발행했고, 이는
인플레이션을 초래했습니다. 당시 한국 경제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냐며 미국 국제개발처 usaid는 한국의 원조금을 지원하며 한국을 밑받질 독이라고 혹평할 정도였죠.
하지만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됩니다.
당시는 미국의 대 정책 변화로 무상원조가 감소하기 시작하여 자체 경제 개발이 급하던 때였죠.
그 무렵 박정희가 등장했습니다. 박정희가 아니라 미국이다 설계한 것이고, 박
꼭두각시였다 뭐 이런 말도 있지만, 어쨌든 한국의 경제 성장은 박정희 시기에 윤곽이 잡혔죠.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혁명 공약에서 절망과 기아, 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 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라고 외쳤죠.
이때부터 한국이라는 국가는 하나의 목표 경제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의 신흥 독립국들이 폐쇄경제를 택했을 때, 한국은 수출 주도형 경제 발전을 성장 전략으로 잡죠.
하지만 수출 주도형 발전은 초반에 농촌 붕괴 현상을 초래하며 막대한 실업과 외화
사태를 낳게 됩니다. 이때 선택한 게 외화벌이죠.
1963년부터 박정희 정부는 약 1900명의 광부와 약 1만 명의 간호사를 소독에 파견했습니다.
당시 서독은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인해 노동력이 부족한 상태였거든요.
많은 지역 기회가 보장된 상황에서 독일인들은 육체 노동이 요구되는 직업은 가지지 않으려 했습니다.
부족한 인력을 한국을 포함한 외국인 노동자가 채운 것이죠.
당시 한국은 연간 약 5천만 달러를 벌어들입니다.
gdp의 무려 2%에 달하는 액수였던 이 외환은
경제성장의 종잣돈이 되었죠. 1964년 9월부터는 30만 명이 넘는 국군의 베트남에 파병하여 약 50억 달러에 해당하는 거액의 외화를 벌어들이는 전쟁 특수를 누렸습니다.
이 금액에는 미국의 군사원조, 파병, 한국군의 수당 그리고 베트남 전쟁 관련 사업으로 한국 기업이 수입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진현대, 대림건설 등의 기업들이 이때 용역과 건설, 무역으로 떼돈을 벌며 재벌로 성장했죠.
1954년 7.2%에 불과했던 경제 성장률은 1970년에 10%
증가했고 1960년 129만 원이었던 1인당 국민총소득은 10년 만에 200 7만 원으로 증가합니다.
베트남 특수가 끝난 후 한국은 막대한 오일머니를 가진 중동으로 눈을 돌렸죠.
정부는 1970년대부터 중화학공업을 집중 육성하며 수출 기업에 특혜를 줬는데 이때 건설 기업들이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중동에 진출해 일명 중동 붐을 일으켰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공단의 항만 공사, 가스공사, 주거단지 조성 등 초대형 공사들을 모두 따내며 1970
19년에는 1인당 gdp 1700 달러를 달성하죠.
물론 긍정적인 면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고도 성장은 물가 폭등을 초래했습니다.
정부가 수출 촉진과 산업 확충 등을 위해 화폐를 과도하게 발행했고 오이 쇼크 같은 외부적 요인도 더해져 인플레이션이 되었죠.
나라 경제는 성장했지만 물가 상승으로 서민들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결국 1980년대 초반에는 경제 성장률이 마이너스
%로 곤두박질치며 난관을 겪게 되었죠.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잉 투자, 2차 오이쇼크 126 사태로 인한 정치적 혼란 같은 복합적인 요소 때문이었죠.
전두환 정부는 재정을 동결하고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석유를 비축하는 등 적극 극적인 경제 안정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결과적으로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경제는 안정을 찾고 저금리, 저유가, 저환율의 이른바 3조 호황을 맞게 되죠.
이때부터 전기자동차, 가전제품, 조선기,
철강 등 중학 분야를 통한 고도 성장을 이어나갑니다.
1989년에는 tv, 휴대폰, 보일러 등의 전자제품의 수출로 수출 180억 달러를 달성하기에 이르죠.
1990년 한국은 비로소 경제 강국으로 발전하며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로 됩니다.
1964년에 수출 1억 달러를 넘어선 한국은 31년 만에 수출 2천억 달러를 돌파하는 쾌거를 이루었죠.
대기업 밀어주기라는 혹평과 부작용은 존재하지만 나라에서 it 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상화한 결과 삼성, lg 등 대기업들이 글로벌 it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제가 태어난 1996년에는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를 열며 oecd의 29번째 회원국으로 입성하게 되었죠.
가입 확정과 동시에 정부와 온 국민이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약 1년 뒤 imf가 터지기 전까지는 말이죠 우려했던 일은 현실이 됐습니다.
1997년 1월, 당시 재계 순위 14위였던 한보그룹의 부도를 시작으로 재벌
들이 줄줄이 도산하기 시작했죠. 3월에는 삼미, 4월에는 진로, 5월에는 대농과 한신, 7월에는 기아, 11월에는 해태와 뉴코아, 12월에는 고려증권과 한라가 쓰러졌죠.
그야말로 뉴스만 틀면 나라가 망해가고 있다는 소리 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결국 1997년 12월 3일, 외화 관리 정책 실패를 비롯한 여러 복합적인 요인으로 사상 초유의 경제 위기를 맞은 한국은 국제통화기금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죠.
imf는 한국에 가혹한 경제 구조 조정을 요구했고, 그 결과 더 많은 기업과 은행들이
도산했습니다. 10가구 중 4가구는 실직이나 부도를 경험했고, 이로 인해 수많은 가정과 중산층이 붕괴됩니다.
하지만 한국은 또 이겨내죠. 금모으기 운동과 같은 전 국민의 단결력과 imf의 개입 속에 착수한 김대중 정부의 경제 개혁으로 한국은 서서히 금융위기로부터 빠져나갑니다.
1998년 12월에는 imf 긴급 보강 금융에 18억 달러를 상환하고, 2001년 12월 4일에는 예정보다 3년 가까이 앞당겨 모든 차관을
상환함으로써 김대중 정부는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공식 발표했죠.
imf 구제 금융을 받은 나라 중 한국처럼 단기간의 위기를 극복한 나라는 없다.
이후 한국은 무역 자유화 정책과 경제 개혁 등으로 빠른 경제 회복세를 보였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또 한 번 큰 타격을 입긴 했지만, 경제는 계속해서 성장했고, 2009년 oecd 산하 개발원조위원회에 가입하면서
최초로 원조 수혜국에서 원조 공여국이 되었습니다.
한강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죠. 일제강점기부터 6.25 전쟁, 그리고 imf 외환 위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에는 그야말로 바람잘 날이 없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메가 더 장군은 폐허가 된 서울을 보며 이 나라를 복구하는 데 최소 100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죠.
하지만 한국은 그 모든 위기를 이겨내고 70년 만에 세계 1위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자부심만 갖기엔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습니다.
imf를 계기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 상하이 계층의 소득 격차가 확대되는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었고, 이는 현재까지도 극복하지 못한 문제이죠.
급격한 발전으로 인한 세대의 갈등, 경제 위주의 국가 운영이 낳은 황금 만능주의 등 많습니다.
여전히 아이들은 꿈 적성이 아닌 돈을 보죠.
의대가 목표이고, 의대에서도 외과 같은 과들은
대상이 되니까요. 확실히 시도 있지만 그래도 한강의 기적은 꽤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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