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이야기에서 시작을 하겠습니다.
하나씩 읽어보겠습니다.
이지르부카 아라트나시리 부다시리 바스마 도르지 아라트나시리 바얀테무르 모두 고려 왕들 이름입니다.
몽골 이름입니다.
원나라의 반식민처럼 돼있었던 그 고려 후기
충자둘림의 왕들 몽골 이름입니다. 자 그러면 이 이름들은 어떨까요? 바얀 티무르 울루스 북카 울루스 부하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의 몽골 이름입니다.
그리고 바이얀 티무르는 이 이자춘의 아버지 그러니까 이성계 할아버지 이춘의 몽골 이름입니다.
용비어천가에 보면 해동 육룡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육룡은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을 이룹니다.
이 안사라는 사람이 목조인데 이 목조부터 환조까지 이 사람들은 모두 원나라의 다루가치들이었습니다.
몽골 원나라의 지방을 통치하는 관리들을 가르킵니다.
전주 이씨 왕실은 그 옛날 이 안사라는 사람이 전주에 살고 있을 때
당시에 서울에서 파견됐던 한 관리와 다툼이 생겨서 삼척으로 피난했다가 몽골 땅으로 당시 원나라로 망명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원나라에 귀화를 해서 다루가치로서 지역을 통치를 하다가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 울루스 무하 때 고려로 귀순을 했죠.
그게 천삼백오십오년입니다. 이성계는 이 고려로 귀순하기 이십 년 전인 천삼백삼십오 년 당시 몽골 땅의 화령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조선을 개창을 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몽골 땅에서 태어났지만 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몽골 이름이 지금으로 생각하면은 뭔가 이해가 되지 않는 뭔가 복잡한 그런 정치적인 민족적인 그런 갈등과 융합이 있었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 전주 이씨 왕실이 왕실이 만든 나라가 조선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제목은 바로 같이 울루스부카의 아들 조선의 왕이되다.
오백 년 만에 고종이 한 방에 해결해낸 조선 왕실 시조 조경단입니다.
전라북도 전주 덕진동에 가면은 전북대학교하고 덕진 체련공원 사이에 늘 닫혀있는 문이 있습니다.
문 너머의 공간 이름은 조경단입니다.
경사가 시작된 재단이란 뜻입니다. 또 있습니다.
옛날에 이 전주성 남문 이름은 풍남문입니다.
서문 이름은 패서문입니다. 풍과 패는 중국 한나라 유방이 군사를 일으킨 강서성 패군 풍년을 가르킵니다.
자, 이제 짐작이 가시겠죠
조병달이 뭐고 풍남문이 뭐고 태선문이 뭔지.
조선 왕실에서 제 전주는 풍패지향이었습니다.
새 왕조를 일으킨 제왕의 고향이란 뜻이죠.
조경단은 이 전주희씨 시조인 이한이라는 사람을 기리는 재단입니다.
그리고 강원도 산척에는 이성계 고조부 이양무의 무덤
준경묘가 있습니다. 자그마치 오십팔년 동안 이어진 조선 왕실은 자그마치 오백칠 년 뒤인 천팔백구십구년에 자기네들의 시조 묘와 삼척에 있는 고부 고조 묘를 찾아서 단과 묘를 만들었습니다.
자, 이렇게 전주에서 시작해서 두만강 건너 알동까지 이어진 전주 이씨 왕실 흥망사 이야기입니다.
전주희씨 왕실사를 기록한 조선 왕조.
실록에 따르면 전주에 처음에 살던 이 안사라는 사람은 성품이 호방했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천하를 경략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죠.
그런데 때마침 전주에 산성 별감이 파견이 됩니다.
전주성인 행적을 잘 돌보고 있나 하고 중앙에서 파견된 거죠.
그때 이 탄성 별감하고 관기 기생을 두고 다퉜답니다.
후한이 두려웠던 이안사가 화를 피해서 자기를 따르고 있는 식솔 백칠십 여 가구와 함께 강릉도 삼척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럼 나중에 또 보니까 그 아까 싸웠다던 산성 별감이 강릉도 안 염소를 부입을 한 거 아니겠습니까 안 되겠다.
그래서 화를 피해서 동해를 가로질러서 북쪽 덕원 지금의 한홍 땅으로 옮깁니다.
한옥은 그때 몽골 땅이었습니다. 원나라 땅이었습니다.
산척을 떠나기 전에 이안사의 아버지 이 양부가 죽었습니다.
황급한 와중에도 묘째를 찾아 찾고 있는데 승리하라.
자가 와서는 그 옆에 언덕에 앉더니 자기가 데리고 있던 동자한테 이렇게 말한다는 겁니다.
이 자리가 소 백 마리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고 금으로 관을 만들면 오대 뒤에 임금이 나올 자리네 하고 가더랍니다.
그 가난했던 이한사가 야 저기 있으면 우리 집안이 필 텐데 하고 생각하고 근데 돈이 없으니까 그래서 꾀를 냈습니다.
소 백 마리 그러니까 일백 백자인데 그 대신에 흰 백자를 써서 흰 소를 제물로 잡아서 제사를 지내고 금으로 만든 관을 살 돈이 없으니까 황금 대신에 누런 귀리 집으로 관을 삼아서 장사를 치렀다고 합니다.
대구 금관 신화입니다. 그리고 오세 때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합니다.
조금 세월을 위로 돌리면은 이성계와 이방원까지 이 사람들을 세종은 용비어 창가에서 해동 육룡이라고 불렀습니다.
목조 이안사, 익조 이행리, 도조 춘, 환조 이자춘,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입니다.
그 천이백오십사 년에 이안사가 두만강을 건너서 지금 러시아 땅인 알동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때는 몽골 땅이었죠. 거기서 원래 원나라 지역 관리가 됩니다.
이 사람이 첫 번째 다루가치입니다. 이 다루가치는 세습입니다.
그 손자 이자춘이또 몽골명의 이러한 다루가치가 됐고 그 아들 또 이자춘이 또 이런 이름을 가진 다루가치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몽골의 다루가치로서 넓은 영역을 통치를 했죠.
그러다가 어느 날 이자춘이 꿈을 꿨답니다.
꿈속에서 흥룡과 싸우고 그 백룡이 싸우는데 그 백룡을 도와줬답니다.
그런데 백룡이 큰 경사가 자손이 있으리라 하고 예언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자춘이 고려에 귀순을 해서 공민왕을 도와서 몽골을 격퇴합니다.
따라왔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스무 살 먹은 이성계였습니다.
이성계도 군인이었죠. 그래서 왜구 격투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민심을 확 잡은 다음에 새 나라를 세웠습니다.
태조가 된 겁니다. 이게 그 애비들이 꿈꿨던 배구 금관 설화가 실현된 겁니다.
고조 때 쫓기듯이 떠났던 고향으로 찬란하게 복귀한 거죠.
그러니 이 삼척과 하문과 고향 전주가 얼마나 소중했겠습니까 몽골 본토에 살던 전주 이씨들이 몽골 이름을 쓰면서 살다가
고향 고려로 돌아왔던 겁니다. 이제부터 이 전주에서 벌어지는 일들 조선 후반 특히 고종 때 벌어졌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천사백십이년에 전주의 어용전이 건립됩니다.
어용전은 왕의 초상화를 모시는 건물입니다.
갤러리죠. 세종 때 이게 경기전으로 계층이 됩니다.
경기전은 지금 세 전주의 한옥마을의 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 어영전에는 태조 이성계 초상화
늘 봉안들렸었습니다. 오로지 초상화 하나를 복원했던 그런 전각입니다.
그런데 이 임진왜란 전까지는 제왕의 땅 그러면 풍패의 지향이라 그러면 함흥과 한길도일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전주 이씨들이 전주에서 피난을 가서 또 그 위 북쪽으로 또다시 달아나서 안정되게 세력을 퍼뜨렸던 그런 곳이니까요.
그래서 한길도 관찰사 정갑손이 본도는 우리 조정의 풍패라고 자랑을 했기도 했었습니다.
세종 때 선조 때도 한길도는 풍패의 땅이므로 지키지 않을 수 없다 라고 인진단이 끝나고 나서 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산적에 대해서는 처음부터는 왕실에서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느냐 제후의 조상묘는 사대까지 제사를 지냅니다.
유교 여의 예법에 따르면요 이성계 오대조인 이 양무는 이 예법 바깥에 있는 존재였죠.
천오백팔십 년에 강원도 감찰사가 이렇게 보고를 합니다.
천하 명당에 이양무의 묘를 찾았다라고.
그때 감사가 정철이었습니다. 송강 정철입니다.
그랬더니 이 예법을 꺼내면서 이를 조정에서는 무시무시를 해버립니다.
그래서 왜란이 끝나고 호란이 끝납니다.
그리고 양반 사회가 안정이 되고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영정조 그 무렵 숙종 그 무렵이 됩니다.
아 이 전쟁도 끝났고 좀 살만하다 싶으니까 사대부 집안을 중심으로 족보 제작 그리고 시조 묘 찾기 그리고 열풍이 붑니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에 내로라 하는 그런 사람들 집안이 가지고 있는 족보들은 태반이 바로 이 시기 십칠세기 후반 십팔 세기 이때 제작된 족보들입니다.
고조부까지만 제사를 지는 사대 봉사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사당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대까지만 지낼 수 있는 그 4대 봉사 한계를 넘어서 묘 앞에서 제사를 지낸 묘제 묘제를 통해서 자기네 가문의 결속을 하려는 그런 움직임이 동시에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묘가 필요한 겁니다. 자연스럽게 시조묘가 왕실 시조묘가 있는 전주가 풍패 지장으로 부하게 됐습니다.
또 배구 금관 건국사를 품은 산척이 성지로 부각된 겁니다.
그리하여 삼척을 중심으로 강원도 지역에서 이양무 묘를 찾았다는 제보가 잇따라 올라옵니다.
인조 뗍니다. 천육백사십 년 풍기 사람 박지영이란 사람이 묘를 꿈에서 찾았다면서 꿈 몽자, 책 서자를 쓰는 몽서를 올립니다.
그 명정승인 최명길도 가끔 꿈이 드러막기도 한다면서 이 박지영이 올린 몽서에 대해서 조사를 요구를 합니다.
그랬더니 인조가 사람을 보내서 그 삼척 지역, 그러니까 이 몽세에서 봤다는 적혀 있는 그 꿈의 지형을 조사하고 땅을 파봤죠.
근데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도 인조는 삼척에 있는 준경묘 이양무 묘에 조금이라도 제보를 하라고 권장을 합니다.
이렇게 이 품귀 사람이 제보를 올렸는데 이게 완전히 어찌 보면은 가짜처럼 들어났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한테 상을 줍니다.
상을 주면서 앞으로 우리 조상의 묘를 사야 되는 사람한테는 이와 같은 상을 내릴 것이다 라고 이렇게 은근히 풍긴 겁니다.
찾는 사람한테
백금과 판윤 벼슬을 준다라는 말이 쫙 퍼져나갑니다.
그랬더니 제보가 봇물처럼 터집니다. 하지만 아무런 증거가 나오지 않는 겁니다.
그 이후에 효종, 숙종 때까지도 증거 없는 거짓 제보가 계속 터져 나오니까 험악한 말을 한 혐의이라면서 벌을 주고는 했습니다.
대신에 그때까지 이양무와 그 안에 이씨 묘로 제일 많이 지적된 그 분묘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하곤 했죠.
그러면서 세월이 갑니다.
천칠백육십칠년입니다. 전주성이 대화제로 불탑니다.
그랬더니 그때 전라관찰사 홍 낙인이 남문과 서문을 재건하고 이름을 각각 풍남문과 대선문이라고 붙였습니다.
그때 이제 비로소
전주성이 진정한 제왕의 성이 된 겁니다.
천칠백칠십일 년입니다. 영조 때니다.
전주 경기전 북쪽에 조경묘가 건립됩니다.
그때 또 영조는 이 시조 이한의 사당의 건립을 전격적으로 지시를 합니다.
이렇게 말하죠. 내가 지금 여든인데 십산데 할아버지 얼굴을 뵙게 될 판이다 곧 죽겠단 얘기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불과 두 주 만에 터, 악기 공사가 완공되고
그리고 바로 사당이 관공이 됩니다. 영조의 왕거리고 관이 흔들렸거든요.
영조가 과연 정당하게 왕권을 차지했느냐에 대한 암살 음모가 많이 적발되기도 했었으니까요.
그 왕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조 이장의 묘를 빨리 찾고 찾지 못한다면 그의 사당이나 재단을 빨리 만들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던 거죠.
그런데 이 시조 이한의 묘역을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경기전 옆에 사당만 지었습니다.
그리고 완공이 되고 사흘 뒤에 특별 과거를 실시했습니다.
희한하게도 시조와 시조 할아버지와 시조 할머니인 전주이씨와 경주이씨 급제자가 안 나온 겁니다.
그랬더니 영조가 그 다음 달 이 전주희 씨하고 경주 김씨만 상 대상으로 또 시험을 치러서 네 명을 급지를 시킵니다.
완전히 이제 아 참 웃기는 얘기지만 하여튼 그렇게 전주이씨를 어찌 그때 어떻게 되든지 기록상으로는 최고의 가문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그렇게 작용했던 거죠.
이제 전주는 조선 창업자 태주의 본양 그 정도에서 조선 창업의 땅으로 격상이 돼버린 겁니다.
그리고 한참 세월도 문제적 세월 천팔백년대 고정 때가 왔습니다.
고정 때도 후깁니다. 천팔백구십팔 년 1월 이십사일입니다.
이종건이라는 의정부 찬정이 시조묘를 찾지 못하고 모시지 못해서 원통하다고 상소를 합니다.
그때 고종이 대답합니다.
어 일반 백성도 조상을 모시는데 황제의 집안이겠는가 이때가 고종이 대안 제국을 만들고 딱 일 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나라는 엉망 진창이 됐었는데 고종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환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정통성 확보를 최우선의 정책으로 삼고 있었죠.
그러해서 천팔백구십구년 이듬해 석 달 만인 일월 이십오 일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이렇게 선언합니다.
전주 건지산에 제단을 쌓고 조경단이라고 부르라.
건지산 어느 쪽에 시조인 이 한의 무덤이 있는데 이걸 찾지 못하겠으니
그냥 재단을 쌓고 재단을 쌓고 거기 제사를 지내라.
그 재단 이름은 조경단이라고 하라. 라고 명한 겁니다.
동시에 바로 그에 바로 며칠 어안으로 삼척에 있는 이안사 부부묘를 준경묘, 연경묘라고 이름하고 이를 또 정비하라고 지시를 합니다.
물증이 없어서 오백 년을 미루던 그 조선의 시조와 조선 왕실의 시조를 찾는 그 대역사가 한꺼번에 해결이 된 겁니다.
매천 황현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고종이 시종묘를 알리기 위해 거창한 역사를 시작했는데 너무 거창해서 원성이 행인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런데 한경에서 온 지관 주 씨가 몰래 참서를 묻어놨다가 발굴했다.
참서에는 황제를 칭한 뒤 300년 동안 국조가 이어지리라라고 돼 있었다.
이 보고를 받은 고종은 크게 기뻐하였다.
서울에서 감독관이 내려왔고 전라북도에서는 관찰사 이완용이 주관했다.
고종은 자기 금고 황실 금고인 내탕고에서 오천 원을 공사비를 꺼내줍니다.
근데 턱없이 부족합니다. 산을 깎아내고 거기에다가 또 재단을 짓고 해야 되니까요.
턱없이 부족했던 겁니다. 그랬더니 탁지부에서 만원 당시 돈 일만원을 예비비로 추가로 요청했습니다.
이래저래 조경단에 들어간 공사비는 실질적인 공사비는 삼만팔천오십팔 원 오십칠전이었습니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렇게 내탕금 몇천 원에다가 택지부 예비비 만 원에서 이 한참 모자라니까 그 차액 공사비 보충을 위해서
김창석, 정귀조라는 사람들을 감독으로 임명해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전주의 거부들이었습니다.
옛날 공명첩처럼 벼슬을 딱 주고 그 벼슬의 대가로 돈을 가지고 와서 왕실의 재단을 정벌했던 겁니다.
천팔백구십구 년입니다. 참 허망한 게 그리고 육 년 뒤에 을사조약이 체결됩니다.
그리고 또 오 년 뒤에 나라가 사라집니다.
뿌리는 찾았죠
그 뿌리에서 움터서 창대했던 그 나라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만 겁니다.
전제로 가보십시오. 웅지로 세웠던 나라 다루가치로 피해서 살았던 그 전주 이씨들이 와서 세웠던 그 나라가 어떤 경로로 흥망을 겪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조경단은 도 문에 가로막혀서 들어갈 순 없습니다.
하지만 먼 발찌도 볼 수가 있습니다.
충분히 볼 수가 있습니다. 한번 구경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다루가치가 세운 나라 다루가치의 아들이 세운 나라 조선 그리고 그 조선의 흥망 오백 년을 조경단 이야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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