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년 7월, 의자왕의 항복으로 백제가 멸망하게 됩니다.
일본 서기는 백제가 멸망한 것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백제는 스스로 망했다.
임금의 부인을 요사스럽고 간사한 여자로서 마음대로 권력을 빼앗고, 훌륭하고 어진 신하들을 죽였기 때문에 이런 화를 불렀다.
신라의 김춘추는 연개소문에게 처한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당일 사신호 가서 자기 나라 풍속의 의관을 버리고 천자에게 아부하여 따를 것을 청하고, 이웃 나라에 화를 끼치고 그 의도하는 바를 이루었다.
그렇다고 전쟁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습니다.
신라와 당나라군이 차지한 지역은 사비성과 웅진성 일대에 국한됐을 뿐, 여전히 지방에는 백제의 자녀 세력이 남아 있었습니다.
당나라군은 백제에서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았다고 하는데, 이는 백제인들이 봉기하도록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 유명한 백제 금동대향로도 이때 당나라 군의 약탈을 피해 임시로 파묻혔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백제 부흥운동을 지휘한 주요 인물로는 복신과 도침, 그리고 흑치상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복신이었습니다.
복씨는 무왕의 조카로 알려졌는데, 실제로 그가 왕족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혹이 있습니다.
복신이 신기하고 용감한 꾀를 냈다는 기록을 보면, 그가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이 된 것은 본인의 출신보다는 뛰어난 능력 덕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해 8월,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군은 임존성에 결집한 부흥군을 공격했지만, 이들을 진압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부흥군을 완전히 진압하지 않은 상황에서, 소정방은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소정방은 철수하면서 의자왕을 비롯한 약 1만 2천 명의 주민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고 합니다.
이제 백제의 남은 병력은 유인원이 거느린 약 1만의 당나라군과 신라군 7천 명이 전부였습니다.
백제의 분군이 큰 문제가 안 될 거라 생각해 섣부르게 철수를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부은 그는 마음껏 세력을 넓혀서 짧은 시간에 200개의 성을 탈환하기도 했습니다.
661년, 어느 정도 힘을 모은 부흥군은 신라와 당나라 군이 주둔하고 있던 사비성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신라와 당나라 군은 가까스로 이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때 당나라 군을 총지휘했던 인물은 유인원이었지만, 사비성을 방어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은 유인궤였습니다.
유인궤는 원래 죄를 짓고 평민이 됐었지만, 그의 재능을 인정받아 다시 중용된 것이었습니다.
당나라와 백제 부흥군은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싸움을 벌였지만, 어느 한 쪽도 확실한 승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 와중에 당나라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해 백제를 직접 통치하려고 했습니다.
이전에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며, 평양 이남 지역은 신라가 갖는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웅진 도덕부를 설치함으로써 이 협약을 지킬 생각이 없다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신라는 불만을 가졌지만, 나중에라도 당나라가 약속을 지킬 거라 기대하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백제의 멸망은 고구려에 큰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설연타와 거란에 이어
백제라는 든든한 아군까지 잃게 된 고구려는 철저히 고립됐습니다.
이제 당나라는 군사력을 고구려에 집중시킬 수 있었고, 백제의 위협이 사라진 상황에서 신라 또한 고구려를 공격하는 데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고구려는 계속된 전쟁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당 고종은 다시 한 번 고구려 원정을 준비했습니다.
소정방의 병력을 서둘러 백제에서 철수시킨 것도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차피 당나라의 최종 목적은 백제가 아닌 고구려였습니다.
661년, 당나라 군은 여러 갈래로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15년 전과 다른 점은, 대략 35만에 달하는 당나라 군 대다수의 병력이 서해를 건너 고구려 땅에 상륙했다는 점입니다.
그중 가장 먼저 고구려 땅을 밟은 것은 소정방이 이끄는 평양도 행군이었습니다.
대동강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한 소정방은 곧바로 평양성을 포위, 공격했습니다.
고구려의 병력 대부분이 요동을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허를 찔린 셈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요동의 병력을 평양으로 이동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당나라의 부여도 행군과 루방도 행군이 요동을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섣부르게 병력을 빼서 평양을 돕는다면,
요동 방어망 전체가 붕괴할 수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개필 화력이 지휘하는 요동도 행군이 압록강을 건넌 것이었습니다.
개필 화력이 짧은 시간에 고려의 요동 방어망을 뚫었다고 보긴 어렵기 때문에, 이들도 배를 타고 고구려 역내로 진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개필하력의 주 목적은 요동의 병력이 평양으로 이동하는 걸 중간에서 차단하는 것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은 아들 남생을 보내, 계필하력이 압록강을 건너는 걸 막게 했습니다.
하지만 개필하력은 마침 추운 날씨로 꽁꽁 얼어 있었던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 군을 격파했습니다.
남생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무려 3만 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봤습니다.
이로써 요동에 집중된 고려의 병력이 평양을 돕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만약 개필 화력마저 평양을 공격하고 있던 당나라 군과 합류한다면, 고려에 숨통을 조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개필 화력이 갑자기 방향을 돌려 철군한 것이었습니다.
고구려 쪽 기록이 전무하다시피 하기 때문에,
개필하력이 철군한 이유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가장 유력한 설은, 때마침 쳐들어온 철륵을 막기 위해 개필 화력에 요동도 행군이 어쩔 수 없이 군을 돌려야 했다는 견해입니다.
철록은 터키계 유목 민족으로, 제1차 고당 전쟁 때 당나라를 위협했던 설현타도 철록의 한 부족이었습니다.
이전의 연계 소문이 서연타와 동맹을 맺고 당나라를 공격하게 한 것처럼, 이번에도 고구려가 천록을 설득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개필 하력과 더불어 요동을 공격했던 부여도 행군도 천록을 상대하러 서쪽으로 물러났습니다.
그제야 고구려는 요동의 군대를 평양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평양은 소정방이 이끄는 평양도 행군뿐 아니라,
옥저도 행군과 폐강도 행군의 집중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경고했던 평양성을 차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어서, 싸움은 장기전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평양을 방어하고 있던 인물은 바로 백전 노장 연개소문이었습니다.
때마침 요동에서 구원군이 속속 합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황은 급격히 당나라에 불리해졌습니다.
일본 서기는 고구려와 당나라 간의 싸움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12월, 고구려는 매우 추워서 폐수가 얼어붙었다.
당나라군은 높은 망루에 있는 수래와 성문을 깨뜨리는 충팽을 앞세워 북과 징을 울리면서 공격했다.
고구려 병사들은 용감하고 씩씩하게 싸워 다시 당의 두 진지를 빼앗았다.
당에는 오직 두 개의 진지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다시 밤에 빼앗을 계획을 세웠다. 이것을 한 당나라 병사들은 무릎을 끌어안고 곡소리를 냈다.
662년 2월, 연계 소문이 지휘하는 고구려군은 사수에서 당나라 군과 결전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고구려의 대승이었습니다.
당나라의 옥조도 행군과 폐강도 행군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봤고, 지휘관이었던 방효태도 그가 데려온 아들 13명과 함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방효태는 도망가라는 부하의 말을 듣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 온몸의 고슴도치처럼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당나라가 파견한 6명의 장군 중에서 3명이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당나라는 고구려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이제 남은 당나라 군대는 소정방의 평양도 행군뿐이었습니다.
고립된 상황에서 소정방은 신라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신라는 그때까지 병력을 아끼면서 적극적인 군사 행동을 자제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당나라의 구원 요청을 무시할 수도 없었습니다.
얼마, 평양에 도착한 김유신은 소정방을 만나 식량을 전달했습니다.
소정방은 오래전부터 군량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김유신이 가져온 쌀이 아니었다면 훨씬 더 큰 피해를 봤을 겁니다.
그리고 더 이상 싸워봤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소정방은 곧바로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모든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 땅에서 물러갔습니다.
2차 고당 전쟁에서도 고구려가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둔 것이었습니다.
이때 패배는 당나라의 전쟁 의지를 완전히 꺾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이 보유한 주력 부대와 가장 뛰어난 지휘관을 보냈음에도 괴멸적인 패배를 당한 결과였습니다.
이후 당 고종은 선박을 건조하는 걸 멈추고, 백성을 괴롭히는 관리를 단속하는 등, 잦은 전쟁으로 지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애썼다고 합니다.
비슷한 시기, 남쪽에서는 백제 부흥 운동이 한창이었습니다.
부흥운동을 주도하던 복신과 도침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부여풍을 백제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부여풍을 의자왕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일본에 보내져 약 20년간 볼모로 잡혀 있었습니다.
의장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당나라로 끌려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복신과 도침은 부여풍을 모셔와 부흥 운동의 중심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이에 일본은 부여풍을 보내줬을 뿐 아니라 군사 지원까지 약속했습니다.
그렇게 백제 부흥 운동은 탄력을 받게 됩니다.
반면에 당나라의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당나라군은 웅진성에 고립돼 있었고, 군수품 보급마저 여의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고구려 원정마저 실패하자, 당나라 조정은 백제에서 병력을 완전히 철수시키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당나라 군이 궁지에 몰리자, 복씨는 유인원에게 사신을 보내 이런 말을 전했습니다.
그대들은 언제 당으로 돌아갈 것이오?
마땅히 환송하겠소. 당나라 군의 사기를 꺾기 위한 희롱의 말이었지만, 당나라 군의 철수를 유도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습니다.
당고종도 유인원에게 편지를 보내 웅진성을 수비하기 어려우니 신라로 철수하든지, 아니면 당나라로 철수해도 좋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백제의 지배권을 포기하자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유인계는 지금 철수하며 백제가 부흥에 성공할 것이고, 고구려를 멸망시킬 기회도 완전히 이를 거라면서, 오히려 더 많은 병력을 백제에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당나라는 증원 병력을 백제에 파견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보내진 병력이 무려 40만 명이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적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나라에서 증원 병력이 합류하자 당나라군의 사기는 크게 올랐습니다.
거기에 신라의 문무왕이 대군을 이끌고 당나라군과 합세했습니다.
문무왕은 김춘추의 아들이 김범민으로, 661년 김춘추가 죽자 왕위에 오른 것이었습니다.
기세가 크게 오른 나당 연합군은 백제의 봉거지 주류성으로 진격했습니다.
이제 궁지에 몰린 쪽은 부흥군이었습니다.
때마침 부흥군 내에서는 내분이 벌어져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복신은 동료 장수인 도침을 죽이고 그의 군사까지 흡수하면서 부흥군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됐습니다.
명목상 부흥군의 우두머리는 부여풍이었지만, 그는 단지 제사만 주관할 뿐 실권은 모두 복신에게 있었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부여풍과 복신 사이에 갈등이 생겼고, 얼마 후 부여풍이 복신을 살해했습니다.
복신이 먼저 부여풍을 죽이려고 했는데, 이를 눈치챈 부여풍이 선수를 쳐 복신을 죽인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부여풍이 부흥군의 지휘권을 차지했지만,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던 복신을 잃은 건 큰 손실이었습니다.
663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백강 인근에서 백제 부흥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결전을 벌였습니다.
백강은 오늘날 금강으로 보고 있는데,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라는 표현이 있는 걸 보면, 전투는 바다와 인접한 곳에서 벌어졌던 것 같습니다.
백강 전투에도 한중일 3국이 모두 충돌한 최초의 전투였습니다.
이때 신라와 백제군은 육군이 주력이었던 반면에, 당나라와 일본은 수군이 주력이었습니다.
신라와 백제군은 기병끼리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만, 승부는 해전으로 결정됐다고 합니다.
먼저 일본의 해군이 당나라 해군을 향해 돌진했었는데, 그 와중에 대오가 흐트러졌습니다.
기회를 포착한 당나라 해군이 좌우에서 협공을 가하자 일본 해군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일본의 배는 약 400척으로, 170척을 보유한 당나라 해군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배는 당나라의 배보다 소형이어서 당나라 군의 진형을 뚫는 데 실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나라 기록에 따르면, 이날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가득했고, 바닷물이 모두 붉게 물들었다고 합니다.
이는 일본 해군이 화공으로 큰 피해를 입었음을 의미했습니다.
결국 백강 전투는 신라와 당나라의 승리로 마무리됐습니다.
부여풍은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더 이상 싸우길 포기하고 고구려로 달아났습니다.
얼마 부흥군의 봉고지였던 주류성마저 항복하자, 백제에 남은 세력들도 잇따라 항복했습니다.
그렇게 3년간 계속되던 백제 부흥 운동이 사실상 끝을 맺게 됩니다.
하지만 백제에서의 승리와는 별개로 당나라는 당분간 전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고구려 원정에서 입은 피해가 컸던 데다, 계속된 전쟁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야 했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가장 큰 적은 고구려 내부에 있었습니다.
제2차 고당 전쟁이 끝나고 얼마 뒤인 665년,
고구려의 망리지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본 서기에 따르면, 연계의 소문은 죽기 전에 그의 새 아들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너희 형제는 고기와 물같이 화합해 자귀를 두고 다투지 마라.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너희는 반드시 이웃나라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연개소문의 뒤를 이어 그의 장남 남생이 고구려 최고 관직인 망리지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남생은 개필하력과의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는 등 실력을 검증받지 못했고, 지지 세력 또한 탄탄치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남생은 전국을 둘러보기 위해 평양을 떠났습니다.
남생은 떠나면서 국정의 운영을 동생 남권과 남산에게 맡겼습니다.
그 사이에 누군가 남건과 남산을 찾아와 남생이 그들을 죽이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남생 또한 남고가 남생이 그를 몰아내려 한다는 거짓 보고를 들었습니다.
처음 삼 형제는 이들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서로를 의심하게 됩니다.
결국 남생은 첩자를 보내 동생들을 염탐하게 했는데, 첩자는 그만 동생들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남건과 남사는 왕의 명이라고 속이고 남생을 평양으로 불렀지만, 죽음을 두려워한 남생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격분한 동생들은 남생의 아들을 죽였고, 이로써 이들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습니다.
연기 소문이 죽은 지 1년도 안 돼서 그가 가장 우려했던 네 분이 터진 것이었습니다.
복수에 눈이 먼 남생은 국내성을 근거지로 삼고 아우디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초반에 남생은 모골성을 차지하면서 기세를 울렸지만, 시간이 갈수록 전세는 남생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남생은 궁지에 몰리자 고구려를 멸망으로 이끈 결정을 내렸는데, 그것은 바로 당나라에 구원을 청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당 고종은 출병을 망설였지만,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촉구하자, 마침내 군을 일으켰습니다.
666년, 이세적과 개필화력이 이끄는 당나라 군이 고구려로 진격했습니다.
당나라는 과거 두 번의 전쟁에서 항상 복음 문제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남생이 자신의 근거지를 당나라에 받친 덕분에 보급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고구려군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당나라 군은 지속적으로 많은 병력을 투입하면서 고구려를 밀어붙였습니다.
하지만 이에 맞서는 남건과 남산 형제의 역량으로는 고구려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없었습니다.
당나라 군은 요동 방어망의 핵심 요충지인 신성을 차지한 데 이어 부여성을 함락시켰습니다.
668년 8월, 당나라군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워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신라도 당나라를 돕기 위해 무려 20만에 달하는 병력을 평양으로 파견했습니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한 달 이상 포위를 지속했고, 그 와중에 고구려의 다른 지역들은 속수무책으로 당나라에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보장원과 남산이 신하들을 이끌고 이세저에게 항복했습니다.
하지만 남건이 항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평양성을 지켰는데, 신성이란 이름의 승려가 남건을 배신하고 성문을 열었습니다.
고구려의 수도 평양이 당나라에 함락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백제에 이어 고구려 또한 허망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새로운 전쟁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신라는 당나라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그에 대한 보상은 모두 당나라가 차지했습니다.
당나라는 백제에 괴례 정부인 웅진도독부를 설치하면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했습니다.
당나라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신라의 문무왕을 불러서 부여윤과 화친을 맹세하게 했습니다.
신라 입장에서는 황당한 상황이었습니다.
문모왕은 태자였을 때, 정복자로서 부여융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모욕을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당나라가 백제를 부활시키고는 동등한 위치에서 화친을 맺게 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당나라는 고구려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함으로써 고구려마저 직접 지배하겠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평양 이남의 땅을 신라에 돌려주겠다는 약속은 잊혀진 지 오래였습니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결심했습니다.
670년, 신라는 고구려 부흥 세력과 손을 잡고 압록강 넘어 있는 오골성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라와 당나라 간의 전쟁인 나당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을 당나라군에 밀려 후퇴하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신라의 선제 공격은 실패로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삼국 통일 전쟁사를 쓴 노태동 교수에 의하면 슬라의 원래 목적은 고구려가 아닌 백제 지역을 차지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당나라 군을 고구려 지역에 묶어둔 사이에 신라군 주력은 백제 땅을 공격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계획은 적중했습니다.
당나라는 급히 설인귀를 파견해 웅진도독부를 돕게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신라가 백제 지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사실 신라가 승리한 데에는 운도 따랐습니다.
비슷한 시기, 당나라는 토공과의 전투에서 대패를 당했습니다.
그 결과 당나라의 심장부인 관중 지역이 토번의 위협을 받자 당나라는 신라의 대군을 파견하는 걸 주조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당나라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신라와 당나라는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치열한 싸움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675년, 20만 대군을 물리쳤다고 알려진 매소성 전투를 기점으로 신라는 당나라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신라가 삼국 통일 전쟁의 최종 승자로 올라서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빼앗겼기 때문에 신라가 진정으로 삼국을 통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한국사회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대 중 하나였던 삼국시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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