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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500년 고려 역사를 초기부터 후기까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by 로이인랑 2023.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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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의 호족 출신인 왕건은 중국과의 해상 무역으로 성장한 호족 세력과 연합하여 세력을 키웠습니다. 
그 후 궁해의 신화가 되어 수군을 이끌고 한강 유역과 금성 지역을 점령하는 등 큰 공을 세우면서 신임을 얻어 재상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이후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왕건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내세워 구백십팔 년 국호를 고려라 정하고, 연호를 천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919년, 자신의 근거지였던 송악을 새로운 수도로 삼고 개경이라 불렀습니다. 
고려와 후백제가 후삼국 통일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태조 주기 이후 웅주 인근 지역이 후백제에 투항하고, 서원경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호족의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이에 태조는 지방의 호족들의 지지를 얻고자 노력하였고, 그들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신라의 화친 정책을 취하며 신라 지역의 호족들에게 지지를 얻었습니다.

927년, 후백제가 신라를 침략하자, 고려군은 이를 돕기 위해 출전하였지만, 봉산에서 후백제 군에게 패배하였습니다. 
하지만 3년 후인 930 년,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대치하였을 때, 고창지역 호족들의 도움으로 대승을 거두면서 고려는 후삼국 통일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후백제에서는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견원이 넷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큰 아들 신검은 정변을 일으켜 견원을 금산사에 가두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이에 견훤은 탈출하여 고려에 귀순하였고, 신라의 경순왕도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고려에 항복하였습니다. 
이후 고려는 936년 12천 전투, 황산 전투에서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태조는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백성의 조세 부담을 줄여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고, 이에 조세 세율을 10분의 1로 정하여 호족이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빚으로 노비가 된 일부 양민을 값을 치르고 풀어주었고, 빈민 구제 기관인 흑창을 설치하였습니다.

또한 태봉과 신라, 중국의 제도를 참고하여 정치 제도를 마련하고, 사심관 제도와 기인 제도 등을 통해 호족을 견제하고 지방 통치를 보완하였습니다. 
사심관 제도란 중앙의 고위 관리에게 출신 지역의 호족을 관리하게 한 제도를 말합니다. 
신라왕 김부가 와서 항복하자 신라국을 없애 경주라 하고,

김부를 경주의 사심으로 임명하여 부호장 이하 관직 등을 주관토록 하였다. 
사심관은 부호장 이하의 향리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고, 그 지방의 치안 유지, 풍속 교정, 공무 조달 등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긴 제도란 지방 호족의 자제를 수도에 파견하게 한 제도를 말합니다.

국초에 향리의 자제를 뽑아 개경에서 볼모로 삼고, 또한 출신지의 일에 대한 자문에 대비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기인이라 하였다. 
이는 중앙정부가 호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이며, 실제로는 인질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태조는 호족 통제 정책뿐 아니라 회유 정책도 실시하였습니다.

호족의 딸과 혼인하는 혼인 정책, 왕씨성을 하사하는 사성 정책을 펼쳤으며,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공로와 인품에 따라 토지를 나누어 주는 역분전 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후삼국을 통합한 뒤에는 정개와 계백 묘사를 지어 관리들이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하였고,

예절을 강조하여 국왕과 신하의 구분을 엄격히 하였으며, 훈요 10조를 남겨 후대의 왕들이 지켜야 할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습니다. 
태조는 옛 고구려, 백제, 신라 출신 세력을 지배 세력으로 수용하여 민족을 통합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발해 유민의 귀순을 적극 받아들였는데, 발해의 왕자 대광현이 발해 유민 수만을 이끌고 들어오자, 왕족으로 대우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받들게 하였습니다.

가을 7월, 발래국의 세자 대광현이 물이 수만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자, 성명을 하사하여 왕개라 하고, 종실의 족보에 넣었다. 
고려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발해 대광현의 고려 귀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발의 유민 중에는 관리, 장군, 학자 등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태조는 이들을 적재적소에 임명하여 후삼국 통일에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태조는 발레를 멸망시킨 거란을 배척하였습니다. 
요나라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낙타 오시피를 보내왔는데, 개경에 만부교 아래에 메워놓아 굶어 죽게 한 만부교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태조는 건국 초부터 서경을 중시하여 남쪽의 인구를 이주시키고, 이곳에 관부와 관리를 두었습니다. 
이러한 적극적인 북진 정책과 발해 유민의 합류로 청천강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지역까지 국경선을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태조가 많은 아들을 남기고 죽자, 뒤를 이어 왕이 된 혜종, 정종 때에는 왕규의 난을 비롯해 치열한 왕위 다툼으로 인해 왕권이 더욱 불안해졌습니다.

이에 뒤이어 주기한 광종은 불안정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중국 후주에서 쌍기를 영입하여 호족의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 정치를 추진하였습니다. 
광종은 혼란기에 불법으로 노비가 된 자를 조사하여 양인 신분을 회복시켜주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재정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쌍기의 권위로 과거제를 실시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추고 문예를 공부한 인재를 관리로 선발하였습니다. 
광종은 이를 통해 요직을 장악하던 공신 세력을 약화시키고, 새로 선발한 관리들을 자신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세력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광종은 관리의 복색을 관등에 따라 네 가지 색으로 정하여 관리의 위계 질서를 확립하고 국왕 중심의 새로운 관료 체제를 마련하였습니다.

왕 9년 처음 과거를 시행하였다. 한림학사 쌍기에게 명하여 진사를 뽑았다. 
왕 십일 년 백관의 공복을 정하였다. 
원윤 이상은 자세 곳, 중단경 이상은 붉은 세 곳, 도환경 이상은 비세 곳, 소주부 이상은 녹색 옷으로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사를 통해 과거제 시행과 백관의 공복, 재정 등 광종의 업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광종은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자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였습니다. 
수도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로 불렀으며, 광덕, 준풍 등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국가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또한 주현 단위로 조세와 공물, 부역 등을 부과하는 주현 공부법을 실시하여 국가 재정을 확보하였고, 빈민의 구호 및 질병 치료를 위해 재위보를 설치하여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란을 견제하고자 송과 경제적, 문화적 교류를 활발히 하였고, 불교를 중요하게 여겨 화엄종, 승려 균열을 통해 귀법사를 창건하였습니다. 
광종의 뒤를 이어 주게한 경종은 다소 급진적이었던 광종의 정책을 철회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신 세력을 다시 중용하고 광종의 정책을 뒷받침하였던 신진 세력을 제거하여 안정을 추구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시정 전시과 제도를 실시하여 전 현직 관료를 대상으로 곡물을 수취할 수 있는 토지인 전지와 땔감을 얻을 수 있는 토지인 시지를 지급하였습니다. 
경종의 뒤를 이어 죽게한 성종은 신라 육두품 출신의 유학자 최승로의 심우 이십팔 절을 받아들여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중앙집권적 귀족 정치를 추구하였습니다. 
성종은 태봉과 신라의 제도를 토대로 당의 삼성 육부제를 참작하여 이성 육부제의 중앙 관제를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지방 통치 제도를 정비하여 주요 지역에 시비목을 설치하였고, 절도사를 파견하였으며,

지방세력 통제를 위해 향리 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이는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의 중소 호족을 향리로 편입하여 통제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성종은 유교 교육 진흥을 위해 과거 제도를 정비하였고, 개경에는 최고 교육 기관인 국자감을 설치하였습니다.

국자감은 유학부와 기술학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를 통해 많은 관리와 유학자를 배출하였습니다. 
또한 지방에 향교를 설치하고, 경서에 통달한 경학 박사와 의료를 담당하는 의학 박사를 파견하였습니다. 
이는 지배 이념인 유교를 권장하여 지방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종은 유교를 진흥시킨 반면, 연등회를 축소하고 팔관회를 폐지하는 등 국가적인 불교 행사를 억제하고, 토속적인 신앙 의례를 폐지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과거제를 정비하고 지방의 인재를 불러 교육하였으며, 유교적인 모범 사례를 발굴하여 표창하였습니다. 
성종과 목종에 이어 즉위한 현종은 연등회와 팔관회를 다시 성대하게 거행하는 등 자주적인 문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현종은 전국을 경기와 오도, 양계로 나누고, 그 안에 삼경, 사도호부, 팔목을 비롯한 군, 현, 진을 설치하여 지방 통치 제도를 확립하였으며, 국방과 군사 문제 처리를 위해 도병마사를 설치하였습니다. 
또한 국왕 친위부대인 2군을 설치하고, 향리 자재에게 과거 응시 자격을 부여하는 주현 공거법을 실시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10세기 초에 당이 멸망하고 여러 왕조가 들어섰습니다. 
거란의 야요라 보기는 이러한 혼란을 틈타 분열되어 있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916년 요를 건국하였습니다. 
요는 구백이십육 년 발레를 멸망시키는 등 점차 세력을 확장하였고, 이후 주위에 여러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맺어 갔습니다.

이후 9백4십이년, 요는 고려의 사신 30년과 함께 낙타 오시피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태조 왕건은 거라는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라고 하여, 사신들을 섬으로 유배 보냈고, 선물 받은 낙타들은 개경의 보정문 안에 있는 다리인 만부교 아래에서 굶어 죽게 하였는데, 이를 가리켜 만부교 사건이라 부릅니다.

이후 태조는 세상을 떠나기 전, 후대의 왕들을 위해 남긴 훈요십조를 통해, 거라는 금수의 나라이니 언어와 제도를 본받지 말 것을 경고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즉위한 정종은 947년, 농민으로 구성된 예비군인 광군을 창설하며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습니다.

한편, 중국을 통일한 송이 거란과 대립하는 구도가 형성되자, 고려는 송과 친교를 맺고 거란을 배격하는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러자 거라는 993년 장수 소선영을 보내 고려에 침입하였습니다.

이에 고려의 고위직이었던 서희는 소손년과 회담하여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알리며, 북방 교통로를 확보하면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 교류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이에 거라는 압록강 동쪽 이남의 강동 6주를 고려의 영토로 편입하는 것을 승인하였습니다. 
거란의 장수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어찌하여 그대의 나라가 차지하고 있는가 또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바다를 건너 송을 섬기고 있다. 
지금 땅을 떼어 바치고 통교한다면 아무 일 없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서희가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곧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다.

만일 국경 문제를 논한다면 거란의 동경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범하였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사를 통해 서희의 외교 담판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려는 약속과 달리 송과의 교류를 유지하였습니다. 
한편 강동 6주가 여진 정벌과 고려 압박에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거라는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고려의 무관이었던 강조는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왕으로 옹립하였습니다. 
그러자 거라는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다시 고려에 침입하였습니다. 
거란의 공격에 고려는 속절없이 무너져 수도 개경이 함락되었고, 현종이 나주까지 피난을 가는 등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수세에 몰린 고려는 현종의 친조를 조건으로 화친을 청하였고, 거라는 이를 받아들여 회군하였습니다. 
하지만 고려의 무신 양규가 이끄는 군대는 회군하는 거란군을 급습하였고, 이 과정에서 거란은 큰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거라는 고려에 약속한 친조를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현종은 병을 핑계로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이에 거라는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이를 거부하였고, 그 결과 거란에 3차 침입이 시작되었습니다. 
초배합이 이끄는 궐안군은 10만여 군사를 동원하며 고려를 침공하였습니다.

하지만 강감찬이 이끈 고려군은 1019년 귀주대첩에서 거란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거란의 병사가 귀주를 지나자, 강감찬 등이 동교에서 맞아 싸웠다. 
아군이 추격하여 석천을 건너 발령에 이르니, 시신이 들을 덮고 사로잡은 사람과 노획한 말, 낙타, 갑옷, 무기는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니, 거란이 패한 것이 이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이와 같이 고려사를 통해 강감찬의 귀주대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 후 고려는 개경의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고, 북쪽 국경 일대에는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의 도연포에 이르는 지역의 천리장성을 축조하여 북방민족의 침략에 대비하였습니다.

또한 전쟁 과정에서 부처의 힘으로 거란을 물리치고자 초조대장경을 조판하였습니다. 
이후 고려는 거란과 친선 관계를 수립하였고, 송과 거란 사이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였습니다. 
시기에 따라 숙신 또는 말갈 등으로 불리었던 여진은 발해의 옛 땅인 만주와 두만강 일대에서 부족 단위로 생활하였습니다.

이후 여진은 점차 남쪽으로 내려와 10세기 초에는 고려 국경 근처까지 진출하였습니다.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긴 여진은 곡물로 토산물을 바치고, 마리나 모피를 고려의 식량, 농기구, 포목, 무기 등과 교환하였습니다. 
고려는 여진의 추장들에게 벼슬을 주고 물품을 하사하는 회유 정책을 펼치는 등, 귀순해 오는 여진인들을 자치주를 통해 통치하였습니다.

대체로 평온한 관계를 유지하던 고려와 여진은 12세기 초에 와니엔부의 추장 인계를 중심으로 강성해지면서 충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고려 숙종은 여진을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크게 패하였고, 윤관의 북벌군도 여진의 기병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윤관은 숙종에게 건의하여 기병인 신기군을 중심으로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으로 구성된 별무반을 편성하였습니다.

윤관이 말하기를, 신이 패한 바는 적은 기병이고, 우리는 보병이어서 가히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건의하여 처음으로 별무반을 세우고, 말을 가진 자는 신기군으로 삼았고, 말이 없는 자는 신보군에 속하게 하였다.

또한 승려를 선발하여 항마군을 편성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사를 통해 별무반의 구성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진과의 전쟁을 대비하던 중 숙종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자, 뒤이어 주기한 예종은 1107년 윤관에게 별무반을 이끌고 천리장성을 넘어 여진의 거점을 정벌하게 하였습니다. 
고려는 천리장성 이북의 동북 방면으로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새로 개척한 영토에 동북 구성을 쌓고 남쪽의 백성을 이주시켰습니다.

그러나 여진의 계속된 침입으로 수비가 곤란하였고, 여진이 사신을 보내 해마다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자, 고려는 1년 7개월 만에 구성을 다시 여진에게 되돌려주었습니다. 
동북 구성은 공험진의 위치를 두만강 북쪽에서 그 이남인 정평까지로 보고, 함경도 일대에 걸쳐 있었다는 설, 길주 내지 마운영 이남부터 정평까지 함경남도 일대로 보는 설,

함관영 이남, 정평 이북에 함흥, 평야 일대로 보는 설 등 세 가지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후 완옌부가 중심이 된 여진은 세력을 확장하여 만주 일대를 장악하였고, 천백십오 년 금을 건국하고 황제를 칭하며, 고려의 형제 관계를 제외하였습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여진은 본래 고려에 복속된 종족이었으므로 반대하는 여론이 높았습니다.

한편 거란은 금이 침입해오자 고려에 원군을 요청하였지만, 고려는 금과 거란의 요구를 모두 거절하고 정세를 활용하여 의주를 확보하였습니다. 
그 후 거란을 멸망시킨 금이 사대 관계를 요구하자, 고려를 집권하고 있던 이자겸은 전쟁을 피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금과 4대의 외교를 맺었습니다.

이로써 건국부터 추진해온 고려의 북진 정책은 중단되었습니다. 
한편 금은 거란을 멸망시킨 뒤 송을 공격하였습니다. 
송은 고려에 함께 금을 공격하자고 제안하였지만 고려는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이후 고려의 외교는 금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성종 이후 중앙집권 체제가 확립되면서 중앙 관료화된 지방 호족과 신라, 육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이 새로운 지배층이 되어 국정을 운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 중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 관직자를 배출한 가문을 가리켜 문벌 귀족이라 하였는데,

대표적인 문벌 귀족으로는 경원 이씨, 이자겸, 해주최씨 최충, 경주김씨 김부식, 안산 김 씨, 김은부, 파평윤씨 윤관 등이 있었습니다. 
문벌 귀족은 과거제와 음서를 통하여 관직을 독점하였고, 중서문화성과 중추원의 재상이 되어 정국을 주도하였습니다. 
또한 관직에 따라 과전을 받고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의 혜택을 받아 안정된 경제 기반을 확보하였고, 권력을 이용해 불법적인 방법으로 토지와 노비를 차지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려 초기의 문벌 귀족은 균형 잡힌 정치를 이끌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보수화되고 편안함을 추구하여 왕권을 제약하였습니다. 
이들은 비슷한 가문이나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권력 기반을 강화하였고,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바탕으로 정권을 잡기도 하였습니다. 
일부 문벌 귀족들은 유력 가문이 아닌 계층의 과거 응시나 관직 수여를 가로막고 왕권의 정당한 행사를 제약하였습니다.

이에 숙종과 예종은 과거에 합격한 지방 향리 출신 관료를 등용하여 문벌 귀족을 견제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여진이 고려의 국경을 침입하였을 때, 대부분의 문벌 귀족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현상 유지를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진에게 구성을 돌려주고, 여진 정벌을 완수하지 못하자, 보수적 문벌 귀족들은 윤관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신들의 정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였습니다.

예종 때에는 이자겸의 세력이 가장 강성하였습니다. 
대표적인 문벌인 경원 이씨 가문은 문종 때부터 80여 년 동안 계속된 왕실과의 혼인으로, 가장 유력한 외척 가문이 되었습니다. 
인종의 외조부였던 이자겸은 예종에게 둘째 딸을 왕비로 보낸 후, 다시 셋째, 넷째 딸을 외손자인 인종과 혼인하게 하여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이자겸은 스스로 국공에 올라 왕태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다. 
또한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이라 칭하고, 중앙과 지방에서 올리는 글을 임금과 동등하게 전이라 불렀다. 
아들들이 다투어 지은 저택은 거리마다 이어져 있었으며,

세력이 커지자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사방에서 선물로 들어온 고기 수만 근이 날마다 썩어 나갔다. 
고려사에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당시 문벌 귀족인 이자겸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그의 권력 남용이 얼마나 심각하였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자겸의 권력 장악이 지나치게 커지자, 인종은 자신의 측근 세력들과 함께 이자겸을 제거하여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이자겸은 천백이십육 년, 외손자이자 사위인 인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고자 척준겸과 함께 난을 일으켰는데, 이를 가리켜 이자겸의 난이라 부릅니다. 
한편, 이자겸의 아들 이지현의 노비와 척준경의 노비 사이에 벌어진 싸움으로 이자과 척준경의 사이가 틀어지자, 인종은 척준경을 회유하여 이자겸을 제거하도록 하였습니다.

이후 이자겸은 왕명을 받은 척준경에게 진압당하였고, 영광으로 유배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인종은 척준경에게 공신 칭호를 주어 대우하였고, 척준경은 문하시랑에 임명되어 잠시 권력을 잡았지만, 이자겸의 난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탄핵당한 뒤 암태도로 유배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왕권은 되찾았지만, 이자겸의 난으로 인해 궁궐이 불타면서 국왕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문벌 귀족 사회는 중앙 지배층 사이의 분열이 심화되어 크게 동요하였습니다.

인종은 이자겸의 난 이후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종의 개혁 정치와 금에 대한 4대 외교를 둘러싸고 묘청, 정지상 중심의 개혁적인 서경 세력과 김부식 중심의 보수적인 개경 세력이 대립하였습니다. 
묘청 등 서경세력은 풍수지리서를 이용하여 도읍을 서경으로 옮길 것, 왕을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사용할 것, 금을 정벌할 것 등을 주장하였습니다.

묘청 등이 말하기를, 신등이 복원돼 서경 임원혁의 지세는 음양가들이 말하는 아주 좋은 땅입니다. 
만약 이곳에 군거를 세워 이어하신다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또한 금이 예물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고, 주변의 삼십육국이 모두 신하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사를 통해 묘청 등 서경 세력이 주장한 개혁 내용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에 인종은 서경 세력의 주장에 동조하여 서경에 대화공을 짓고, 그 안에 토착 신을 섬기는 팔성당을 설치하였습니다. 
반면,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 귀족 세력은 도참 사상을 배격하고, 기존의 유교 정치 이념에 충실할 것과 금의 4대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며, 서경 세력의 주장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왕이 묘청의 말을 따라서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서경으로 행차하고자 하였다. 
김부식이 아뢰어 말하길, 올해 여름에 서경 대화궁 30여 곳에 벼락이 쳤습니다. 
만약 이곳이 좋은 땅이라면 하늘이 이처럼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서경은 아직 수학이 끝나지 않아 왕의 행차가 나간다면 반드시 곡식을 밟게 될 것이니, 백성에게 인을 베풀고 만물을 사랑하는 뜻이 아닙니다. 
라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사를 통해 김부식의 서경 천도 반대 주장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결국 개경 세력의 반대로 서경 천도가 좌절되자

묘청 등은 서경에서 국호를 대위, 연호를 1천 개라 정하고 난을 일으켰습니다. 
난이 일어나자 김부식은 서경 천도를 지지한 세력을 제거하고 반란 진압에 나섰습니다. 
이에 묘청 등 서경 세력은 1년여 동안 저항하였지만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묘청의 난 이후 고려 사회는 보수적인 성향이 더욱 짙어졌습니다. 
반란을 진압한 김부식 등 문벌 귀족의 세력이 강화되었고, 무신에 대한 차별이 심화되었습니다. 
이는 결국 무신정변이 발생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또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으로 인해 서경의 권위가 약화되었고, 개경 외에 서경에도 별도의 독립적인 기관을 두는 제도인 분사 제도와 삼경 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이 싸움은 난가이 불교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대, 한악파의 싸움이다. 
또 독립 당대, 사대당의 싸움이고, 진보 대 보수의 대결이다.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이다.

이 싸움에서 묘청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의 역사가 사대적이고 보수적인 유교에 정복되고 말았다. 
그러니 어찌 이 싸움을 천 년 역사의 가장 큰 사건이라 하지 않으랴.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에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조선 역사상 1천년 내 제1대 사건이라고 표현하며, 묘청의 자주성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이후에도 문벌 귀족의 권력 독점이 계속되자, 고려 사회의 모순과 분열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또한 무신이 승진 등 여러 방면에서 차별을 받고, 하급 군인들이 군인전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자, 무신들의 불만은 나날이 커져갔습니다. 
인종의 뒤를 이은 의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문신과 무신의 조화를 도모하였습니다.

하지만 문벌 귀족의 반발로 이를 저지당하자, 사치와 향락에 빠지는 등 실정을 거듭하였습니다. 
이에 정중부와 이의방 등은 1170년 의종의 보현원 행차 때 무신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차지하였습니다. 
어두워지자 어가가 보현원에 가까워지니, 이고와 이의방에 앞서 가서 왕명이라 속이고 순검군을 집합시켰다.

왕이 보현원 문에 들어서고 여러 신하들이 물러날 무렵에 이고 등이 임종식, 이복기, 한뢰 등을 죽였다. 
국왕을 호종한 문관과 대소, 신료 및 환관이 모두 해를 입어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정중부가 왕을 협박하여 군기감으로 옮기고, 태자는 영은관으로 옮기게 하였다가, 끝내는 왕은 거제현으로 추방하고, 태자는 진도현으로 추방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사를 통해 무신정변의 배경과 전개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무신 정권 초기에는 무신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국정이 혼란하였습니다. 
정중부와 이의방 등은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옹립한 후, 무신들의 회의기구인 중방을 통하여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중방은 고려의 중앙군인 이군, 유유의 상장군과 대장군으로 구성된 무신회의기구였는데, 무신정변 직후부터 최충헌의 집권 전까지 최고 권력기구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무신 집권자들은 정치적 혼란을 바로잡기보다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토지와 노비를 늘리고, 사병을 길러 세력을 강화하는 데 집중하였습니다.

그러자 무신 정권에 대한 반발로 김보당의 난, 조의총의 난, 교종 승려의 난 등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왕위에서 물러난 의종은 김보당의 거병으로 복귀 되기를 기다렸지만, 거병이 실패하자 천민 출신 이의민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하였습니다. 
무신들 간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자, 집권자가 자주 교체되는 혼란이 이어졌습니다.

천백79년, 정중부 등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경대승은 자신의 신변 경호를 위해 만든 사병 조직인 도방을 설치하고, 문관과 무관을 고루 등용하는 등 무신정변으로 와해된 조정의 질서를 회복하려 하였으나, 183년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러자 의종을 살해했던 이의민이 경대승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 의미는 그 후 12년간 집권하였지만, 1196년 쿠데타를 일으킨 최충헌에게 살해당하였습니다.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최충헌은 최고 정치기구인 교정, 도감을 도와 정책을 결정하고 반대 세력을 감시하였으며, 교정도감의 장관인 교정 결감은 최 씨 집권자들이 세습하였습니다. 
또한 사병 조직인 도방을 확대하여 경호를 강화하였으며, 농민 봉기를 탄압하였습니다.

한편, 최충헌은 왕에게 봉사 10조를 올려 개혁을 건의하였으나, 최충헌 자신도 토지와 노비를 늘리고, 어장 등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독점하는 등 정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집중하였습니다. 
그 결과 봉사 10조는 최충헌의 권력을 안정시키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최충헌의 뒤를 이어 집권한 아들 최후 역시 교정, 도감을 통하여 정치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최호는 독자적 인사행정기구인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하였고, 서방을 설치하여 문학과 행정능력을 갖춘 문신들이 정책을 자문하도록 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를 관료로 추천하였습니다. 
최후는 야별초를 조직하여 치안을 안정시키고 정권을 보위하게 하였습니다. 
야별초는 이후 좌별초와 우별초로 분리되었고,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던 병사들로 조직된 신의군이 추가되어 삼별초가 되었습니다.

무신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삼별초는 몽골 침입 당시 강화도에서 진도, 제주도로 옮겨가며 끝까지 항쟁하였습니다. 
한편, 몽골이 침입하자 최씨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장기 항전에 대비하였습니다. 
또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불타버린 초조대장경을 대신할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습니다.

이렇게 무신 정권은 천도하며 끝까지 항전하였지만, 몽골의 압력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무신들의 정권 장악 이후, 무신들 간의 권력 다툼은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또한 천민 출신이었던 이의민이 무신 정권의 집권자가 되자, 농민이나 천민들도 신분 상승을 꿈꾸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신들은 농민을 위한 개혁에는 소홀한 채, 불법적인 방법으로 대농장을 소유하고, 노비를 늘렸으며, 하층민에게 과도하게 세금을 부과하였습니다. 
가혹한 수탈에 자연재해까지 겹쳐 생활이 더욱 궁핍해진 백성들은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였습니다. 
한편, 서경 유수 조의총은 무인들의 폭거와 의종 시해를 명분으로 내세워 1174년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농민들이 반란에 동참하였는데, 조위총의 난은 22개월 후 진압되었지만 농민 항쟁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수 행정구역인 공주 명학소에서는 망이, 망소이 형제가 소의 차별에 반발하여 망이, 망소이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봉기군의 세력이 점점 커져 충청도 일대까지 점령하자, 고려 조정은 명학소를 충승현으로 승격하여 이들을 회유하였습니다.

전주에서는 가혹한 부역 동원에 반발하여 관노비와 군사들이 봉기한 전주 관노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경상도 운문의 김사미와 초전의 효심은 신라 부흥을 외치며 지방관의 지나친 수타를 국가에 호소하고 시정을 요구하였으며, 경주의 이비와 폐좌 역시 고려 왕조를 부정하며 신라 부흥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비슷한 이유로 서경의 최광수는 고구려 부흥 운동을, 담양의 이연연 형제는 백제 부흥을 외치며 봉개하였습니다. 
개경의 산업이었던 만적은 다른 노비들과 함께 자신들의 주인과 최충헌을 죽인 후, 노비 문서를 불태우기로 모의하였습니다. 
또한 누구나 공경대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신분제 철폐를 주장하였습니다.

신종 1년, 산호만족 등 육인이 북산에서 나무하다가 공산노비들을 불러 모의하였다. 
나라에서 경인 계사년 이후로 고관이 천민과 노비에서 많이 나왔다. 
장수와 재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으랴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우리가 왜 육체를 괴롭히면서 채찍 밑에 곤욕을 당해야 하겠는가라고 하니, 여러 노비가 모두 그렇게 여겼다. 
우리가 성 안에서 봉기하여 먼저 최충헌 등을 죽인다. 
이어서 각각 그 주인을 쳐서 죽이고, 천인 호적을 불살라서 우리나라에 천인이 없게 하자.

그러면 공경 장상을 우리가 모두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려사를 통해 만족이 시도한 신분 해방 운동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무신정권기의 하층민들은 지배층의 지나친 수탈과 억압에 저항하고, 불평등한 신분 제도를 개선하고자 노력하였지만, 항쟁은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권력자들은 항쟁을 진압하는 데만 집중하였을 뿐, 하층민의 요구를 정치에 반영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며, 궁핍하고 차별적인 이들의 생활이 나아지지는 않았습니다. 
최씨 무신정권이 고려를 지배하는 동안, 국제 정세가 크게 변하여, 몽골이 전 세계를 정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고려는 몽골에게 쫓겨 내려온 거란을 함께 격태한 강동의 역 사건을 통해 몽골과 처음 접촉하였습니다. 
이때 고려는 평화적으로 몽골과 국교를 수립하였지만, 이후 몽골은 고려의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 몽골 사신 저고여가 귀국길에 피살된 것을 계기로, 천이백삼십일 년 살리타가 이끄는 몽골군이 고려를 침입하였습니다.

몽골이 침략하자, 고려는 박서가 귀주성 전투에서 활약하는 등 몽골군을 막아내었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 패하였습니다. 
몽골군이 개경까지 내려오자, 전세가 불리해진 고려는 화친을 요청하여 몽골군을 몰아내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몽골군은 물러나지 않았고, 개경과 북쪽의 점령 지역에 다루가치를 두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였습니다.

이에 최후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백성들을 산성과 섬으로 들어가게 하여, 몽골의 침입에 끝까지 저항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하지만 내륙의 백성들에게는 몽골군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몽골군의 사육과 약탈에 고통받아야 했습니다. 
고려가 강화로 천도하자, 몽골은 개경 천도와 친조를 요구하며, 살리타를 앞세워 고려에 다시 침입하였습니다.

몽골이 재차 침입하자, 승려 김윤훈은 처인성에서 부곡민과 합세하여 살리타를 사살하였고, 그 공으로 처인 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충주성에서는 하층민이 중심이 되어 두 차례 모두 몽골군에 저항하여 싸웠는데, 김윤훈는 충주성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습니다.

몽골군이 쳐들어와 칠십여 일간 충주성을 포위하니 군량이 거의 바닥 났다. 
김윤후가 군사들을 북돋우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힘을 다해 싸운다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관작을 제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관로 문서를 불사르고, 소와 말도 나누어 주었다. 
이에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몽골군을 물리쳤다.

이와 같이 사료를 통해 김윤후의 충주성 전투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김윤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대구 부인사에 보관 중이던 고려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이 소실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삼 년 후인 천이백삼십오 년, 몽골은 다시 고려를 침입하였습니다.

삼차 침입시 몽골군은 경주까지 침입하였고, 그 과정에서 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되었습니다. 
이에 고려는 부처의 힘으로 몽골을 물리치고자 팔만대장경 조판을 시작하였습니다. 
이후에도 몽골의 침입은 계속되었습니다. 
전쟁이 길어지자 국토가 황폐해지고,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으며, 중앙의 통제력 역시 약화되었습니다.

이에 몽골과의 강화를 지지하던 김준이 최의를 몰아낸 후 몽골과의 강화를 추진하였고, 이로써 62년간 이어진 최 씨 정권은 막을 내렸습니다. 
이후 김준, 임연, 임유무로 이어지던 무신정권은 임유무가 원종에 의해 살해되면서 끝이 났고,

이에 100여 년간 유지된 무신정권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고려는 독립과 풍속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몽골과 강화를 맺었고, 1270년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환도하였습니다. 
한편 최후가 양성한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몰락과 몽골과의 강화에 불만을 가져 대몽 항쟁을 지속하였습니다.

배중손의 지휘 아래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며 강화도에서 반기를 들었으며, 이후 배중손의 주도 아래 진도에서 김통정의 주도 아래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며 장기간 항전하였으나, 1273년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고려와의 전쟁이 끝나자 원은 일본 원정을 위해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군대와 물자의 제공을 강요하였습니다. 
고려와 원해 연합군은 두 차례 일본 원정을 감행하였지만 태풍으로 인해 실패하였고, 일본 원정으로 인한 고려가 입은 경제적, 군사적 손실은 막대하였습니다. 
원과 강화 후 고려는 국가 체제를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내정 간섭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원은 고려 지배를 위해 화주 쌍성총관부, 서경의 동령부, 제주의 탐라 총관부를 설치하였습니다. 
또한 고려는 왕이 원의 공주와 혼인해야 하는 부마국이 되었습니다.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의 왕들은 원의 공주와 혼인하였고, 태어난 왕자들은 원에서 교육받은 후 고려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으며,

원의 지시를 받아 왕을 교체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부마국이 되자 왕실의 호칭 및 관제는 제후국의 수준에 맞게 격을 낮춰야만 했습니다. 
조 혹은 종으로 불리던 왕실의 호칭은 원의 지배를 충실히 따르라는 뜻에서 충으로 시작해 왕으로 끝났습니다.

왕이 스스로를 칭하던 짐은 고가 되었고, 폐하가 전하로 바뀌었으며, 태자를 세자로 불러야 했습니다. 
또한 고려의 중앙정치 조직이었던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첨이부로 통합되는 등 이성 육부가 일부 사사로 격하되었습니다. 
원은 정동행성의 부속기구인 이문소를 통해서도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였습니다.

또한 만호부를 설치하여 고려의 군사 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원의 관리인 다루가치를 감찰관으로 파견하였습니다. 
한편 원은 조공이라는 명목으로 인력과 물자를 수탈하였습니다. 
원은 공녀와 환관을 뽑아갔으며 음방을 설치하여 사냥용 매를 수탈하고 금, 은, 자기, 호피, 배,

인삼, 약재 등 특산물을 거두어 갔습니다. 
원은 고려의 문화 역시 바꾸었습니다. 
고려에서는 변발, 호복, 족두리, 연지 등의 몽골 풍습이 유행하였고 원에서는 고려 풍습이 유행하였습니다. 
또한 공녀 차출을 피하기 위해 조혼 풍습이 등장하였고 성리학, 목화, 화약, 서양 문물 등 새로운 문물이 전례되었습니다.

선발에 뽑히게 되면 그 부모나 일가 친척들이 서로 모여 통곡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으며 국경에서 송별할 때에는 옷자락을 붙잡고 발을 구르며 넘어져서 길을 막고 울부짖다가 슬프고 원통하여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고 스스로 목매어 죽는 자도 있으며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쏟아 눈이 먼 자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고려사를 통해 공녀 차출로 인해 고통받은 고려 백성들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의 간섭이 지속되자 친원 성향을 가진 권문세족이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하였습니다. 
권문세족은 기존의 문벌 귀족이나 무신 집권기에 등장한 신흥 가문 뿐만 아니라 몽골어를 익힌 통역관, 응방 출신자 등과 같은 부류로 구성되었습니다.

친원적 성향의 권문세족은 원 세력을 바탕으로 도평의사사를 장악하는 등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고 불법적으로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아 대농장을 경영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지위를 세습하였으며 강제로 농민을 노비로 삼아 불을 축적하였습니다. 
그 결과 왕권이 악화되었고 국가 재정 수입이 급격히 감소하였으며, 농민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습니다.

이에 고려 왕들은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개혁을 도모하였습니다. 
충렬왕은 전민 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이 약탈한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강제로 노비가 된 양민을 해방시키려 하였고, 원이 설치한 동녕부와 탐라 총관부를 회복하였습니다.

충선왕은 사림원을 설치하여 신진 관료를 중용하고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소금 전매제인 각염법을 시행하였습니다. 
또한 원에 만권당을 설치하여 이재현 등 고려 유학자들과 원 유학자들이 교류하게 하였습니다. 
충수광은 찰리 변이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소유한 땅과 노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충모광은 응방을 폐지하고 고리대를 금지하였으며, 내정 개혁기구인 정치 도감을 설치하며, 정치, 경제, 사회 분야의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14세기 중반, 국민왕은 원명 교체기를 이용하여 자주성을 회복하고, 신진사대부를 성장시키며, 권문세족을 억압하는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국민왕은 대표적인 친원 세력이자 자신의 누이, 동생이 원나라 순제의 기황후인 점을 이용하여 위세를 떨치던 기철 일파를 숙청하였습니다.

또한 몽골식의 풍속을 금지하고, 원나라에 의해 격화된 왕실 호칭과 중서문하성, 상사성 등의 관제를 복구하였으며, 원 중심의 연호와 원의 내정간섭기구였던 정동행성, 이문소 등을 폐지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력으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천령 이북의 고려 땅을 되찾고, 옛 고구려 땅을 회복하기 위해 요동지방을 공략하였습니다.

공민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개혁적 성향을 가진 승려 신돈을 등용하고, 정몽주와 정도전 등의 신진 사대부들을 중앙 정계에 진출시켰습니다. 
또한 성균관 중건 및 과거제 정비를 통하여 자신의 개혁을 뒷받침할 신진 관료를 육성하였으며, 최씨, 무신정권기, 최후가 설치한 인사행정기구인 정방을 폐지하였습니다. 
국민당은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을 강화하기 위해 전민 변정도감을 설치하였습니다.

신돈을 전민 변정도감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약탈한 토지와 노비를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은 양민으로 해방시켰습니다. 
하지만 권문세족의 반발로 인해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이 시해되면서 개혁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중국에서는 원명 교체기의 원의 세력이 쇠퇴하자 한족 농민 반란군인 홍건적이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원 정부는 홍건적 소탕에 나섰고, 원의 공격에 쫓긴 홍건적은 공민왕 때 두 차례나 고려에 침입하였습니다. 
1359년 홍건적의 1차 침입 때는 이승경, 이방실 등이 이들을 격퇴하였지만, 2년 후인 1361년 2차 침입 때에는 개경이 함락되는 등 피해가 막심해 국민항이 복주까지 피난을 가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고려는 최영, 이성계, 정세훈, 안우, 이방실 등의 활약으로 홍건적을 격퇴하고 개경을 탈환하였습니다. 
13세기 전반부터 고려를 괴롭히던 왜구들은 14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하여 국민왕과 우왕 때에는 그 세력이 매우 강력하였습니다. 
이에 고려는 정몽주 등을 보내 일본 정부와 외교 교섭을 시도하였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습니다.

이에 원나라로부터 화약 제조법을 습득해 온 최무선은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화포를 이용하여 진포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쳤습니다. 
또한 최영은 홍산 전투에서, 이성계는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토벌하였고, 창왕 때 바위는 쓰시마 섬을 정벌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외적의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최영과 이성계 등은 정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신흥 무신 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훗날, 이들은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권문세족을 정계에서 축출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대부분 지방 향리 출신이었던 신진 사대부들은 학문적 소양을 쌓아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하였습니다. 
이들은 권문세족이 저지른 불법과 횡포를 비판하고, 성리학을 수용하며, 불교 폐단을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신진 사대부들은 경제적 기반이 미약하였고, 권문세족이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거 합격과 관직 진출에 제한이 있었습니다. 
한편, 14세기 후반, 원명 교체기에 고려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이들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최영과 이성계 등의 신흥무인 세력이 새롭게 떠오르기 시작하였고, 뜻이 맞은 신흥무인세력과 신진 사대부들은 힘을 합쳐 권문세족을 정계에서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하지만 신진 사대부들은 개혁의 방법을 둘러싸고 온건파와 급진파로 분열하였습니다. 
이색, 정몽주 등을 중심으로 한 다수의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조의 틀을 유지하며 점진적으로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신흥무인세력인 이성계와 손잡은, 정도전, 조준 등의 급진 개혁파는 역성혁명을 일으켜 새 왕조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한편, 원을 몰아내고 중원을 차지한 명은 고려를 압박하며, 천령 이북의 땅을 직접 다스리겠다고 통보하였습니다. 
이에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와 조민수 등을 앞세워 요동정벌을 추진하였지만, 이성계는 사하 불가론을 내세우며 요동정벌을 반대하였습니다. 
지금 요동을 정벌하는 일에는 네 가지의 옳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하는 것이 첫 번째 옳지 못함이요,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두 번째 옳지 못하며, 온 나라의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러 가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니 세 번째 옳지 못하며, 이제 곧 덥고 비가 많이 올 것이므로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가 전염병을 앓을 것이니 네 번째 옳지 못함입니다.

이와 같이 태조실록을 통해 이성계가 주장한 요동 정벌이 불가능한 네 가지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왕과 체형은 이성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요동 정보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명령을 받아 출진한 이성계는 도망치는 군사가 속출하고 큰 비를 만나 압록강을 건너기 어렵게 되자 우왕에게 요동 정벌을 포기할 것을 다시 한 번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우왕과 최영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요동 정벌을 독촉하자, 이성계는 천삼백팔십팔 년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최영을 숙청하고 우왕과 창왕을 잇따라 폐위한 뒤 공양왕을 세우고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후 이성계는 천삼백구십일 년 정도전, 조준 등 급진 개혁파의 권유로 현직 관리와 퇴직 관리에게 경기 지역의 토지에 한정해 수조권을 지급하는

과전법을 실시하여 신진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이후 정도전과 남은 등의 급진파는 정몽주 등의 온건파를 제거하고 고려 왕조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천삼백구십이 년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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