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북한 도발의 대표적인 예인 그 시발점인 여기는 6.25 전쟁은 별표 크게 치고 보자 이거예요.
이건 나오니까. 그럼 6.25 전쟁이 나온다.
그럼 뭐가 나오냐 어떻게 나오냐가 포인트죠.
따라 해보죠. 전개 과정 끝. 이게 시험에 나와요.
전개 과정이. 일단 6.25 전쟁의 배경부터 보자고.
1950년 6월 25일 날 벌어진 전쟁이 6.25 전쟁인데 그 배경을 하나 하나 보잔 말이에요.
6.25가 왜 벌어지게 됐는가 일단 미군이 철수를 한 겁니다.
미군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는데 뭐 하러 남아 있겠습니까 그리고 김일성의 민주기지론이라는 게 있는데 김일성이 생각하는 38도선 이남은 무엇이냐
친일파 출신들이 단 한 명도 처벌받지 못하고 친미파로 변해서 인민들 등에 빨대 꽂고 쪽쪽 빨아 먹는 없어져야 될 집단으로 김일성은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얘가 생각하는 건 뭐냐면 어려운 인민들을 해방하자.
해방 전쟁을 부르짖으면서 벌인 전쟁이 김일성의 62호였던 것이죠.
그리고 전쟁 2주면 끝나
이딴 소리 하다가 3년을 끌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어요.
김일성은. 어쨌든. 그래서 여기는 김일성은 소련의 중국의 지원을 받아서 남쪽을 민주 기지로 만들겠다라는 무력통일 적화 통일의 야욕이 여기는 625의 배경이었고 또 하나는 뭐냐면 중국의 공산화였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중국 국민당을 이김으로써 중국 국민당은 대만으로 도망을 갔고 이 넓은 지역을 중국이 차지를 했으니 이 북한한테는 엄청난 백이었죠.
만약에 여기에 국민당이 승리했잖아요.
그럼 우리 역사는 달라졌을 거예요. 아마 여기 북한이 존재할 수 없었을 거라고.
하필이면 공산당이 이기는 바람에 이 일이 이렇게 가슴 아프게 전개가 된 거죠.
서기는 소련과 여기는 중국의 지원을 김일성은 엄청나게 받고 있었다.
차근차근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미국은 이승만한테 무기를 안 줬어요.
이승만이 성격이 호전적이라 이 이승만이 맨날 하는 얘기가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미국은 무기를 주면 바로 치고 올라갈 거라고 생각을 한 거죠.
그러니까 미국은 무기를 안 주고 소련은 계속 무기를 준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깨질 수밖에 없지.
그리고 결정적인 6.25 전쟁의 배경이고 색깔 라야 되는데 따라 해보죠.
에치슨 선언. 에치슨이 누구냐면 미 국방장관이에요.
이 사람이 1950년 1월에 프레스센터에서 한 연설이 극동 방위선을 그었어요.
에치슨 라인을 보시면 알겠지만 일본하고 알류산 열도 필리핀은 방어선에 들어가는데 여기는 대한민국은 미국의 극동 방어선에 안 들어간 거죠.
그러니까 북한이 쳐도라도 미국이 돕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거.
그래서 김일성이 오판을 한 게 여기 있는 6.25입니다.
이상이 6.25 전쟁의 배경이었고 그중에 애치슨 선언을 꼭 기억하세요.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날 저녁에서 소련제 t 34 탱크를 빌고
북한군이 밀고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단 3일 만에 여기는 서울을 빼앗기고 대전을 거쳐서 정부가 여기는 낙동강 동쪽으로 피난을 내려오게 됩니다.
그래서 마산 남부하고 부산 지역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이 북한군 손에 들어가게 되죠.
당시의 대한민국의 모습입니다. 단 한 달 만에 이런 짱이 났어요.
큰일 났습니다. 북한이 전쟁을 벌이자마자 바로 미국은 이건 불법 전쟁이다 물러가라라고 얘기를 했지만 김일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밀고 내려왔고요.
미국 입장에서는 후회를 한 거지. 이거 만약에 북한 손에 넘어가면 여기 다 빨개지면 이걸 병참기지 삼아서 일본까지 먹을 거 아니에요.
그럼 여기는 동아시아가 전부 다 이거는 사회주의 손에 넘어가는 거잖아요.
이거 안 된다라고 생각을 한 거죠.
그래서 미국에서 명분이 없으니까 여기는 un에서 이제 이건 불법 전쟁입니다라고 얘기를 해서 소련이 불참한 틈을 타가지고 미국 영국 프랑스가 도장 찍어가지고 여기는 un군을 이끌고 한 달 만에 온 거예요.
십육 개국을 이끌고 장군이 누구예요? 폼크루즈예요.
니암 닐슨이에요. 니암 닐슨. 메가도가 온 거지.
그래서 여기는 유엔군이 우리나라에 도착한 것이 바로 7월달입니다.
전쟁 발발 한 달 뒤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왔는데 이때 이제 유엔군은 우습게 생각하고 왔다가 스미스 부대를 비롯한 미군들이 줄지어 깨집니다.
북한군의 엄청난 화력이 집중을 해가지고 도저히 여기서 맞짱 뜨고 밀고 올라갈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죠.
그래서 메가도가 생각한 건 뭐냐면 이렇게 밀고 올라가면 아군 측의 피해가 너무 크니까 이렇게 돌아서 여기는 인천으로 상륙하면 어떨까? 일단 서울하고 가깝잖아요.
그리고 우리나라 모든 도로가 다 경부선 경의선 이렇게 서울을 중심으로 뚫려 있기 때문에
인천으로 치고 올라가서 서울만 먹으면 모든 수송로로 고속도로 철도 다 막을 수 있어요.
그럼 여기 있는 철도하고 고속도로를 국도 일반 국도입니다.
일반 고속도로는 없죠. 그때 박정희 때 만들어지죠.
일반 국도와 철도를 유엔군이 딱 잡으면 어떻게 돼요 보급을 끊을 수 있잖아요.
보급을 끊으면 얘들은 총알이 없는데 어떻게 했어요 오합지졸이 되는 거.
그래서 메가도는 이쪽으로 가자고 한 거예요.
그런데 이제 당시 미 국무성에서는 이걸 반대를 한 것이 여러분들 알다시피 여기가 얼마나 커요 조수간만에 제가 커가지고 이 갯벌이 4kg야.
이게. 당시 260척 정도의 배가 인천으로 들어와야 돼요.
그리고 수로가 좁아요. 어? 그 수로가 좁은데 이게 빠른 기동도 안돼.
거기다 길에 띄워놓으면 어떻게 돼요 물속에서 닫기도 전에 다 아작이 나요.
그리고 중요한 건 뭐냐면 이 군함이 커가지고 제일 만조 때 수심의 깊이가 가장 깊을 때 그때가 딱 두 시간이거든.
그 두 시간 안에 다 내려야 되는데 수만 명의 유엔군을 내려야 되는데 만약에 적이 세게 항전을 하면 상륙 못하고 비척비척하면 결국 물 빠지면 상륙도 못하는 거예요.
갯벌에 내려놓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5천 분의 일이라고 그랬어요.
상륙의 성공을 메가도가 밀어붙인 거지.
그래서 1950년 9월에 전쟁 발발 3개월 만에 그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을 한 거예요.
그래갖고 사전에 기뢰 제거랄지 아니면은 여기는 유엔군이 들어오는데 등대불을 켠다랄지 이 역할을 한 게 우리 군인들이에요.
그래서 뭐 켈로부대가 등댓불을 켰고 전투 끝에
그리고 또 당시에 해군 첩보부대가 여기서 사전에 기회도 제거하고 그걸 영화화한 게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영화였던 거죠.
그러니까 메가더의 힘 뿐만이 아니라 그때 이름 모를 많은 우리 어떤 장병들의 노고가 있었다.
그리고 또 성동격서라고 그래서 제가 이 영화 관련 해설에 도서도 얘기를 했는데 북한은 인천으로 들어올 줄 몰랐어요.
여기만 보고 있었다고 소련하고 중국이 경고했거든.
헛 찔리니까 여기 좀 신경을 좀 써라.
근데 김일성은 뭐냐면 시야가 좁아졌어.
무슨 소리입니까 여기는 낙동강만 건너면 전쟁 끝났네.
근데 낙동강 밀어붙이 어 하면서 여기만 치고 있다가 꾹 하고 이렇게 여기를 찔린 거거든.
이게 인천 상륙 작전이에요. 그래서 인천을 안 치는 것처럼 하기 위해서 성동격서 동쪽에서 소리를 치고 서쪽을 치는 거죠.
성동격서로 이쪽 장사로 상륙을 하잖아요.
그래서 이게 장사해수욕장에는 장사 상륙 작전이에요.
그래서 여기는 말 그대로 죽으러 가는 거거든.
소리 치러 가는 거 시선 끌려고 가는 거거든.
미8군이 위험하다고 안 가고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이 갔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열이 전사를 합니다. 그래서 이쪽으로 시선이 들어갔을 때 이쪽에서 이제 이정재가 작전을 한 거죠.
그래갖고 그 정태원 대표라고 태원 엔터테인먼트 아이리스 만든 그 제작사에요.
근데 그 대표분께서 직접 저희 연구실을 찾아오셔서 영화 제작 도중에 이걸 설명을 하는데 그분 뚝심이 대단해서 3부작을 만들고 싶대.
그래서 인천 상륙 작전 잘 되면 서울 수복 작전 장사상륙작전 이렇게 6.25 3부작을 만들고 싶다고 하는데 이번에 영화관 700만 이상 들어서 그분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네요.
어쨌든 여기는 인천 상륙 작전으로 여기는 보급로를 끊게 됩니다.
이러다 보니까 당연히 우리는 밀고 올라갈 수 있게 된 거죠.
그래서 여기는
서울을 9월 28일날 우리가 다시 수복할 수 있었던 거고 그리고 이제 치고 올라가면서 10월 1일날 38도선을 통과해.
그래서 1월 1일이 바로 국군의 날이 되는 거고 10월 19일날 우리가 평양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 올라가는 거죠. 노래도 있어요.
전후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한강수야.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하니 아 피에 맺힌 여기 있는 압록강 두만강 라인까지 전지네요.
적군을 무찌르고서 화랑 담배 연기 속에 북한이 토한다.
이렇게 해서 치고 올라갔어요. 그래서 북한은 이제 여기까지밖에 안 간 거지.
이런 상태에서 전쟁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항상 역지사지해봐.
여러분들이 중국이야 가만히 있겠어요 나는 그러니까 빨갱이는 무조건 나쁘고 왜 참전해서 그렇게 단순한 생각 좀 하지 말고 공무원쯤 되면 여러분 생각이 중국은 참전할 수밖에 없지.
만약에 여기가 자유 대 안 되면 여기 미사일 기지 만들어놓으면 중국 작살 나요.
북한은 중국의 입술이에요. 우리나라는 미국의 입술이 그러다 보니까 여기는 중공군이 참전을 한 거죠.
11월 달에 중국 공산당이 참전을 한 거예요.
그래서 얘들이 밀고 내렸는데 몇 만이 밀고 내려왔는지 아무도 몰라요.
어떤 사람은 팔십만이라고 그러고 인해전술 파도처럼 죽여 죽여도 계속 밀고 내려오고 총보다 사람 수가 더 많으니까
총이 3인당 일정이 주어지고 나머지는 p일이나 1만 팔씩 적어가시죠.
펭가리를 주는 거 하면서 밤에만 내려와.
낮에는 제공권을 장악한 유엔군이 공중 폭격 때려버리니까 낮에는 땅골 들어가 있고 밤에 아마 하면서 80만 명이 삐리리 부르고 내려오니까 공포였던 거죠.
그래갖고 너무 무서워가지고 우리 유엔군들이 개막 원서부터 후퇴를 하기 시작하는데 결국 이것도 추위가 체감 온도가 영하 40도인 거예요.
그러니까 중공군이 쏘는 총알은 안 무서워.
왜 총알이 안 날아와 총알이 있어야 걔들이 쏘지 추위가 더 무서운 거예요.
그래가지고 추위 속에 점점 얼어 죽어가고
후퇴를 해서 1951년 1월 4일 날 여기는 서울을 다시 뺏겨.
이게 일사 후퇴예요. 일사 후퇴 직전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쫓겨내려오던 당시 미국 10사단이 여기는 흥남부두에 이게 딱 고립이 됩니다.
그래서 당시 유엔군 10만 명이 이렇게 탈출을 해가지고 부산에 도착하는 이것이 바로 흥남 철수 작전이었는데
철수 직전에 생각지도 못한 피난민이 십만 명이 찾아온 거예요.
우리가 유엔군한테 많은 도움을 줘서 아마 당신들 그냥 이대로 우리 두고 가면 우리도 학살 당할 것 같습니다.
도와주세요 라고 얘기를 해요. 근데 이 사람들을 도우려면 무기하고 화약을 다 버려야 되잖아요.
선택이지 뭐. 그때 미국 이제 십사단에서 어 수십만 톤의 무기와 탄약을 다 버리고 폭발을 시킵니다.
적들이 사용하지 못하게
그러니까 기계보다는 사람의 생명을 선택한 거죠.
그래서 미군 10만 명 우리나라 피난민 10만 명에서 20만 명이 여기서 영광이 탈출을 해요.
이게 흥남철수고 영화 국제시장 첫 장면이 되는 거죠.
이때 이산가족 많이 생겼죠 배에 타고 어쩌고 하면서 그래 갖고 노래도 있잖아요.
구사우라 금수나라고
눈보라가 휘나 알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그러면서 금수나 어대로 가서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 눈물을 흘리면서 1사 이후 나 홀로 왔다.
어디에? 부산으로 온 거예요. 부산 국제시장에 이렇게 온 거지.
그래서 여기는 20만 명이 탈출하는데 이 안에서 죽은 사람이 한 명도 없대요.
이루고 자는데 한 명도 안 죽고 그 눈보라 속에 도착한 게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도착하거든요.
아이가 다섯 명이 배에서 태어나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미군들이 김치 1, 2, 3, 4, 5로 지어요.
김치 파일을 생명이 오히려 다섯 명이 태어난 이 기적과도 같은 가슴 훈훈한 이야기가 흥남 철수가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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