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6년 최충호는 이전 집권자였던 이의민을 죽이고 중방을 장악해 이듬해 1997년 명종을 폐위한 뒤 신종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동생 최충수마저 제거한 뒤 유일무이의 독보적 집권자가 되었죠.
이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까지 5명이.
집권자가 바뀌긴 했지만 백성들 입장에서는 독재자의 이름과 얼굴만 바뀔 뿐
세상이 바뀌는 건 없었습니다. 여전히 사회는 어지러웠죠.
그 어느 독재자도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내놓은 들은 없었습니다.
민생이 도탄에 빠지든 말든 집권자들은 자기 권력 챙기기 위해 서로 싸우기 바빴습니다.
그래서 민란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무신 정권기 초반에는 지방의 유력층 혹은 지배층들이 반란을 일으키다가 점차 농민 봉기로 퍼지더니 1998년에는 이제는 천민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른바 만적의 난인데요
만족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 살던 산노비였다고 합니다.
노비는 크게 국가에 소속된 공노비와 개인 소유의 사노비가 흔히들 만적이 최충헌의 노비였다고 알고 계시죠? 그런데 만적이 실제 주인은 누구인지 기록은 없고 그저 최충헌의 노비이지 않을까 추측을 할 뿐입니다.
만족은 인근 뒷산에서 노비들을 대규모로 불러 모아놓고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정중부의 난 일에 나라의 공경대부는 노예 계급에서도 많이 나왔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주인의 매질 밑에서 근육과 뼈의 고통만을 당할 순 없다 최충헌을 비롯하여 각기 자기 상전을 죽이고 노비 문서를 불질러 나라로 하여금 노예가 없는 곳으로 만들면 우리도 공경대부 같은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라고요.
여기서 왕후장상이 씨가 따로 있겠는가 라는 말은 만적이 처음 했다고 알고 계신 분들 많은데, 이 말은 중국 고대 밀란에서 나온 말이고, 이미 유명한 구절이었습니다.
이제까지 한국사에서 천민이 반란을 주도한 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전에 이유민도 천민 출신이었겠다 바야흐로 천민까지도 반란을 꾀하는 시대가 온 겁니다.
이들은 노란색 종이로 정자를 표식으로 삼고는 정해둔 일에 맞추어 흥국사 절에 모여 관노비들과 합류해 반란을 모의할 생각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모이지 않자 만적은 반란 거사일을 다른 날로 미루고 맙니다.
모든 반란은 미루는 순간 내부 고발자가 나오기 마련이죠.
겁을 먹은 한 노비가 만적의 계획을 주인한테 일렀고, 이 소식에 최충헌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최충헌은 고발자를 제외한 전원 잡아들여 강에다가 던져 죽여버렸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분 해방 운동이라고 평가받는 만적의 나는 굳이 따지자면 반란은 일어나지 않은 미수 사건으로 그치고 말았죠.
만족에는 말고 만적의 난으로부터 3년 후에 경남 진주에서 공사 노비들이 실제로 반란을 일으키긴 합니다.
바로 진압되지만요 이토록 너도나도 반란을 일으키던 시대가 무신정권기였죠.
한편 최충헌이 강제로 옹립한 국왕 신종은 점차 건강이 안 좋아지더니 1년 정도로 투병 생활을 합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종의 건강이 안 좋아지는 상황에서 후계를 생각 안 할 수가 없었죠.
신종 스스로도 도저히 오래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고, 최충헌과의 논의 끝에 아들에게 양위를 하기로 합니다.
신종의 아들은 아직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 보위를 이을 수 없다고 반대하자, 최충헌이
군부의 명령을 거부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답니다.
보통 이럴 때는 왕명을 거부하지 마십시오가 되어야 하는데, 후계 선언을 군부의 명령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군부의 위상이 왕족의 권한보다도 더 높았다는 사회적 분위기를 시사하죠.
신종은 퇴위하고 8일 후에 사망하고, 1204년 그의 아들이 21대 왕 희종으로 지위합니다.
한편 최충헌은 본인의 미래에 대해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그리고 본인에 이르기까지 집권자들의 끝이 하나같이 좋지 못했죠.
통수와 배신과 암살이 판을 치며 언제 어떻게 해코지를 당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시대였고, 그만큼 본인의 목을 노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 거라고 생각을 했겠습니다.
최충헌의 권력이 막강하니까 대놓고 앞에 와서 최충헌을 반대할 수는 없지만, 속으로 최충헌 벼르는 사람이야 굉장히 많았겠죠 무엇보다 최충헌은 국왕을 자기 멋대로 폐위시켰기 때문에 안 좋은 여론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최충헌은 자각을 하고 있었고요.
여기에 굳이 정치적 경쟁자가 아니더라도
최충헌은 국왕들을 더 확실한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해 내시들을 싹 물갈이하고, 불교계도 자기 유리하게 손을 받게 때문에 최충헌 노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실제 최충헌은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암살 미수 사건을 수도 없이 겪었습니다.
그래서 1200년에는 최충헌은 과거 경대승에 신설하였던 개인 사병 경호 집단
도방을 부활시키기도 했답니다. 뭔가 새로운 정치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고, 이제 중방이라는 기구도 믿을 수 있는 기관이 아니었습니다.
권력자에 따라 늘 물타기 했던 중방이 과연 최충헌의 충북 집단인지 최충헌도 확신하기 어려웠죠.
그래서 최충헌은 오로지 본인만을 위한 권력기관을 하나 신설하기로 합니다.
일명 교정 도감. 1209년 승려 일부가 최충헌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최충헌은 이 승려들을 조사하고 처벌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교정 도감을 설치했는데, 이후 교정 도감은 최충환의 개인 비서 역할을 담당하더니, 점점 더 그 역할과 권한이 커지면서 결국은 국가 대소사를 결정하는 기구까지 확대됩니다.
이 교정 도감은 오로지 최충헌만을 위한 기관이었던 만큼, 국가 대소사들이 최충헌 개인 입김에 따라 결정되는 교정 도감에서 이뤄졌던 거죠.
이후 교정 도감은 무신 정권이 종료될 때까지 향후 무신정권 권력의 상징체가 됩니다.
이제 중방의 시대는 끝이 나고, 교정 도감의 시대의 시작이었죠.
그러나 고려 국왕 희종은 최충헌의 제멋대로 시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고, 1211년, 이번엔 희종이 직접 최충헌을 암살 시도를 준비합니다.
최충헌을 조용히 궁궐로 불러들여 그를 암살하려고 했는데, 이번엔 진짜 최충헌이 죽을 뻔했는데 겨우, 겨우 최충헌이 도망쳐서 숨어 있던 사이, 도방 소속의 경호 병력들이 궁궐로 들어와 최충헌을 구출해내면서 구사일생으로 최충헌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최충헌 암살 시도가 끝이 나자 본인도 끝이리라 희종은 체념했지만, 최충헌은 그래도 자비를 베풀겠다며 희종을 죽이지는 않고, 1212년
섬으로 유배를 보내버리기로 하고, 희종 폐위 후 희종의 조카를 22대왕 강종으로 즉위시킵니다.
강종이 누구냐 최충헌이 가장 먼저 폐위시켰던 명종의 아들이었습니다.
최충헌은 무려 두 명의 왕이나 자기 마음대로 교체를 해버린 겁니다.
그러나 강종은 이미 노년의 몸이었고, 직위할 때부터 건강이 좋지 못해서 재위 1년 8개월 만에 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강종은 아들에게 양위하겠다는 유언을 남긴 그날 밤 사망했고, 유언에 따라 그의 아들이
3대 왕 고종으로 지휘하였습니다. 물론 최충헌의 권력이 국왕 고종보다 훨씬 더 강했고,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최충헌은 고종과 동일한 어가를 타고, 국왕과 거의 동급의 대우와 지휘를 보장받았습니다.
고종도 스스로 자존심이 세지 않아서 굳이 최충헌을 상대로 척을 지지 않으려고 했고, 최충헌이 국왕과 왕실을 능멸해도 고종은 참습니다.
그래서 고종과 최충헌 사이에서는 큰 트러블이 없었죠.
이런 추세에 최충헌도 늙어가고,
성격이 타협적으로 바뀐 것일까요? 최충헌은 앞서 본인이 폐위시킨 뒤 섬에 가둬두었던 희종을 풀어주고, 희종의 딸과 자기 아들을 결혼시킵니다.
그리고 최충헌의 몸이 급격하게 안 좋아지는데요.
최고 집권자가 건강이 나빠지고, 몇 년 못 가 곧 죽을 것이 확실해지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권력의 밑에선 누가 최충헌의 뒤를 이을 것이냐를 두고 요동칠 수밖에 없습니다.
최충헌도 몸이 나빠지는 와중에도 알았습니다.
본인이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고 죽으면 헬게이트가 열리려는 걸 최충헌이 늘 경계했던 것이 무신 집권자들이 저는 그 끝이 안 좋게 죽고,
그때마다 내전과 피의 숙청이 이어지니 또 한 번의 폭풍이 몰아치겠구나를 최충하는 의식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장 안정적으로 정국이 이어지기 위해선 최충헌의 아들이 최충헌의 뒤를 잇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최충헌 측근들 가운데 누가 포스트 최충헌 차례를 욕심을 안 내겠습니까? 이전까지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이 세습된 적도 없었고, 그저 강한 놈이 이어받았을 뿐이었잖아요.
최충헌의 측근들 가운데 그 자리를 노리던 장수가 최충헌의 총애를 받고 있던 최준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최충헌의 아들 최후가 있죠. 최준문도 최충헌의 총애를 듬뿍 받았던 지라 군부의 입지가 탄탄했고, 최충헌조차도 최후에게 권력을 승계하기 위해선 최준문을 경계해야만 했습니다.
최충헌은 아들 최후 덜어 자신에 대한 문병을 중단하라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최주문은 최후를 죽이기 위해, 최우가 자기 아버지 최충헌은 문병호기만을 기다리지만, 최후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나타나지 않았죠.
이러니 최준문파 사람들 내부에서는 최후에게 붙은 배신자가 생겼고, 계획을 전부 들은 최후는 오히려 최주문을 역공해 체포 후 그 18을 전원 유배 보내 버렸습니다.
물론 유배 가는 길에 최 주문을 제거하죠.
1219년, 최충헌은 죽고, 죽기 전, 최충헌의 지시 덕에 그의 장남 최후가 그래도 큰 애전 없이 교정도감의 주인이 됩니다.
이로써 무신정권은 세습되는 관례가 생겼고, 무신정권 중에서 이 우봉최씨 집안이 교도감을 장악하고 군림하던 시기를
최씨 정권기라고 합니다. 최훈은 역대 모든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들 가운데 가장 유난하다고 평가받으며, 또 가장 오래도록 집권한 독재자였습니다.
그 때문에 초연은 아주 지난한 골치 아픈 일에 시달려야 했으니, 바로 몽골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최후 시기에 우리가 익히 들어온 그 악명 높은 징기스칸의 후예들 몽골이 고려로 쳐들어오죠.
최후는 집권 후 몇 년간은 횡령의 정도가 너무 심하고, 평판에 썩 좋지 못했던 무신들을 내치고 유배를 보내버렸습니다.
최후가 선정을 베푸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과거 최준문을 따랐거나 본인의 충신이 아닌 무신들을 벼랑간 아무 명분 갖다 붙여서 내친 거였죠.
고려 군부를 철저하게 본인의 충신들로만 가득 채우려고 했던 겁니다.
절대 최후가 선정을 베푼 도덕적인 사람은 아니었다는 거죠.
그리고 격구를 너무 좋아했던 최후는 민가 100여 집을 헐어버리고, 큰 규모의 격구장을 세웠으며, 최후에게 바친 뇌물과 로비의 양이 어마어마했답니다.
집권 초반에는 최후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들도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과거 아버지 최충헌의 사람들 가운데 최후를 따르지 않겠다는 무리들이 여러 번 쿠데타도 모의했고, 그 과정에서 최후는 자기 아버지처럼 친 동생마저도 죽여야 했고, 많은 무신들이 갈려나갔죠.
최우는 군부뿐 아니라 고려 조정까지도 최후가 장악을 할 필요가 있었고 최후는 자신의 개인 사택에 정박이라는 기구를 만듭니다.
정박은 고려 조종의 인사권을 행사하는 기구로, 모든 정치인들과 공직자들의 임명권과 해임권이 이 최후의 개인 사저에 있는 정방이라는 곳에서 이루어졌죠.
정방 설치 이후, 최후는 빠르게 본인의 독재 권력을 안정화시켜 나갔습니다.
정방으로 인해 문신들의 입지가 높아지는데요.
정방의 결정으로 조정의 요직에 임명됐다는 건,
그 사람이 최후의 측근이라는 뜻이잖아요.
정방우의에 임명된 문신들은 최후 지지 세력이었던 만큼, 최후가 정치적 백이 되어 주어서, 이전 무신 집권기에 비해 문신들의 사회적 위치가 상당히 회복되었습니다.
또 최훈은 무예에 출중한 젊은 청장년들을 모아 개인 경호부대인 야별초를 창설합니다.
이 야별초 출신들이 나중에 고려 군부의 핵심 장군으로 발령받을 수 있을 만큼, 야별초는 군인으로서 출세하기 위한 관문이기도 했죠.
최후에게는 또 의외의 면모가 있었으니, 문학적인 재능이 굉장히 뛰어났습니다.
이 작시 능력과 글 쓰는 능력이 웬만한 문신들보다 더 뛰어났으며, 서해의 솜씨 또한 수준급이었죠.
유교 경전을 비롯해 교양과 지식 정도가 남달랐다고 본인뿐 아니라 문학적 재능을 가진 인재들을 등용해 많이 어울렸는데요.
아예 학자들을 국가 차원에서 양성하고 지원해주겠다며, 재능 있는 문신들을 발탁해주는
서방이라는 기구를 별도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출신들이 나중에 성리학을 수용하고 발전시키며, 사대부라는 계층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토록 어느 정도 권력을 안정화시킨 이후, 최후가 향후 고려 사회에 끼친 영향력과 파급력은 하나같이 거대한 것들이었죠.
이런 최후에게 크나 큰 위기가 찾아오니, 바로 몽골의 침입이었습니다.
몽골과의 첫 접촉은 이미 최충헌 때 이루어진 이후로, 몽골 측의 무리한 곡물 요구로 계속 외교적 문제가 있어 왔습니다.
결정적으로 1225년 고려 정부에게 또 갑질을 대고 말도 안 되는 공무원을 요구하러 온 몽골 사신
저 고려가 귀국하던 중 국경을 넘지 못한 채 고려 땅에서 피살됩니다.
범인은 고려와 몽골이 친해지는 것을 두려워해 이간질할 요량으로 여진족들이 한 짓이라는 게 유력하지만, 정확한 건 모르며,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역사 속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죠.
결국 저고요 피살 사건을 계기로 몽골 쪽에 쳐들어오는데, 바로 쳐들어오지는 않습니다.
저고요 피살 사건이 1225년인데, 그로부터 2년 후에 1227년 징기스칸이 죽거든요.
그 칸의 자리가 징기스칸의 아들에게 넘어가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아서 몽골 내부적으로 어지러웠습니다.
그러다 징기스칸의 셋째 아들인 우구데이칸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몇 년 뒤였던 1231년 고려로 침입을 해옵니다.
우구데이칸이 보낸 고려 침략군의 총 지휘관은 살리차 규모는 3만 정도였습니다.
바야흐로 몽골 침입의 시작이었죠. 국경지대를 쑥대밭으로 만든 후, 산리탄은 부대를 3개로 나누는데, 이 중 2개 부대가 각각 귀주성과 자모산성에서 발이 묶입니다.
귀주성을 지키는 김경순 장군과 자모산성을 지키던 최춘영 장군이
맹활약을 하며 몽골과의 수성전에서 잘 버티고 있었습니다.
몽골의 주력 부대는 정작 바로 수도를 향해 진격해, 12월 1일 개경을 포위합니다.
살리타는 고려 조정의 항복을 권유했고, 12월 5일부터 살리타와 고려 정부는 본격적으로 화친 협정을 위한 회의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12월 23일, 내년 고려는 막대한 양의 공무를 마치고, 몽골에서 고려 정보로 감독관들을 파견하겠다는 조항과 함께
살레타는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사실 살리타가 마음만 먹으면 개경 안으로 들어가서 최후랑 고려 국왕을 죽이고 고려를 멸망시킬 수도 있었는데, 왜 화의를 맺는 걸로 끝냈을까요? 고려를 멸망시킬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징그스칸의 뒤를 이은 우구데이카는 여진족의 금나라와 1대 일전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려가 금나라를 지원해 준다면 몽골은 양 전선에서 모두 싸워야 하겠죠 그래서 1차 침입은 고려가 금나라를 돕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걸로 전쟁을 마무리한 겁니다.
최후는 1차 몽골 침입을 강화 협약을 체결하는 조건으로 어떻게 마무리 짓기는 했으나, 진짜로 몽골한테 항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최는 몽골 부대가 돌아간 지 얼마 안 되어, 1232년 2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길 자는, 즉 강화도 천도를 공식적으로 거론했습니다.
기존의 수도였던 개경은 산지가 아니라 몽골족의 공격에 방어하기가 대단히 취약하기 때문에, 기병 중심의 몽골족들이 젠병일
섬으로 들어가 버리면 충분히 싸울 만하다는 게 최후의 명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섬으로 강화도만한 섬이 없다는 거죠.
개경이랑도 가깝고 나름 한반도 가운데에 있어서 황해, 경기, 충청, 전라도, 서해안, 따라서 줄지어 있는 평해지대로부터 곡식을 수혈받기에도 유리하잖아요.
그러니까 강화도 천도는 최후가 앞으로 몽골족과 계속 전쟁을 치르겠다는 의지가 공공연하게 전제가 되어 있는 방침이었습니다.
반대가 엄청 났죠. 명분은 좋다지만 수도를 옮기는 일이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국력이 소모되는 일인 거죠.
대부분의 귀족들이 반대했습니다. 그냥 몽골족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평화를 추구하며 백성들의 목숨이나 지탱해보자는 쪽도 있었고, 굳이 섬으로 들어갈 것 없이 산성을 방어하면서 싸워도 승산이 있다고 말하는 쪽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재자였던 최후가 강화도 천도를 논의하라고 한 건
진짜 논의하라는 게 아니죠. 최후는 죽여도 탈 없는 반대파 몇몇 본보기를 제거한 뒤 강화도 천도를 강행했습니다.
최후가 당시 고려 왕이었던 고종에게 가서 천도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자 고종은 난처해 하며 아무 말도 못했답니다.
그런데 최후가 고종에게 물어보기 며칠 전부터 이미 사람들을 강화도로 보내서 궁궐 공사를 위한 준비에 착수 중이었습니다.
최은은 개경 백성들한테 20일을 줄 테니 몽골족들에게 살해당하기 싫으면 강화도로 빨리 거주지를 옮기라고 발표했습니다.
갑자기 20일 안에 이사를 하라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그 20일 사이에 열흘은 또 장마가 계속 내려서 정말 지옥의 행군이었다고 합니다.
가서도 문제예요. 강화도는 섬인지라 도시가 확장되기가 힘들어요.
몇백 년간 수도였던 곳에 살던 그 많은 사람들이 강화도로 다 들어오면 도시의 위생 상태가 어떻게 되겠으며, 거주지 문제는 또 어떻게 됐겠습니까? 아울러 군부 독재의 권력에 빌붙은 핵심 세력들은 군부와 결탁해서 기존에 거기에 살던 사람들 내쫓고 집 팔러 자기네 집으로 만들고
가뜩이나 힘든데 궁골 공사와 최후의 사태 공사에 동원된 백성 숫자가 수천 명이었습니다.
개경은 불과 두 달도 안 되어 유령 도시가 됩니다.
1232년, 고려 정보의 그 유명한 강화도 천도는 그다지 예쁘지 않았습니다.
몽골 종의 1차 침략 후 몽골 병력은 철군했지만, 몽골 정부에서 고려로 다루가치를 하는 감독관들 72명을 파견해서 고려의 내정 간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루가치들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최후가 왕실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강화도로 떠나기 직전에 고려에 파견되어 있던 다루가치들 72명을 전원 소환합니다.
부를 땐 너희를 위해 파티를 마련했다면 불러놓고 얘들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살해해버리죠.
이 사건이 몽골에 전해지자 1232년 살리타의 몽골군이 다시 쳐들어옵니다.
2차 침입이죠. 10월경 몽골 군대가 개경으로 들어오는데, 살리타는 강화도에 있는 고려 조정에 당장 섬에서 나오라고 강압적으로 요구했습니다.
당연히 고려 조정은 거부했죠. 몽골 군대가 수전에 능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배를 만들어서 강화도까지 가는 건 가능했습니다.
다만 지금도 그렇지만 강화도로 가는 물살이 상당히 급한 편입니다.
배를 만들어서 섬까지 가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은데, 많은 인력 손실을 볼 거고 쉽지만은 않았던 거죠.
대신 살리타는 이래도 너네가 안 나오고 뻑이겠냐며 초토화 작전을 실시합니다.
즉 군대를 여러 개로 쪼개서 한반도 전역으로 보내 국토를 밟고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면, 고려 조정도 별 수 없이 섬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고 보는 거죠.
고려 정부, 안 나옵니다. 그냥 고려가 몽골족의 말발굽에 짓밟히도록 그대로 두었죠.
그런데 이게 웬걸 경기도 용인의 처인 부곡에서 정찰 중이던 살리타가 매복해 있던 김윤후 등의 승병들이 들이닥쳐서 살리타를 사살해버린 겁니다.
몽골 부대 전체를 관장하는 총사령관이 이렇게 느닷없이, 어이없게 죽어버린 겁니다.
놀란 몽골 부사령관은 후퇴 명령을 내려 2차 침입도 끝이 납니다.
제2차 고려 몽골 전쟁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로 끝났기 때문에, 고려를 완전하게 복속시키지 못한 몽골이 다시 쳐들어오리라는 것은 당연한 수준이었습니다.
이후로도 몽골은 몇 번이고 쳐들어오지만, 최후의 고려 조정은 강화도에 박힌 채,
국토가 유린이 되든, 백성들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고 끝까지 섬에서 나오기를 거부합니다.
지구전으로 끌고 가면 고려가 유리하다고 판단했죠.
거기에 희생되는 백성들은 어쩔 수 없고요.
이렇게 전쟁이 점점 대규모로 치닫는데, 고려 중앙정부는 강화도에 박힌 채 나오지 않다 보니, 각 지방별 고려의 정규군들이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최후의 개인 경호부대였던 야별초의 병력들이 전선에 투입되곤 했는데요 전쟁이 격화되면서 그 규모가 점점 더 커집니다.
이들은 주로 게릴라, 전술, 유격전, 보급로 차단, 백성들의 피난, 행렬, 호위 등의 작전을 수행했고,
생각보다 활약성이 나쁘지 않자, 최후는 야별초의 규모를 더욱 확대하여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어 운영했습니다.
좌별초든 우별초든 이제 최후의 개인 경호 뿐 아니라, 몽골과의 전쟁에서 정규군의 역할까지 도맡는 군사 조직으로 확대되었죠.
몽골은 여진족의 금나라를 멸망시킨 뒤, 1235년 타우타이를 새로운 총지휘관으로 하여 다시 한 번 고려로 쳐들어옵니다.
탕후타이의 작전도 마찬가지로, 더 이상 강화도에서 참고 버티지 못하게 고려 전 국토를 밟아 놓는 것이었죠.
이때 경주에 있던 황룡사와 황룡사 구축 목탑이 전수됩니다.
고려 전국적으로 각 지방별로 항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강화도에 있던 최후는 불교의 힘으로 호국의 염원을 담겠다며 대장경 조판 사업을 발표합니다.
대장경이란 불교 경전을 집대성한 총서 느낌인데요.
원래 고려에게는 초조대장경이라고 고려 초에 제작한 대장경이 있었는데, 2차 몽골 침입 때 소실되어 버렸단 말이죠.
최후는 새로운 대장경을 다시 조판하라며, 강화도에 대장도감이라는 임시 관청을 만들곤
대장경 재간행 사업을 밀어붙입니다. 몽골군과 고려 정부의 치킨 게임에서 패배한 쪽은 고려였습니다.
1235년 시작된 몽골족의 3차 침입은 1238년 겨울이 되어서야, 거의 4년이 되어서야 끝이 납니다.
몇 년 약탈이 계속되니까 진짜 피해가 너무 극심해졌고 고려 조정은 타호 타이에게 몽골족이 돌아만 간다며, 고려 조정이 강화도를 나올 것과, 고려의 국왕 고종이 직접 몽골로 찾아가 칸에게 입조를 하겠다는 조건으로
끝냈습니다. 물론 고려 조정이 맺은 조항들, 예컨대 강화도로 나오겠다는 조약과 고려의 국왕 고종이 직접 몽골로 찾아가겠다는 조약 아무것도 지키지 않습니다.
대신 왕의 조카를 보내거나 하는데 당연히 바로 걸렸죠.
이로부터 몇 년 후, 몽골의 이대 칸, 우구데이 칸이 죽습니다.
3대 칸을 두고 여러 부족장들이 내분을 벌이는데요.
덕분에 한동안 고려는 몽골족의 침입을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247년, 어느 정도 내분을 수습한 3대 구6칸은
3차 대의 강화 조약을 지키지 않는 고려를 응징하기 위해 또 한 번 4차 침입을 해옵니다.
이 사차와 관련해서는 구체적인 전세 상황이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고려사에는 몽골족들의 약탈이 심해지자, 전국 각지의 백성들을 최대한 섬으로 대피하라는 지시를 내렸던 듯 합니다.
이때 평안북도 안주에 있는 백성들 일부는 위도라는 섬으로 피난을 가는데,
이 피난길을 몽골족이 덮쳤으나, 나중에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게 되는 김방경 장군이 몽골족을 격퇴시켜 무사히 백성들을 피난시킨 전공이 있었습니다.
4차 침입 역시 고려에게 상황이 유리하지는 않았는데요 1248년, 돌연 몽골족의 구육항이 사망해버립니다.
소식은 1249년에 전해졌는데, 몽골적인 풍습상, 칸이 죽으면 곳곳에 대외 원정 가 있는 모든 사령관들이 다시 돌아와야 한답니다.
이 때문에 고려에 주둔하고 있던 모든 몽골 부대도 어쩔 수 없이 몽골로 돌아가면서 4차 침입도 얼떨결이 끝나버렸죠.
4차 침입이 끝나고 1251년 앞서 3차 침입 당시 최후가 지시했던 대장경 조판 사업이 무려 15년 만에 마무리됩니다.
고려 초기에 제작했던 초조대장경과 구분하기 위해, 최후의 지시에 따라 만든 대장경을 다시 만들었다는 뜻에서 제조대장경이라고 부릅니다.
총 8만 장의 불교 경전 위로 쌓으면 높이가 3kg,
글자 수가 무려 5천만 장 오타가 거의 없어서 매우 정밀하게로 세계적인 인정까지 받은 제조 대장경의 벨칭은 바로 팔만대장경이죠.
오태율이 0.003%라던데요 이 글씨체조차도 굉장히 아름다워서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었다.
다 후손들 입장에서 조상들이 이런 귀중한 유물을 만들어주어 지금의 우리가 세계적으로 자랑스러워 할 수 있으나, 어떤 분들은 이런 국난의 상황 속에서 민생은 외면한 채, 그 막대한 국가의 재정을 고작 불경 만드는 데 투입시킨
고려 정부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몽골 부대의 약탈이 한창이던 3차와 최후의 고려 정부가 민생을 내팽개친 건 사실이죠.
그러나 팔만대장경 제조가 아무런 쓸데없는 짓은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그 오래전에는 백성들이 불교에 정말 크게,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에게 빌면 왜적이 물러난다 이건 고려 정보도 말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죠.
그럼에도 밀고 나갈 가치가 있는 사업이었다는 거죠.
백성들을 정신적으로 조금이나마 트라우마에서 극 시키고 희망을 줄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이었습니다.
더불어 최후가 팔만대장경 제조를 지시함으로써, 과거 아버지 최충헌 때부터 군부 정권에 등을 돌리고 있던 일부 불교 종파들을 회유해
그들 스스로 승병을 조직해 전쟁에 투입했다는 효과까지 있었다고 하니, 팔만대장경 조판이 무가치하지는 않았다는 거죠.
그런데 이 최후의 역작이었던 팔만대장경 완성은 정작 최후가 그 끝을 보지는 못했는데요.
팔만대장경이 완성되기 전에 고려의 무신정권 가운데 최장기간 집권했던 최우가 죽고 말았던 겁니다.
모든 무신 집권자들 중 고려에 가장 큰 영향력과 파급력을 행사했던 최후 매우 유능하다고 평가받으나, 그 유능한 능력을 정의를 위해서가 아닌 정치와 본인의 개인 권력을 위해 사용했다는 비판도 받으나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최후는 대체에 불과한 독재자였답니다.
이 정도 위치의 최후였으니, 당연히 최후의 뒤를 이을 후계 문제는
고려 최대의 화두였습니다. 문제는 최후에게 아들이 없었고, 정실 부인에게서 낳은 딸 한 명이 있었죠.
최후는 일찍이 딸의 남편, 즉 자기 사위 김약선을 후계로 점찍어 두고 있었습니다.
고려대 몽골 1차 전쟁 때 귀주성을 끝까지 지켜냈던 김경순 장군의 친형입니다.
최후가 자기 후계로 삼았을 정도이니, 비록 친아들이 아닌 사위이지만 김약선에 대한 총회가 남달랐겠죠.
더군다나 김약선과 최후의 딸 사이에서 딸을 낳았는데, 이 딸이 고려의 태자와 혼인을 한 태자비였습니다.
즉 나중에 고려의 태자가 고려의 왕이 되면 김약선과 최후의 딸은 왕의 장인, 장모가 되는 겁니다.
하지만 역사의 해피엔딩은 잘 없는 법이죠.
김약선과 최의 딸 사이 금슬이 최악이었습니다.
최후의 딸이 자기 집 남자 종과 바람이 났는데, 김약선이 이 사실을 알아차린 겁니다.
최후의 딸은 자신의 외도를 김약선이 아빠한테 말할까 봐 겁나서 선수 칩니다.
최후의 딸이 아빠한테 가서 남편 김약선을 모함했고, 이 모함에 속은 최후는 사위 김약선을 죽여버립니다.
그런데 얼마 후 자기 딸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과 남자 종이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최훈은 너무 화가 나서 딸마저 죽여버립니다.
그럼 이제 후계를 잃을 사람이 없어지는 거죠.
최후에게 아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습니다.
만족 만전이라는 형제가 있었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최후가 데리고 있는 기생, 그것도 몸을 파는 기생인 창기로부터 낳은 아들인지라 최후가 아들 취급도 안 했습니다.
아들 취급도 못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두 형제는 온갖 망나니 짓을
아빠 이름에 먹튀를 계속하니까 화가 난 최호는 두 형제 머리를 깎게 하고 승려로 강제 출가시켰었죠.
딸과 사위까지 없는 상황에서 최호는 그래도 누구 한 명을 후계로 삼아야 이 교정 도감의 군부 권력이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고, 만족 만전 형제 중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최후는 첫째 만종일를 제치고, 둘째 만전희에게 최항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하사하고
그를 후계로 삼았습니다. 첫째 만종이는 계속 승리로 있었죠.
이렇게 최양은 교정 도감의 권력을 계승한 새로운 집권자가 되었는데, 최항이 최후의 아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최항은 무능한 막난이었습니다.
아버지 최후가 죽은 지 겨우 이틀 만에 아버지의 첩들을 겁탈했고, 자기가 승리했던 시절 자기 심기를 건드렸던 이들을 다 기억하고 있다가 전원 체포해 별다른 절차 없이 싹 다 죽여버렸죠.
그리고 최양은 어머니가 천빈이었고 본인도 계승할 자격이 없다가 얼떨결에 계승했다는 출신 콤플렉스가 심해서 이 콤플렉스가 삐뚤어진 형태로 나타납니다.
사람 의심하고 주변 평판이 좋은 이들을 하나 둘 물리치기 시작했죠.
물리칠 정도가 아니라 학살에 가까운 숙청을 해야 됩니다.
예컨대 최후의 정실 부인이 자기 친엄마를 천출이라고 무시했다며 최 양은 그녀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 집안 오빠들을 전부
죽입니다. 또 김약선의 친 동생이자 고려대 몽골 1차 전투 당시 귀주성의 영웅이었던 김경손마저 제거합니다.
최항의 패악질로 최후 때 보여주었던 고려 무신정권의 권위가 실추될 대로 실추되며 그 기반이 심각하게 흔들리게 되는데요.
고려의 무신정권은 사실상 최후의 죽음과 함께 그 끝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500년 고려 역사를 초기부터 후기까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0) | 2023.06.01 |
---|---|
6.25 전쟁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해 드립니다. (0) | 2023.05.31 |
고구려의 멸망과 삼국통의 과정에서 한반도와 중국이 통합될 수 없는 이유 (0) | 2023.05.30 |
고려시대 무신정권기 천민들의 봉기적 관점에서 설명드립니다. (0) | 2023.05.25 |
갑골문에 나타난 인신공양 과연 사실일까? (0) | 2023.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