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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구려의 멸망과 삼국통의 과정에서 한반도와 중국이 통합될 수 없는 이유

by 로이인랑 2023.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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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은 고구려를 위하여 고구려 당나라를 물리친 다음에 신라, 백제 점령했으면 만주도 우리 땅인데 찬란한 생전과 멸망이라는 양 모습이 다 나타났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꼼꼼하게 보면서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생각들 해보도록 합시다.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치 진나라가 무너지고 한 나라가 들어서듯이 수나라가 무너진 다음에 당나라가 들어섰어요. 
앞에 있었던 수 양제는 전체가 다 자기가 망했잖아요. 
너무 재산이 많으니까 써도 된다고 믿었던 사람인 거죠. 
무한한 자원을 갖고 있다고 믿는 무모한 황제가 아니라 혼란을 아주 체계화시키는 방법을 극복하고 이 왕조를 수백 년간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동력을 이루어내는 황제가 등장하게 된 거죠. 
그 당태종 이세민이라는 존재예요. 상대가 바뀌었고 그 상대는 이전 상대와 다르다 이렇게 가면 안 된다 대국을 소국이 싸워서 이길 수 없다 객관적 전력 차이와 국가적 자원을 생각했었을 때 계속 전쟁을 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거죠. 
굉장히 국력이 쇠잔해진 고구려 입장에서 이제 화친밖엔 대답이 없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으니까 화친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행동까지 해야 되나라고 싶을 정도로 굉장히 친선 교류 정책을 많이 펼쳤는데 수나라 병사들이 시신을 묻고 그 위에다가 이렇게 흙을 쌓은 다음에 우리가 이겼다. 
경관이라는 조형물을 무너뜨리기도 했고요. 
특히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게 봉역도 쉽게 말하면 우리나라 지도죠. 
핵심 기밀을 담은 봉욕도를 갖다 바치기도 하고 또 이제 진대덕이라고 해서 관리의 명칭인 건데 당나라 관리가 들어와서 고구려 상황을 살펴볼 수 있게까지 다 허락을 해줘요. 
문제는 뭐냐

이런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가 입장을 안 바꿨다는 거예요.

645년 4월에 당나라 군대가 요화를 넘어서 계모성, 신성 등을 점령을 하고요. 
요동성에서 전투가 발생을 합니다. 요동성 하면 수나라의 어떤 진격을 막았었던 유명한 곳이잖아요. 
그리고 또 요동성 하면 그곳에 이제 또 주몽의 사당이 있었던 걸로 유명하죠. 
주몽이 있었던 활과 칼의 일부가 남겨져 있다. 
근데 결국은 유동성과 이 당나라 간의 치열한 싸움 속에서

남풍을 이용한 화공 공격으로 유동성이 무너지게 되는 거죠. 
1만 명이 넘는 병사가 전사했고 이 성 안에 있었던 남녀 백성 4만 명 이상이 끌려갔고 양곡 50만 석과 수만 마리의 소아 말을 빼앗겼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객관적인 물적 타격도 크지만 주관적인 타격이 크죠. 
왜냐하면 수나라를 막아냈던 섬이잖아요. 
또 주몽이라는 신성한 존재의 상징물이 있었던 곳인데 그게 무너졌다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지난번 편에서 분명히 말씀드렸지만 이 시대 전쟁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가 뭐냐면

해양전이라는 거죠. 수나라와의 싸움 이후에 고구려가 해양전을 대비하기 위해서 여러 성을 쌓았단 말이에요. 
근데 이때 보면 이 요동이 무너진 그 비슷한 시점에 당나라 수은 같은 경우는 장량이라는 사람이 이끄는 500여 채의 배가 4만 3천 명 정도 되는 부대를 동원해서 요동반도 가장 끝자락, 레오튼 반도 끝자락에 비사성이라는 성이 있거든요. 
그 성을 공격해서 그 성을 무너뜨려요. 
그리고 이 시점에 이제 백암성 같은 유명한 성들도 무너지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초유의 위기가 발생을 하게 된 거예요.

해양의 최전방 거점지와 그리고 요동을 지키는 최전방의 전설적인 성 두 개가 무너지게 되니 뭐라고 할 수 있죠? 장기로 장기판으로 이야기한다면 이제 차포가 하나씩 딱 떨어져 나가는 상황이 되는 거죠. 
그리고 이제 그다음 싸움이 그 유명한 안시성입니다.

특히 수성전 성을 이렇게 막는 성에서 이렇게 버티는 전법을 이야기하다 보면 성 안에서만 싸운다고 생각해요? 아니에요. 
한 부대는 성 안에서 싸우는 거고 다른 부대가 성 밖에서 성을 포위한 부대를 공격하는 양면 공격으로 언제나 싸워야 돼요. 
그래야지만 버틸 수 있거든요. 이 당시 고구려의 지배자는 연기소인데 연기소민 입장에선 안시성을 지켜야만 되는 상황이죠. 
그래서 15만 대군을 보냅니다. 15만 대군을 보냈으나 완벽하게 대피합니다.

역시 기록에 따르면 3만6800명이 포로로 잡혔고 그중에 이제 말갈 병사 3300여 명은 본보기로 생매장을 시켰다고 합니다. 
지난 편에서 얘기를 했었지만 당나라 준비 다 했거든요. 
돌걸 싹 정복했고 당태종은 천가한이라고 그래서 황제도 됐지만 유목민족의 수장도 되어 있었던 상태였고 끝까지 고구려 편을 들었던 말갈 병사들이 완전히 작살을 해버리게 되는 상황이 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

문자 그대로 고립무원이 되는 거죠. 그 상황에서 정말 치열한 싸움을 하여튼 기록에 따르면 정말 심할 때 하루에도 6번에서 7차례 공방전을 펼친다고 해요. 
정말 전심으로 서로 싸우는 거죠. 계속 그런 싸움들이 이어지게 되는데 예를 들면 당나라가 이동식 수레를 통해서 이제 누각이나 성각기 같은 성을 넘어오는 방어물들을 다 무너뜨려요. 
그러면 이제 거기다가 또 고구려 병사한테 가가지고 거기다 막 목책 세우고 토담 쌓고 하면서 또 버티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쪽은 무너뜨리고

한쪽은 세우고 한쪽은 공격하고 그러다가 이제 결국은 당태종 이세이 결정을 내립니다. 
60일 동안 그러니까 두 달 동안 안시성 동남 쪽에다 토산을 세웁니다. 
산을 세워요. 성의 의미를 없애버리는 거죠. 
성만한 산을 세우는 거예요. 이게 이제 인력이 비교가 안 되니까 그러면 그냥 이렇게 토로 들어가면 되죠. 
그런데 이게 예전에 드라마 대중형을 보면 섬을 세우니까 밑에 병사들이 들어가가지고 땅꾸로 파는 거예요. 
그래서 그 토산을 무너뜨리고 막 그런 장면이 너무나 재미있게 묘사가 돼서 감동받고 그런 게 역사 책에 쓰여지기도 했는데

그것까지는 확인할 수 없고 여튼 간에 토산을 세웠는데 결국 그 토산이 또 무너지게 돼요. 
마치 제갈량이 진창성에서 발목이 묶였듯이 당태종 이세민이 요동과 기사를 무너뜨렸는데 이 안시성을 무너뜨리지 못하는 거 안시성을 무너뜨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평양성으로 들어갈 수가 없거든요. 
또 정확한 사료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수근이 못 올라온 걸로 봐서는 비사성을 무너뜨리긴 했지만 다른 지역의 고구려 수근이 굉장히 활발하게 활동을 하지 않았나 이런 추정도 가능해요. 
즉 병력의 집중이 불가능하죠. 그리고 사실은 애초에 100만 대군을 동원했기 때문에 산성 하나를 무너뜨릴 때 병력이 더 많이 오는 건 별 의미가 없어요. 
이런 과정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버티죠. 
버티고 버티면서 안시성을 무너뜨리지 못하니까 군대를 퇴각할 수밖에 없고 퇴각하던 과정 중에 이제 요택이라고 하는

요아 일대 저습지 일 대를 통과하면서 어마어마한 고생을 하면서 이 당태종 이샘이 돌아갔다. 
결과적으로 봤었을 때 1차 고당 전쟁에서 승리를 합니다. 
그리고 이 자체는 우리가 전 충분히 즐겨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 당시 요즘 말하면 세계 제국의 어떤 그런 최고의 지배자와의 싸움에서 주력 부대와 주력성이 무너진 상태에서도 버텨냈다. 
안시성의 군미인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 이 정도의 정말 깡다구 정도는 좀 있어야 되지 않나 그런 기분은 전 충분히 가져도 좋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근데 이제 아까 말씀드렸듯이 당나라 수나라 다릅니다. 
사회적 자원을 워낙 관리를 잘하고 있었기 때문에 100만 대군 원정 같은 걸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탄탄한 거예요. 
승질 하지 우리 입장에서는 그렇죠? 그리고 이제 여기서 무슨 수를 쓰기 시작하냐 직접 대규모 원정은 아닌데 정확히 2년 지난 647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또 침입을 합니다.

5월 달에는 우진달이 이끄는 수근이 7월에는 우진달과 이안이 이끄는 수근이 각각 요동반도와 암록강 하구 일대 해안 지방에서 싸움을 일으키게 되는 거죠. 
그다음 해인 648년에는 설만철이 지휘하는 수근이 실제로 압록강 하구의 박작성을 정복을 하고 황해를 건너서 아예 평양성을 공격하기도 해요. 
전쟁이 일상화가 된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전쟁의 일상화를 감당할 수 있는 나라와 전쟁의 일상화를 감당할 수 없는 나라가 지금 싸우기 시작을 한 거예요.

얼마나 큰 사회적 차이가 있는지 알겠죠 그렇죠? 또 하나는 뭐가 있냐면 이제 수나라 때부터 시작됐던 해상전이 일상화가 된 거예요. 
그냥 바로 황해에다 배를 띄운 다음에 고구려 영토 어디든지 다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 돼버린 거죠. 
그러니까 고구려 입장에서 너무 힘들죠. 
매일 전쟁을 치러야 되고 매 전군을 동원해야 되고 이제 성만 지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안가를 다 지켜야 돼요. 
국가가 국력이 점점 피폐해질 수밖에 없어요.

근데 판이 더 커집니다. 수나라 당나라 때 계속 회전을 하다 보니까 조금만 백제를 먼저 물어틀어버리면 위아래로 점령 가능하잖아. 
지금 고구려랑 당나라랑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백제의 문제가 또 딱 등장하게 된 거예요. 
우리가 지난번에 이야기할 적에 고구려의 약점이라고도 그랬잖아요. 
동북아에서 지금 중원의 통일제국이 등장을 하고 있고 돌거리나 이런 지형도가 바뀌고 있는데 고구려는 강대강 전략밖에 못 펼치고 있었던 상황이고 수나라 당나라랑 싸우면서도 백제, 신라랑도 그 다시 사이가 좋지 못했잖아.

이게 고구려의 문제거든요. 근데 반대편으로 백제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백제랑 신라는 둘이만 계속 싸웠단 말이에요. 
세상이 우리 둘밖에 원수가 없는 거야. 
우리 둘이 싸우고 있는 사이에 동북아시아 질서가 바뀌는데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안 싸울 줄도 알아야 되고 친해질 줄도 알아야 되고 방향을 바꿀 줄도 알아야 되잖아요. 
더군다나 더 큰 문제가 뭐예요 그렇게 계속 싸우고 있는데

신라가 또 계속 성장하고 있잖아요. 오직 신라한테 싸워서 이기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신라를 멸망시키지 못해요. 
국력은 국력대로 소진되고 있고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운영 안 되고 있고 이런 상황인 거죠.

당시 신라의 주력군은 이천에 집결해 있었고 김유신 입군은 약 5만 대군으로 추정을 하고 있죠. 
당나라의 수군 한 10만 이렇게 된다고 추정을 하고 있는데 덕적도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지도상 구분을 해보면 당시의 백제의 중심지라는 것은 이제 사비성을 중심으로 있는 곳이잖아요. 
이 부여 공주 바로 북쪽 자락에 차영 산맥이 쫙 막고 있어요. 
차영 산맥을 넘어서 공격하냐 아니면 두 개로 쪼개져서 당나라군은 수군으로 오고 그리고 신라군은 육군으로 오냐 이런 몇 가지 중에 하나 선택을 해야 되는 거죠. 
흥미로운 게 뭐냐

백제가 멸망하기 4년 전에 좌평 성충 굉장한 충신입니다. 
의자왕의 폭거에 대해서 하나하나 낱낱이 따지면서 차가 국정류 똑바로 운영하세요 라고 주장하다가 잡혀서 돌아가신 분이에요. 
그가 뭘 얘기하냐 지금의 상황을 보호하니 당나라의 활동이 심상치 않고 신라의 기세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니 탄현과 백강은 무조건 막으시옵소서. 
수도만 점령하면 나라는 사라지거든요. 
지금처럼 무슨 어디로 옮겨 싸우고 이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결국은 사비를 중심으로 한

충청도와 전라북도 일대의 그 중심지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가 되게 중요하고 이걸 막아내는 데 있어서 결국은 금강과 논산 쪽으로 들어오는 길을 막아라 라는 게 성충의 간언이었었고 당장 전쟁이 일어나서 신라군과 당나라 군대가 에서 만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신하들 사이에서도 막 회의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 회의가 얼마나 황당하냐면

좌평 의직은 당나라 군대가 상륙하면 공격을 하자고 주장을 하고 다소 상형 상형이 이제 김유신과 내통을 했다 이런 혐의가 있는 사람인데 신라군을 또 먼저 공격해야 된다 좌편 흥수는 백강과 탄현을 지켜야 한다 결정을 내려서 대비를 해야 되는데 회의만 하는 거예요. 
결정을 못 내려 아무것도 안 하는 사이에 신라군은 이미 탄년을 지났어요. 
그리고 타인을 지나고 나니까 부랴부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게 뭐예요 개백한테 5천 군사를 주잖아요. 
아니 상대는 5만 군대가 오는데

그리고 백강 쪽에서는 이미 당나라 군대가 들어오게 되어 있었던 상황인 거고 백제는 한 단만 나누고 제대로 된 방비를 하지 않다가 나라가 10일 만에 그냥 망해버리고 맙니다. 
백제가 망해버리니까 상황이 완전히 극적으로 바뀌어요. 
디귿자 구조로 고구려만 이렇게 멀찌감치 남아버리게 되는 거잖아요. 
더군다나 남쪽에는 오랜 원수인 신라가 또 있고 이런 상황이 되는 거니까 당나라 입장에선 군사 작전하기 너무 좋아지게 되는 거고 고구려 입장에선 이제는 어디를 막아야 될지 모르겠다는 상황까지 돼버리는 거니까 최악의 상황이 되는 거죠.

결국 나라가 망하는 이유는 내부적인 문제 때문이거든요. 
그게 가장 커요. 영류왕이 화진 정책을 펼치다가 연계 수업만한테 처단을 당하죠. 
연시 집안이 원래 그렇게까지 강했던 집안도 아니고 특히 연개소문은 어찌 됐건 사서에 남아 있는 기록들을 보면 굉장히 좀 이렇게 좀 비판도 많이 받는 연개소문이 굉장히 용력과 결단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저도 분명한 건 다수의 지지를 얻고 있었던 사람은 분명히 아니었다라는 거죠.

영기소의 영양을 몰아낼 때 영학만 죽인 것이 아니고 당시에 굉장히 높은 귀족들을 다 죽였거든요. 
수백에서 수십에서 수백을 죽였어요. 왕 하나 살짝 제거해서 더 강한 나라 만들자 이게 아니라 왕을 죽이면서 본인이 권력 잡으려고 대다수의 지배층을 죽여버리면 고대 사회는 귀족 사회인데 왕족도 힘이 없어지고 귀족도 힘이 없어져버리면 완전히 나라가 헐렁헐렁해질 수밖에 없잖아요. 
영국의 소문이 그런 행동을 해버리니까 고구려가 과거와 같은 왕실 중심의 단합된 사회로 운영이 못 되는 거죠.

이게 또 안시성주 문제로 가게 되는 건데 안시성은 독립된 성이었어요.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면 영기 소문이 먼저 영유왕과 귀족들을 제거했잖아요.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둘을 제거했으니까 그다음에 성주를 바꿔야 되잖아. 
일단 성주가 또 중요한 역할이니까 그때 안 바꾸고 버텼어. 
그러니까 이제 연계 수문이 군대를 보내서 안성을 공격하는데 다 막아. 
이런 아주 비정상적인 현상이라는 것이 이미 고구려 사회에서 연계 수문 당시에도 횡행했었던 상황인 거죠.

그리고 더 큰 문제가 뭐냐 염기성이 죽은 다음이 문제죠. 
아들이 3명이 있었는데 아들이 사이가 다 아파. 
첫째 아들 연남생이 둘째 아들 연남건한테 밀린 것 같아요. 
그래서 연남건이 대막리주의로 취임하면서 국가를 운영하니까 투항을 해요. 
당나라 쪽으로 연남생과 국내선 육성 및 1만 호가 투항했다고 나와요. 
국내선은 원래 고구려 수도잖아요.

근데 국내에 성이 투항을 하고 10만 호 10만 가구가 함께 투항을 했다는 거예요. 
사실상 만주에 대한 지배권 자체가 상실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리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도 전쟁 맞바지이기는 하지만 원산 일대 12개 성을 다스리고 있었거든요. 
신라에 투항을 했어요. 뭔 말인지 알겠죠? 누군가가 불법적으로 권력을 잡은 그 불안정한 상황이 나아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니까 진짜 이렇게 아장이 나기 시작하는 바스락바스락거리면서 무너지게 되는 거죠.

이런 상황이 되게 되고요. 그래서 이제 결국은 668년의 전쟁에서 고구려군 답지 않은 정말 처참한 패배가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서인기가 불과 3천의 군대를 이끌고 부여성을 공격하는데요. 
3천 명의 군대로 고구려 기병 일만을 상대로 승리를 거둡니다. 
성을 무너뜨렸던 건 아니고 성을 보호하고자 달려왔었던 부대를 무너트렸는데 달려왔었던 부대를 무너트리니까 성이 자진 투항을 해요. 
부여성이 자진 투항을 하니까 주변에 40여 개 성이 자진 투항을 해버려요.

빨라지죠 이게 너무 심각하니까 결국은 이제 당시 지배자였던 연남건이 부유성을 놓치면 정말 안 되거든요. 
그래서 병사 오만을 끌고 왔으나 이세적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만나서 오만 대군 중에 3만을 이어요. 
이때 진으로 거의 끝난 거죠. 그래서 결국은 이 승리 이후에 압록강변의 대행성을 점령하고 이미 또 압록강까지 온 거예요. 
그리고 완주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는

이게 전투에서 진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나라 안에서 모든 게 무너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던 거죠. 
그러고 나서 결국은 이제 신라군까지 참여해서 평양선 근처에서 치열한 전쟁 속에서 668년 고구려가 역사 속에서 안타깝지만 사라지게 되는 거죠. 
사회적 분열 정통성이 없는 권력 나라를 살리지 못하는 정책 고구려 같은 경우는 안타깝게도 그지 없는 그리고 예정된 결말을 향해 나갔다는 거죠.

과장된 자부심이라든지 영토에 대한 맹목적인 환상 자꾸 이런 걸로 우리가 고구려를 저는 소모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왜 고구려가 망했는가 그리고 왜 당나라가 이겼는가 왜 신라가 살아남았는가에 대해서 이면적 관점에서 우리가 좀 살펴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기 하나만 제가 꼭 덧붙여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게 뭐냐면 이렇게 졌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잘 알다시피 그 이후에 나당 전쟁에서 신라가 당나라테 이기잖아요. 
그리고 다래가 또 새롭게 세워지죠. 그것들을 우리가 고려해 본다라면

7세기에 벌어졌던 이 싸움을 통해서 기본적으로 우리 한반도 일대와 중국 일대가 밀접한 지역으로 기능할 수는 있지만 통합될 수는 없구나라는 것이 확정이 됐었던 지정학적으로 중요했었던 사건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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