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갑골문에 나타난 인신공양 과연 사실일까?

by 로이인랑 2023. 5. 24.
반응형

 상나라 시기의 각골문 발견은 청나라 광서 25년 그러니까 1899년 금석학자인 왕인영은 북경의 한 한약방에서 파는 용골에서 오래된 문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왕일영은 청나라 광서 6년에
진사 한림이 됩니다. 그리고 중국의 고대 문물에 대하여 깊이 있게 연구한 인물이었습니다.


당시에 왕인영은 이들 소위 용골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으며 은상시대의 유물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이에 갑골문이라는 용어는 왕영이 발견하면서 붙여졌던 것입니다. 


현재의 각골문은 대부분 언어에서 출토되었고
시간은 상나라 후기 그러니까 기원전 14세기에서 11세기 때인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당시 상나라 왕실은 점을 치기 위해 기갑과 수골의 문자를 새겼던 것입니다. 


이에 갑골문은 중원에서 발견된 고대 문자 중 시기가 가장 빠르고 체계가 완벽한 문자입니다.
이 갑골문은 아주 중요한 고대 자료입니다. 
동시에 비교적 완벽한 상나라 역사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담겨 있는 역사 코드는 아주 중요합니다. 
하여 사람을 산 채로 제사 지냈던 것입니다. 
즉 인신 공약을 한 기록이 각골문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역사 정보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이는 중원의 고대인들은 아주 미신적이었고 귀신을 숭상했고 조상을 섬겼던 것입니다. 
하여 사람을 희생물로 삼아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이 원시 종교 신앙에 따른 것입니다. 
하여 상나라 때 전복술이 아주 발달했고 무당의 지위가 아주 높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상황의 정치 참모였습니다.


앞으로 며칠 내에 비가 내릴지 아닐지, 또한 재난이 있을지 없을지, 그리고 농작물이 풍년일지 아닐지, 전쟁에서 승리를 할지 아닐지, 심지어 자식을 낳고 병이 들고 꿈을 꾸는 등의 일에 대하여도 모두 점을 쳤고 이는 신령의 의지와 일의 기륜, 화복을 알아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여
이 전복의 결과는 왕왕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상왕이 신으로 봤던 것은 자연신 이외에 가장 중요한 제사 대상은 그 자신이 이미 돌아가신 조상들이었습니다. 
하여 전복이 작고 사람 수는 많아서 대량의 사람들이 제사를 위하여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는 전쟁으로 인한 사망 이외에 또 하나의 비인도적인 사망 현상을 나타냈던 것입니다. 


하여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황에 의하여 산채로 제사를 지내졌던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1930년대부터 중국의 오기창, 동장빈, 우성우, 진몽과, 구석등 등
여러 중국의 고문자, 전문가와 고고학 전문가들이 갑골문에 대한 해독을 시작을 했으며, 통계를 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연구한 갑골문의 수량이 서로 다르고, 출토 시기와 차수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어느 학자도 확실한 숫자를 내놓지 못하고 있지만,
그저 그 숫자가 놀랄 정도로 많다는 것은 모두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중원 고대의 특수한 제사 풍섭이 있었는데, 그 제사를 지낼 때 사람을 제물로 하여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그 자리에서 산 사람을 죽입니다.
이는 은상 시대에 가장 성행을 했고, 가장 참혹했던 것입니다. 


하여 도대체 상황이 산 사람을 제사를 지내는 것은 어느 정도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여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이 구체적인 수치를 내놓으려고 노력한 바 있습니다. 
이는 중원에서 이미 사망한 갑골 학자이자 사학자인
호호부는 1974년에 그가 알고 있는 갑골문의 자료에 근거하여 이 제사로 살해된 사람 수를 통계를 낸 바 있습니다. 


호호부가 1974년 문물 잡지에 중국 노예 사회의 인순과 인재라는 거래소 통계에 따르면, 방경처는
상황 반경이 수도를 은으로 옮긴 것으로부터 재신 망국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연도에 대하여는 학설상 이견이 있지만, 총 8세 12명의 상나라 왕이 집권한 시기 동안 모두 1만 3천52명이 희생되었다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1145개 각골문 복사에는 인신 공양 숫자가 적혀 있지는 않지만, 하나당 1인으로 치더라도 그 제사의 희생으로 살해당한 사람의 수는 최소한 1만4197명에 이른다고 적었습니다.


따라서 호부의 통계로 계산을 해보면, 방경천 은에서 재신망국에 이르는 총 273년 동안 평균 매년 50명이 신령의 희생물이 되었고, 산채로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는 사실상 제사에서 살해된 숫자는 이것을 훨씬 초과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아마도 수배에서 수십 배 이상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호우부는 제사에서 살해된 인명의 수량이 약간 변화한다고 보고, 상나라 때의 인신 공양 제사를 4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이를 시기별로 살펴보면, 무정 기원전 1339년에서
1281년 시기, 총 58년간 9,021명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경 조각, 기원전 1280년과 1241년 시기, 39년간 622명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넘심 강정무을 문정, 기원전 1240년에서 1210년 시기 30년간 총 3205명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또한 재을 재신, 기원전 1209년과 기원전 1123년 시기, 총 83년간 104명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호흡부는 이 놀라운 숫자는 완전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부는 해외로 유실되고, 어떤 것은 아직도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내 각골문이 얼마나 되는지 대하여도 지금까지 완전하게 통계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여 만일 이들 갑골문에서 들어 있는 사람을 희생으로 삼은 경우 모조리 통계를 낸다면 그 숫자는 더욱 많아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각 골문을 연구하는 사람들 대상으로 삼은 숫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 통계를 통해 나오는 숫자도 서로 다르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상나라 시대 왕의 인신 공양 제사에 관한 통계 버전은 상대의 포로라는 글에서 나타납니다. 


이 글은 중국 고문자 학자인 여우소가 1964년에 쓴 글이고, 1979년 8월에 출판된
고문자 영구 제1집에 실렸습니다. 그리고 상나라 때의 인심 공약은 대부분이 전쟁 포로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여호수의 글에서 통계낸 각 골문의 총 편수는 688개였고 이에 여호수는 상황이 사용한 인명을 초기, 중기, 말기 세 시기로 나누었습니다.
초기에는 무정시기에 총 5,418명을 죽임을 당했고, 중기에는 조경에서 문정까지 1950명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말기에는 재을 재신 시기에 칠십오 명이 죽임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하여 서로 다른 버전의 통계 숫자를 보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감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사료를 보면 제을 재신의 집권 후반기에는 전쟁의 규모와 지속 기간이 초기 중기를 훨씬 넘어섭니다. 


따라서 전쟁에서 붙잡은 포로의 숫자도 훨씬 늘어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인신공양 제사의 수량은 계속 감소했을까라는 것입니다. 
이는 인류 사회 발전사의 약간의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이는 상나라 후기에는 생산력 수준이 이미 새로운 수준으로 늘어났던 것입니다. 


이는 이전에 전쟁 포로의 용도가 이미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는 인신 공양 제물에서
일하는 노예로 바뀐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신분 변화는 생산력 증가라는 인류 문명의 진보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다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살아있는 목숨이 상나라 식이 칼 아래 죽어 나갔는지는 각골문에 숨겨져 있던 또 하나의 비밀일 것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