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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왜 대마도는 일본땅이 되었는가? 대마도의 역사과정과 더불어 설명 드립니다.

by 로이인랑 2023.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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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오랜 기간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했습니다. 
지금 대마도가 일본 땅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기로 원래부터 대마도는 일본 땅이었을 거다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대마도는 조선에 속하지도 않았고 일본에도 속하지 않았고, 독자적인 국가로 굉장히 오랜 세월 동안 있었거든요. 
대마도 같은 경우에는
길이는 이 제주도와 비슷하거든요. 근데 면적은 절반밖에 되지 않아요. 


대마도보다 크기가 더 큰 제주도의 경우에는 이 한반도라는 강력한 영양권 안에 있었잖아요. 
다른 큰 영향권 안에 들지 않는 섬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주도라는 섬은 고려와 조선에 속할 수밖에 없었죠. 


반면 대마도는 어땠을까요? 물론 한반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것은 사실이에요. 
근데 그만큼 일본 열도에서도 큰 영향력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죠.
그렇기 때문에 조선, 일본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지거나 넘어가지 않고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었던 거죠. 
즉 힘의 균형이 맞춰져 있었다. 한쪽으로 완전히 넘어갈 만한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그 힘의 균형은 시기에 따라서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었던 것. 
그런 경우 대마도 같은 작은 섬은 한쪽으로 쉽게 넘어가 버리게 되는 거예요. 
지금 대마도가 어쨌든 일본 땅이니까 결론적으로만 보면
한반도보다는 일본에서 끼치는 영향력이 더 컸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죠. 


하지만 조선이 대마도를 실제로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존재했었거든요. 
특히 조선 전기의 상황이 그랬어요. 조선은 건국 초기에 수군에 굉장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거든요. 
고려 말 왜구에 당한 기억이 트라우마가 있어서 조선 수군을 압도적으로 유지하고자 했어요. 


과거에 조선의 병력이 이렇게 있으면 절반 가까이가 수군 병력으로만 채운 적도 있었거든요.
군선도 수백 척을 건조를 해요. 국책사업으로 병조선, 판옥선 같은 신형 함선을 계속해서 개발해서 건조합니다. 
조선이 독자 개발한 최첨단 신형 함선에 대한 이야기는 연관 영상을 한번 검색해보시면 좋을 것 같다. 


따라서 이 조선 초기에는 조선의 해군력이 굉장히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대마도에 끼치는 영향력에서 일본보다 훨씬 강했다. 
반면 일본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1467년부터 1590년까지 내전이 있었어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전국 시대가 계속된 거예요. 
일본 내부에서 치고받고, 지들끼리 죽고 죽이니까 해외로 눈을 돌릴 수가 없잖아요. 


분명히 이때는 조선은 강한 해군력을 갖고 있었고, 일본은 자기들끼리 치고 받고 있었다. 
힘의 균형추는 분명히 조선으로 쏠려 있었어요. 
근데도 왜 조선은 대마도를 먹지 못했을까? 조선 전기에 계속된 대마도 원정이 실제로 있었는데, 이걸 계속했다면 제주도처럼
대마도도 조선으로 편입할 수 있었을지 모르죠. 


그리고 만약에 대마도가 조선으로 편입됐다면 나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훨씬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한번 해보게 됩니다. 
일본이 사실 섬나라라서 배를 다루는 것이 굉장히 능숙하고 해군이 강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일본이 단일화된 연합된 형태의 해군, 일본군이라는 개념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나타나죠. 


그전까지
일본은 각 지역별로 따로따로 생존해 있었지 단일화된 국가로서의 해군이라는 개념이 희박했습니다. 
반면 조선 초기에 활발한 군사 활동을 벌이고 대마도 정벌을 한 것은 사실이잖아요. 


근데 조선 초기에는 그렇게 해군을 잘 키웠는데 조선 중기로 넘어가서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쯤 되면 조선의 수군역이 참담할 정도로 약화되죠. 
임진왜란 때 조선이 왜 이렇게 일본에 너무나도 쉽게 발렸는지에 관한 영상을 참조하실 수 있겠습니다.


물론 조선이 많은 폐단을 갖고 있었던 건 사실인데, 조선의 정책적인 면과 관련해서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조선 군대의 훈련은 주로 북방의 여진족 기마대화에 대비한 것이었죠.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이 이렇게 쭉 넘어오잖아요. 


그래서 미친 속도로 진군을 하잖아요. 
근데 선조는 아직까지 한성에서 도망을 치지 않았어요. 
왜 그러냐
방에 있는 여진족과 맞서는 최정의 군대가 아직 남아 있고, 얘네가 내려와서 외군을 다 혼내줄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죠. 


근데 이 믿었던 신립 장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완전히 깨지고 신립이 전사하고 말죠. 
신립이 완패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선조는 북쪽으로 그때서야 빤스를 하는 거예요. 
믿을 만한 군대가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하니까 선조가 그제서야 도망가는 거예요. 


물론 신립 장군의 패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죠. 
제대로 된 군사를 갖추지 못하고 급하게 싸웠다는 이야기도 있고. 
근데 그중에 가장 유력한 학설 중 한 가지는
신립 장군이 북방 여진 기마대와의 전쟁에 최적화된 전술을 들고 나왔다. 


반면 일본군의 주력군은 기마대가 아니라 조총을 든 보병이었다는 거죠. 
신립 장군이 북방에서 쓰던 전술을 그대로 옮겨와서 일본군에게 썼는데, 전혀 먹혀들지 않고 패배했다는 이유도 유력합니다. 
그러면 조선은 왜 그렇게 북방의 최정의 병력을 몰방했었는가 의문이 생기죠. 


바로 조선의 현실적인 주적이 북쪽의 여진족이었기 때문이에요. 
조선은 초기만 해도 북쪽의 여진족도 큰 위협이었고, 남쪽의 외구도 큰 위협이었잖아요.
근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점점 북쪽의 여진족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기 시작합니다. 


남쪽의 왜구는 가끔 튀어나오는 건달 정도라고 하면, 북쪽의 여진족은 항상 자리를 잡고 무서운 조폭인 거예요. 
그래서 조선 입장에서 여진족 문제는 중요했다. 
조선 초기에는 적극적인 팽창 정책으로 4군 6진을 개척해서 조선 초기의 국경을 확립하는 일도 하자.
근데 문제는 조선의 국방력이 지나치게 북쪽으로 과잉 투입되었다는 거예요. 


기록에 보면 조선 전기에만 13회의 대규모 여진족 정벌에 나섭니다. 
대마도는 그만큼 정벌에 힘쓰지 않았어요. 
조선의 국력을 기울인 대규모 정벌을 그만큼 했다는 것은 당연히 남쪽에 대한 소홀함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죠. 


왜 그러면 조선은 그렇게 나라를 기울여서 너무나도 많은 여진족을 정벌했을까요? 바로 문제는 명나라가 그걸 원했기 때문이죠.
명나라 입장에서는 북쪽의 기마민족들이 눈예가이잖아요. 
명나라뿐만 아니라 역대 모든 중국 왕조를 다 틀어봐도 북쪽의 유목민족이 주적인 거예요. 


과거 금나라, 요나라의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북방 유목민족이 한 번 나라를 일으키고 크게 세력을 확장하면 중원 국가는 큰 위협에 시달릴 수밖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항상 끊임없이 유목민족을 견제해야 되고, 거기서 조선을 끌어들여서
자기들이 편하려고 한 거예요. 그리고 명나라가 조선을 끌어들인 이유가 또 있습니다. 


바로 우선 전기의 상황을 보면 되는데, 여진족 거주지에 설치된 위가 184개가 있었거든요. 
이 위라는 건 지금으로 따지면 한 시군 정도의 행정 단위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여진족이 184개 시 흩어져서 살았다 보시면 됩니다. 


주된 근거지는 만주 쪽이었죠. 근데 우리가 생각하기로 여진족은 명나라에 충성을 바쳤을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기 쉽죠 실제 사실이에요.
근데 여진족이 일방적으로 명나라만 섬긴 것이 아니에요. 
184개 위가 있는데, 이 중에 79개 위는 조선에게도 조공을 바치고 충성 맹세를 했던 부족이에요. 


어떤 부족은 명나라에 충성을 바치는 부족도 있었고, 어떤 부족은 조선에게 충성을 바치는 부족도 있었고, 떤 부족 같은 경우에는 명나라에도 조공하고 조선에도 조공하면서 양쪽에 양다리를 걸치면서 눈치를 보는 부족들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여진족과 조선의 관계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무조건 적대적인 그런 관계가 아니었던 거예요.


국경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긴장 관계는 맞죠. 
하지만 유사시는 군사력을 동원하지만 평상시에는 교류하고 무역하고 평화롭게 지내는 날이 실제로는 더 많았겠죠. 
따라서 이 명나라는 조선이 여진족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거예요. 


즉 조선과 여진이 혹시나 힘을 합치면 골치가 아파지는 거예요. 
자기네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조선과 여진족을 어떻게 갈라놓는 전략을 써야겠다 조선이 계속해서 여진족을 알아서 견제해주면 오랑캐인 조선과 여진족이 지들끼리 싸우면서 힘이 빠지잖아요. 


명나라 입장에서는 주변국들을 컨트롤 하기가 더 쉬워지겠죠. 
전형적인 이제의 전략이 물론 명나라만 아니었어도 여진족을 정벌할 수 있었겠죠. 
하지만 명나라의 과한 요구가 아니었다면 조선이 군사력을 그렇게 갉아 먹으면서까지 여진족 정벌에 목숨을 걸지 않았을 거예요.


일례로 태종 4년에 어떤 이야기가 있냐면 명나라가 말 1만 피를 보내라 이런 요구를 한 적이 있어요. 
물론 말 값을 지불하는 형식이지 그냥 삥 뜯는 건 아니에요. 
말은 어떤 의미가 있었냐 굉장히 중요한 군수 물자였다는 거죠. 
지금 돌격하는 탱크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말이잖아요. 


이런 방식으로 조선 전기에만
중요한 군수 물자인 말이 명나라로 계속해서 흘러 들어가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명나라는 계속해서 군수물자를 요구하고, 한쪽으로는 계속해서 여진족을 정벌하고자 합니다. 
계속 조선을 통제하는 방식을 택하는 거예요.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너무 중요시한 나무지 남쪽으로는 상대적으로 소홀해질 수밖에 없죠. 
듣다 보면 답답하잖아요. 조선이 왜 이렇게 명나라에 질질 끌려다녔을까
뭔가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이렇게 결정하면 안 되나 왜 이렇게 대책 없이 끌려다녔을까요? 바로 애초 조선 왕조의 정통성이 명나라에서 나왔기 때문이에요. 


이성계가 내부의 치열한 권력 다툼을 이겨내고 조선이란 나라를 세웠잖아요. 
역성혁명이라 아직까지 내부가 안정이 안 된 거예요. 
고려로 복귀하기를 원하는 복귀주의자들이 아직도 판을 치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자신의 권력에 대한 명분이 필요했잖아요. 


그래서 삼국이었던 명나라에 그것을 공인해주세요라고 부탁을 한 거예요. 
명나라가 국제적으로 공인을 해주면 자신의 명분이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는 셈이죠. 
그래서 태조 이성계가 직위하자마자 명나라에게 사신을 보내서 조공을 바치고 나라 이름도 정해달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명태조 주원장이 이성계에게 사신을 보내서 그래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해라라고 정해주고 조선 왕의 인장도 주고 조선왕으로 승인해준 거죠.
사신이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과정에서 명태조 주원장이 고장을 엄청나게 발광을 하는 적이 있어요. 
이것도 관련 영상이 있으니까 참조해 보세요. 


조선은 태생부터 명나라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게다가 태조 이성계가 여진족 출신이 아니냐 이런 의심을 실제로 받았어요. 
이성계가 털이 많다 이런 이유로 신체적인 이유로 귀화한 여진족이 아니냐 이런 학설도 실제로 있습니다.


그래서 이성기 시절부터 자기는 여진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더 강하게 여진족을 몰아붙여야 했고, 명나라에 질질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죠. 
그 틈을 타서 대마도는 온전하게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었던 거예요. 


지금까지 내용을 한번 정리해볼까요? 조선 전기에는 조선은 일본보다 훨씬 우수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일본은 100년 가까운 내전으로 굉장히 혼란에 빠져 있었죠.
그런 조선 초기에 대마도 정보를 계속한다면 대마도를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그런 우수한 해군력을 낭비하였다. 


둘째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조선은 남쪽 바다로 진출을 하기보다는 이 북쪽의 여진족에 지나치게 국력을 소모하게 되었다. 
여진족에 지나치게 집착한 것은 명나라의 지나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 요구를 적절하게 끊어내는 데 실패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은 결국 대마도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버렸고,
결국 일본이 대마도를 차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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