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정조가 능지처참을 한 구선복 그는 누구인가?

by 로이인랑 2023. 5. 12.
반응형


1786년 정조가 국왕으로 등극한 지 10년이 되는 해 한 인물이 능지처참을 당합니다. 
그 극단적인 형벌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정조시대 군권을 장악한 무종이라 불린 구선복이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무예 실력을 지니고 있고 무인들에게 추앙을 받을지라도 무종이란 표현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종이란 국왕에게만 사용되는 표현이기에 어느 누구도 종이란 표현은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개 무관인 그에게 무종이란 단어를 사용했고 그가 스스로 무종임을 자랑하고 다녔으니 이는 국왕에게 대역 불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를 비롯하여 조정의 관료들이 아무도 그를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집안이 오랫동안 무방 가문들의 우두머리로서 역할을 했고 그를 따르는 무사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능성구씨는 무인 세력의 명가로 영조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 권력의 핵심에서 가문의 세를 떨쳤습니다.
인조반정 이후 도성을 중심으로 중앙 5군영이 만들어졌는데 인조는 자신을 국왕으로 만들어준 서인 세력들에게 각 군영의 대장을 그들 스스로 임명할 수 있게 한 특권을 주었고 그들은 지속적으로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인물을 군영 대장으로 임명하였기에
군부 세력을 등에 업은 기득권 서인 세력들은 정조 시대까지 권력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때문에 구선복은 이런 군부세력을 바탕으로 무종이란 칭으로 불리며 조선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국왕에게 대항할 수 있었습니다.
1718년 태어난 구선복은 1738년 식년과 생원시의 3등으로 합격 생원이 되었고 그 뒤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습니다. 
1741년 형조참판 겸 오이도 총부 부총관을 거쳐 황해도 수군 절도사가 되고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1752년 이모 화변으로 사도세자가 나무 뒤주에 갇히자 포도대장으로서 뒤주를 감시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때 그는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뒤주 옆에서 술과 떡을 먹으며 사도 세자를 능멸하고 조롱했다고 합니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뒤주를 직접 마련하였고 뒤주에 들어가는 사도세자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고 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린 새손이었던 정조는 이 모습을 보고 장차 자신이 왕이 되면 반드시 구성복을 처단하리라 다짐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조는 세손 시절만이 아니라 국왕이 되어서도 그를 단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면 그들이 노론 세력들과 연대하여 국왕을 제거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792년 윤4월 27일자 정조실록의 기록은 정조가 그동안 얼마나 구선복을 증오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정조는 역적 구선복으로 말하자면 홍인남보다 더 심하여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 먹는다는 것도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말에 속한다 매번 경연에 오를 때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병권을 손수 쥐고 있고 그 무리들이 많아서 갑자기 처치할 수 없었으므로 4년간 괴로움을 참고 있다가 끝내 사단으로 인하여 법을 적용하였다라고 분노를 표출하였습니다. 
이는 정조가 그동안 극도의 인내로 복수의 칼을 품고 있었음을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1776년 정조는 주위 직후 노론 벽파의 영수 홍인남과 정우겸을 처단했지만 막상 구선복은 차단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구 씨 일가가 무시무시한 병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선복은 1757년 총융사로서 최초의 군영대장에 오른 이후 1765년에 마침내 훈련대장에 올랐고
그는 종영이었던 구선행과 번갈아가며 병권을 잡아 무반 벌렬 가문으로서의 위세를 보여주었습니다. 


구선복의 뒷배경도 막강했으니 이때부터 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 출신이기도 했지만 특히 정조 즉위 초 영의정을 역임한 소론의 거두이자 화아농주와 인척지간인 김상철과 사돈지간이었습니다.
김상철은 소론임에도 노론 벽파인 정우겸 김기주 홍인남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구선복도 이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갔기에 정조는 즉위하고도 10여 년간은 강력한 그의 힘을 꺾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구선복은 훈련도감에서 궁중으로 파견한 하리들을 통해 조정 대소사를 일일이 보고받았을 뿐 아니라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 홍 씨의 오라버니 좌의정 홍락선을 빈현에서 업신 여길 정도로 위세를 떨었습니다. 


그래서 정조는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선복 일당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조가 즉위한 후에도 대부분의 무장들은 그를 무종이라 받들 정도로 그는 강력한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10년 동안은 어쩔 수 없이 그를 훈련대장으로 맡게 하였으니 홍구경이 맡은 3년의 기간을 뺀 7년간은 구선복이 훈련 대장을 맡게 됩니다.


정조는 와신상담하며 천천히 기회를 만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즉위호 정조는 자신이 임명하는 병조판서를 통해 군권을 통제하려 했습니다.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병조 판사는 훈련도감과 금미영 어영청 등의 제조를 겸한 군권의 핵심 관리였습니다.
그러나 당대 병조의 인사권은 제한적이었으니 휘하 각 군영에서 단지 한 사람의 후보자만 추천해서 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냥 우리가 알아서 한 사람 추천하니 병조 판사는 도장만 찍으라는 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종조는 해당 군영에서 후보 한 명이 아닌 3명을 추천하라고 명합니다.
후보 3명 중 1명을 낙점하면 그래도 병조 판사가 적임자를 거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각 군영의 대장이 이미 노론과 연계된 무관들이 독점한 상황에서 제도 개선만으로 해결하기는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드디어 정조에게 기회가 왔으니 도승지 홍구경이 그 빌미를 제공합니다.
정조 초반 홍구경은 자신의 누이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이기도 하면서 엄청난 권세를 부렸습니다. 


그런데 원빈이 후사 없이 일찍 죽어버리자 홍구경은 정조의 조카인 상계군 담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장차 왕이 될 세자로 삼으려 했고
홍구경은 이 일로 정조의 미움을 사 축출되었습니다. 
한편 그런 일이 있은 후 정조와 의빈성씨 사이에 무녀 세자가 태어납니다. 


당시 의비는 후궁이 아닌 궁녀였기 때문에 정조는 문요 제자를 원자로 정하기를 주저했으나
소론의 역으로 결국 생후 3개월 만에 원자로 삼습니다. 
1784년 7월 정조는 태어난 지 만 22개월짜리 원자를 세자로 책봉했으니 이는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세자 책봉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왕세자로 책봉됐던 문요 세자가
5살 되던 해인 1786년 6월 6일 홍역으로 죽어버렸고 설상가상으로 의빈성 씨도 같은 해 9월 출산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의빈성 씨의 죽음을 두고 조정에서는 홍구경이 상계군 다의 일파와 짜고 그녀를 독살했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상계군을 공석이 된 세자 자리에 앉히려는 역모가 있다는 것입니다. 
상계군은 은원군 인의 아들로 은원군은 영조의 손자이자 사조 제자의 서장자이며 정조의 이복 동생이었습니다.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는 이 의혹을 공식화하는 엄문정교까지 내리며 반드시 역적을 찾아내어 처단해야 한다며 정조를 압박했습니다. 
실제 정순왕후의 학교는 은원군을 노린 것으로 정조의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동생인 은원군을 역적으로 몰아 제거할 작전이었습니다.


그래야만 혹 정조가 후손을 낳지 못할 때 자신들이 마음대로 왕의 자리를 정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나의 처지는 다른 사람과 다른데 지금 만약 또 서재 하나를 보존치 못한다면이라고 사정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은원군의 목숨은 졸지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렸으니
그러나 이때 예기치 못한 변수가 발생하면서 정국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정조는 이 사건을 통해 구선복 일가를 제거하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으니 어수선한 상황에서 의심의 핵심에 있던 상계군 담이 갑자기 죽어버렸고
이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가진 상개군의 외할아버지인 송낙규가 상복을 입고 대궐에 들어와 고변했던 것입니다. 


다음이 살았을 때 김정승이 살면 나도 살 것이고 김정승이 죽으면 나도 죽을 것이라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구위겸이 황해 병사로 있을 때 후한 선물을 바치고 편지의 자신을 소인이라고 지칭한 것을 일찍이 목격했습니다.
다은 평소에 병이 없었는데 김정승에 대해 말한 며칠 후 갑자기 죽었으니 의심스럽습니다. 


김정승은 영의정까지 지낸 영중추부사 김상철을 뜻하는데 노론이 경악한 것은 그보다 구위겸이 상계군과 결탁했다는 고변 때문이었습니다. 
즉 상계군이 죽기 전에 자신에게 고백을 한 게 있었는데 그 내용은 구선복 구명겸 등이 짜고 상계군을 세자로 앉히려는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김상철은 구선복의 사돈이었고 구이겸은 구선복의 양아들이었습니다. 
급기야 역모죄를 수사하기 위한 추국청이 설치되고 중심 인물인 구선복이 오게 됩니다. 
구선복은 처음에는 자신을 몰아내려는 음모라며 결백을 주장하다가 장어회와 돼지하자 결국에는 다음과 같이 승복을 합니다.


저는 모년 이후 용납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항상 의구심과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라고 자백했는데 모녀는 사도세자가 죽은 이모 화변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원제가 끝내 자신의 발목을 잡은 것이었습니다. 
구선복은 작년에 홍보경의 문양의 역모 사건에도 깊숙이 관련됐음을 시인하였으니
을사연봉 3도에서 군사를 일으킬 때 안에서 호응할 대장은 저의 조카 구명겸이었는데 이번 역모를 할 때 제가 시임 대장으로 스스로 주관해 반성한다고 일컬었습니다. 


라며 정조를 죽이고 상계군 담을 국왕으로 추대하는 반정을 추진하다 그만두었다고 실토하게 됩니다.
1786년 12월 9일 결국 정조는 구선복을 최고의 형별인 능지처사에 처하게 됩니다. 
구명겸에 대해서는 남문 밖에 삼군을 크게 모아놓고 조리를 돌린 뒤에 목을 베어 매달아 효수하였고 구이겸은 그 다음 해인 1787년 1월 9일 의금부 도사를 과천연에 보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습니다.


연자인에 대한 처벌도 있었으니 1787년 1월 15일 구명겸의 가족과 처첩들은 전부 노비가 되어 전국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정조는 국왕을 음해하려던 반정의 기운이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신하들에게 토로하면서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정조는 병호년에 이르러서야 국법에 의해 차단되었는데 시신을 저자에 버리는 형벌이 어찌 이 역적에게 법을 충분히 적용했다고 하겠는가
사실은 살점을 씹어 먹고 가죽을 벗겨 깔고 자도 시원치 않았다며 구선복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내었습니다. 


또 재위 16년 5월에 다시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역적 구선복의 일은 그의 극도로 흉악함을 어찌 하루라도 용서할 수 있겠는가만은
그 스스로 천주를 범하기를 기다린 연후에 죽였던 것이다고 전하였으니 부친을 죽음으로 본 인물이지만 사사로운 감정으로 처벌하지 않고 스스로 법망에 걸린 후 처벌했다는 뜻이었습니다. 


결국 정순왕호가 정조의 동생 은언군을 죽이기 위해 시작된 엄문정교 사건은 구선복 일가를 몰락시키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노론이 밀고 있던 정수나무 측은 군부 한 축이 무너지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대반전으로 병권을 완전히 장악한 정조는 오군영의 대표인 훈련 도감을 약화시키고 1785년에 출범시킨 장용일을 더욱 확대하여 1788년 새로운 친의 군영인 장용영 창설을 추진하게 되었으니
이는 훗날 5천여 명이 넘는 대부대로 발돋움하며 왕권 강화에 기여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