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지중해를 호수로 삼으며 유럽을 호령했던 이 나라는 유럽 문화의 뿌리 격이자 현대에까지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 나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오늘은 이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를 알아보며 로마의 역사를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기원전 753년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 티베리스 강을 따라 작은 나라 로마가 건국됩니다.
늑대 젖을 먹고 자라던 로물루스가 건국했다고 전해지는 이 나라는 처음에는 매우 작은 나라였습니다.
사실상 처음엔 나라가 아니라 촌락이라고 해야 될 정도였으니 말이죠.
하지만 훗날 이 나라는 거대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초기 로마는 왕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때를 로마 칠왕식이라 하여 전투를 잘하는 이들이 권력 투쟁을 통해 왕위에 올랐죠.
하지만 이 왕들은 너무 권력을 남용하는 바람에 점점 민심을
잃었고 그 틈에 귀족들이 세력을 형성 왕을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이 귀족 세력을 원로원이라고 하죠. 그리고 마침내 왕권이 매우 약화되자 원로원 귀족들은 왕정을 몰락시키고 로마에는 공화정이 세워집니다.
로마 공화국의 시작이었죠. 이 공화정 때 로마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기
시작합니다. 로마 공화국은 영토 확장 정책을 펼쳐 중부와 남부 이탈리아를 정복해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한 것이었죠.
훗날 로마 제국의 초석이 되는 아주 중요한 정복 사업이었는데 하지만 이 업적은 비슷한 시기 우리에게도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이 역대급 영토 확장을 하는 바람에 당시에는 존재감이 묻히기는 했습니다.
그래도 로마는 꾸역꾸역 확장에 가다가 마침내 지중해의 요충지인 시칠리아 섬까지 그 세력을 뻗치려 했죠.
하지만 이때 로마는 강적을 만납니다.
당시 시칠리아의 영향력을 행사 중이던 카르타고가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둘은
시비가 붙은 것이었죠. 그래서 이탈리아의 로마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이 둘은 시칠리아 섬과 지중해 재해권을 두고 세 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르게 되죠.
바로 포에니 전쟁이었습니다. 기원전 26 94년에 벌어진 1차 포에니 전쟁은 접전 끝에 로마의 승리로 끝이 났죠.
로마는 그간 정복 전쟁으로 다져진 풍부한 전쟁 경험과 귀족들의 지원으로 아이가테스 해전에서
최종적으로 카르타고를 격파했던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로마는 카르타고로부터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획득 시칠리아는 로마인 소아귀에 들어가죠.
하지만 당시 나름 강국이었던 카르타고는 때아닌 패전에 몹시 자존심이 상해했고 복수를 꿈꿔왔죠 결국 카르타고는 20여 년 뒤 2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키는데 이테카르타고에는 한니발이라는 뛰어난 명장이
등장했고 그는 대담하게도 아예 로마 본토로 쳐들어 갑니다.
이때 아니발은 수만 병력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는 허를 찌르는 전술을 펼쳤고 그는 당황한 로마를 손 쉽게 격파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가 로마 본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죠 이때 로마는 이발의 천재적인 군사력에 탈탈 털려서 무려 50만 명이나 되는 피해를 봤습니다.
하지만 이런 위기에서 로마의 단결력이
빛을 발했죠온 로마는 똘똘 뭉쳐 카르타고에 저항했고 오히려 구역구역 아프리카의 별동대를 파견해 카르타고 본토에 역습을 가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신의 한수에 한니발은 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아프리카에서 자마 전투라는 최후의 결전을 벌였는데 이때 로마에는 명장 피오가 나타나 뛰어난 전술로 하니발을 격퇴함으로써 카르타고는 결국 항복 또다시 배상금을 물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둘의 균형 로마의 개로 기울었고 50여 년 뒤 로마는 카르타고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3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키는데 여기서 카르타고는 무기를 로마에 모두 압수당했음에도 맨몸으로 저항하며 무려 3년이나 버텨냈으나 결국 기원전 146년 패배함으로써 카르타고는 멸망하고 그 땅은 아프리카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죠.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로마의 폭발적인 성장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을 겪으며 로마의 전투능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했고 그 기세를 몰아 로마는 알렉산더 대왕의 후예들인 헬레니즘 왕국들을 공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왕조를 격파하고 그리스를 차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알렉산더의 아성마저 뛰어넘은 로마는 점점 팽창 결국 기원전 2세기 로마는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북아프리카 일부를 아우르는 대국으로 변모했죠.
이렇게 성장한 로마 영토만 따지면 당대 최강의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장하는 과정에서 로마에는 어두운 면 역시 생기게 됩니다.
급격한 정복은 사회에 문제를 끼치게 된 것이었죠.
전쟁이 계속되면서 땅은 넓어지고 전투에서 잡은 노예들이 늘어났는데 돈 많은 귀족들이 이때 재빨리 움직여 땅을 엄청나게 사들이고 거기에 노예들을 부리면서 거대한 농장을 경영했죠.
이를 푼디움이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귀족들이 땅을 독차지하고 평민 자영농들은 밀려나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귀족과 평민 사이에 빈부 격차가 커졌고 사회에는 불만이 팽배해져 갔죠.
이때 정치도 귀족과 평민으로 갈라져 서로 대립하게 되었는데 결국 먼저 평민파의 불만이 폭발하여 현 상황의 개혁을 요구 기원전 13 94년부터 평민파인 그라쿠스 형제가 나타나 귀족의 토지 보유를 제한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원론 귀족들은 이에 극렬하게 반발했고 오히려 월권 행위를 하여 그라쿠스 형제를 암살 개혁은 수포로 돌아갔죠.
이로써 귀족파 원로원은 더더욱 권력의 독점 빈부 격차는 심각해져만 갔습니다.
결국 불만은 쌓여갔고 이 상황 속에서 노예마저 반란을 일으켜 기원전 111년 노예 검투사들의 대반란인 스파르타쿠스의 항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진압당하고 반란 주동자들은
십자가 영어로 공개 처형되죠 이런 혼란 속에서 평민파의 귀족파에 대한 반감은 점점 커져갔는데 이때 혜성같이 등장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였죠. 그는 파의 대표로 공을 세워서 영국 브리타니아 지역과 프랑스 갈리아 지역을 점령 평림파에게 힘을 보태주었는데 이제 기원전 19년 그는 임기를 마치고 개선장군이 되어 다시 로마로 돌아올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는 평민들에게 엄청난 명성을 얻은 상태였죠.
이에 원론
귀족들은 그를 극도로 경계하며 음모를 꾸몄습니다.
귀족들은 돌아오는 카이사르에게 군사 지휘권을 반납하고 민간인 신분 될 것을 요구했던 것이었죠.
민간인이 되는 즉시 카이사르를 암살시켜 버릴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귀족들보다 한 수 위였죠.
그는 고민을 하다가 어차피 요구를 따르면 죽으니 그의 군사를 이끌고 귀족들에게 쳐들어가서 자신이 권력을 잡기로 결심한 것
그래서 그는 반란을 결정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 시내로 진격했죠.
이때 카이사르가 외친 말이 바로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입니다.
이에 족들은 당황 부랴부랴 귀족파의 수장 폼페이우스를 중심으로 응전하는데 카이사르는 뛰어난 군사 재능으로 차례로 귀족파 군대를 연파했고 마침내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격파하고 귀족들을 몰아내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패배한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을 갔으나 이집트에 도착하자마자 앙심을 품은 옛 부하에 의해 암살당해서 최후를 맞았죠.
한편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이집트로 왔는데 여기 와서 뜻밖에도 그 유명한 이집트 여왕 클레오 파트라를 만나 사랑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수는 제거되었고 로마는 이로써 카이사르의 1인 지배 체제가 되었습니다.
독재관이 된 카이사르는 각종 개혁을 통해 점점 인기를 얻어갔죠.
로는 그의 치세 아래 발전해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해도 역시 반대판은 생기기 마련이었습니다.
카이사르가 차츰 자신의 임기를 늘려가고 사실상 황제처럼 군림하자 로마 내에서는 황제 체제에 반대하는 공화파 인물들이 반감을 품게 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기원전 14년 카이사르는 그들에 의해 암살됐죠 암살자들 가운데에는 카이사르가 믿던 정치인
브루투스도 포함되어 있어서 카이사르가 이때 브루투스 너마저 라고 말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죠 카이사르가 죽고 나서 로마는 세파로 나뉘어졌습니다.
바로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그리고 옥타비아 누스였죠.
각각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자처하던 그들은 일단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셋이서 로마를 다 스리자고 하며 연합해 삼두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랬지만 당연히 그들은 속으로
자기가 로마를 차지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결국 셋 사이에는 내전이 발발하죠.
이 중 는 꼼수를 부렸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걸려 일찌감치 리타이어했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우스가 격전을 벌였는데 원래는 토니우스가 병력도 더 많고 전투력도 강해서 매우 유리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죠 동쪽 땅을 차지했던 안토니우스는 가까운
이집트에서 자주 머물렀는데 거기서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그도 카이사르처럼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었습니다.
결국 콩깍지가 시인 안토니우스는 쓸개까지 내줄 기세로 클레오파트라의 말만 따랐고 마침내는 클레오파트라가 있는 이 집 쪽으로 자신의 본거지를 옮기려고까지 했는데 이때 옮겨가던 도중 갑자기 나타난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와 싸움이 붙어해전이 벌어졌고 여기서 당황한 안토니우스는 참패하여 옥타비아누스가 승리 카이사르의 양자였던 그가 권력 다툼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되었죠.
이로써 로마는 다시 하나로 묶였고 유일무이한 최고 권력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으로부터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부여받습니다.
거의 황제급의 칭호인데 물론
형식적으로는 공화정을 유지하느라 황제라는 말을 쓰진 않았지만 어차피 그와 다름없는 권력을 쥐게 되어 그는 로마 제국 초대 황제로 통하죠.
이 시기부터 사실상 로마 공화정은 식되었고 황제가 다스리는 재정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사후 황족들이 황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이런 세습 군주의 특성상 이상한 황제가 나올 확률도 많아서 이후 로마에는 3대 황제 칼리굴라와 5대 황제 네로 같은
희대의 폭군이 황제에 오르기도 했으나 다행히도 그 다음에 오현재라 불리는 5명의 현명한 황제가 통치하면서 로마는 약 100년간 최전성기를 누리게 되죠.
이때를 팍스 로마나라고 부르다 이때는 영토 확장 역시 활발했어서 특히 오현재 중 트라이아누스 황제 때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브리타니아 남부까지 로마는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죠.
그렇게 당시 유럽 천하를 지배하며 전성기를 맞던 로마 제국 하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지나가기 마련이었습니다.
오현제 시대가 지나가자 암흑기가 시작되어 또다시 폭군이 나오기 시작 17대 황제인 코모두스를 시작으로 로마는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콤모두스는 어린 나이에 암살의 위협을 겪으면서 과대망상 정신 분열을 앓던 황제였고 정세를 내팽게 치고 유흥과 활락에 빠져서 했습니다.
때문에 로마는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횡행했는데 결국 참다못한
신하들에 의해 콧모두스는 암살되었으나 이 이후로 로마는 혼란기에 접어들었죠.
그렇게 나라는 점차 어지러워지고 그렇게 될 때 항상 나오는 세력 군인의 세력이 늘어나기 시작했죠.
그 결과 기원 후 3세기에 들어서자 로마는 군인들이 서로 죽고 죽이며 황제를 차지해 50년 동안 25명의 황제가 바뀌는 혼란상이 이어졌습니다.
이를 군인 황제 시대라고 하죠. 여기에 외부적으로 게르만족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략까지 더해져 로마는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었죠.
경제력 또한 나날이 악화되었습니다. 하지만 3세기 말이 되자 다행히도 로마는 다시 중심이 잡힙니다.
디오클레티아노스라는 황제가 나타나 군인 황제 시대를 종식 유일무이한 단독 황제가 된 것이었죠.
군인 황제 시대의 대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로마 개혁 작업에 나섰고 어지러워진 로마를 나름 잘 정리했다고 평가받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고 다음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즉위했는데 이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로마 제국은 중흥기를 누리죠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작업을 완성했고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여 대제의 칭호를 얻었으며 또한 쇠락해 가던 수도 로마를 버리고 행정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겨 그 이름을 콘스탄티노플이라고 하기도 했죠.
이렇게 로마는 콘스탄티누스 30여 년간 다시
위세를 떨쳤죠.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도 결국 세상을 떠났고 그가 죽자 구심점을 잃은 로마는 또다시 세계로 분열되었던 것이었죠.
여기서부터 슬슬 로마 제국은 힘을 잃어갑니다.
우선 왜적의 위협이 거세어졌죠. 4세기부터 200년에 걸쳐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되면서 게르만족들이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로마 쪽으로 계속해서 침략해 왔고 로마는 이를 막아야 했던 것이었다.
또한 제국이 쇠퇴하면서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황제가 로마를 통치하기 시작 점점 로마는 분열되어 갔고 점점 대제국을 유지할 능력은 떨어지게 되었죠.
그러다가 기원 후 395년 결국 일이 터지고 맙니다.
50대 황제인 테오도시우스가 죽은 뒤 로마 제국은 동로마와 서로마로 쪼개진 것이
테오도시우스가 죽기 전 두 아들에게 동로마의 동방 황제 서로마의 서방 황제를 나눠서 맡겼습니다.
물론 이 초반에는 로마가 완전히 분열되지는 않아서 처음에는 동서 로마가 서로 정책도 공동으로 발표하는 등 아직 관계가 끈끈했었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따로따로 정책을 시행하기 결국은 동서로 최종 분할되게 됩니다.
당연히 분열된 제국은 예전만큼의 힘을
수 없었고 몰락은 시작되는데 이 중 서로마가 먼저 쇠퇴를 맞습니다.
사실 서로마가 동로마보다 불리했던 게 동로마가 이집트 같은 알토란 땅을 가져갔고 서로만은 나머지 매우 척박한 땅만을 갖고 나뉘어졌기 때문이었죠.
따라서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약 무엇보다 서로마에는 위협적인 게르만족이 속속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서로마에는 연달아서 무능한 황제가 즉위하는 상황 결국 약해지는 서로마에는 게르만 족이 점점 스며들어 서로마의 각종 요직을 장악했고 마침내 서기 470 16년 게르만족 출신 장군인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서로마는 종말을 고했죠.
서로마 멸망 당시 황제가 로물루스 황제였는데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와 이름이 같다는 점은 역사의 묘한 일치이죠.
그런데 서로마가 멸망했어도 알토란 땅을 다 떼어 받은 동로마는 계속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동로마는 오히려 기원후 527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등장하며 중흥기를 누렸죠.
이때 동로마를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하는데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가 된 유스티니아누스는 옛 서로마의 영토를 재정복하는 고토 회복 전쟁에 들어갑니다.
그는 로마 제국 최강의 명장으로 평가받는 벨리사리우스를 시켜 엄청난 수의 게르만 족들을 무찌르고 반달 왕국을 멸망시켰으며 이탈리아 반도까지 탈환하는
기염을 토했죠. 이로써 서로마 제국의 영토 상당수를 유스티니아누스는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막판에 문제가 터졌죠. 당시에 로마 판 판데믹 사태가 터져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흑사병이 퍼진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스티니아누스 자신도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겨우 살았고 피해로 인한 인적 재정적 손실이 커지게 되죠.
결국 기껏 정복한 영토를 유지할 능력이 저하되었고 곧 랑고바르드 족에 의해 이탈리아 반도를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는 565년 사망했는데 이제 제국의 기운이 다했는지 더 이상 그만큼의 명분이 나타났다 못합니다.
후임 황제들은 줄줄이 능력이 부족했고 결국 점령지 상당수를 이뤘으며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오랜 전쟁으로 재정은 손실되어만 갔습니다.
또한 동서로 이슬람 세력 등 여러 종족들의 침입이 계속되는 상황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는 급속히 줄어들었고 결국 최후에는 콘스탄티노플만 영토로 남게 되었는데 1453년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제국이 20차례에 걸친 공격 끝에 콘스탄티노프를 함락시킴으로써 비잔티움 제국도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이로써 로마 제국은
사라졌죠. 하지만 로마 제국의 존재감은 매우 컸어서 나중에는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로마를 칭하는 국가가 나타나 800여 년간 존속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로마를 잊지 못하고 너도 나도 로마의 독수리 문장을 자국 문장으로 사용했죠.
엄청난 세월을 지속하면서 현재에까지 존재감을 남긴 로마 제국은 지금까지도 모든 길은 로마로 라는 말과 함께 우리에게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산 초당 출판사에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사라는 책을 토대로 스토리를 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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