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지금의 평양시 만경대인 평안남도 대동군 고편면에서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김일성의 원래 이름은 김일성이 아니었죠.
성주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왜 이름을 바꾸었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꽤 분분했는데 김일성 자서전에 왜 바꾸었는지
나오긴 하죠. 그런데 김일성의 자서전은 믿을 게 못 됩니다.
김일성 자서전은 사실상 판타지 소설이죠.
그래서 김일성의 인생은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오늘 영상에서 풀 이야기들은 비교적 증거들이 있는 부분, 확인된 부분들만 푼 것이죠.
cia의 기밀 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고등학교 시절 돈을 훔치 살해하면서 이름을 바꾸었다고 나옵니다.
항일 운동을 하던 김일성이라는 장군이 실존했는데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고 김일성이 그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죠. 김일성이 제일 잘하던 게 남의 공을 가로채는 것이었거든요.
본론으로 돌아와서 김일성이 태어난 당시는 일제 강정기였습니다.
소작농이었던 김일성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였는데 조선 국민의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소한 뒤 지린성으로 이사하면서 1919년 당시 여덟살이던 김일성도 함께 만주로 건너갑니다.
이후 아버지의 권유로 홀로 평양으로 돌아와 외가에 머물면서 학교를 다녔지만 부친의 체포
소식에 2년 후 다시 만주로 돌아가죠.
하지만 김일성이 16살이 되던 애 아버지는 암살당하고 홀어머니 불안정한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김일성의 아버지는 반공주의자였습니다.
김일성의 아버지는 만주에서 무면허 한의사로 일하며 아편에 팔아 돈을 벌었는데 반공주의자라는 이유로 공산주의자 암살을 당했죠.
여튼 아버지가 죽으면서 힘든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곳
학교도 옮겨 다녔고 방학도 해 좋아.
그러다 중학교 때 중국인 교사를 통해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파괴 됩니다.
김일성은 공산주의와 제국주의 등 여러 가지 사상의 매력을 느끼게 되죠.
김일성의 관심은 곧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1929년 5월 김일성은 조선 청년회에 가입해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하죠.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에게 죽었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공산주의
무조건적으로 혐오하는 게 정상입니다.
김일성에게는 아버지의 죽음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니면 기회라고 생각했다 수도 있죠.
당시 공산주의는 지금과는 달리 새로운 바람이자 유행이었습니다.
게다가 중국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김일성의 조선공산청년회의 활동은 얼마 안 가 일본 경찰에게 잡혀버리죠.
김일성은 투옥됩니다. 1930년 출소한 김일성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학교에서도 퇴학당했죠. 김일성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막일을 하며 살아가든가 아니면 다시 공산
세력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죠. 김일성은 후자를 선택합니다.
이종락이 이끄는 공산주의 혁명군을 찾아 가져와.
이종락이 김일성을 좋게 봐주었는지 김일성은 무기 조달 자금을 위한 세금 부대 분대장을 맡게 됩니다.
흔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죠. 군대에서 분대장을 달아보신 분은 느끼셨을 겁니다.
이게 사람이라는 게. 직급을 달아주면 책임감 같은 게 생기죠.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해야 할 것 같고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쉽지도 않게 됩니다.
처음으로 분대장이라는 역할을 맡게 된 김일성도 그랬죠.
아니, 김일성은 좀
했습니다. 김일성은 돈을 걷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죠.
김일성의 세금 징수 군대는 마골단이라 불릴 정도였습니다.
농가를 찾아가 돈을 강탈하거나 국인이든 조선인이든 아들이 일본에 유학 중이거나 좀 산다 싶으면 단체로 몰려가서는 돈 내놓으라며 호통을 쳤고 폭행도 마다하지 않았죠.
지금으로 치자면 깡패네요. 이때까지 김일성은 분명 김성주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김일성이란 이름의 유래는 다양한
측과 가설이 난무해서 정확한 사실은 아무도 모르지만 이 시기쯤부터 김일성이 되죠.
하지만 조선혁명군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깡패 짓을 하고 다니는데 올해 가는 게 더 이상하죠.
참다 못한 중국 경찰이 잡아들이기도 했고, 하도 원한을 많이 사서 사살당하거나 일제에 체포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결국 와해돼 버리고 맙니다.
김일성은 다시 갈 곳이 없어졌죠. 그런데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킵니다.
중국 공산당은 항일 유격대를 조직할
지시하죠. 만주에는 곳곳에서 공산주의의 유격대가 조직됩니다.
갈 곳이 없었던 김일성은 이 항일 유격대에 망설임 없이 들어가죠.
김일성은 1942년까지 중국 공산당이 지도했던 무장 부대 동북 항일연군에 소속되어 활동을 했습니다.
이때 김일성은 소대장으로 활동했는데, 이게 현대에 와서는 김일성 무대 치3파로 알려져 있죠.
이 시기의 기록은 김일성의 회고록을 보면 휴양 찬란하게 적혀 있는데 대부분 거짓입니다.
그나마 사실으로 확인된 업적은 홍기화 전투이죠.
김일성이 이끄는 유격대가 마이다
토볼 때와 싸운 전투인데, 학계에서 인정하는 몇 안 되는 김일성의 항일 업적입니다.
홍기야 전투 이후 김일성은 김정숙과 결혼해 아이를 낳춰 이때 태어난 아이가 김정일입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일본 관동군의 토벌 작전으로 동북 항일연군이 괴멸되죠.
소련으로 피신합니다. 김일성은 빨치산을 이끌고 서령군이 지휘하는 88 국제 여단
속으로 들어가는데, 소련의 밑으로 들어가게 된 이 일은 후에 잘한 것 하나 없는 김일성이 북한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죠.
소련에 들어간 김일성은 처음에는 일본의 스파이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받았습니다.
소련은 여차하면 바로 죽일 생각이었죠.
죽을 위기에 처해질 때마다 김일성은 어릴 적 배워둔 중국어로 죽을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러시아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말이죠.
결국 소련군과 함께 일본군과 싸우며 소련군 장교까지 맡게 됩니다.
1945년 장기화되는 일본과의 싸움을 끝내고 싶다
미국에서 원자 폭탄이 완성되었고, 소련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죠.
일본의 패망이 거의 확정된 상황이었던 겁니다.
한반도는 동아시아 질서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한반도를 놓고 미국과 소련의 긴장감이 높아지자, 미소는 38선을 긋고 서로 일본군을 몰아내자고 합의하자 그렇게 일본에게 행정권을 넘겨받아 한반도의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하게 됩니다.
소련의 스탈리는 줄곧 한반도의 공산화를 노리고 있었죠.
미국과의 팽팽한 기싸움이 예고되면서 스탈린은 한국에 세우들의
꼭두각시가 필요했습니다. 이때 스탈린의 선택을 받은 게 김일성이었죠.
사실 조선에는 이미 강력한 기반을 마련한 박헌영의 공산주의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굳이 박헌영이 아니더라도 능력과 덕망으로 보자면 성을 선택할 이유는 없었죠.
하지만 스탈리는 말 그대로 꼭두각시를 원했습니다.
유능하고 생각이 있는 사람을 밑에 두면 분명히 말을 안 듣거나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당시 국내든 해외든 이름 날리는 공산주의 거물들이 많았는데, 김일성은 아무도 못 들어본 듣보잡이었습니다.
그렇게 김일성은 소련군과 함께 한반도 북부로 넘어와 먼저 지역에 공산주의 세력, 갑산파를 흡수합니다.
특히 남쪽에서 기반을 다진 공산주의 세력의 1인자 박헌영은 김일성의 등장이 당황스러웠지만,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을 무시할 수
김일성 또한 국내에서 막대한 지지를 받는 박헌영을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1945년 10월 8일, 이 둘은 38선 근처에서 만남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둘의 의견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심했죠.
소련은 김일성의 의견을 들어주었습니다.
어쩌면 소련의 의견이 김일성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사회주의
토지개혁과 공업 개혁을 추진하자 군대를 꾸리고 헌법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정적과 자산가, 우익 독립운동가 등을 잔인하게 수청합니다.
소련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해서 말이죠.
소련은 말을 안 해도 알아서 하는 김일성이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김일성은 소련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중국 연안파, 소련파와 같은 박헌영을 제외한 대규모 공산주의 세력을 모두 흡수하는 데 성공하죠.
한편 미군이 통치하는 남쪽에서는 어떤 정치 세력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김일성은 김구와 김규선의 통일정부 수립안에 찬성하지 않았고 결국 1948년 5월 10일 남쪽에서는 최초의 선거가 실시되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리됩니다.
공산주의와 점점 멀어져 가는 남한에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던 박헌영은 북으로 넘어가 김일성과 합류합니다.
이렇게 김일성의 조선 노동당은 완전체가 되었고, 1940
8년 8월 북한 역시 단독 선거를 거쳐 김일성은 북한의 정점에 올라섰죠.
1948년 9월 9일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합니다.
사실상 지금의 북한이 완성되는 순간이죠.
일단 겉으로는 완벽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죠.
공산주의는 탄생한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사상이었고, 분파도 너무나 많았습니다.
파트도 달랐고요. 너무나도 많은 분파는 통일감을 주지 못했고, 소수지만 박헌영 이름을 외치는 일도 있었죠.
김일성은 박헌영의 존재가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박헌영 입장에서는 영향력을 펼치지
못하는 북쪽이 불편하기만 했죠. 이때 박헌영이 주장한 게 남침이었습니다.
둘의 목적은 달랐지만 김일성과 의 공통된 주장이 전쟁이었죠.
박헌영은 일단 전쟁만 일으키면 남쪽에 깔린 자신의 세력이 남한 정부를 순식간에 무너뜨릴 거고 미국도 개입하지 않았어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우저 등에게 허락을 받고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되죠.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6.25 전쟁은 전혀 다른 전개로 흘러갑니다.
미국은 곧바로 남한을 지원했고,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죠.
박헌영의 세력은 이미 남한에서 숙청되어 산산조각난 되었습니다.
예상과 달리 북한이 밀리는 상황에 다급해진 김일성은 1950년 7월 8일 스탈린에게 지원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내죠.
6.25 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이라는 게 지금은 모두가 아는
이지만 이 편지가 공개되지 않았을 당시에는 북침이냐 남침이냐 하는 논쟁이 정말 많았습니다.
지금은 북침이라고 하면 미친 놈 취급을 받죠.
미친 놈일 수도 있고요. 어쨌든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승리하지 못한 전쟁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죠.
모두가 예상하시듯이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미군의 스파이라 누명일 씨와 박헌영을 처형하고 박헌영과 관련 인물들까지 모조리
숙청해버렸죠. 소련파, 중국파 계열 공산주의 거물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모두 정치범으로 만들어 처형하거나 암살해 버립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을까요? 있었습니다.
당시 김일성의 입지는 흔들리고 있었거든요.
6.25 뿐만이 아니었죠. 6.25 전쟁 종전 4개월 전에 스탈린은 사망했고 후계자인 니키타 후르쇼프는 스탈린에게 매우 비판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후루쇼프는 스탈림처럼 독재 숭배로 통치하는 김일성을 축출하려고 했죠.
김일성은 외부의 꼬리를 흔들어서 어떻게 해결이 안 될 것 같으니 내부에서 압도적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도 김일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나타났죠.
우리가 모르는 쿠데타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일단 공개적으로 김일성을 비판했던 사건이 8월 사건이 터집니다.
파의 종파 사건 이후 수년 동안 김일성은 끝도 없는 숙청과 처형으로 정적을 모조리 제거해 버리죠.
이런 흐름은 1960년대까지 이어지고 이제 돌이 수 없었습니다.
더욱 강력한 독재를 결심하고 김일성은 사상 개혁까지 시도하죠.
주체 사상이란 원래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철학적 원리지마 김일성은 이를 김일성 주의로 바꿔 나라의 절대적 시인으로 군림하기 위한 국가전략으로 사용했습니다.
1970년에 진행된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총 비서에 재선출되었고 1972년 헌법 개정으로 국가 권력 구조를 국가 주석 중심 체제로 바꾸어 버리죠.
앞에서 1948년 북한의 모습이 완성되었다고 했죠 1972년은 지금의
체제가 완성된 순간입니다. 저희 채널의 북한 관련 영상을 몇 개 보신 분이라면 알고 계실 겁니다.
6.25 직후에는 북한의 경제가 더 좋았죠.
뭐 각종 경제를 위한 사업들을 진행하는데 다 말아먹었습니다.
하인 결과가 좋았다면 북한의 경제가 이꼬라지는 않을 테니까요.
압도적인 권력을 차지한 김일성은 그 이후로 정치적인 행보라기보다는 국제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다른 나라와의 교역과 한국과의 경쟁 1990년대 초반에는 김영상과의 회동을 약속하며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언급되었죠.
그러다 아들인 김정일에게 권력을 세습하고 1999
14년 7월 8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김일성의 인생을 보면 한 나라의 지도자를 지낼 만한 능력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는 걸 꼬리를 잘 흔들었던 격변기라는 시대에 태어난 능력 없는 야망가로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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