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천년 전 한반도에서 혼란의 후삼국 시대가 끝나고 고려 1대 왕 태조 왕건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918년에 즉위한 태조는 936년 후삼국을 통일했는데요.
고려는 외세의 도움 없이 발해 유민과 후백제 신라 백성 모두를 끌어안은 최초의 자주적 통일 국가였습니다.
나라를 세운 왕건에겐 두 가지 숙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고구려 고토 회복 운동 고려가 고구려를 이은 나라이니 잃어버린 고구려 옛 땅을 되찾겠다고 다짐했고
결국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일부 지역을 회복했습니다.
둘째는 민족 통일인데요. 태조는 불교를 국교로 삼아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모읍니다.
또한 건국의 공을 세운 힘센 지방 호족들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포섭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태조는 혼인 정책으로 공신들 지방에 잘 나가는 호족 딸들과 결혼해서 왕비 29명과 아들 25명 딸 9명을 얻었고 사성 정책으로 유력 호족들에게 자신의 성 왕실을 쓰도록 해줬습니다.
이로써 수많은 호족이 한 패밀리로 뭉쳤지만 이는 왕건의 사후 피비린내 나는 왕위 쟁탈전을 예고하는 일이기도 또한 긴 제도로 호족의 아들을 수도 개경에 머물게 해서 지방 호족이 중앙 정부에 충성하도록 만들었죠.
세월이 흘러 죽음을 코앞에 둔 왕건은 박수리를 불러 후손들에게 10가지 교훈 훈요10조를 남겼습니다.
943년 왕권의 뒤를 이은 건 장남 혜종이었습니다.
치열한 왕권 다툼 속에서 해종은 늘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매일같이 처소를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던 해종이 34세 젊은 나이로 사망합니다.
해종이 죽자 바로 아랫 동생 왕요가 셋째 임금 정종으로 즉위했는데요.
젊고 혈기왕성한 왕요는 자신의 힘을 키우기 위해 해종의 지지 기반이었던 박수리 왕규를 제거하는 등 즉위 초부터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여전히 개경 호족들은 고분고분 따라주지 않았고 왕권을 확실히 다지지 못한 채 재위 4년 만에 정종이 병사합니다.
정종이 죽고 동생 광종이 뒤를 잇자 고려는 대전환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피의 군주라 불리는 광종 의외로 처음.
7년간은 조용히 지냈습니다. 국정을 휘두르는 호족들을 딱히 건들지도 않고 관망하면서 정치적 토대를 다지다가 때가 됐다고 판단하자
폭풍처럼 개혁을 추진했는데요. 광종이 조용히 그려온 밑그림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였습니다.
이를 위해 개국 공신들 각지를 꽉 잡은 지방 호족들의 날개를 다 꺾어버리겠다고 결심하는데요.
광종은 첫째로 노비 안건법을 마련해서 억울하게 노비된 자들을 양민으로 해방해 줍니다.
이는 곧 공신과 호족들의 기반이 와르르 무너진 셈이었습니다.
그들의 수백 수천 노비들은 곧 재산이자 사병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광종의 과거제 도입은 그야말로 핵폭탄급 개혁이었습니다 고려 건국의 공을 세운 호족 공신들 대부분이 무인들인데 갑자기 학문으로 인재를 뽑아 관직을 준다는 겁니다.
이 과거제를 건의한 자는 쌍기라는 관리였는데 광종이 후주에서 영입해 해외 인재였습니다.
이렇게 광종은 호족들에 끌려다니던 왕실의 과거를 청산하고 때로는 자신을 황제라 칭하며 고려의 위상을 드높였는데요.
말려에는 위협 세력을 숙청하며 피의 군주라 불리게 됩니다.
광종의 뒤를 이은 경종은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981년 제6대 성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성종은 유교를 정치 개념으로 채택해서 국가 체제를 대대적으로 정비한 왕인데요.
신하들에게 나라 잘 다스리는 법을 적어내라 명했고 그중 최승로가 올린 시무 28조가 채택되면서 정치 방향성이 잡히고 고려의 여러 제도가 자리 잡았습니다.
성종이 왕이 되고 10여 년이 지난 993년부터 거랑군이 고려에 세 번에 걸쳐 쳐들어옵니다.
거랑군은 당시 세계 최강 군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요.
첫 번째 전쟁에선 그 유명한 서희의 담판이 있었습니다.
거라는 고려와 송나라가 친하게 지내는 게 불만이었고 서희는 이를 정확히 간파해 역제안까지 했습니다.
우리도 너희 거랑과 교류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건 거랑과 고려 사이에 있는 여진족 때문이다.
그러니 이참에 우리가 여진족 몰아내고 그 땅 차지하게 도와주면 너희 거랑과 잘 지내겠다 하며 설득했다.
결국 서희의 말발로 거란군이 물러가고 덤으로 땅까지 넓혔습니다.
이때 고려가 얻은 땅에 6개의 성을 쌓고 강동육주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거랑과의 세 번째 전쟁에서는 1019년 귀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둔 강감찬 장군이 등장합니다.
당대 최강 거란의 10만 대군 중 살아 돌아간 병사는
고작 수천이로써 강감찬 장군은 고려의 위상을 한껏 드높였습니다.
그 뒤로 거라는 더 이상 고려를 공격하지 않았고 수십 년 만에 전쟁에서 벗어나 나라가 안정 속에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개경 근처에 있는 나루터 병란도에는 외국 상인들이 드나들었고 세계를 누비며 활발히 무역한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고려는 코리아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150년쯤 지난 고려 제 18대 의종이 왕위에 올랐을 무렵 왕실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과거 인종 때 문벌 귀족 이자겸이 왕위를 빼앗겼다.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인데요. 고려의 새롭게 떠오른 지배 계층 문벌 귀족은 대대로 고위 관료를 배출하고 왕실 외척이 된 자들이었습니다.
옛날 호족의 후손들이 이젠 문벌 귀족이 되어 권세를 누리고 있었죠.
그리고 서경파인 묘청의 난이 이어지면서 개경파와 서경파 중 서경파가 몰락했는데요.
여기서 서경파는 진보 세력으로 도읍을 서경으로 옮기자 사대를 요구하는 금나라를 정벌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나중에 일제강점기 사학자 신채호는 이때 김부식의 개경파가 승리했기 때문에 조선시대까지도 사대주의 정신이 만연하게 됐다.
다 했습니다 만약 이때 서경파 묘청이 승리했다면 조선은 독립적 진취적인 나라가 됐을 거라고 평가했죠.
어쨌든 서경파의 몰락은 곧 고려 왕실을 받쳐주던 유력한 세력이 사라진 것을 의미했습니다.
결국 18대 의종은 즉위 초부터 개경 문벌 귀족의 심한 간섭을 받았는데요.
이에 환묘를 느낀 나머지 의종은 환관과 내시를 중심으로 자신의 친위 세력을 만들었습니다.
황광과 내시들의 어깨가 한껏 올라가니 사람들이 오죽하면 왕명이 고자에게서 나온다고 말할 정도였죠.
약한 왕권을 가진 의종은 잔치를 열고 놀면서 그 시름을 잊었는데요.
늘 왕의 술잔을 받는 건 마음 맞는 일부 문신과 환관 넷이였고 무신들은 파티에 끼지 못한 채 그들의 주의를 지킬 뿐이었습니다.
천대 받던 무신들의 불만이 폭주하면서 결국 1170년 한맺힌 무신들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무신 반란을 이끈 정중부는 의종을 쫓아내고 의종 동생 명종을 새 왕으로 앉혔는데요.
명종은 벌벌 떨며 모든 일을 무신들 뜻에 따라 처리했습니다.
이제 19대 명종에서 23대 고종 때까지 100년간의 무신정권 시대 시작된 것입니다.
무신 반란을 이끈 정중부 이의방 이고는 처음에만 사이좋게 권력을 나눠 갖다가 결국 권력 맛에 빠져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이희방 정중부 경대승 이희민 최충헌에 이르는 무신들의 릴레이 사륙전이 펼쳐졌는데 그 싸움의 마지막 승자는 최충헌이었습니다.
무력한 명종은 최충헌에게 쫓겨나고 신종이 즉위하면서 이제 60년간의 최 씨의 무신 정권이 이어집니다.
그 사이 가난과 수탈의 고통 봤던 농민과 천민들이 대대적인 민란을 일으켰는데요.
1976년 공주 명악소에서 망이 망소이의 난이 있다.
198년에 최충헌의 노비 만족이 난을 일으키려다 실패하기도 합니다.
최 씨의 무신정권이 이어지던 제23대 고종 시대는 아시아 전체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던 시기였습니다.
친기즉칸이 몽골을 통일하고 세계제국 건설에 나선 건데요.
몽골에 쫓겨온 거란이 고려 땅 강동성을 차지하자 몽골군과 고려군이 손을 잡고 1219년 거랑군이 항복합니다.
이후 몽골은 고려와 형제 관계를 맺고
곡물을 요구했는데요. 1225년 곡물을 챙겨 돌아가던 몽골 사신이 귀국길에 피살을 당합니다.
몽골은 고려지이라고 의심하며 보복을 다짐합니다.
이로써 1231년 살리타 장군이 이끄는 몽골군이 쳐들어오니 이것은 약 30년간 이어진 고려 침공의 서막이었습니다.
과연 몽골의 군대는 강력했으나 고려 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강화를 맺고 몽골군이 철수하면서 몽골 1차 침입이 막을 내렸죠.
최충헌의 권력을 이어받은 아들 최후의 주장으로 고려는 1232년 강화로 도읍을 옮기게 됩니다.
강화도에 산도 많고
주변 물살이 세서 적을 막기 좋았는데요.
또다시 쳐들어온 몽골군은 공격하기 힘든 강화는 놔두고 고려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땅을 하나씩 삼키다 보면 고려 왕도 못 견디고 섬에서 나와 항복하겠지 생각한 거였지 그러나 살리타 장군은 처인성에서 승려에게 살해당하는데요.
당시 처인성에서는 고려군뿐만 아니라 백성 승려까지 죄다 모여 손에 창칼 돌멩이를 들고
죽을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몽골 3차 침입 때 황룡사 9층 목탑이 파괴되기도 합니다.
고려인들은 불교의 힘으로 결속해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만들며 처절한 싸움을 이어갔습니다.
인류 최고의 목판 예술품이라 불리는 팔만대장경은 일반 백성부터 귀족 국왕까지 전 계층이 참여한 역작으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결국 고려 왕이 몽골에 가서 항복하겠다.
약속
1239년 몽골군이 물러납니다. 몽골이 계속 요구하는 것은 출륙 환도였습니다 고려 조정이 이제 좀 섬에서 나와서 개경으로 복귀하고 몽골 칸에게 와서 항복하라는 거였다.
고종은 개경 환도를 원했지만 최후의 후계를 이은 최양은 대문 강경론을 고수하며 굳건히 버텼습니다.
그리고 1257년 고려의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최양이 죽고 아들 최희가 권력을 넘겨받은 것인데 최희에겐 여러모로 최 씨 정권을 이끌 만한 자질이 부족했습니다.
결국 1258년 무신 김준과 유경 등이 최희를 살해하면서 약 60년에 걸친 최 씨 무신정권이 붕괴 형식적으로나마 정권을 되찾은 고종은 태자를 몽골로 보냅니다.
태자가 몽골에 도착해 보니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가 서로 황제라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태자는 쿠빌라이에게 운명을 베팅했고 태자가 항복하자 쿠빌라이는 감격하며
그를 대접해줬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몽골의 위세 앞에 무릎을 턱턱 꿇었는데 고려는 쉽게 굴복하지 않고 항전한 나라였습니다.
그런 고려의 태자가 결국 자신을 선택한 것은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는 일이었습니다.
쿠빌라이는 태자가 요구한 6가지를 들어줬는데요.
그중 특히 고려의 풍속을 고치지 않겠다는 이른바 불개토풍을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은 앞으로 고려 왕조 체제를 지키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고종의 승하 소식에 고려로 돌아온 태자는 고려 24대 왕 원종이 되었습니다.
그의 쿠빌라이도 정식 황제가 됐고 나라 이름을 몽골에서 원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약 30년에 걸친 여몽전쟁이 종결됐습니다.
쿠빌라이에게 호감을 품은 원종은 생각했습니다.
막강한 몽골의 힘을 빌려서 왕권을 회복하면 어때
최 씨 무신정권이 무너진 후에도 왕권은 금방 복구되지 않았습니다.
원나라는 고려 조정의 개경 환도를 재촉했는데요.
당시 새로운 무신정권을 이끌던 건 최이를 죽인 김준이었고 김준은 자신들의 기반인 강화도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독을 품은 원종은 이런 김준을 1268년에 제거하고 1270년대
마침내 개경에 환도했으며 무신정권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그러자 이제 원종과 친목 정권에 반대하는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는데요.
무신 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삼별초는 고려 최강의 전투 병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삼별초는 1273년 여몽 연합군의 결 무너졌죠.
그동안 원종은 쿠빌라이의 딸과 자신의 아들을 결혼시키자고 몇 차례 청했습니다.
마침내 1274년 태자 심이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니
그가 바로 고려 제25대 충렬왕입니다.
원종은 고려의 생존을 위해 사돈 관계를 맺고 외교적 실익을 얻었는데요.
한편으로는 충렬왕이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스스로 변발한 것을 보고 고려 백성들의 통곡 소리가 자자했다는 일을 유명합니다.
이렇게 약 100년간의 원 간섭기가 시작되는데요.
세계 제국을 건설한 원의
속국이 되거나 정복당한 다른 나라와는 달리 고려는 독립국이자 주마국으로 엄연히 국권을 유지했습니다.
원나라는 고려의 풍속과 제도를 인정하는 한편 고려 왕을 통제하며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 간섭을 강화합니다 고려 왕실의 지위가 격화되면서 호칭도 한 단계씩 낮아졌는데 태아는 전화로 태자는 세자로 바뀌게 됐다.
고려왕 이름에는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에 충이 붓고 마지막 글자도 조나 종 대신 왕으로 바뀌었습니다.
원나라의 욕으로 끌려간 젊은 여자들을 공녀라 불렀는데 공연은 원 황제의 궁녀 혹은 신하의 첩이 되거나 노비로 팔려갔습니다.
쿠빌라이카는 고려의 전쟁 물자를 준비시켜 일본 정복을 시도했다가 결국 실패하기도 했는데요.
일본인들은 이때 분 태풍을 가미카제 즉 신의 바람이라 불렀습니다.
원나라 황제의 입기 말에 점점 고려보다 원나라에 충성하는 친원파가 생겨납니다.
당시 원나라를 등에 업고 관료계를 장악한 새로운 지배층이 바로 건문세족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기철인데요. 공려로 갔다가 원 황제 부인이 된 기황후의 오빠입니다.
건문세족의 부정부패로 백성들의 삶을 피패했습니다.
그러다 14세기 중엽 31대 공민왕이 원나라 배척 운동을 벌이며 나라를 뜯어고치기 시작합니다.
왕 위에 오르자마자 몽골식 변발
복장 금지를 외치며 권세 부리던 기초를 죽여버리고 뺏긴 땅도 되찾았는데요.
당시 원나라가 홍건적의 봉기로 급격히 몰락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민왕은 떠돌이 승려였던 신돈을 신뢰해 나랏일을 맡겼는데요.
신돈이 특히 성균관을 크게 키워서 젊은 유학자가 대거 배출되니 조선 건국의 핵심이 될 신진사대부가 성장하게 됩니다.
혼란의 시대 뛰어난 장군 이성계가 역사에 등장합니다.
나라를 어지럽히는 홍건적과 외부를 시원하게 격퇴하면서 백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게 되죠. 그리고 마침내 신흥무인세력 이성계와 신진사대부 정도전이 개혁의 뜻을 품고 손을 잡게 됩니다.
몇 년 뒤 원나라 땅을 대부분 차지한 명나라가 고려 북쪽 땅도 원나라 땅이었으니 자기들 거라고 통보합니다.
제32대 우왕과 최영 장군은 고려 영토를 침해했다며 명나라를 공격하기로 하는데요.
이성계가 사 불가론을 내세우며
끝까지 반대했지만 출병하라는 우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출병을 원했던 최형은 남아서 왕을 이성계가 요동 정벌에 나서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이 압록강에 있는 작은 섬 위화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성계가 역사의 물줄기를 뒤바꿀 결정을 내리니 1388년의 위화도 해군입니다.
장수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은 이성계는 개경으로 돌아와 최영을 죽이고 우왕을 내쫓았으며 창왕을 세웠다가 몇 달 만에 공양왕으로 갈아치웁니다.
이렇게 이성계 일파가 조정을 장악한 가운데 개혁의 방향성을 두고 의견은 두 개로 갈라졌습니다.
정도전 같은 급진 세력은 이성계를 새 왕으로 세우고자 했고 정몽주 같은 온건세력은 고려를 지키며 순차적으로 개혁하길 원했습니다.
결국 이성계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합니다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가 죽고 나니 이제 이성계 앞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1392년 공양왕이 쫓겨나며 이성계가 새 왕조를 열고 이듬해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꿨습니다.
강력한 군사력과 유연한 외교력으로 격변하는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했던 고려 그 474년간의 역사가 끝나고 한반도는 또다시 새로운 시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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