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전체 한국인 중 김 씨 성을 사용하는 비율은 무려 21%에 달합니다.
또 사용 인구가 많은 순서대로 김 씨와 이 씨
박 씨 최 씨 정 씨를 합해 보면 50%가 넘어가죠.
전체 인구의 절반이 겨우 다섯 개 성에 몰려 있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굉장히 특이한 현상입니다.
왜 한국의 성 씨는 이토록 다양하지 않은 걸까요.
오늘의 주제는 한국의 성시입니다.
2세기 초 중국에서 편찬된 설문해자라는 사전은 성을 사람이 태어난 바라고 정의합니다.
즉 이 성이라는 글자는 여자를 의미하는 여자와 태어나다를 의미하는 생자가 합쳐져 여자가 아기를 낳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으며 따라서 사람이 누구에게서 태어났는지를 밝히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죠.
오늘날이야 성을 사용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지만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를 식별하는 데는 이름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동선을 불문하고 오랫동안 많은 이들은 성을 갖지 않고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이름의 앞이나 뒤에 성을 붙였던 사람들은 이름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던 사람들 즉 자신의 가문을 밝힘으로써 다른 이들과 차별화되어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의 역사가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곳은 중국입니다.
기원전 11세기 경 중국을 지배했던 주나라의 왕실이 자신들의 선조가 살았다고 알려진 지명에서 희라는 글자를 따온 게 시초인데요.
이후 주나라가 왕실 구성원들에게 나라의 토지를 나눠주고 그들을 제호로 삼음으로써 씨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제우들 또한 왕족이었으니 희성을 사용했지만 사는 곳이 달라지면서 각자 다스리던 나라나 살던 지역의 이름 등을 씨로 삼아 서로를 구별했던 것이죠.
그러다가 점점 성과 씨의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기원전 3세기 경이 되면 성과 씨를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성 씨는 중국의 지배계급 내에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를 잡습니다.
성시가 발명된 곳이 중국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성시 또한 중국과의 교류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 시기가 언제부터인지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지만 일단 기록상 나타나는 최초의 한국성은 4세기 근초고왕 때 백제 왕실에서 사용했다는 여시입니다.
백제는 바다를 사이에 끼고 중국과 마주보고 있어 사신의 교류가 잦은 편이었고
그래서 중국식 성시 체계를 도입해야 할 필요성을 비교적 일찍 느꼈을 겁니다.
백제 왕실의 여신은 부여라는 국명을 축약한 것입니다.
무연은 기원전 4세기경부터 기원후 5세기 말까지 만주에 존재했던 나라인데요.
백제 왕실이 자신들의 선조가 살았던 곳으로 인식했던 나라이기도 하죠.
그리고 백제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파생한 범 부역의 국가이자 동시에 부여를 멸망시킨 주역이기도 했던 고구려는 5세기 장수왕 시대부터 곧 씨 성을 사용했던 흔적이 나타납니다.
이 글자는 고구려라는 국명을 축약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부여 왕실의 성인 해씨를 다른 방식으로 적은 것이라는 주장도 유력하게 제기됩니다.
고대 한국인들이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빌려 쓰는 데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어 길다의 어간인 길을 적는다고 할 때 뜻이 통하는 길 영자를 쓰는 방법이 있었고 뜻은 다르지만 발음이 같은 좋을 길자를 쓰는 방법이 있었죠.
그래서 같은 한국어를 적는다고 해도 쓰는 한자가 다를 수 있었습니다.
노풀고자와 풀 해자도 바로 이런 관계일 수 있습니다.
부여 왕실의 성씨인 풀 해자는 태양을 의미하는 한국어 해를 적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고구려 왕실의 성씨인 높을고자는 높다라는 뜻으로부터 높은 곳에 있는 것 즉 해라는 뜻이 파생될 수 있죠 한국어 해를 접기 위해 바르미 같은 풀 세자를 쓸 수도 있고 뜻이 통하는 높을 고자를 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고대의 태양은 하늘에 홀로 고고하게 떠 있어 그 자체로 신비롭게 여겨졌고
그래서 지역을 막론하고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부여와 고구려도 건국 신화를 보면 창건자들이 태양의 후예임을 과시함으로써 권위를 획득했던 것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 나라들이 중국식 성시체계를 도입할 때 태양을 의미하는 글자를 선택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죠 한편 범 부역의 국가들과 함께 한국 고대사의 다른 축을 구성했던 신라는 6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성씨의 사용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늦어졌던 것은 신라의 원래 강역이 한반도 동남부에 치우쳐 있어 중국과의 교류가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6세기에 이르러 영토를 크게 확장하며 중국으로 나아가는 교통로를 확보하자 신라 왕실은 쇠 금자를 왕실의 성으로 내세우기 시작했죠.
왜 이 글자였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명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황금을 의미했던 고대 한국어 쇠를 접기 위해서였다는 겁니다.
황금은 무엇보다 초원에서 말을 타며 살아가던 기마민족들이 숭배하던 금속입니다.
최초의 기마민족이라 불리는 스키타이인들은 아무리 오래되어도 녹슬지 않고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이 태양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태양 숭배의 일환으로 화려한 황금문명을 일궜습니다.
특히 스키타이의 지배층은 얇은 황금 조각을 온몸에 붙임으로써 스스로 밝게 빛나는 태양이 되고자 했죠.
태양숭배에서 파생된 스키타이의 황금 숭배는 기원전 4세기경부터 유라시아 초원을 따라 동쪽으로 전파되어 흉로에 이르렀고 흉로에서 다시 신라로 전해졌다고 여겨집니다.
4세기경부터 뚜렷한 황금 숭배의 흔적을 보이며 다양한 황금 장신구들로 온몸을 치장했던 신라의 왕들이 성시를 고를 때 황금을 의미하는 글자를 채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는 게 첫 번째 설명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설명은 쇠라는 뜻보다는 금이라는 발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보는 것인데요.
옛날에는 발음이 정교하게 구분되지 않아 시대나 지역에 따라 모음이 쉽게 변했고 그래서 금은 검이나 감 곰 등으로도 발음되었습니다.
모두 대형 맹수인 을 의미하는 말이었죠.
신라는 기원전 108년에 멸망했던 고조선의 유민들이 주축이 되어 건국한 나라이고 고조선은 흑곰이나 불곰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곰을 숭배하는 토테미즘이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고조선이나 신라에서 곰 곰 감 금 등은 신을 의미하는 말이었고 여기서 왕처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붙이는 존칭의 의미가 파생되었죠.
그리고 이렇게 존칭으로 사용되었던 금이 중국식 성명 체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점차 성으로 굳어졌다는 게 두 번째 설명입니다.
이처럼 초기 한국의 성시들은 대체로 왕족 현상이었습니다.
크게 보면 고구려의 고시와 백제의 여시 신라의 금씨가 경합하는 형국이었고 이외 중국과 교류가 잦았던 귀족들이 성씨를 칭하는 경우가 일부 있었죠.
그런데 7세기 들어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한반도 대부분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금 씨는 한반도를 대표하는 성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신라의 다른 귀족들도 하나 둘 성시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박 씨와 이씨
정 씨 최 씨가 차례로 등장하죠. 금 씨는 15세기를 전후해 발음이 변해 김 씨가 되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오대성 씨가 모두 신라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확실히 특이한 현상입니다.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민족들이 이민족에게 점령당해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의 시기를 겪습니다.
그래서 보통 나라가 멸망하면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일어나면서 그 나라를 지배했던 이들은 사멸의 길을 걷기 마련이죠.
그런데 신라는 달랐습니다.
935년 신라는 멸망했지만 신라의 뒤를 이어 한반도를 차지했던 나라들은 모두 외부의 근거지를 둔 이질적인 국가가 아닌 내부의 근거지를 두고 건국된 동질적인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신라가 확정한 영토를 기반으로 북쪽의 영토를 조금씩 넓혀 나갔죠.
물론 그러는 동안 몽골이나 일본으로부터 침략도 겪었지만 나라를 잃지는 않았습니다.
덕분에 신라의 귀족은 신라가 망한 뒤에도 살아남아 고려의 귀족이 되었고 고려가 망한 뒤에도 살아남아 조선의 양반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라의 오대성 씨는 19세기 말까지 계속 번영하며 큰 인구 집단을 이뤄왔고 번영은 번영한다는 바로 그 이유로 또 다른 번영을 낳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학자 마크 피터스는 말합니다 한국의 성씨는 한 귀족 계급이 1500년 동안 끊기지 않고 권력을 잡았던 세계적으로 굉장히 드문 사례를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말이죠.
얘 얘도 김 간장이래 아니 우리 동네 이렇게 김간장들이 많아 이
본 영상은 다음의 책과 논문들을 읽고 제작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두 권의 책을 추천해 드리고 싶은데요.
먼저 우물 밖의 개구리가 보는 한국사는 한국학 전문가인 마크 피터슨이 외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사를 바라보는 다른 관점들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원 다니나든 다채롭더는 한국을 대표하는 고고학자 강인욱 교수가 고고학적 접근을 통해 한민족의 기원에 다가서는 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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