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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6.25전쟁의 시작 과정을 설명해 드립니다.

by 로이인랑 2023.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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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2차 세계대전이라는 약 6년에 걸친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함에 따라 35년 동안 일본의 소나기에 걷어진 한반도는 마침내 독립을 이룩하게 됩니다. 
하지만 2차 대전의 승전국들은 한반도는 35년의 식민통치에서 이제 막 벗어난 상태이기 때문에 스스로 통치할 힘이 없다고 판단합니다. 
때문에 38도선을 기준으로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들어서게 되고 2차 대전의 승전국은 한반도를 향후 5년간 대신해서 통치하자는 신탁 통치를 결정합니다.
한반도 내에서도 이제 겨우 독립을 이룩한 지라 또다시 타국의 통치에 대한 찬반 운동이 격해지기 시작했죠. 
시간이 지나면서 두 강대국이 자리 잡고 있던 한반도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각기 다른 이념의 차이로 서서히 고착화되어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개개인의 정치 이념에 따라 남과 북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남북의 대립 구도는 더욱 확고해져 갔습니다. 
이제 남은 건 정부를 수립하는 것 초기에는 유엔의 주도 하에 남북한을 묶어 한반도 전체를 두고 총선거를 결정했지만
북한에서는 이미 공산주의가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한 지역에서만의 단독 선거를 실시하게 됩니다. 
그렇게 남한 지역에서는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이승만 정권이 탄생하였습니다. 
반대로 서서히 독자적인 정부 수립을 준비하던 북한은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합니다. 
이렇게 한반도 땅에는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50년 미국은 김일성을 자극하는 엄청난 발표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애치슨 선언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공산주의는 빠르게 퍼져나갔고 이러한 소련의 붉은 물결을 막고자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이 강경한 정책을 추진한 것이죠. 
아시아 전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동아시아 방위선을 그었는데 알류산 열도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선으로 그어버리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이 탄생하였습니다.
즉 한반도를 비롯해 대만 인도차이나 반도가 제외되었고 이 에치슨 라인에 포함되지 않는 국가는 미국의 방위에서 제외되어 국제연합의 보호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이제 남한에 있던 미군은 모두 철수하게 되고 이 소식은 북한 김일성의 귀는 물론 소련의 스탈린의 귀에도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한반도 전체에 붉은 물을 들이기 위한 김일성의 야망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당시 양쪽의 국력 상황은 한국군은 탱크가 한 대도 없고 국민 성금으로 캐나다로부터 구입한 항공기 10대가 전부인 반면에
북한군은 소련으로부터 탱크 242대 항공기 211대 각종 포 3500문을 확보했기 때문에 김일성은 이 상황에서 남친 공격만 진행하면 10점 10승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3일이면 충분히 서울을 점령하고 50일 안에는 남한 전체를 점령하며 한반도를 공산주의로 뒤덮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본격적으로 무력 적화 통일을 현실화하기 위해 스탈린에게 50차례가 넘는 지원 요청 전문을 보냈는데 반면 스탈린은 2차 대전이라는 어마어마한 경험을 직접적으로 해본 지라 섣불리 김일성의 계획에 찬성할 수는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미국이 보여준 압도적인 공력을 체감한 이상 미국과의 전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배제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은 끝끝내 세 차례나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으로부터 남친에 대한 허락과 지원 약속을 받았고
추가로 중국의 마우저둥으로부터 참전 약속과 모든 전쟁 물자의 지원 약속을 받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스탈린과 마우저둥 그리고 김일성 세 사람이 치밀하게 계획한 6.25 한국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폭풍이라는 작전명 하에 38도 경계선을 넘어 전면적인 남한 침공을 개시하였습니다. 
소련의 간접적인 지원을 받은 북한군은 전차와 전투기를 앞세워 서울을 향해 매우 빠른 속도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아무것도 없었던 국군은 북한군의 기습 공격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1950년 6월 달력을 보면 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는데 육군이 휴가를 많이 가는 즉 일주일 중 방어가 가장 허술한 요일이었습니다. 
하필이면 전쟁이 발발하기 이틀 전 전방에 있던 군인의 절반을 휴가를 보내는 바람에 나만의 부대는 텅 비어 있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죠. 
때문에 소수의 인원을 순환적으로 휴가를 보내는 것이 아니고 왜 전쟁이 발발하기 이틀 전에 대규모 휴가를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한국전쟁 10대 미스터리로 꼽히게 됩니다.
전쟁 발발 3일 만인 6월 28일 북한의 빠른 침투에 남한은 대응도 제대로 못하고 수도 서울을 점령당하고 맙니다. 
이때 북한의 전차가 서울 시내까지 들어서자 국군은 북한이 한강 이남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강 대교를 폭파시키는 결정을 내립니다. 
다리 폭파 소식을 접해 들은 4만 4천 명 가량의 병력은 중장비는 물론 소총까지 모두 버리고 후퇴를 해야 했습니다. 
이승만은 이미 새벽 4시에 특별열차 편으로 서울을 빠져나가 대전으로 피난하였으며 한강 이북은 북한군에게 완전히 점령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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