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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친일파의 후손 그들은 벌을 받았을까?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by 로이인랑 2023.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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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독립운동가분들의 후손은 힘들게 사시고 있는 반면 친일파들의 후손은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들었어 아시죠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친일파의 후손들은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친일파도 종류가 좀 있습니다. 그게 일제강점기 전에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와 일제강점기 후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고 민족을 팔아먹은 친일파들이
대한제국의 주권이 일본에게 넘어가기까지 한 번에 넘어간 게 아니라 국가의 권한이 하나 둘 과정을 밟아가며 일제에게 빼앗겼습니다. 
굵직한 것만 보면 1905년 을사늑약 때 외교권이 박탈되었고 1907년 정미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면서 국방력을 빼앗겼고 1910년 경술국치 때 최종적으로 한반도의 주권 전체가 일제에 넘어가게 됩니다. 
이 조약들은 전부 강요에 의한 건 맞지만 어찌 됐든 조약이기 때문에 상호 합의와 서명이 필요합니다.
이때 각 조약별로 나서서 서명한 일제의 앞잡이들이 바로 이 친일파들인데 을사늑약 때 서명한 관료들을 을사오적 총 5명 정미조약 때 서명한 관료들을 정미칠적 총 7명 그리고 경술국치에 서명했던 관료들을 경술국적이라고 합니다. 
경술 국적은 총 8명이죠. 여기서 삼관왕하는 딱 한 명 있습니다. 
을사오적 정매칠적 경술 국적 모두에 해당하는 단 한 사람
모든 조약을 주도하여 모든 국관을 갖다 바친 친일파의 리더 격인 이완용입니다. 
이완용은 몰락한 양반 지반 출신이지만 그의 양아버지가 흥선대원군과 사돈지간이었다고 합니다. 
이완용은 마지막 순종 황제가 세자였던 시절에 그의 스승이기도 했고 독립협회의 2대 회장 출신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이 변절했던 거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이완용은 일제로부터 높은 관측과 현 시세 약 100억 가량의 보상금은 물론 1등 자위까지 하사받습니다.
3.1운동 직전엔 3.1운동을 기획했던 손병희가 이완용을 찾아가 이완용도 3.1운동에 참여해 죄를 씻으라며 제안을 했는데 이완용은 본인이 나서는 순간 맞아 죽을 것 같다며 거절합니다. 
알긴 아네요. 그렇게 평생을 노리다가 1926년 67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이완영이 가지고 있던 땅이 여의도 면적의 7배 가량이었다고 합니다. 
죽기 전 이완용은 그 땅을 현금화했고 그 현금이 그대로 그의 아들에게 상속되었습니다.
이완용의 아들 이한군은 당대에도 방탕하기로 유명했다고 하고 그의 아들들 그러니까 이완용의 손자들이죠. 
이 아들들도 싹 다 일제로부터 자기를 하사받습니다. 
자기를 하사 받은 만큼 일본인 중일전쟁이니 대륙전쟁을 할 때 징병을 홍보해주고 헌금도 주도하는 친일 행위를 했죠. 
이완용의 증손자 중에 이윤형이라고 있는데 1993년에 이윤형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습니다. 
자기 증조 할아버지인 이완용 때부터 내려온 토지를 돌려놓으라는 겁니다.
이 소송에서 심지어 이깁니다. 이 이윤형은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을 역임한 적도 있으며 국가로부터 다시 돌려받은 이완용의 토지 중 지금은 서울시 부과연동 토지 일부를 처분합니다. 
이때 처분한 금액이 30억 원 알려진 게 이 정도니까 실제로는 더 했겠죠. 
이완영이 가지고 있던 토지가 여의도의 7배였는데 그중 고작 북아현동 반을 30억이 나왔으니
추산 불가 현재 그 가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와 그 어마무시한 돈의 행방은 오리무중입니다. 
여러 곳에서 추적하려고 했지만 행방을 찾는 데 실패했다죠 그러나 이완용의 손자들의 명의로 된 토지와 야산들은 조금씩 계속 입증된 것들이 있습니다.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 국적에서 3관왕은 이관용이 한 사람으로 유일하고 2관왕을 한 사람들이 4명이 있습니다. 
우선 을사오적과 경술 국적에 해당하는 박재순
오랫동안 외부 대신을 하고 날아 팔아 먹을 때 관직이 내부 대신이었으니까 상당히 높은 관직이었죠. 
박재수는 친일파들 중에서 가장 글을 잘 쓰는데 가장 교활했다는 평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박재수는 같은 친일파들한테 너무 온건하다고도 욕을 먹었습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이 되자 한국에 있으면 개인의 신변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일본으로 넘어갔고 현재 시세액 기준 약 20억 원의 보상금을 받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매년 그에 준하는 연금을 받기도 했고요 박재순의 아들 박부양은 20살 때부터 그때는 정말 귀한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고 역시 스무 살 때 한성은행의 대주주가 됩니다. 
그런데 박부양의 아들 그러니까 박재순의 손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비판하며 광복군으로 활동하고 해방 후에는 서울대 음대 졸업 후 성악가로 활동하다가 강원대학교의 교수가 됩니다. 
이 권왕을 한 또 한 사람은 정미칠적과 경술 국적에 당하는 고영희가 있습니다.
고영이는 대한산림협회와 토지조사국에 있으면서 한반도의 산과 토지를 일제에게 그대로 바치는 데 앞장섰습니다. 
박재순처럼 강제 병합 후 20억 원 가량의 보상금을 그리고 그에 준하는 연금을 받았죠. 
그의 아들 고희경도 역시 자기를 세습받은 후 친일 관료를 역임했죠. 
그런데 2009년에는 그 후손들이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토지 일부를 매각한 후 약 4억 원 가량의 현금을 자진해서 국가에 반납했습니다. 
세 번째 2관왕은 이병모입니다 고영이와 마찬가지로 정미칠적과 경술 국적에 해당하는 사람이죠.
이병무는 군인 출신으로 정밀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이후 일제가 직접 관리하던 친일 군대를 지휘하였습니다. 
당시 직급은 중장 정도였다고 하네요. 
역시 가문 대대로 잘 먹고 잘 살았고 이병모의 증손자가 12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88년에는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92년에는 환경부 차관을 현재는 모 대기업의 부회장이랍니다. 
모 언론에서는 최고 환경 전략 전문가로 뽑혔습니다. 
마지막 2관왕은 조중웅입니다.
조중웅도 정미칠적과 경술 국적에 해당합니다. 
일제강점기 때는 한국어를 최소화하고 일본어 교육을 확장하자고 아이디어를 제안했습니다. 
조중흥은 남양주에 약 2억 상당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고 당연히 세습이 됐겠죠. 
그의 아들은 일본 제국군 육군 소유였고요 방금 말씀드린 남양주 지역의 토지는 2008년경 국가가 환수하는데 왜 개인의 재산을 정부에서 뺏어가냐며 불복한 채 그 후손들이 항소를 하기도 했습니다.
항소는 폐소해서 국가가 환수해 가기는 합니다. 
이제부터는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 국적들 중 말씀드리지 않은 개별 매국노드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해간 을사늑약은 이토 히로부미가 군대를 동원해 군거를 포위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가운데 대한제국의 각료들이 처음엔 전부 반대하다가 이완용을 선두로 이지용 이근택이 찬성을 했고 그들의 설득 끝에 권중형과 박재순도 찬성합니다. 
이완용과 박재순은 설명을 드렸고
다른 세 명이 이지용 이견택 권중현입니다. 
이지용은 마음에 들어 하는 기생을 첩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이 기생은 역적의 첩이 되기 싫다며 거절했다고 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엄청난 보상금을 챙긴 이지용은 정작 이 돈을 도박에 다 날려버렸다고 합니다. 
이근택은 형제와 그 아들들까지 전부 친일 집안이었고 이근택의 증손자 중 한 명은 공주대학교의 총장이기도 했습니다.
권중현은 그나마 3.1운동 당시 죄책감을 느끼고 일제로부터 받은 자비를 반납하려고 했으나 일제가 거절했답니다. 
물론 아들들도 친일파였고 국가가 공식적으로 환수한 권중현 지방 땅의 공시지가가 13억이었죠. 
그의 손자는 한국고미술협회에서 일했다죠 다음은 대한민국의 군대가 해산된 정미칠조액의 매국노들 정미칠적을 보겠습니다. 
이완용이 주도했던 정밀칠적에는 앞서 말씀드린 이완용 이병무 고영희 조중웅 외에도 송병준 이재곤 임선준이 있었습니다.
송병주는 가장 악질이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돈을 밝혔고 친일단체와 친일 종교를 만들어 공금을 횡령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재산은 부동산의 형태로 대대로 이어지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환수했는데 그 증손자는 송병준이 애국자라며 망언을 했고 헌법 소원을 제기한 적도 있습니다. 
아울러 2010년에는 송병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인천시 부평구의 땅이 집안 땅이라며 국가에 소송을 건 적이 있는데 그 경제적 가치가 3천억이었다고 합니다.
송병준의 손자 둘은 현 스포츠토토의 전신이 되는 한 회사의 사장과 부사장이었습니다. 
이재곤도 땅 부자였으나 그 아들들 중 2명은 아버지와 달리 독립운동에 몸을 담던 중 이승만 대통령과 친분을 맺어 광복 후 정계와 재계를 왔다. 
갔다. 합니다. 임선주는 이완용과 사돈 집안이었고 역시 막대한 재산이 가문 대대로 세습되었습니다. 
마지막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
이때 회의장에 있던 8명 중에는 역시 말씀드린 이완용 이병무 고영희 조중훈 박재순 외에도 윤덕영 민병석 조민희가 있었습니다. 
윤덕영의 재산은 이완용보다 훨씬 많았으며 당시 약 2만 평의 땅이 있었다고 합니다. 
경복궁 기준 서쪽 전체가 전부 윤덕영의 집이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민병석의 두 아들은 전부 해방 후
사법기관의 거물로 군림했는데 장남은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대법원장을 역임했고 차남은 서울지법 판사였습니다. 
손자들도 법관 혹은 기업인으로 재산을 모았습니다. 
민병석의 가문은 충청도의 약 10억 정도의 땅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마지막 조민희는 이완용의 처남이며 친일의 대가로 보상금과 연금 형태의 수당을 받았으나 전부 도박으로 탕진했다고 합니다. 
2005년 활동을 시작한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2006년경 1차적으로 106명 2007년경 2차적으로 195명
2009년 3차로 705명의 친일파 명단을 시기로 구분하여 발표한 후 집계가 가능한 친일파들의 재산을 환수시켰습니다. 
환수한 금액이 몇십억에 이르긴 하지만 비율로 따지면 10%도 환수 못했고 그 후손들은 뻔뻔하게도 국가에게 소송을 걸었답니다. 
사실 친일파들의 재산을 공식적으로 정확하게 집산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찾을 수 없게 감춰놨을 것이며 무엇보다 그 땅들을 하루빨리 처분했단 말이죠.
처분해서 나오는 현금의 일부를 변호사와 브동산 브로커들에게 수수료로 떼준다고 하니까 다들 득달같이 달려들어 세탁을 해주는 바람에 정확한 재산을 알기 어렵다고 합니다. 
서울 지역의 노른자 땅 70%가량이 친일파 후손들의 땅이라고 하네요. 
이제 와서 친일파 청산은 어렵겠지만 최소한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친일파의 후손들은 비록 본인들은 억울하겠지만 감추려 들지 말고 조상들의 부끄러운 짓에 대해 사죄하려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이는 게 떳떳한 대한민국 국민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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