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티비 시리즈는 서양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공성전 중에 하나인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담고 있습니다.
천사백오십삼년 메헤맷 이세 황제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타티노플 오늘날 터키의 이스탄불을 공격하게 되고 그곳에 남아있던 수천 년 로마 종묘 사직의 종지부를 찍게 되죠.
이 전투의 여파가 얼마나 컸는지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대부분의 제가 읽던 서양 역사책들은 1453년을 중세와 근대를 나누는 분기점으로 사용하곤 했습니다.
이 전투가 유명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첫 번째 이유는 이제 콘스탄티노플은 그 이전까지 함락시키기가 거의 불가능한 도시로 알려져 있었어요.
콘스탄티노플은 이렇게 삼각형으로 생겼는데 한쪽은 육지를 향하고 있고 두 면은 바다를 향하고
있습니다. 일단 육지 쪽에서 이 도시를 공격하려고 그러면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5세기에 지은 거대한 삼중성벽 오늘날까지도 이스탄불의 관광 명물 중의 하나인 피오도스안 워를 공격해야 이 성벽의 방어 체제가 얼마나 견고한지 히오도시우스가 오백 년 정도의 이 성벽을 지은 이후로 천 년 동안 어떤 군대도 성공적으로 이 성벽을 공격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또 바다 쪽에서 상륙 작전을 벌이기가 쉬웠냐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이 콘스탄티노플의 두 면 중 남쪽 면은 보스포러스 해협이라고 하는 굉장히 물살이 빠른 바다를 면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거기에 당시의 항해 기술로 배를 정박시키거나 배를 고정시키고 그것을 플랫폼으로 이용해가지고 공성전을 펼친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죠.
콘스탄티노플의 취약점이 있다면 북쪽 면 골든혼이라고 하는 내륙해를 향하고 있는 항구였을
겁니다. 근데 이쪽을 공격하려고 그러면 일단 적군이 함대를 골든혼으로 들여보내야 되는데 이 골든혼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동로마 군대에서 거대한 쇠사슬을 설치했습니다.
그래서 적군에 함대가 들어오려고 그러면 쇠사슬을 당겨서 입구를 가로막아서 이 안으로 배를 들여보내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죠.
이 메인 맷 니세가 굉장히 기발한 아이디어를 냅니다.
병사들한테 이 배를 지고 산을 넘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배를 지고 산을 넘어서 오스만 제국의 함대를 골든혼 내륙케로 진입시키는 데 성공하게 되고 콘스탄티노프는 결국 함락 당하게 되죠.
그래서 이제 매 몇 잇의 창의성과 지략이 오늘날까지 세계 전쟁사에서 하나의 레전드로 남아 있죠 이 tv 시리즈는 그래서 이 전투 당시 동남아 제국의 지휘부와 오스만 제국의 지휘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상세하게 그렸습니다.
하지만 이 내용을 좀 더 재미있게 보기 위해서는 이 콘스탄티노플이 당시 서양 사람들한테 어떤 도시였는지를 이해할 필요 있습니다.
이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당시 서구 사회에서 거의 지구의 종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 도시는 엄청난 역사적 종교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이 상징성을 이해하면 이 tv 시리즈도 더 재밌게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다음 주에 알파고 씨와 벌일 본격적인 터키 역사 토크도 더 재밌게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오늘 에피소드 준비해봤습니다.
일단 한국인이 터키의 역사를 처음. 접하면 가장 헷갈리는 것이 터키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는 우리가 민족의 이름과 땅의 이름을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한민족 한반도 한국처럼 나라 이름 민족 이름 땅의 이름을 거의 동일시 하죠.
하지만 터키의 역사는 이렇게 생각을 하면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이 터키라는 나라 이름 자체가 투르키야 투르크족의 나라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투르크 족들이 오늘날 우리가 터키라고 부르는 땅에 산 거는 약 1천 년 정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터키라고 부르는 땅은 굉장히 많은 민족들이 이곳으로 이주에 와서 문명의 꽃을 폈다가 또 망하고 다른 민족이 이주에서 또 문명의 꽃을 피고 이런 역사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곳입니다.
근데 이 민족들이 다 투르크족들이 아니기 때문에 이 역사 전체를 터키의 역사라고 부르기가 굉장히 애매하죠.
그래서 이 전체 역사를 얘기할 때는 터키의 역사라고 하기보다는 터키가 오늘날에 위치하고 있는 그 지역의 이름 아나톨리아 반도의 이름을 따서 아나톨리아의 역사라고 얘기를 합니다.
이 시리즈에 나오는 오스만 제국은 이제 스스로를 이슬람의 수호자로 자청했기 때문에 터키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슬람의 역사 즉 중동의 역사와 훨씬 더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 아나톨리아의 역사 투르크족 이전에 이 지역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은 서양 문명의 샘 또는 요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서양인에게 훨씬 더 중요한 감정적 역사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보자면 제가 서양 미술사를 공부할 때 서구 문명 특히 지중의 문화권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문명의 흔적이 어디냐라고 그러면 차탈허역이라고 하는 유적지를 얘기했어요.
이 유적지가 어디냐 바로 오늘날의 터키 아나톨리아 반도에 있습니다.
또 지중해권에서 처음으로 철기 문명을 꽃 피웠다고 여겨지는 히타이트 문명도 기원전 1200년 정도의 아나톨리아에서 꽃을 피웠었죠.
또 이제 서양 사람들이 어떻게 보면 자신들의 정신적 직계 선조라고 여기는 문명은 고대 그리스 문명이죠.
고대 그리스 하면은 우리 머리속에는 이제 오늘날의 그리스 그 지역이 떠오르지만 고대 그리스 문명은 지중해권에 훨씬 더 넓게 분포돼 있었고 그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찬란한 도시 중에 몇 개가 아나톨리아 반도에 위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터키에 관광을 하러 가게 되면은 에페소스라든지 밀레토라든지 사디스 같은 굉장히 아름다운 고대 그리스 문화권의 도시들을 방문하게 되죠.
하지만 이제 콘스탄티노플에게 함락당했던 중세 유럽 사람들에게 콘스탄티노플은 그것보다 더 직접적이고 근접한 의미가 있었죠.
바로 이 지역을 당시 사람들은 세계 그리스도 교회 총본부라고 여겼다는 거예요.
지중해권의 그리스도교가 퍼진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컨스탄티누스라고 불리는 로마의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한 거죠.
그게 어디입니까 니케아라는 곳이에요.
니케아도 오늘날 아나톨리아 반도에 위치를 하고 있죠 그리고 그 콘스탄티노스의 이름을 따서 로마의 두 번째 수도로 지정된 곳이 콘스탄티노플이었기 때문에 이 콘스탄티노플은 모든 그리스도교인들한테 신성하고 성스러운 도시였어요.
실제로 콘스탄티노플은 그리스도교 권에서 가장 큰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천백 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콘스타틴노플의 인구가 프랑스에서 가장 큰 도시 열 개의 인구를 합쳐놓은 것보다 크다고 했을 정도로 사실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크고 가장 찬란하고 가장 부유한 도시가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또 물론 둘이서 서로 기싸움을 많이 하긴 했지만 이 로마에 있는 교황과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그리스 정교의 대주교는 전 세계 그리스도 교인들이 그리스도교 커뮤니티의 투탑으로 인정을 하는 권력자들이기도 했죠.
그렇기 때문에 이 도시가 이슬람교도들의 수호자를 자청하는 투르크족들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이 기독교 커뮤니티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당시 서유럽 사람들이 이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세계의 종말처럼 받아들인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이곳이 로마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이에요.
사실 거의 대부분의 중세기의 서유럽 사람들은 스스로를 로마인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부분이 사실 우리가 중세 역사를 공부할 때 한국인으로서 굉장히 헷갈리는 부분이에요.
왜냐하면 우리 역사 책에서는 로마 시대는 약 460년에서 470년 경에 끝납니다.
우리가 공부한 역사 책에서는 이제 로마라는 거대한 나라가 있었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로 이 제국이 둘로 나뉘죠
서로마와 동로마로 나뉘게 되고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가 암살을 당하면서 그때부터 로마시대는 끝이 나고 흔히 우리가 암흑기 또는 중세기라고 불리는 그 시대가 시작했다.
이렇게 배웠단 말이에요. 하지만 당시 사람들한테는 로마 시대가 끝이 난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냐 그 당시 로마라는 단어는 어떤 한 왕조나 어떤 정치 시스템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중에서 꼽혔던 고대 도시 문명에서 파생된 모든 삶의 형태와 종교와 철학을 총칭하는 단어였습니다.
그리고 그 문명을 계승하자 라고 선택을 한 사람들은 모두 다 로마인이라고 스스로 느꼈어요.
근데 그 당시 서유럽 귀족들을 봅시다 로마의 국교였던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고 그리고 로마의 언어였던 라틴어로 미사를 드리고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국제회의를 했었죠.
그리고 왕들 사이에 분쟁이 나면 로마 큐리아 바티칸에 있는
즉 로마라는 도시에 있는 교황청에서 그 분쟁을 해결했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의 법을 따르고 로마의 종교를 따르고 로마의 언어를 쓰니까 우리는 로만이다 라고 느끼고 있었던 거죠.
그만큼 동로마 황제도 어떻게 보면 형제 황제라고 느꼈다는 겁니다.
이거를 볼 수 있는 것이 이제 교황님의 당시 공식 명칭이 라티노로 폰티펙스 막시무스였는데 이것은 로마에서 주피터 신을 떠받들던 제사장과 정확하게 같은 타이틀입니다.
그리고 그 왕들끼리의 분쟁을 해결하던 일종의 법적 역할을 하던 커뮤니티가 있는데 이것을 쿠리아 로마나라고 불렀는데 쿠리아라는 것은 로마 시대에 행정 모임 또는 지역 의회를 뜻하는 단어에요.
게다가 성당을 갖다가 대체로 우리가 오늘날까지도 바실리카라고 부르죠.
바실리카는 로마에서 일종의 동사무소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당시에 서유럽에 살던 사람들은 성당에서 출생 등록을 하고 결혼 등록을 하고 사망 신고를 하고 성당을 통해서 분쟁을 해결하고 법 해석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들이 아직도 로마 행정체제에
지배를 받고 있다고 느꼈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로마 제국은 멸망한 적이 없어요.
게다가 이 게르만족 후의 왕 중에서 가장 파워풀한 사람 나중에 독일의 황제를 뭐라고 부르죠.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라고 불렀기 때문에 실제로 그들의 머릿속에는 로마 제국의 법도 살아있고 종교도 살아있고 황제도 살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조금 더 뒤로 돌아가서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 갈렸던 사건도 사실 그 당시 로마인들에게는 그렇게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이 강성했을 때도 이 지중해를 반으로 나눠서 동쪽과 서쪽은 다른 언어와 다른 문화를 계승한 조금 다른 문명이었어요.
한 제국의 영토이긴 했지만 서로 굉장히 달랐다는 겁니다.
이 콘스탄티노프를 중심으로 오늘날의 그리스 터키 그 다음에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해가지고 이집트까지 내려오는 이 반달 모양의 땅 같은 경우에는 그 로마 제국의 정복을 당하기 이전에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을 했던 땅입니다.
그리고 그 지역은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들 셀리코스라든지 프톨레마이오스 같은 사람들의 후예들이 여러 왕국으로 나눠서 통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역은 그리스의 문화를 계승하고 이미 그리스어를 엘리트들이 정치 외교 또는 학문의 언어로 사용하는 지역이었고 그에 비해서 이제 로마만큼 도시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던 오늘날의 프랑스나 스페인 같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자 로마의 도시 계획이라든지 법도라든지 그리고 그들의 언어인 라티너를 완전히 받아들이게 됐죠.
그래서 이제 서유럽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프를 중심으로 한 우리가 동로마 제국이라고 불리는 곳을 대체로 그냥 그리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중세기에 우리가 그리스라는 단어를 보면 굉장히 조심해야 되는 게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라고 부르는 나라는 큰 관계가 없어요.
당시에 그리스 문화를 계승하고 그리스어를 쓰는 엘리트들이 상업과 정치를 독점하고 있던 지중해 동쪽 전반을 뜻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비잔틴 제국의 최고 비밀 무기 중에 하나가 배에서 화염 방사기를 쏠 수 있는 이렇게 불을 쏠 수 있는 이런 기계가 있었는데 그걸 갖다가 역사 책에서 오늘날까지 그리 파이어라고 부르고요 그다음에 콘스탄티노프를 중심으로 발달한 그리스도 교회 갈레를 우리가 그스 정교회라고 부르죠.
하지만 거기서 그리스라는 것은 동로마 제국 전체를 뜻하는 거죠.
그렇다면 이제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사람들은 서유럽 사람들을 어떻게 불렀냐 그들을 같은 로마인으로 존중해 줄 때는 라틴이라고 불렀고요
실제로 로마의 언어인 라티너를 쓰는 사람들이다.
근데 그렇게 부르기 싫을 때는 처음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타이틀을 받은 게르만족 추장이 오늘날 프랑스의 이름이 되는 프랑크라는 부족의 추장이었기 때문에 그냥 어느 나라 사람이든 상관없이 전부 다 프랑크라고 불렀었습니다.
그래서 이쪽은 라틴과 프랑크 그리고 이쪽은 그리스어가 지배하는 개의 문화권에 두 명의 로마 황제가 서로 싸우기도 하고 서로 돕기도 하면서 이루어 나간 것이 바로 중세 문명이죠.
사실 중세 역사의 대부분은 이 두 문화권의 어떤 인터렉션으로 이해할 수가 있어요.
171년에 유명한 사건이 있죠. 만지컬트라는 곳에서 동남아 제국의 군대가 투르크 군대에게 대패를 하게 그러면서 동구 그리스도 교권이 전부 다 위험해졌다고 하면서 콘스탄트노프에 있는 황제가 로마에 있는 교황한테 sos를 보내죠 그때 로마의 교황청의 얼반 2세라고 하는 교황이 남부 프랑스에 가가지고 그 유명한 신이 원하신다 연설을 하게 되고 그래서 십자군이 출발을 하게 됐죠.
또 이 라틴어권과 그리스어권 간에 굉장히 잔혹한 싸움이 있을 때도 많았습니다.
뭐 우리가 제일 잘 알고 있는 싸움은 천오십사년에 일어난 시즌이라고 하는 그리스 정교회와 카톨릭이 완전히 서로 결별을 선언한 그 사건도 있었지만 1204년에 십자군들이 원래 공격해야 하는 이슬람 교도들을 공격하지 않고 콘스탄티노프를 공격한 사건
있습니다. 그때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한 엄청난 보물들이 오늘날 베네치아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산마르코 성당에 전부 다 전시가 되어 있죠 그런데 이것도 이제 그 당시에는 사실 집안 싸움이었어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황실의 조카 중에 한 명이 자기가 왕위에 앉게 되면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가 교황청에 충성을 하도록 하겠다고 서약을 하고 십자군들을 끌고 들어온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도 같은 집안에서 누가 우위를 차지하느냐의 싸움이었던 거예요.
하지만 천사백오십삼년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완전히 다르죠 이 그리스어권과 라티너권으로 돼 있는 두 개의 서구 문명의 어떤 심장과 두뇌 같은 하나가 완전히 없어져 버린 사건이었고 서유럽은 그들을 기독교의 역사와는 물론 고대 그리스와 히타 이 모든 지중에 고대 역사와 연결시켜주는 탯줄이 끊어져 버리는 그런 사건이었던 거죠.
그 이후로유럽은 대서양으로 눈을 돌리고 그래서 대양의 시대가 열리기 때문에 이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대체로 중세의 종지부다라고 우리가 얘기를 하죠.
사실 이제 이 그리스어권과 라티너권 이 두 개의 유럽은 서로 굉장히 많은 소통을 하고 있었고 거기서 적혈구 역할을 해주는 민족이 바로 이탈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티비 시리즈에도 보면은 가장 열심히 컨스턴티노프를 방어하기 위해서 싸우는 주스티니아니라고 하는 용병이 있는데 그 사람은 이탈리아의 제노바
컨스탄톤톤플이 망한 다음에 이 이탈리아인들과 그 이탈리아인들 주변에 있던 그리스인들이 대거 이탈리아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이탈리아에서 콘스탄티노플에 축적돼 있는 그 수천 년의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와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관련된 지식과 예술과 노하우가 이탈리아로 전파되고 그곳에서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되기 때문에 이것이 이제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중세와 근대의 분기점으로 보면 또 다른 큰 이유죠
근데 이제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제가 미국과 프랑스 역사 책을 보고 배운 거라는 거예요.
즉 이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서양인들한테 가지고 있는 의미만 쭉 지금 설명을 한 겁니다.
하지만 이 콘스탄티노프를 빼앗은 민족 즉 투르크족의 후예들은 이 역사적인 사건을 어떻게 볼까 굉장히 궁금하고요 실제 터키인의 목소리로 이 사건의 의미에 대해서 들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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