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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대 이집트의 역사 나일강 이집트의 발전과정 자세히 설명해 드립니다.

by 로이인랑 2023.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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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천 년경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나일강 일대에서 이집트가 시작됩니다. 
사하라 사막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거대한 강이 흐르는 이곳에 사람들이 정착을 한 것입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이 발달하는 데에는 이 나일강이 매우 크게 작용했는데 나일강은 다른 강에서는 찾기 힘든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기적으로 범람한다는 것이죠. 
매년 5월에 내리는 폭우 때문에 물이 넘쳐 흐르게 되고 이것이 나일강 일대의 땅을 굉장히 비옥하게 해주고 있었습니다. 
훗날 이 지역의 엄청난 농업 생산량으로 이집트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헤게모니를 누리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식량을 확보하거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는데 그렇게 나일강을 중심으로 두 개의 왕국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가 등장합니다.
이곳을 통치하던 왕들은 각각 하얀색과 빨간색 왕관을 쓰면서 자신의 권력을 표시했으며 후에는 매네스과 두 왕국을 통일하면서 하얀색과 빨간색 왕관을 이중으로 쓰게 되죠. 
그리고 기원전 3100년 본격적인 이집트 왕조의 시작을 알립니다. 
사실 이 당시 아직 북유럽에서는 메모드가 살고 있었고 고조선에는 단군 신화가 생기기도 전의 일이었죠. 
위에는 바다 주위는 사막으로 이루어진 폐쇄된 지형으로 고대 이집트 초기에는 오랫동안 이민족의 침략이 적었습니다.
이집트의 사람들은 이곳의 최고 통치자에게 파라오라는 타이틀을 붙이며 그들을 신처럼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파라오 자신 또한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으며 육체가 죽게 되면 영혼은 다시 돌아와 생명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파라오의 영혼이 돌아와서 편안히 쉴 주거 공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피라미드입니다. 
피라미드에 대해 간단히 설명드리자면 피라미드의 건설은 기원전 2천668년 파라오 조세르 때 처음 만들어졌는데 이때는 지금의 모양과 약간 다른 계단식 피라미드가 건설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집트 사회는 더욱 안정되고 강력해져 파라오들은 피라미드를 더욱 높게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파라오 쿠프 때 기존의 피라미드에서 그 규모를 극대화하여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 피라미드를 완성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10만 명이 20년에 걸쳐 지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초기 이집트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나라로 발전되었습니다. 
피라미드 뿐만 아니라 왕의 신전과 스핑크스 같은 최고의 건축물은 물론 그에 따르는 시설물들과 왕을 재현하는 현상들을 통해 파로의 절대 권력을 드러냈죠.
하지만 이러한 시기가 지나고 파라오의 권력을 위협하는 존재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이집트의 지방 귀족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점점 파라오의 권위를 위협해가자 급기야 각 지방에는 귀족들이 왕권을 능가해 버리기까지 합니다. 
이로 인해 사회는 불안정해져 갔고 파라오의 권한도 서서히 무너져 갔습니다. 
그 후로 70일 동안 70명의 팔로워가 생겼다고 할 정도로 대혼란의 시기를 겪습니다. 
이집트는 외부의 침입보다 내부의 권력 다툼이 극심해지면서 암흑기가 지속되죠
이러한 상황은 약 140년의 혼란기를 거치고 전쟁에 능한 멘토호 태풍 2세가 각지의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이집트의 혼란기를 끝내버립니다. 
그에게는 두 땅을 통일한 자라는 칭호가 붙게 되고 전쟁에 능한 파로답게 전쟁과 관련한 유물을 많이 남깁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집트의 군사력은 정체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아시아 계통의 인종 힉소스인들이
나일강 동부를 침략해 옵니다. 그들은 말이 끄는 전차와 활과 같은 신무기로 순식간에 이집트인들을 점령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전투는 처음이었던 이집트인들은 힉소스에게 무릎을 꿇고 맙니다. 
나일강 하류 삼각주 일대 이집트는 약 100년간 힉소스의 직접적인 지배에 복종해야만 했고 산 이집트는 힉소스로부터 살아남아 분열된 형태로 유지하게 됩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점령당한 하이집트에서 힉소스인이 이집트의 기본적인 틀을 유지하고 파라오 자리에 오른 것만으로도 만족했기 때문에
이집트 문명의 독창성은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죠. 
이러한 침입자 힉소스의 지배는 아흐모스 1세에 의해 몰락합니다. 
아흐모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힉소스에 대항하여 싸우다 죽고 형제 또한 의문모로 죽음을 당하자 아흐모스가 나일강 유역에서 힉소스를 완전히 몰아낸 것입니다. 
이로써 고대 이집트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 신왕국 시대가 시작됩니다.
이집트 하면 역시 미라에 관한 얘기도 빠질 수 없는데요. 
이들의 사후관은 육체가 죽으면 영혼은 사후 세계로 가지만 시간이 지나면 영혼 또한 육체가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아마포라는 붕대로 시신을 감싸서 육체를 온전히 보존하고자 했는데 이집트의 기후가 워낙 건조해서 시체가 밖에 버려져도 자연적으로 미라가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개나 고양이 같은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들도 모두 미라로 만들었습니다.
이집트 왕국은 지배당한 경험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대폭 강화하기 시작했고 정복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새 왕국 시대의 여왕 하트셉스투가 집권하면서 이집트 번영의 토대를 마련합니다. 
이 당시 외부에서 무력에 의한 침략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전쟁보다는 주변 국가와의 평화적 외교를 통해 불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창조와 건설 평화를 추구하며 통치 기간 동안 성공적인 치세를 이룬 그녀는 고대에서 걸출한 여왕으로 기록됩니다.
그 당시 그녀가 머물렀던 신전은 아직까지도 남겨져 있는데 엄청난 크기와 완벽한 좌우 대칭으로 고대 이집트의 가장 아름다운 기념물로 기록되죠 그녀가 죽고 공동 파라오로 올라 있던 투트모스 3세가 권력을 차지합니다. 
하트셉스트가 주로 무역을 했다면 이집트를 세계 제1의 제국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투트모세는 대규모 군사 정복을 단행합니다. 
그렇게 20년간 17번의 원정을 떠나 약 350개의 크고 작은 도시부터 서아시아 지역까지 차지합니다.
이러한 뚜뚜멋의 3세의 무서운 움직임에 따라 주변국들이 눈치를 보고 이집트에 선물을 보내기도 하였죠. 
약 70년이 흐르고 이집트에는 아크나톤이 파라오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의 아내는 화려한 외모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네페르티티입니다. 
이 사진은 최근 로열티 나우에서 재현한 네페르티티의 현대 모습입니다. 
아마 네페르티티가 현대인이었다면 이런 모습일 거라고 예측되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아크나톤의 시기 이집트에는 종교의 힘이 세지고 있었습니다. 
그중 바람의 신으로 여겨진 암문에게 제사를 지내던 신관들의 권한은 이제 파라오를 능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권력의 위협을 받은 아크나톤은 아예 새로운 신을 만드는데 그것은 태양의 신 아톤이었습니다. 
아문 숭배를 완전히 단절시키고 자신이 창조한 신 아톤을 믿게 하여 권력을 유지하였던 것이죠. 
아크나톤이 죽은 이후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투탕카맨은 원래의 아문 신앙을 부활시켰고 고대 종교를 되돌렸습니다.
안타깝게도 투탕카맨은 18살의 어린 나이로 사망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근친상간으로 인한 유전적 질환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이집트는 왕가를 계승하기 위해 근치 논으로 그 핏줄을 대대로 이었는데 이러한 행위가 유전적인 결함을 낳게 되고 투탕카맨 또한 갖가지 기형을 안고 태어나게 됩니다. 
그는 선천적 내반족으로 걷기가 굉장히 힘들었으며 9개월로 인한 언어 장애 또한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의 사망 원인은 이러한 면역 체계가 약해 말라리아에 걸린 것으로 판단되는 한편 두개골이 골절된 걸로 보아 암살당했다는 설도 거론되고 있습니다. 
1922년에는 그의 무덤에서 어마어마한 유물들이 고스란히 발견되어 엄청난 이슈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투탄카빈이 죽은 후 이집트 왕국의 최고의 전성기를 가져올 파라오 람세스 2세가 즉기합니다. 
그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파라오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90세까지 살아있는 동안 60년을 통치하면서 안으로는 경제적 호황을 누리며 내분을 잠재우는 리더십을 발휘했고 밖으로는 이집트 영토를 넓히고 많은 포로를 확보했던 정복의 영웅으로서 맹위를 떨쳤습니다. 
이러한 명성을 과시하고자 그는 엄청난 건축과 대형 조각을 건립해서 자신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습니다. 
또한 당시 이집트는 세계 최고의 건축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에 고대부터 수혜주 은화 건설을 계속해서 시도하였습니다.
운하가 건설된다면 아프리카 대륙을 삥 둘러 가지 않고 유럽에서 인도양으로 바로 갈 수 있기 때문에 해운업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죠. 
하지만 아무리 기술이 좋은 이집트도 사막지대에서 땅을 파내 운하를 건설한다는 것은 기술과 자금이 굉장히 많이 요구되었습니다. 
실제로 운하 건설 과정에서 12만 명의 인명 피해를 낳게 됩니다. 
람세스 2세가 죽은 후 신항국 시대의 이집트는 점점 세태의 귀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내부 분열과 더불어 여러 외부 세력의 친입에 시달리고 결국 이집트가 점령당하기까지 합니다.
한편 기원전 332년 그리스 반도에 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엄청난 영토 확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는 물론 이집트 페르시아를 거쳐 대제국을 건설하죠. 
이러한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전쟁은 광범위한 지역에 점점 그리스 문화를 퍼뜨리는 시발점이 되었고 그가 죽은 후 고대 세계는 그리스의 영향력으로 뒤덮인 헬레니즘 시대를 열게 됩니다. 
이 헬레니즘 시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혼자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 제국이라고도 불리웠죠
이 헬레니즘 제국의 거대한 영토는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4개의 왕조로 분열되었습니다. 
그중 이집트는 푸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하에 지배되는데 푸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집트인들을 쉽게 통치하기 위해 파라오로 승계하고 기존의 이집트를 이어가려고 했습니다. 
즉 순수 이집트인이 아닌 그리스 계통의 포톨레마에서의 혈통이 파라오 자리에 오른 것이었죠.
수백 년이 흐르면서 그리스와 이집트 문화는 점점 결합되어 갔고 이집트는 그 시대에 가장 발전한 문명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정치적 격변과 여러 차례 폭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러한 혼란 속에서 푸툴르마이어스의 파라오로 클레오파트라가 자리에 오릅니다. 
외부에서는 로마가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힘이 약한 이집트는 로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문에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권력자로 사로잡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습니다. 
로마의 두 권력자로 매혹시킨 클레오파트라의 파라만장한 스토리는 채널 영상에 따로 제작되어 있어서 더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클레오파트라가 자결로 세상을 떠나자 이집트 파라오의 명맥은 그녀를 끝으로 완전히 끊어져 버립니다. 
그리고 이집트는 당시 지중해를 제패하던 로마의 속주곡으로 넘어가 버립니다.
로마의 속조가 되어버린 이집트는 곡물부터 기타 공유품들까지 로마에 공급해주는 곡창지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집트는 동방 교육의 중심지 지중해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속조임에도 부유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수학과 공학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러한 이집트의 엄청난 영향력은 동남아 제국 시대까지도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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