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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한제국 황제 직계 후손들 조선이 멸망한 후 황족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 드려요.

by 로이인랑 2023.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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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는 총 25명의 왕들과 2명의 황제가 있었습니다. 


조선의 26대 왕이었던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왕에서 황제로 등극했고 조선 왕실은 더 이상 왕족이 아닌 황족이 되었죠. 
그런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역사를 배울 때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사를 배우다가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면 끝에 두 황제 고종과 순종 황제 이후 그 황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 못합니다.
그 후손들 황제의 직계 후손들은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대한제국을 선포한 1대 황제 고종은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된 이후 덕수궁에서 만년을 계속 보냅니다. 
그곳에서 한반도의 주권이 일본에게 완전히 넘어가는 과정 전부를 목격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9년 후였던 1919년 사망합니다 고종 황제에게는 한 명의 황비와 꽤 많은 후궁들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자녀들도 많아서 황실 가족이 굉장히 많았는데 원래 그 시대에는 거의 다 그랬듯이 대부분이 갓난 아기일 때 사망하고 요절하지 않은 자녀들만 세워봤을 때는 3명의 아들들과 한 명의 딸이 있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고종의 첫째 아들은 한 명의 황비에 해당하는 이 명성황후에게서 나온 황태자 이 척입니다. 
고종 황제의 유일한 적자였기 때문에 1907년 고종 황제가 일제에게 강제 퇴위된 후 황태자 2척이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황제였던 순종 황제로 즉위합니다.
순종 황제는 1907년부터 한일 병합이 되던 1910년까지 약 3년 정도 황제로 있었지만 이완용 등의 친일파들과 일제에게 휘둘리는 꼭두각시 황제였고 결국 1910년 마찬가지로 강제 퇴위당하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아버지 고종 황제가 덕수궁에 있었다면 순종 황제는 창덕궁에서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일제강점기 이후론 황제의 명칭이 인정되지 않고 이왕이라는 호칭을 강요받았죠. 
그리고 조선 왕실은 이왕가라고 불렀습니다.
순종 황제에게는 순정 황후라는 황비가 한 명 있었는데 둘 사이에서 자녀가 없었습니다. 
순종 황제는 아버지 고종 황제가 서거한 지 7년 후였던 1926년 사망하지만 아내 순정 황후는 계속 창덕궁에서 살아갑니다. 
그 상태로 해방도 겪고 6.25 전쟁도 겪고 4.19 혁명도 겪고 박정희의 쿠데타도 다 보고 난 뒤였던 1966년 창덕궁에서 사망하죠.
일제강점기 때 이왕가 즉 황족들은 전부 다 반강제적으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유일하게 순정 황후만 한국에 남아 있었습니다. 
남편 순종황제 사후론 가족들 중 혼자만 한국에 있다가 해방되고는 이승만 정부에게 찬밥 신세를 당해야 했죠. 
그렇게 쓸쓸하게 1966년까지 살아계시다가 잠드신 조선의 마지막 황비였습니다.
참고로 순정 황후는 6.25 전쟁 때도 서울을 떠나지 않았으며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감히 순정 황후만큼은 건드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고종의 둘째 아들은 의친왕 이강입니다. 
대한제국 선포 전에는 의화군이라는 왕호였으나 왕족이 황족으로 격상되면서 의친왕이라는 자위를 받죠. 
명성황후가 의친왕 친모를 싫어했대요 의친왕 이강은 일제강점기가 되기 훨씬 전에 일찍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그런데 을사조약을 맺기 2년 전이었던 1902년 한국에서 유일준 등의 일본 유학생 출신 지식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하다가 적발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무능한 고종을 퇴위시키고 미국에 있던 의친왕 이강을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쿠데타는 미국에 있던 을친왕 이강은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습니다.
실패로 돌아갔고 을지어 이강은 이 사건과 정말 무관했지만 그래도 고종 순종 등 황족들에게 안 좋은 이미지로 낙인 찍히고 맙니다. 
을지어 입장에선 억울하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전에 귀국을 했고 일제강점기가 시작이 되자 여러모로 일제 모르게 독립운동을 격려하고 비밀리에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를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 요원들이 의친왕을 한반도에서 빼내오려는 작전을 펼치다가
적발되어 실패하기도 하죠. 1930년대에 일본으로 넘어가 있다가 해방 전에 다시 귀국을 했고 해방 후 6.25 전쟁 때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서울에서 정말 개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이승만 정부가 황실 사람들을 진짜 잘 안 챙겨줬거든요. 
을친왕 이강은 1955년 삼양을 했고 사격 솜씨가 탁월했으며 술과 자동차를 그렇게 좋아했다고 합니다. 
의친왕 이강에게 자녀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중 둘째 아들 이 우가 엄청나게 잘생긴 미남으로 유명합니다. 
인터넷에 이유를 쳐보시면 정말 깜짝 놀라실 겁니다.
이걸 고증하기 위해서인지 영화 덕혜옹주에서는 배우 고수가 역할을 맡았죠. 
그러나 이 잘생긴 이우 왕자는 히로시마 원폭에 희생됩니다. 
고종 황제의 셋째 아들은 영친왕 이은입니다. 
첫째 순종 황제 둘째 의친왕 이강 그리고 셋째 영친왕 이은은 전부 어머니가 다른 이복 형제들입니다. 
영치아가 워낙 늦둥이였던 지라 바로 위에 형이었던 의친왕과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났습니다. 
장남 순종 황제와는 형제 관계이긴 하지만 이 나이 차이로만 봤을 때 거의 아빠와 아들 수준이었죠.
순종이 황제로 등극하고 순종이 아무리 꼭두각시 황제였다지만 의례적이나마 다음 황제를 이을 황태자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오히려 국가의 구분이 다 망해져 가기 때문에 순종 황제는 더더욱 후계를 지목하려고 했으나 순종 황제에겐 자녀가 없었죠. 
그래서 동생들 중 한 명을 골라야 했는데 둘째 의친왕은 오랜 미국 생활과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이미지가 안 좋아서 동생 영친왕 이은을 황태자로 삼습니다.
만약 조선이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순종 황제 다음 황제를 이을 사람은 영친왕이었고 그래서 조선 황실의 직계는 영친왕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일제도 황태자 책봉 당시 영친왕을 미뤘는데 이유는 둘째 의친왕은 지나치게 똑똑하고 사람들로부터 인망이 좋았습니다. 
반대로 영친왕은 성격이 온순하고 유해서 다루기 쉽다고 생각했던 거죠.
영친왕은 한반도의 주권을 일제에게 넘기는 서약을 할 때 그 회담장에도 반강제적으로 참여했었습니다. 
일제강점기가 되면 일제는 조선 황실 즉 이왕가와 일본 귀족 자녀들을 정략 결혼시키는데 다들 아시다시피 영친왕 이은은 1920년 일본 왕족의 여인 마사코 한국 이름으로 이방자 여사와 결혼합니다.
일제강점기 내내 영친왕은 강제적으로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일본 중장까지 임명됩니다. 
친일 행위를 했다는 게 아니라 전부 다 일제가 강요한 거였습니다. 
광복 후에는 당연히 한국으로 돌아올 줄 알았으나 이승만 정부가 조선 황족들의 한국 귀국을 막는 바람에 영친왕 포함. 
황가 가족들이 귀국하지 못하게 됩니다.
당시로서는 아직까지 한국 국민들이 전쟁 군주제에 익숙해 있던 상태라 대통령과 왕을 확실하게 구분하지 못했고 이런 상황에서 족들이 돌아오면 이승만은 1대 대통령으로서 본인의 입지가 흔들리게 될 거라고 불안해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에 있던 황족들을 다시 전부 귀국시켜 주었고 이 가족들은 창덕궁에서 귀거합니다.
그러나 이미 한국땅을 밟았을 때 영친왕은 뇌 손상으로 실어증을 앓고 있었고 7년 정도 투병을 하다가 1970년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영친왕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영친왕의 아내 이방자 여사입니다. 그녀의 본명은 나시모토노미아 마사코 일본 왕족의 한 사람입니다.
비록 일제에 의한 강제 정략 결혼이었지만 영친왕과 그녀의 금슬이 대단히 좋았고 개인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던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름을 한국식으로 개명한 것만 봐도 알 수가 있죠. 
이방자 여사도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국인들에게 협박과 비난을 감내해야 했고 반대로 일본인으로부터도 일본을 배신한 여인이라며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해방 후에도 한국 일본 동시에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죠.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허가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한국당으로 왔고 창덕궁에 머뭅니다. 
이후 이방자 여사는 남편을 병간호하고 장애인 복지 사업에 전념했으나 황실 재산이 거의 대한민국 정부에 헌원되자 아주 적은 정부 보조금으로 병에 걸린 남편과 신우이 덕혜옹주를 보살핍니다.
부족한 돈은 직접 만든 공예품을 팔아 마련하기도 했죠. 
마지막 고종의 자녀는 막내 딸 덕혜옹주입니다. 
왕비의 소생을 공주 후궁 소생을 옹주라고 하는데 덕혜옹주는 고종 황제가 환갑인 나이에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고 2년 후였던 1912년 태어났습니다. 
워낙에 막둥이인지라 고종이 애지중지 키우던 딸이었죠.
얼마나 예뻐했으면 덕수궁에 덕혜옹주를 위한 유치원을 만들어주고 일부러 수업 듣는 모습까지 볼 정도로 고종 황제는 딸 바보였습니다. 
더키 홍주가 7살 8살 때 아버지 고종 황제가 죽고 14살 한창 사춘기 소녀일 때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됩니다. 
그녀가 18살 무렵 어머니가 한국에서 죽고 이후로 안 그래도 내 성적이었던 덕혜옹주는 말도 거의 하지 않고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20살이 됐을 때 덕키 옹주는 대마도의 귀족 출신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을 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 딸도 있었으나 덕키 옹주의 우울증은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 오빠 영친왕과 새 언니 이방자 여사가 덕희 형주를 보살펴줬지만 덕희 형주가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한 뒤로는 두 사람과 왕래가 소원해지면서 신경 쇠약 증세는 더 심해집니다. 
결국 남편 소 다케유키는 덕키 옹주를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죠
그렇게 덕케 홍주는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지지만 한국의 김을 한 기자가 그녀의 행방을 찾아 언론에 공개합니다. 
1962년 덕혜 홍주는 오빠와 새언니보다 1년 앞서 김포공항에 도착했고 공항엔 할머니가 되어버린 옛날 덕혜옹주를 모시던 상궁들이 맞이했지만 덕혜 홍주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창덕궁에서 오빠 영친왕과 세현이 이방자 여사와 함께 살아가지만 그녀의 정신병은 낳지 않았고 이방자 여사가 덕케 옹주를 볼필해주었죠.
저희 아버지가 그러는데 어릴 적 창덕궁에 놀러 가서 이 안내원들이 낙선재에 이방자 여사와 덕혜 옹주께서 계시니까 조용히 다니라고 혼났던 적이 있었다고 하네요. 
1989년 덕케 옹주는 77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그로부터 9일 후 이방자 여사도 세상을 떠납니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사이에는 이 구라는 아들이 한 명 있었습니다.
만약 조선이 멸망하지 않거나 일제가 조선 황실을 그대로 두었으면 영친왕이 형 순종 황제에 이어 3대 황제가 됐을 것이고 영친왕 다음은 그의 아들 이구가 4대 황제가 되었겠죠. 
즉 2구는 조선 황실의 마지막 직계 황세손인 겁니다. 
이 군은 mit 공대를 나와서 해방 이후까지 미국에서 생활하며 미국인 여성과 결혼합니다.
이구의 아버지는 한국인 어머니는 일본인 아내는 미국인인 다국적 가족이죠. 
1963년 부모님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를 따라 아내와 다 같이 창덕궁 낙선재에서 머물렀으나 1982년 아내 줄리아 사이에서 자녀가 한 명도 없다는 이유로 전주희 씨 종친회에서 이구와 줄리아 내외를 강제 입원시켰습니다.
이 군은 한국 일본을 오가며 건축 사업을 하다가 2005년에 고향 도쿄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이후의 장례식은 마지막 황세손의 격에 맞게 장대하게 9일장으로 치러졌고 숱한 정치인들이 장례 행렬을 방문하면서 당시 세간의 뉴스가 되기도 했죠. 
조선 황실의 마지막 장례식이었죠.
강제 이혼 당한 아내 줄리아는 한국에 있으면서도 언론을 피하고 싶어서 이후의 장례식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장례 행렬 저 멀리서 죽은 남편을 지켜만 봤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지막 조선 황실들의 후일담을 알려드렸는데 뭔가 황실이면 늘 편하게만 있을 줄 알았던 반면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현대사를 거치면서 누구하나 전부 비극적인 인생을 살았답니다. 
참고로 고종황제 명성황후 순종황제 정황후 을친왕 영친왕 이방자 덕혜옹주 그리고 마지막 2구까지 조선의 마지막 롤 패밀리들의 무덤은
전부 남양주 홍유릉과 그 인근에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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