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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 불교의 통일 원효로부터 시작된 깨달음 화엄경

by 로이인랑 2022.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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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님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각 코끼리 몸을 한 부위씩 만져보았습니다. 
다리를 만져본 장님은 코끼리가 마치 나무 기둥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다란 코를 만져본 장님은 마치 뱀과 같다고 생각했죠. 
상아를 잡은 장님은 단단하고 매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귀를 잡은 장님은 얇고 넓은 부채와 같다고 생각했죠. 
장님들은 만져본 부위에 따라 코끼리를 서로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모두 같은 코끼리를 두고서 말이죠.
크고 작은 이견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불교도 예외는 아닙니다. 

 

부처의 가르침이라는 거대한 코끼리를 두고 후레인들은 각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위를 내세웠습니다. 
당연하게도 수많은 종파를 만들어냈습니다.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며 상대를 헐뜯기도 했죠. 
서기 7세기 한반도에 어떤 승리라는 생각했습니다. 


같은 부처님 가르침 앞에서 왜 자기들 주장만 옳다고 여기는지 고민했습니다. 


모습은 달라 보일지 언정 다른 것이 아닌데 말이죠.
그는 논쟁을 화합으로 바꾸고자 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까요. 


화합의 철학을 펼친 그는 바로 원효입니다. 
원효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입니다. 법명이며 이른 새벽이라는 뜻입니다. 

 

불교를 빛나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죠. 
속성은 설 씨이며 이름은 사입니다. 617년부터 686년까지 살았습니다. 
이제 원효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원효는 현재의 경북 경산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귀족 출신이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다양하게 배웠습니다. 
특히 그는 화랑 출신으로 무예가 출중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고 있었죠. 그러나 그에게 슬픔이 찾아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었죠. 이른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원효는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것이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원효는 출가를 결심하게 됩니다. 
그때가 15세입니다.
원효는 특별히 스승을 두지 않고 돌아다녔습니다. 
여러 승려들을 만나며 배우고 스스로 경전을 공부하고 해석했습니다. 
그럼에도 공부에 목이 말랐던 그는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고자 마음 먹습니다. 


후배이자 친구인 의상과 함께 말이죠. 
의상은 원효보다 8살 아래였습니다. 의상 또한 원효처럼 화랑 출신이었지만 불교의 뜻을 두어 출가한 인물이었죠. 
둘이 언제 만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유학길은 위험했습니다. 그럼에도 원효와 의상은 고구려를 거쳐 육지길을 했습니다. 
그러나 요동까지 이르렀을 때 결국 고구려 군사들에게 붙잡힙니다. 
첩자로 오해받아 며칠 갇혀 있다가 다행히 풀려났고 그대로 신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첫 유학길은 실패로 끝이 났죠. 

 

그리고 10년 정도가 흘렀습니다.
원효와 의상은 다시 유학길에 도전합니다. 
이번에는 육지가 아닌 바다로 건너가려고 했죠. 
가던 중에 그들은 잠시 비를 피할 곳을 찾았습니다. 
동굴처럼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묶게 되었죠. 
어두운 동굴 속에서 자고 있던 원효는 목이 말라 잠시 일어났다가 주변에 물이 담긴 바가지를 발견했고 그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잠들었습니다. 


아침이 되어 날이 밝자 원효는 깜짝 놀랐습니다. 
동굴은 무덤이었고 자신이 들이켰던 물은 해골에 고여 있던 물이었죠.
그제서야 원효는 구역질을 하며 괴로워했습니다. 
그 순간 원효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밤에 마시고 달게 느껴졌던 물이 사실은 해골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더럽다고 생각했습니다. 
해골물은 달라진 적이 없는데도 말이죠.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해골물 이야기는 꾸며진 것으로 보입니다. 
송고승전에는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효는 마찬가지로 동굴에서 잠을 잡니다. 
다음 날 동굴이 아닌 무덤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비가 많이 와 할 수 없이 또 그 무덤에서 잠을 잤는데 무덤이라는 걸 알고 나서인지 악몽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깨달았다고 하죠. 무덤이란 사실은 처음부터 변하지 않았는데 오로지 내 마음 때문에 악몽을 꾼 것이었습니다. 
원효는 깨달은 후 시를 한 편 짓습니다.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갖가지 법이 사라진다.
어떤 이야기든지 중요한 핵심은 바로 무엇이든 마음 먹기 달렸다는 깨달음이죠 원효는 깨달음을 얻은 후 당나라 유학을 포기합니다. 
배움에는 안과 밖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죠. 


이때가 대략 40세 정도였습니다. 반면 같이 동행했던 의상은 그대로 당나라로 떠났죠 신라에 돌아온 원효의 모습은 이전과 달랐습니다. 
머리와 수염을 기르며 승려로서의 구색은 점점 옅어져 갔죠.
깨달은 그는 일부러 승려 행세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원효는 이렇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준다면 하늘을 바치는 기둥을 세우리라 다들 이게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당시 무열왕이었던 춘추는 이 말 뜻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딸인 요석공주를 원유와 만나게 합니다. 
원유와 요석공주는 서로 만나 사랑을 나눴죠


파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그로 인해 설총이라는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설총은 훗날 훌륭한 유학자가 됩니다. 


원효는 아들이 생겼지만 집을 나와 다시 떠돌아다녔습니다. 
원효는 언제나 백성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선 자신을 소성 거사라 불렀습니다. 
거사는 출가하지 않고 불법을 배우는 사람을 뜻합니다. 
거기에 스스로를 낮추어 소성 거사라 칭한 것이죠. 
더 이상 승려가 아닌 일반 백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귀족들이 원하는 고상한 승려의 모습은 없었죠.
민중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술과 고기를 먹고 기생집에도 드나들었습니다. 


무엇에도 거리낌이 없는 것처럼 보였죠. 
다른 승려들은 개유를 어긴 원효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불교는 귀족들과 더 가까웠습니다. 
어려운 말이 가득하고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죠. 
백성들에게 부처는 없었습니다. 원유는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대중들에게 부처를 알릴 수 있을까 하고 말이죠. 
그래서 그는 연불에 우유를 넣어 노래로 만듭니다. 
덕분에 누구나 재밌게 따라 할 수 있었죠.
또한 누구나 나무아미 타불만 외우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백성들에게 이보다 쉬운 불교는 없었습니다. 
부처를 그들에게 알려준 것이죠. 백성과 함께한 승려는 여럿 있었습니다. 
해공 해숙 대안 등 그들 또한 원효와 함께 했죠. 
원효는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서 있었습니다. 
그는 이처럼 대중교화에 힘썼지만 경전 해석에도 몰두한 교학의 대가였습니다.
원효는 많은 저술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수많은 경전을 해석해 자신의 사상을 키워나갔죠. 
원효는 파괴로 다른 불자들에게 무시당하기도 했지만 부지런히 공부했기에 학문은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일화가 있습니다. 공중에선 당나라에서 들여온 금강삼매경을 강의해 줄 사람을 찾았습니다. 
대한 스님이 맡을 예정이었지만 너무 어려웠고
그는 오히려 원효를 추천했습니다. 원효는 황룡사에 모인 승려들 앞에서 경전을 해석해 나갔습니다. 
이들은 모두 원효에게 감탄했습니다. 많은 승려가 원효의 파괴를 비난했지만 경전 해석에는 원효를 따라가기 힘들었죠.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신문화쟁론 등 등 수많은 저작들을 남겼습니다.
원효는 삶이 닿을 때까지 자유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저 대중과 함께하면서 경전 연구에 몰두했죠. 


70세가 되었을 때 그는 조용히 어떤 토굴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홀로 열반에 듭니다. 
그가 남긴 저서는 중국 일본 인도에까지 전해져 인정받습니다. 
동아시아를 통틀어 유명한 고승이었죠. 
이제 그가 어떤 사상을 이야기했는지 쉽고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원효는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체유심조라고 하죠. 정확히는 화엄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화엄 사상은 모든 것이 하나임을 강조합니다. 
서로가 원인이 되는 인연 관계 연기설을 바탕으로 하죠. 
하나가 곧 전체 전체가 곧 하나라고 합니다. 


친구 의상이 이 화엄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했죠. 
원효 또한 화엄 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사상을 펼쳐 나갑니다. 
원효의 사상을 키워드로 정리했습니다. 


화쟁 일심 무예 세 가지입니다. 먼저 화쟁을 알아보겠습니다. 
논쟁의 화합을 말합니다. 조화를 추구하는 사상이죠. 
원효는 분열과 갈등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3국이 대립했던 시기죠 불자들끼리 논쟁도 심했습니다. 
장님이 코끼리 한 부위를 만져보고 판단하듯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한 것에 집착했습니다. 
집착은 분별심을 낳고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종파들의 간극은 커져갔죠. 원효는 이들이 서로 다투지만 시선이 다를 뿐 결국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화합할 필요성을 느꼈고 합침 통섭의 철학을 펼치기 시작했죠.
상반된 견해들이 본래 서로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합니다. 
단지 하나의 양면일 뿐이죠. 신문 화쟁론을 지어 10가지 논쟁을 화합하려고 했습니다. 
불성이 있는지 없는지 공인지 유인지 등등 불교에서 논의된 여러 논쟁을 정리하고 종합해 결국 서로 다르지 않음을 설명하고자 했죠. 


논쟁을 뛰어넘는 개념을 위에 두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심입니다.


다음 키워드로 1심입니다. 하나의 마음입니다. 
화쟁 사상은 결국 1심으로 모입니다. 
코끼리의 다리나 상아 코 같은 부분적인 논쟁이 아닌 바로 코끼리 하나의 전체 모습이 일심입니다. 
근원을 보려고 했죠. 만 가지 불법이 있더라도 근원은 하나입니다 만법귀일이라고 하죠. 
원효는 일심을 두 가지 문을 들어 설명합니다. 


부처로 가는 문과 중생으로 가는 문입니다.
진녀문과 생멸문이라고 하죠. 발생과 소멸이 없는 본질적인 마음을 지녀문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온갖 번뇌에 둘러싸여 발생과 소멸이 있는 현상적인 마음을 생멸문이라고 하죠. 
쉽게 말해 부처의 참된 마음과 중생의 속된 마음입니다. 
하지만 이 둘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치 고요한 바다와 파도가 일어난 바다와 같습니다. 
상태는 다르지만 결국 같은 바다죠 바닷물 없이 파도가 있을 수 없으니 고요한 바다와 파도는 결국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처와 중생이 따로 있지 않다는 말이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둘이 하나고 하나가 둘이라는 얘기를 하죠. 
이것은 화엄경의 핵심 사상이기도 합니다. 
신라 시대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죠. 


아마도 원유는 일부러 승려 행세를 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깨달은 이후 자신이 승려든 아니든 자유분방하게 살았죠. 
그 어떤 장애물도 없었습니다. 다음 키워드로 무예입니다. 
걸림이 없다는 뜻입니다.

 

 원효는 자유인이었습니다. 
깨달음이나 자비를 실천함에 있어 어떤 틀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죠.
그가 선택한 실천은 대중교화였습니다. 
중생교화를 위해 스스로 중생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깨달음에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듯 귀족과 백성도 다를 것이 없었죠. 
이러한 평등사상이 원효와 승복을 벗게 된 이유입니다. 
원효는 광대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 바가지를 두들기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노래가 무예가입니다. 일체 무예인 일도 출생사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생사를 뛰어넘는다는 뜻입니다. 리듬이 생긴 이 불교 노래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부르게 되었죠. 
덕분에 많은 백성들이 불교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불교를 통불교라고도 합니다. 수많은 분파가 있는 중국 불교에 비하여 한국불교는 통섭을 지향했다는 특징이 그 배경엔 원효의 역할이 컸습니다. 


원효는 경전을 연구한 이론가로 국내에 머물렀음에도 경전들을 두루 섭렵해 수많은 저서들을 써냅니다. 
그 저서들은 외국에 널리 알려지고 인정받게 되죠.
또한 행동으로 나선 실천가이기도 했습니다.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파계를 저지르고 비난받는 것을 감수했죠. 


특이한 행적으로 인해 시대의 아웃사이더를 자처했지만 동아시아 불교의 한 획을 그은 영향력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논쟁을 해결하고자 했던 그의 사상은 당시 불교계뿐만 아니라 갈등과 대립으로 끊이지 않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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