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24살에 단명한 왕필 그의 인생과 업적

by 로이인랑 2022. 12. 26.
반응형


서기 3세기 삼국지 시대 위나라로 갑니다. 
이제 고작 18살인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렵기로 유명한 노자의 줄을 달아 노자 줄을 써냈죠. 
24살 때까지는 주역주를 써냈습니다. 
그 밖에도 많은 책들을 써냈지만 노자주와 주역주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가장 권위 있는 주석수로 여겨진다고 합니다. 
믿겨지지 않는 이 천재적인 인물은 동양 철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24살에 단명하고 맙니다. 
그는 바로 현악자 왕필입니다.


왕필은 서기 226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역학으로 이름난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죠 어려서부터 수많은 책들을 접하여 학문을 익혔습니다. 
10살이 되었을 때는 노자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논변에 뛰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런 왕필의 천재성을 인정해 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하안이라는 사람이죠. 하안은 조조의 사위였으며 뛰어난 학문적 경지를 인정받는 현학자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사람들과 같이 청담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청담은 말고
깨끗한 대화라는 뜻으로 당시 유행했던 담화입니다. 


그 자리에 젊고 어린 왕필이 참석했고 하하는 왕필과 대화를 나눈 뒤 감탄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후배들이란 두려운 것이라 하였거늘 왕필이 바로 그런 사람이로구나 공자의 말을 빌려 왕필을 칭찬했죠. 
왕필은 하안의 견해에 반대 의견을 내기도 합니다. 


그의 논리적이라는 주장에 사람들도 다들 인정했고 하안 또한 그런 왕필을 너그럽게 받아주었죠. 
왕필은 젊은 혈기에 두려울 것 없는 당찬 소년이었습니다.
하하는 왕피를 관직에 추천했습니다. 하지만 먼저 다른 사람이 조상에게 부탁했고 왕여라는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때문에 그보다 낮은 관직을 맡게 되었죠. 
왕필은 아쉬운 나머지 조상을 찾아갔습니다. 
조상과 왕필은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죠. 


아마도 왕필은 청담을 나누려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조상은 그가 이상한 헛소리만 한다고 생각했죠.


왕필이 철없고 유치한 사람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왕여가 죽고 다시 관직 자리가 비었습니다. 
하지만 왕필은 그 관직에 앉을 수 없었습니다. 
제차 다른 사람이 맡았을 뿐이죠. 왕필은 종종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뛰어난 학문적 경제를 믿고 다른 사람들을 깎아내리곤 했죠. 
두려울 게 없는 그는 거만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노는 것을 좋아하고 가볍고 발랄한 성격이
탓에 사람들은 왕필을 세상 물쩍 모르는 젊은이라 평하기도 했죠. 

그러나 하안은 누구보다 그를 아껴주었습니다. 
왕필이 18살 때 써낸 노자주에 감탄했죠. 
왕필이 쓴 노자주는 실로 대단했습니다. 
왜냐하면 보통 주석은 원문보다 긴 설명이 붓기 마련인데 왕피는 원문과 거의 다를 바 없는 글자 수로 줄을 달았기 때문이죠.
그 어려운 책을 하나로 꿰뚫어 보았다는 뜻입니다. 
왕필은 22살에서 24살 때에는 주역주를 써냈습니다. 
하안 또한 노노를 주석해 노노 지폐를 써냈죠. 
그 밖에도 이들은 많은 책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안과 왕필은 대표적으로 현악의 거인이었죠. 
하지만 그들의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당시는 조씨 가문과 사마씨 가문의 권력 투쟁이 심했습니다. 
249년 결정적으로 사마이가 코데타를 일으켜 조상과 그 일당들을 처형합니다. 
사마씨 가문이 실권을 장악한 사건이었죠.
이를 고평릉 사변이라고 합니다. 조조의 사위인 하안도 이때 죽습니다. 
왕필은 처형은 면했지만 그나마 맡고 있던 관직에서 쫓겨났죠 하지만 그해 가을 왕필은 전염병으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때 나이가 겨우 24살이었죠. 너무도 짧은 삶이었지만 역사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이제 왕필이 어떤 철학을 이야기했는지 쉽고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그 전에 잠시 현학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사상도 변합니다. 
삼국지 시대 위나라부터 진나라 때까지를 위진 시대라고 합니다. 
위진 시대에는 현학이라는 것이 유행했고 이를 위진 현악이라고 합니다. 
현학자들이 고민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와 무에 관한 것이었죠. 유무 논쟁은 현학자들에게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현실적인 제도인 유가 먼저인지
자연적인 본성인 무가 먼저인지를 고민했죠. 
제도는 유아들이 추구했던 것이고 본성은 도가들이 추구했던 것입니다. 
육아를 적극 옹호하는 이들도 있었고 아예 배척한 이들도 있었죠. 
주로 도가적 입장에서 유가사상을 해석했기 때문에 신도가라고도 불립니다. 
크게 정시 중림 그리고 후기 현학자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안과 왕필은 정시 명사로 현악의 대표입니다. 
중립 명사는 중립 출연이란 집단을 말하며 도가적 입장으로 기울었죠.
후기 현악으로 갈수록 유물을 동일시하거나 불교 사상을 수용함으로써 변화해 갑니다. 
이제 정시 명사로 대표되는 왕필이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 키워드로 쉽게 알아보겠습니다. 
왕필의 사상을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했습니다. 
귀물론 본말론 상론입니다. 먼저 귀물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왕필은 노자를 주석한 노자주로 유명합니다. 
그는 노자에서 무를 이끌어냈습니다. 왕필은 무를 중요시 했고 귀물로는 무를 귀하게 여긴다는 뜻이죠.
무는 뜻이 다양합니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절대적인 무 있음과 없음으로 비교되는 상대적인 무 그리고 쓰임이 있는 무로 볼 수 있죠 왕필은 물을 쓰임이 있는 것으로 봤습니다. 
그릇이 비어 있어야 무언가를 담을 수 있죠 방도 비어 있어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비어 있는 무가 곧 쓰임으로 연결되는 것이죠. 
왕필은 노자 40장에 이렇게 줄을 달았습니다. 
높음은 낮음을 바탕으로 하고 귀함은 천함을 근본으로 삼고
있음은 없음을 쓰임으로 삼는다 즉 무는 곧 유를 위한 쓰임입니다. 
무는 유를 생성하는 관계인 것이죠. 왕필은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나무와 뿌리로 빗대었습니다. 
다음 키워드로 본말론입니다. 여기 나무가 있습니다. 
땅속에 있는 뿌리는 보이지 않는 땅 위에 있는 가지는 보이는 유라고 빗댈 수 있습니다. 
뿌리는 나뭇가지를 위해서 존재하죠. 따라서 무도 유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무가 어떻게 쓰임이 되는지 설명하는 것이죠.
어미와 자식으로도 비유합니다. 어미는 근본인 무 자식은 형상화된 유인 셈이죠. 
이를 숭본식말이라고 합니다. 근본을 숭상해 말을 번성하게 한다는 뜻이죠. 
따라서 유무에 대해 왕필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제도는 본성에 바탕을 둔다. 여기서 제도는 있으면 유의고 본성은 없으면 무의죠 나뭇가지는 뿌리에 바탕을 둔다는 말입니다. 
나뭇가지는 현실에서 중요하죠 현실적인 제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와 자식이 둘 다 중요하듯 본성과 제도 둘 다 중요하다는 말이죠.
도가 사상의 유가사상을 접목시키는 셈입니다. 
결론적으로 왕필은 근본인 무를 강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유를 위한 쓰임인 것이죠. 
마지막 키워드로 상론입니다. 장자에는 득의 망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뜻을 얻었으면 말을 잊으라는 의미죠 마치 물고기를 잡았으면 그물을 잇는 것과 같습니다. 
왕필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갑니다. 말과 뜻 사이에 상이란 것을 끼워 넣어 득의 망상이라고 말합니다. 
뜻을 얻었으면 상을 잊으라고 말이죠.
즉 상을 얻었으면 말을 잊고 뜻을 얻었으면 상을 잊으라고 합니다. 
그럼 상이 대체 뭘까요. 모양 상자입니다. 
여기서 왕필은 주역이 나오는 부호를 가리킵니다. 
주역에는 효나 궤로 이루어진 부호가 있습니다. 
주역에 나오는 이 모양들을 상이라 빗대며 이렇게 말합니다. 
상을 세워 뜻을 다하면 상을 잊을 수 있다. 
효나 궤가 이루어졌다면 그것을 버릴 수 있다. 


때문에 왕필은 뜻을 얻었음에도 부호에만 집착하는 이들을 비판했습니다.
쉽게 정리하면 말은 상을 구하는 수단 상은 뜻을 구하는 수단인 셈이죠. 
거꾸로 뜻을 얻었으면 상을 버리고 상을 얻었으면 말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초기에 현학자들은 현실 문제를 극복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현악은 점점 모호한 학문으로 변해갔죠. 
심오한 학문은 현실과 동떨어져 갔고 청남 사상은 그저 현실 도피적인 지식인들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위진남북조 시대에 성행한 현악은 서서히 모습을 감추게 됩니다.
하지만 현악의 철학적 깊이는 훗날 불교와 성리학에도 영향을 줍니다. 
왕필은 비록 짧은 생일을 살았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큰 업적을 남겼죠 때문에 현악의 중요한 핵심 인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