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야마구치현의 아브라는 마을에서 황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지자체는 463명 가구를 대상으로 1만 엔씩 우리나라 돈 10만 원 가량의 지원금을 각각 나눠서 지급해야 하는데 어떤 한 남성에게 총 금액 4천6백30만 원 우리나라 돈 4억 육천삼백만 원이 한 번에 입금되어 버린 겁니다.
여기서 네티즌들의 관심을 모았던 건 바로 송금 방식이었는데요.
이 지자체의 관행을 따라 해당 직원은 플로피 디스크의 송금 명단의 파일을 담아 은행에 갖다 준 겁니다.
제가 잘못 말한 게 아니라 진짜 플로피 디스크를 심지어 이 사건은 2022년 4월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미 2011년에 소니에서 플로 디스크 생산을 중지했지만 아직까지도 이 플로피 디스크를 사용하는 다른 곳도 아닌 관공서가 있었다는 사실
또 심지어 이런 방식으로 송금 명단을 은행에 전달하는 관행이 아직까지도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일본 내에서도 꽤나 충격적이어서 많은 화제가 됐던 모양입니다.
일본의 아날로그 집착은 사실 많은 미디어를 통해서 소개된 바 있는데요.
아직도 회사나 관공서에서 팩스를 사용한다던가 결제할 때는 꼭 도장을 쓴다던가 카드 대신에 현금을 선호한다던가
꼭 공이 문서로 보관을 한다든가 하는 모습들이죠.
2021년 10월 7일 도쿄 근처에서 발생한 지진이 있었습니다.
기상청의 고위 관계자가 이 지진에 대한 브리핑을 하고 있는데 기껏 준비한 스크린 속에 프린트한 에이포 용지를 사람이 직접 넘기고 있습니다.
이런 일본의 아날로그 집착에 대한 이유를 찾아보니 대략 이런 식으로 정리가 되더군요.
80년대 일본 전성기 때 갖춰진 시스템에 대한 향수가 있어서
일본이 고령화 사회가 되어버려서 일본 사람들이 변화를 싫어해서 다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저는 좀 더 근원적인 이유가 궁금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일본의 이런 습성을 만들어낸 걸까요.
자판의 글자를 입력하면 그대로 글자를 써주는 대필 기계라던가 도장을 찍어주는 로봇이라던가 이런 장면들은 처음 보면 재밌기도 하고 황당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문화가 참 다르구나 하고요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궁금증이 생깁니다.
일본이 기술력이 그렇게나 뛰어난데 실질적으로 사용되는 방법과 행태를 보면 약간의 개선은 이루어질지 몰라도 사실상 현상의 본질은 바뀌지 않잖아요.
그냥 형식만 거창한 느낌일 뿐 여기서 우리는 뭐랄까 일종의 모순을 느끼게 됩니다.
모순 이 단어를 떠올려보면 사실 일본에는 모순적인 거 투성이가 참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죠.
예를 들면 귀여운 것에 그렇게 열광하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성적 도착을 과도하게 묘사하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문화라던가 또 정치는 어떤가요
1955년 이후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거의 바뀌지 않은 일본의 집권 정당 그 정당의 상당수는 20세기 초 일본을 괴물 국가로 만들었던 사람들의 후손들입니다.
일본이 하고 있는 의회 정치라는 건 사실 국민이 주인이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권력이 천왕으로부터 임명된다는 이 천왕제가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데다가 실제의 통치는 전통적으로 관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 정치 구조 또한 굉장한 모순 덩어리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이런 모순을 굳이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죠.
카렐 반 볼퍼렌이라는 네덜란드 학자는 일본의 이런 현상을 현실의 관리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여러 제도와 관행들이 합쳐져서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행동하도록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일본 사회 곳곳에서 이 개념이 드러납니다.
회사의 근무 시간을 예로 들어볼까요.
회사원 모두가 여덟 시간을 일합니다.
겉으로는요 오후 여섯시가 되면 사무실의 냉난방이 꺼지고 정문은 문을 닫습니다.
야간 경비조는 근무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사실 아무도 퇴근하지 않았고 회사의 불은 그대로 켜져 있습니다.
밤 열시가 넘으면 빌딩의 작은 염문으로 사람들이 조금씩 빠져나옵니다.
그런데 근퇴 서류에는 근무시간이 여덟 시간으로 처리됩니다.
물론 어느 나라건 야근을 하는 경우가 있죠.
문제는 이 야근이 공개적으로 인정되고 투명하게 야근 수당으로 보상되는 게 아니라
일주일에 48시간만 근무한다는 이 일종의 픽션이 유지되고 모든 구성원들은 여기에 협조합니다.
일본 노동성에도 그렇게 보고가 올라갑니다.
일본 의회에서는 얼핏 보면 입법 토론을 거쳐서 공적인 정책이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토론에서 나오는 질문들은 모두 관료들에 의해서 미리 작성된 것들이죠.
이런 모습들을 보면 일본 사회가 기존의 것을 잘 바꾸려고 들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이런 모순들을 자연스럽게 참아내고 말로 드러내지 않더라도
그저 그 안에서 알아서 행동하는 법이 익숙하다는 얘기겠죠.
다테마요와 혼내라는 어휘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 사회는 립서비스로 꾸며진 현실과 실제 현실 사이에서 알아서 잘 행동해야 하고 이 현실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동기를 읽지 못한다 라는 흉을 당하게 됩니다.
아날로그의 집착도 알고 보면 이러한 어마어마한 모순 덩어리에 아주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고
그런 커다란 모순이 현실의 관리라는 이름에 일종의 보이지 않는 시스템에 의해서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게 일본 사회의 모습인 겁니다.
이런 일본 사회에 보이지 않는 시스템과 습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 역사적으로 가장 전성기였던 시절에서 만들어지는데요.
그것은 80년대 경제 부흥기도 아니고 메이지 유신도 아닌 바로 에도시대입니다.
시간을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 천왕과 사무라이 얘기를 잠깐 해볼게요 3에서 4세기 형 일본은 여러 호족 부족 세력들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런 호족 세력들 중 우두머리였던 정치 집단에서 지금의 일본 황실이 기원한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그러다가 8세기 경 후지와라라는 가문이 황실과의 정략 결혼을 통해 사실상 모든 권력을 황실로부터 빼앗아 오게 됩니다.
이 가문이 수도로 정한 곳을 헤이안큐라고 불렀고 이 시대를 헤이안 시대라고 합니다.
헤이안 시대의 집권층이었던 귀족들을 경호하던 계급이 바로 무사 즉 사무라이 계층이었는데 이 사무라이라는 말이 귀인의 곁에서 섬기다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말이거든요.
페이안 시대의 말기로 가면서 후지아라 가문은 점차 힘을 잃게 되고 결국 권력은 무사 가문들에게 넘어가 버리게 됩니다.
그러던 중 미나모토 요리통으라는 무사가 일본 열도를 한 번 장악하게 되는데 이때 최초로 마크라는 제도를 만들게 되죠.
슈군이라는 칭호도 이때 처음으로 쓰이게 됩니다.
여기서 첫 번째 재밌는 포인트가 있어요.
보통 우리는 실권을 잡으면 본인이 왕이 된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잖아요.
요리토모는 전국을 재패하고 실권을 장악한 뒤에 천왕을 밀어내고 자신이 천왕이 된 게 아니라 오히려 천왕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왜 본인이 천왕이 되지 않았을까요. 무력으로 권력을 차지한 무사 정권의 입장에서는 자신 또한 다른 무력에 의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자기 정권의 정통성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내가 바로 천왕에게 임명을 받은 자다 라는 이 명분이 바로 그런 정치적 정통성이 되어줄 수 있었던 것 이때부터 일본은 이상한 이중적인 권력체계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겉으로는 천왕이 다스리지만 실제 현실은 쇼곤이 다스리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막부의 시대를 거치며 여러 무사 가문들이 서로 정권을 뺏고 빼앗기는 전쟁의 역사는 500년간이나 계속됩니다.
그 기나긴 내전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의사였습니다.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 이야기인 전국시대 말기 3대 다이밍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 중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결국 최종 승자가 되어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는데 이를 흔히 에도시대라고 부릅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오백 년이라는 기나긴 전쟁을 종식시켜 탄생된 막부였기 때문에 다시는 이 정권을 다른 세력에 내주고 싶지 않았죠.
그래서 그 누구도 정권에 도전할 수 도록없 아주 강력한 중앙집권을 만드는 것 그리고 누구도 거스르지 못하는 사회의 질서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사회의 질서를 만드는데 집요하게 집착합니다.
일본의 모순을 야기한 이 시대의 첫 번째 포인트는 바로 태국 정책으로 나라의 문을 걸어 잠가버렸다는 점이 이로 인해 200년 넘게 스스로를 격리시킨 일본은 가까운 이웃 나라인 우리나라와 중국과도 현저하게 다른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죠.
그렇다면 일본은 대체 왜 나라를 걸어 잠갔을까요.
당시 포르투갈 선교사들을 통해 들어온 사랑과 용서라는 핵심 메시지를 가진 기독교 이 기독교는 끝없는 전쟁의 비극에서 시달리던 일본 백성들에게 엄청난 위로가 됐고 말 그대로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누가복음에서도 나오듯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이런 다른 종류의 충성을 할 수 있다라는 개념은
도쿠가와 막부가 집착했던 철저한 질선 즉 오직 한 군데에만 닫혀야 하는 충성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개념이었습니다.
뭔가 기존의 것을 뛰어넘는 질서를 암시하는 이 기독교의 개념은 이제 막 정권을 잡은 권력자들에게 아주 심각하게 전복적으로 들리게 되죠.
결국 막부는 기독교인 수만 명을 추적하여 학살합니다.
동시에 현존하는 정치 질서의 틀을 벗어나는 행동은 정통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여기는 이런 사상을 의도적으로 고급시켰죠.
그리고 모든 일본인을 네 개의 신분으로 나눕니다.
특히 맨 아래에 있는 상인은 실질적인 가치를 하나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회에 기생하는 존재로 취급되었습니다.
각 번의 다이묘들을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일 년 주기로 자기 영지와 애도에 번갈아가면서 생활하게 했고 자신의 영지로 가 있는 동안에는 처자식을 애도의 인질로 남겨놓게 했습니다.
전국에는 촘촘한 스파이와 비밀 경찰 조직을 운영했습니다.
여행자가 걸어 다니는 길에는 각 길마다 검문소가 넘쳐났고요 모든 신분에는 강압적인 규제가 적용되었는데 칼은 사무라이들만 찰 수 있었고 그 아래 신분의 사람들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벨 수 있었습니다.
사무라이들 또한 자신의 영주에게 조금이라도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면 할복을 해야 했고
낮은 신분의 사람들은 무수한 규정 중 하나라도 어기면 추방되거나 십자가 형을 당했습니다.
또 공식 허가를 받지 않은 서양인이 일본에서 발견되면 바로 처형당했죠.
이렇게 모든 사회 구성원들은 정해진 자신의 위치에서 세세하게 부여된 직무와 의무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이런 시스템이 이백육십오 년 동안이나 변치 않고 유지가 된 거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통제와 억압은 당시 일본에 평화와 안정 높은 치안 수준을 가져다 줬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의 인구는 세 배 가까이 늘어나 3천만 명에 달했고 18세기 초 에도는 백만의 인구를 자랑하며 당대 세계 최대의 도시가 되죠.
일 년에 한 번씩 옮겨 다니는 이 참근 교대 덕분에 도로망 여관 운송시설 여객선 항구 고급 시설 등 여행에 필요한 온갖 인프라가 생기고 다이묘들이 돈을 많이 쓰다 보니 금융 상품들도 발전하게 됩니다.
이러다 보니 이런 금융 시스템과 공급망을 관리해야 하는 상인 신분에 많은 힘이 실리기 시작하죠.
아까 말씀드렸지만 상인들은 가장 미천한 신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많은 부가 상인들에게로 흘러갑니다.
반대로 극도로 평화로웠던 에도 시대에서 점차 존재의 이유가 사라진 사물아이들 시간이 막 남아 돌던 이 사무라이들은 막부 입장에선 정치적 혼란을 일으킬 위험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막부는 이들을 관료로 만들어 버렸죠.
그렇게 무예를 실전에 사용할 기회가 점차 줄어든 사무라이들은 역설적으로 상관에 대한 절대 복종 어떤 명령도 죽음을 무릅쓰고 따르는 자세 나약함과 물질적 편안함에 대한 경멸 등 무사정신만 더 강조하며 점점 군대식으로 변해갔습니다.
왠지 모르게 지금 봐도 익숙한 그런 관료의 모습이 있지 않나요.
사무라이들은 막부로부터 쌀로 고정된 급여만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신분이 한참 낮은 상인들이 더 많은 돈을 벌어가는 것을 지켜보고는 신분의 우월성에만 더욱 집착하게 되죠.
이런 사물화의 기풍이 강조될수록 고분고분한 관료들을 만드는 일은 더 쉬워졌습니다.
이렇게 가장 낮은 상인 계급들은 점점 성공하고 가장 높은 사무라이 계급은 점점 경직화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철저한 신분제는 유지되었죠.
공식적인 시스템의 구조와 실제 사이의 모습이 간극이 점점 커져가지만
그 질서는 끝까지 유지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265 년 동안 평화를 유지하던 도쿠가와 막부도 1853년 미국 페리제독의 흑선이 일본에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일년의 반란 사건들을 통해 몰락하게 되고 메이지 유신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메이지 유신 시대는 아시다시피 일본이 의무교육 증병제 주식회사 의회
법원 통화 최신 과학기술 서양식 옷 사교댄스 등 서양의 문물을 환기증이 날 만큼 받아들여 급격하게 근대화된 시기잖아요.
심지어 메이지 유신 때 신분제가 다 없어지기도 했고요 이 정도면 완전히 시스템을 가로 갚은 혁명으로 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죠.
그런데 사실 이건 혁명이 아니었습니다.
마르크스는 혁명이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전복시킬 때만 일어난다고 주장했죠.
그런데 메이지 유신은 아래 계급이 지배 계급을 전복시킨 게 아니었습니다.
같은 지배 계층 중 말단에 있던 세력 정확히는 조슈번과 사스마번의 무사들이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킨 자기들끼리의 권력 투쟁이었던 거죠.
재밌는 사실은 이때 권력을 빼앗은 이쪽 지역 출신 세력의 혈통이 지금 현대 일본의 극우 정치인들로 쭉 이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집권 세력은 권력을 천왕에게 돌려준다는 보기 좋은 명분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지만 사실상 이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정통성을 천왕을 통해 또다시 유지하며 이 세력들은 과두 정치를 펼치게 되죠.
그리고 이 세력은 근대 국가를 만들기 위해 오히려 더 더욱 강력한 프레임워크를 구축해 나갑니다.
조화로운 일본 사회는 합의에 의해 움직이고 정치 경제적 결정은 신의 뜻 곧 천왕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결정에 대한 노골적인 반발을 한다는 것은 신성한 질서를 부정한다는 것 메이지 유신으로 서양으로부터 입헌 정치와 법치주의를 가져온 이들은 아주 모순적이게도 천왕에게 통치권을 돌려주자는 구호로 집권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천황제와 의회제도 두 가지 모두 이들에게는 허상에 불과한데 말이죠.
본질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는데 근대 국가가 되기 위해 겉으로만
서양의 제도와 문화들을 허겁지겁 받아들인 것 뿐이었습니다.
실제 정치적인 의사 결정을 내리는 이 사스마와 조슈 출신의 파벌이 나이들어 죽게 되자 책임을 져야 하는 주체는 사라지고 허상만 남아버리게 됐습니다.
아무도 책임지는 주체가 없는 상황에서 결국 승리할 전망도 없는 이 비극에 뛰어들게 되었죠.
또 일본이 패전한 뒤 미 군정이 일본을 통치하면서 근본부터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지만 냉전 시대가 펼쳐지면서 일본의 우파들과 그 후손들은 그대로 정치 세계로 돌아오고 천왕 역시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일본에 아날로그 문화가 계속 남아 있으면서도 잘 바꾸려고 하지 않고 매뉴얼에 집착하면서 그것을 벗어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당황하고 또 서로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꽉 막힌 관료제의 모습 육십 년이 넘도록 자국민을 한 때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이 정당을 바꾸지 않는 일본 사회 또 아직까지도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이 정당의 정치인들 어쩌면
에도시대 때부터 시작된 일본의 비극적인 굴레가 이 모든 것을 낳게 된 것은 아닐까요.
일본은 과연 자기 모순을 멈추고 원래 자신들의 문화권인 동아시아의 일원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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