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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김일성은 어떻게 북한을 장악하고 6.25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by 로이인랑 2023.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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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화된 최고 지도자가 헌법보다 우위에 있는 신정국가 독재 권력을 3대째 세습하는 현대판 왕조 국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북한의 첫 번째 이야기 김일성 일대기를 정리해 봅니다. 
1912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김일성 그의 본명은 김성주인데요. 
놀랍게도 그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했습니다. 
1926년경 가족을 따라 만주로 넘어간 그는 중국인들과 함께 중국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죠.
1931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김일성은 만주에서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는데요. 
이때부터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쓴 것으로 추측됩니다. 
김일성은 1935년부터 동북 항일연군에 소속되는데 여기서 하나 짚고 갈 점이 있습니다. 
동북항일연군의 껍데기는 중국 공산당 산하의 군대였지만
사실상 코민테른의 지도 하에 있었습니다. 
코민테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약칭으로 소련이 전 세계 공산당을 하나로 묶은 국제 공산당 조직이었죠. 
소련은 코민테른을 통해 세계 공산당을 지도 통제하려 했고 일본 제국주의를 꺾기 위한 지령을 내렸습니다. 
소련은 특히 김일성이 활동하던 만주에 예민했습니다. 
당시 일제가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워놨기 때문입니다 만주 항일 운동하는 인원을 최대한 모아서 소련 국경을 지키고 싶었죠.
이렇게 만주의 여러 항일 부대가 동북 항일연군으로 확대 개편됐고 여기에 김일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만주에서 일본군과 싸운 동북 항일연군은 중국 공산당의 입김으로 움직이는 군대라기보단 이미 코민테른을 통한 소련의 입김으로 움직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김일성이 속한 동북 항일연군은 일제와의 싸움에서 빠르게 무너졌습니다. 
일제는 만주 항일 투쟁의 씨를 말려버리겠다며 토벌에 박차를 가했고 1930년대 후반에는
정말 동북 항일연군의 씨가 거의 말라버렸습니다. 
이제 김일성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소련으로 피신하는데요. 
여기서 그의 인생이 상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김일성은 소련에서 동료 김정숙과 결혼해 장남인 김정일을 낳기도 했죠. 
물론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태어났다고 가르칩니다. 
어쨌거나 소련으로 도망친 김일성과 동료들에겐 밝은 미래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이때 소련은 국경 넘어온 얘네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다가 너네 정식으로 소련군이 되지 않겠냐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김일성과 동지들은 당연히 좋다고 수락했죠. 
이렇게 김일성은 소련 극동군 제88 여단에 소속됩니다. 
이제 명실공이 중국 공산당이 아닌 소련 공산당의 명을 받게 된 겁니다. 
당시 소련은 2차 세계대전을 지켜보면서 전쟁이 끝난 후 동북아에 최대한 세력을 확보하려고 준비 중이었습니다.
특히 만주와 한반도의 패권을 확보하려고 만든 부대가 바로 88 여단이었죠. 
이제 88 여단에 소속된 김일성 어엿한 소련 정규군으로서 소련의 이익을 위해 체계적인 소련식 교육과 훈련을 받기 시작합니다. 
북한에서 김일성 덕분에 해방됐다고 선전하지만 1940년대 특히 해방 직전까지 김일성은 소련 극동군 88 여단에서 소련의 충성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김일성은 눈에 띄는 충성심으로 소련의 신임을 얻어서 상관들의 예쁨을 받고 장교까지 진급하는데요. 
이때 특출날 것도 없던 김일성이 소련의 신뢰를 얻은 결정적인 이유가 첩보원 활동덕이었다는 증언이 여럿 나왔습니다. 
김일성이 88여단에서 생활하던 1940년대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둘러보겠습니다.
세계 최강국 미국을 들이받은 일제의 광기는 점점 내리막을 걷는 중이었고 일제 패망에 앞서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은 바쁘게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동북아 세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소련 입장에선 당연히 한반도를 독점으로 먹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미국과의 이해관계 같은
다양한 문제를 무시할 순 없었습니다. 
또 미국 입장에서는 일제가 한반도에서 짐을 뺐을 때 소련이 한반도를 다 잡아먹는 문제를 막아야 했죠. 
미국의 원폭과 소련군의 참전은 일제의 항복을 앞당겼습니다. 
일본이 더 버텼다간 덴노의 입지도 위태로워질 것 같았고 일본 본토 자체가 미국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2차 대전 종전 직전에 미국은 일본에 대한 분할 점령 계획안을 작성했는데 결국 폐기됐습니다. 
분할 점령의 운명에 놓인 건 애꿎은 한반도였죠.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삼킬까 마음이 급했고 우리 사이좋게 분할 점령하자고 제안을 했는데요. 
의외로 소련은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날리면서 한반도에 38도 선이 그어집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일제가 공식적으로 항복을 발표하면서 한반도는 해방을 맞이했는데요. 
해방 직후에 한반도는 극도로 혼란했습니다. 
이제 일본 경찰의 기능은 마비됐기 때문에 조만식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은 이념 갈등도 없이 사회 치안 유지를 위해 애썼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소련의 개입이 시작됐죠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에 소련 함대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내린 이들은 김일성과 88 여단 대원들이었습니다. 
해방 직후 소련을 등에 업고 당당히 북한을 접수하러 온 겁니다. 
소련은
북한의 친소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려고 했고 북한 현지에서 일해줄 충실한 꼭두각시로 김일성을 내세웠습니다. 
왜 하필 김일성이었을까요. 이미 국내 최고의 공산주의자는 박헌영이었고 지지 세력도 강력했습니다. 
누가 봐도 노련한 박헌영이 지도자감이었죠. 
하지만 스탈리는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미덥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국내 지지 세력도 없는 데다 소련에서 수년간 교육받은 김일성이 제격이었죠.
김일성이라면 무조건 소련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스타일리는 박헌영이 남한을 맞게 놔두고 김일성에게 북한을 맡기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소련 후광에 있어도 김일성이 단숨에 권력을 장악하긴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해방 직후 북한에는 다양한 정치 파벌이 존재했는데요. 
일단 김일성과 함께 입국한 88 여단 파벌을 흔히 만주파라고 부르고
혹은 김일성파 빨치산파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김일성과 동료들은 만주 활동 시절에는 넓은 땅에 여기저기 분산돼 있어서 그다지 결속력도 없었고 오히려 소련 88여단 시절에 끈끈해진 파월이기 때문에 만주파보다는 김일성파라고 부르겠습니다. 
김일성파의 작은 분파로 갑산파가 있는데요. 
이들은 일제강점기 때 김일성파와 활동한 적이 있지만 88 여단에서 뭉친 김일성 파와 따로 분리해서 부르는 게 대부분입니다. 
아무튼 굵직하게 구분하면 김일성파가 하나 있고 또 중국 공산당과 활동한 연안파
소련에서 활동한 소련파 국내에서 활동한 사람들을 통칭하는 국내파 그중에서도 박헌영 중심의 남로당파가 있었습니다. 
해방하자마자 갑자기 튀어나온 김일성 판은 제일 힘이 약했고 특히 국내에서 활약해온 박헌영과는 비교가 됐죠. 
남로당은 김일성을 외국에서 갑자기 나타난 경력 불명자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소련은 자기들 꼭두각시가 귀 죽는 꼴을 볼 수가 없었고 듣보잡 김일성파를 집중 육성하기 시작합니다. 
덕분에 김일성파는 북한 고위층 요직을 척척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소련은 김일성 파 밑에서 실무를 맡아줄 고려인들을 북한에 파견 보내는데요. 
이들이 허가이로 대표되는 소련파입니다. 
책임지는 자리는 김일성 파가 그 아래 핵심 실무는 소련파가 맡은 건데 실권을 쥔 소련파가 자연스레 실세가 됐고 김일성은 그들이 거슬렸습니다.
원래 북쪽의 공산주의자들은 남쪽의 박헌영이 중심을 잡은 조선공산당의 지휘를 받고 있었는데요. 
김일성은 북쪽에다가 조선공산당 북조선 붕국을 따로 설치하겠다고 합니다. 
북쪽에 따로 구심점을 만들겠다는 의도였죠. 
1946년에 김일성은 북조선 노동당으로 확대 개편하면서 아예 박헌영과의 관계를 정리해 버립니다. 
남한에 있던 박헌영은 위태로웠습니다.
미군정은 조선 공산당이나 좌익 세력을 뿌리 뽑으려 했고 활동이 힘들어진 박헌영은 결국 월북을 택했습니다 한때 조선공산주의자의 대부였던 박헌영이었지만 북한에 넘어와 보니 이미 주도권은 김일성에게 넘어가 있었습니다. 
1948년 8월 15일에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1948년 9월 9일 북한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합니다. 
1949년에는 남북 노동당이 합당해서
오늘날에 조선 노동당이 되는데 여기서 김일성의 위원장 박헌영과 허가이가 부위원장이 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일성의 독재 체제는 아니었고 한국전쟁에 있어서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꽤나 쿵짝이 잘 맞았습니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을 허락해 달라며 집요하게 졸라댔고 박헌 형은 전쟁이 시작되면 남쪽에서 20만 남로당 세력이 일어날 거라고 호언 장담을 했습니다. 
물론 이건 완전히 오판이었죠.
소련과 중공의 지지를 얻은 김일성과 박헌영은 1950년 6월 25일 남한을 침략하며 전쟁을 일으킵니다. 
선제 기습한 북한은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단숨에 부산 일대까지 밀고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은 전세를 간단히 뒤엎었습니다. 
유엔군이 서울을 점령하니 북한군의 보급로는 뚝 끊겨버렸죠.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국제전의 성격이 더 강해졌습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다시 빼앗겼지만 곧 총 반격으로 전선을 38선까지 밀어올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는 휴전선 주위에서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죠. 
역대급으로 기나긴 정전회담이 이어지다가 747일 만인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정전 협정이 체결됐습니다.
이때부터 2023년까지 70년째 휴전 상태가 이어지고 있죠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은 최대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그의 든든한 뒷배였던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스탈린 격화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전쟁 실패의 책임을 경쟁자들에게 떠넘기며 반대파 제거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했는데요.
이미 전쟁 중에 숙청된 연안파 지도자 무정이 있었습니다. 
무정의 화려한 항일투쟁 경력과 인기는 김일성의 불안 요소였죠. 
소련파 허가에도 숙청당하고 남로당 계열도 몰락하면서 김일성에게 거대한 위협이 되는 세력은 전쟁 기간에 한 차례 제거됐습니다. 
몇 년 뒤 1956년에 8월 종파 사건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연남파와 소련파가 김일성의 절대 권력에 도전하자 김일성은 반대파를 싸그리 숙청해버렸고
결국 그는 위기를 타개하며 1인 지배체제를 굳히기 시작합니다. 
한편으로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돼버린 북한 위에 사회주의 개조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인민들은 식량을 충분히 배급받지 못했지만 철도와 공장 건물이 세워지는 걸 보며 희망이란 걸 품었던 시기입니다. 
조금만 더 힘내면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아래 전후 복구 작업이 이어졌지
한편으로 전쟁 이후 한반도는 체제 경쟁의 장이 됐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보란듯이 각각 남북의 막대한 경제 지원을 퍼부으며 경쟁했습니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과 중공 역시 경제 원조에 힘을 보탰습니다. 
전쟁으로 인민들의 삶이 피폐해진 것을 기회 삼아서 북한은 사회주의를 비교적 순탄하게 개조했습니다. 
자본가 계급도 워낙 극소수였기 때문에 큰 저항도 없이 농업과 수공업이 협동화되어 갔다.
이렇게 1950년대는 현재 북한의 기본적인 틀이 대부분 자리 잡았습니다. 
1960년대에는 김일성의 1인 독재 체제가 완성됐습니다. 
당시 북한의 경제는 남한보다 좀 더 앞서 있었고 김일성은 경제 계획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북한 인민들에게 사회주의 낙원을 약속했죠. 
남쪽은 천연 자원도 부족한 데다 아프리카 빈국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북한의 사회주의 경제 체제는 점점 한계를 드러냈고 남한에선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성공으로 폭발적인 한강의 기적이 시작됐습니다. 
북한은 나랏돈을 국방비에 쏟아부으며 경제 발전을 틀어 막았죠. 
김일성은 국방에 대한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1962년에 쿠바 미사일 위기로 핵전쟁 발발 직전까지 갔었고 1960년대 중반 베트남전에 미군 참전이 확대됐습니다.
북한은 세계 최강 미군과 휴전선을 맞댄 상황이 부담스러웠습니다. 
또한 일본이 원폭을 막고 항복했던 일 한국전쟁 때 미국이 북한의 원폭을 떨어뜨리려고 했던 일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김일성에게 한 가지 깨달음을 줬습니다. 
핵 카드가 최고구나 우리 북한도 핵무기를 가져야겠다. 
이렇게 해서 1960년대에 김일성의 병진 정책이 최초로 천명됐습니다. 
병진 정책 경제와 국방 두 가지를 모두 강조하는 노선입니다. 
북한의 군사비는 계속 늘어서
1967년에 30%까지 급상승했고 경제는 점점 더 악순환에 빠졌습니다. 
1968년에는 북한 특수부대 소속 31명이 철조망을 자르고 남하에서 난리가 났었죠. 
청와대를 습격하고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부 요인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은 이들은 한국 육군으로 위장한 채 새 검정 고객까지 침투했다가 정체가 탈로 났습니다.
군경이 출동하면서 29명이 사살됐는데 나머지 둘 중 1명은 도주하고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는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목바이를 따라 왔다고 발언해 충격을 줬는데요. 
박정희 대통령을 따를 거라고 김신조는 그동안 김일성에게 속고 살았음을 깨닫고는 한국의 귀순에서 목사로 살아가게 됐습니다. 
일명 김신조 사건으로 긴장의 끈
바짝 조여지면서 남한에서는 1968년 4월 향토 예비군이 창설됐고 1968년 10월 북파 공작용 실미도 부대가 창설됐으며 1969년에는 교련이 고등학교 필수 과목이 돼서 고등학생들도 기초적인 군사 훈련을 받게 됐습니다. 
남한의 많은 변화를 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김일성은 북한 주민들을 자신의 사상적 노예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주체사상을 북한 최고 통치 개념으로 삼은 건데요. 
주체사상은 마르크스와 레닌의 공산주의 사상을 북한식으로 개조한 김일성 개인 숭배사상입니다. 
김일성은 성경의 10개명을 표절한 유일사상 10대 원칙으로 주민들을 어릴 때부터 세뇌하기 시작했고 주민들은 신격화된 수령 김일성에게 목숨 바쳐 충성해야 했습니다. 
수많은 탈북자들은 주체사상을 강압적인 사이비 종교라고 표현하죠.
또한 김일성은 아들 김정일에게 독재 권력을 물려주기 위해 공교육을 통한 역사 왜곡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북한의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서는 김일성이 축지법 전신술 영신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솔방울로 타나를 만들고 가랑잎으로 큰 강을 건넌다는 내용을 가르치죠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일본에 원폭을 투하한 사실은 쏙 빼고 김일성 덕분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해방됐다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민족을 구원한 김일성과 그 자손들이 대대손손
북한을 통치해야 한다고 명분을 세운 거죠. 
김씨 패밀리의 신격화 일명 백두혈통의 핏줄만이 독재 권력을 잇는 나라 20세기 유례 없는 신정 국가로 변질된 북한은 엄연히 공산주의 노선에서 이탈했습니다. 
1974년부터 후계자 준비를 충분히 거친 아들 김정일은 80년대 후반부터
실질적으로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1994년 7월 8일에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북한 인민들은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만수대 언덕에서 땅을 치며 먹도와 그리고 길거리에 굶어죽은 시체가 넘쳐나는 암흑의 시대 김정일 1인 독재 시대가 새롭게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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