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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가계 대출 규제와 IMF 외환위기 자세히 설명해 드립니다.

by 로이인랑 2023.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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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imf에서 돈을 꾸는 게 정상일까요. 
안 꾸는 게 정상일까요.
최근에 은행 가서 대출 받아보신 적 있으세요. 
굉장히 어려우시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영끌 대출이니 또는 비투니 돈을 너무 많이 사람들이 빌린다 하는 것이 뉴스가 됐었는데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대출 창구에 목을 조이느라고 사람들이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돈을 얻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출 난민 원정 대출 이런 말이 들리고 있습니다. 
서울에 사는 사람이 충청도 사람에게만 문호가 열려 있는
서민금융기관을 찾아가서 충청도에 가서 충청도 사람 흉내내고 돈을 얻는다고 해요.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그런데 이런 일이 요즘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외환위기 전에 정부가 그때는 관치금융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정부가 금융기관들의 목줄을 죄고 희소했던 금융자원을 산업대출로 많이 돌리는 바람에 가계가 돈 얻기가 힘들어서 중간에 브로커를 끼고 대출 수수료를 주거나 아니면 급행료를 내고 대출을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대로 기업의 경우에는 많은 혜택을 받았죠. 



그래서 오늘은 그 분과 그분과 얽혔던 아엠에프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한국은행 총재가 스물다섯 분 계셨는데요. 
그 중에서 이경식 총재가 조금 특이합니다. 
그분과 관계된 영화가 두 편이 있거든요. 
하나는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겁니다. 외환위기를 소재로 했던 김혜수 주연의 국가부도의 날 이천십팔년에 개봉을 했었죠. 
이천사년에 박신양 주연의 범죄의 재구성이라는 영화도 있었습니다 한국은행 구미사무소에서 9억 원인가 3억 원인가 현금을 도난당한 사건이 있었어요. 
금융기관 직원을 사칭하는 사람이 와서 한국은행 대출 창구에서 돈을 받아갔었는데요. 
그 두 사건
당시의 총재가 이경식 총재십니다. imf 뭐 교과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44년 세계 각국이 모여서 전후에 국제통화질서를 다시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진 기구죠 천구백사십오 년 12월부터 활동을 시작을 했고요 우리나라는 거기에 현재 팔백6십억 정도의 지분을 갖고 있습니다. 
지분율이 1.8% 되고 지분 순위로는 한 16이 됩니다. 
189개국에서
16위니까 뭐 높다고 하면 높고 낮다면 낮을 수가 있는데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 경제 규모에 비해서는 조금 낮죠 전 세계가 다 그렇습니다. 
그걸 조금씩 모아서 누가 갖고 있느냐 미국이 갖고 있죠 미국은 자기 경제 규모에 비해서는 조금 많은 지분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imf에 1955년 8월에 가입을 했습니다 가입 당시에는 우리나라 순위가 훨씬 낮았습니다.
0.14%밖에 되지 않습니다 가입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굉장히 재미있어요. 6.25가 터졌습니다. 
6.2가 터지니까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들이 다 와가지고 우리나라를 돕겠다고 옵니다. 
그래놓고선 한국한테 나 너희들 도와주러 왔으니까 밥내놔 온내나 이렇게 하면 될까요. 
안 되죠 전쟁을 도와준답시고 와가지고 군인을 파견한 다음에 그 나라를 못 살게 구민이요
그거 청일전쟁 때 청나라하고 똑같은 겁니다. 
우리나라가 베트남에 가거나 아니면 중동을 갔을 때도 우리 군대가 갈 때는요 군인들이 먹고 쓸 거 우리가 다 갖고 갑니다. 
그게 진정 도와주는 거니까요. 6.25 때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미군이 유엔군을 보내면서 일단 한국은행이 좀 너희들 돈으로 유엔군과 미군을 도와다오 나중에 다시 갚을게 이렇게 맺은 것이 마이어 협정이라는 것이고요 전쟁이 끝나니까 한국은행이 조릅니다. 
돈 내놔 그래서 미국이 그
8580만 달러가 한국은행한테 빌린 돈을 갚습니다. 
그게 당시에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의 3배 수준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기분이 좋았죠. 한국은행이 돈을 풀어서 외환보유고를 다시 확충을 하네 땡큐 이거 어따 쓸까 이승만 대통령이 장관들의 의견을 듣습니다. 
재무부는요 이 귀한 외화 자원 이거 석유도 사와야 되고요 국방비도 늘려야 되고 돈 쓸 때가 많습니다. 
그때 한국은행 총재가 김유택 총재였었는데 잠깐
눈 딱 감고 그중에 3분의 1은 imf 월드 랭크 가입하는 데 씁시다 거기 우리가 왜 돈을 써 쓸 데도 많은데 거기 가입할 필요 없어 난리를 치는데 한국은행 총재가 나서서 재무부도 제끼고 외교부도 제끼고 imf 본부가 있는 워싱턴을 직접 찾아가가지고 1955년에 가입을 합니다. 
그때 한국하고 같이 가입했던 나라가 아프가니스탄이었습니다. 
그때 세계는 아프가니스탄과 한국을 똑같이 취급했습니다. 
그때 에피소드가 또 하나 있어요. 한국은 돈이 없으니까 너희들 어디서 자니 천구백오십오년
imf 연차 총회를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렸었거든요. 
그때 개최 장소는 힐튼이었고요 전 세계 모든 나라가 힐튼의 숙소를 잡고 있었는데 한국은 돈이 없었습니다. 
그때 터키 정부하고 아엠에프가 특별히 배려를 해줍니다 한국에서 온 대표단 김유택 한국은행 총재하고 그 밑에 있는 두 사람은 이스탄불 대학교 기숙사에서 자라
마침 방학이다. 그래서 한국이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아 우리 여관비 벌었다. 
그렇게 해서 가입한 것이 imf였었습니다. 
imf를 가입한 이상 한국은행은 한국은 imf에서 돈을 꾸는 게 정상일까요. 
안 꾸는 게 정상일까요. 그게 참 대답하기 묘한 겁니다.
imf에서 돈을 꾼다는 것은 외환위기가 닥치거나 아니면 국제수지에 심각한 불균형이 생겨가지고 돈을 꿇어가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래서 정부가 imf 가입할 할 필요가 그렇게 급하지 않다고 얘기했던 것입니다 한국은행은 그래도 이멀전시를 대비해서 imf 가입하면 좋겠다. 
이렇게 얘기했던 것이고요 imf에 많은 돈을 내고 가입을 하더라도
돈을 자주 찾아 쓰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선진국이라고 해서 imf에서 돈을 안 꾸는 것도 아니고 후진국이라고 해서 많이 꾸는 것도 아닙니다. 
참고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독일하고 캐나다는 지금까지 imf가 창설된 이후에 한 차례도 돈을 꾼 적이 없고요 네덜란드 한 번 미국은 몇 번 꿨을 것 같습니까 미국 일본 이태리 그리스 의외로 그리스는 두 번밖에 안 꿨습니다. 
그다음에 프랑스 스페인이 3번 차입 협정을 맺었고요 포르투칼 4번
영국은 11번이나 구웠습니다. 생각보다 많고요 브라질 16번 멕시코가 17번 우리랑 똑같습니다. 
터키가 19번 그리고 아르헨티나가 21번 구웠습니다. 
우리나라는 1955년에 가입한 다음에 65년에 처음으로 930만 달러의 스탠바이 협약을 맺었고요
그 이후에 총 17번을 스탠바이 협약을 맺었습니다. 
스탠바이 협약을 맺은 건 급하면 돈을 꾸겠다고 하는 계약을 맺는 것이고요 실제로 꾼 것은 조금 다릅니다. 
제 기억에 계약은 17번을 맺었는데 실제로 돈을 인출한 것은 8번이었고 그나마 그중에서도 다섯 번은 계약금보다는 작은 부분적으로만 인출을 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비교적
경제 운용을 잘 해왔다는 뜻이죠. 그런데 한국이 그 스탠바이 협정을 열 일곱 번이나 맺었고 돈을 여덟 번이나 꾸었는데 왜 천구백구십칠 년만 유독 문제가 되는 것이 1997년 imf에서 꾼 돈은 그전에 7번 었던 거를 다 합친 거에 10배가 넘는 금액을 한꺼번에 었습니다. 
일단 금액이 많았고
그 과정이 좀 드라마틱합니다. 1996년 말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지금보다는 은 10분의 1도 안 되지만 332억 달러였는데요. 
그다음에 10월에 되니까 300억 달러 이하로 내려가고요 그리고 두 달 사이에 돈이 다 빠져나가가지고 연말 imf에서 돈을 꿀 때는 39억 달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급전직하로 외환 보유액이 줄어든 것이죠. 

당시 정부가 환율 방어를 위해서 갖고 있는 달러를 금융시장에다 풀었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 검찰에서도 수사까지 하기도 했는데 왜 imf가 닥쳤느냐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학자들도 원인을 분석하고 관료들도 회고담을 내고 지금까지 그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크게 보면 원인론은
시기상조였었다. 우리나라가 왜 세계화를 하고 oecd를 가입했느냐 하고 그걸 후회하는 사람도 있고요 중국 음모론으로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국이 1994년 1월에 소위 사회주의 시장 경제를 한답시고 변동 환율 제도를 채택하면서 한꺼번에 위안화를 33% 평가 절하를 했습니다.
그때 세계 각국은 중국 보러 그래 잘한다 니들이 시장 경제를 조금이라도 한다니까 급격한 평가 절하 오케이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그것이 중국의 모든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크게 높여가지고 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이런 나라들한테 연쇄적으로 국제수지 불균형을 일으키게 해서 소위 말하는 아시안 크라이시스를 촉발시켰습니다.
그래서 중국한테 책임이 있다는 그런 분석도 있고요 당시 관료들은 날벼락론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그냥 금융시장이 미쳐가지고 그런 일이 생겼었다. 
이렇게 얘기를 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들은 관치금융이나 민간의 과다한 차입 기업들이죠. 
그런 것 때문에 외환위기가 생겼다. 이런 원재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드리고 싶은 말씀은 당시에 한국은행 총재 총재를 맡으셨던 그리고 저의 상사였던 이영식 총재께서 당시에
외환 정책과 통화 정책의 최종 책임자로서 부끄럽다 해서 이제 야인이 되셨는데 저를 몇 번 돌아가시기 전까지 만나서 후에 비슷하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경식 총재는 천구백오십칠 년에 한국은행에 들어오셔가지고 한 5년쯤 근무하다가 당시 이제 오일육
군사 정변이죠. 그 이후에 한국은행보다는 다이내믹하게 움직이는 정부에서 일하는 것이 좋겠다 해서 경제기획원이죠. 
당시에 경제기획원에서 정부 관료로서 생활을 시작을 하셨습니다. 
그때 만난 분이 강경식 imf 당시의 부총리였던 강경식 씨입니다.
예산 경제기획원의 두 경식이 있었습니다. 
강경식 이경식 강경식은 서울 법대를 졸업한 고시에 합격한 고시파의 원조 한국은행 출신의 이경식은 고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기획원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한 비고시파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주고 밀어주고 끌어주고 하는 정도까지는 않지만 인맥의 양대 산맥을 이루면서 서로를 소위 말해서 험담하거나 뒷담아 치지 않고
서로를 인정해주면서 신사적으로 관료 생활을 나란히 잘 하셨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하던 일을 자기가 맡아서 하기도 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렇게 일을 했어요. 
대표적인 게 금융실명제입니다. 장영자 사건이 났을 때 강경식 당시 재무장관이 금융실명제를 하겠다고 하다가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덮어둡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이죠. 그것을 y이했을 때 부총리를 맡은 이경식 부총리가 그것을 이어받아가지고 금융실명제를 완성을 합니다.
두 사람의 인간관계는 1961년부터 97년에 이르기까지 그런 식으로 이끌어왔기 때문에 상대방이 하는 것을 비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경식 총재가 나중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 외환보유액이 급격히 빠져나갈 때 내가 이경식이 강경식한테 브레이크를 걸고 이의를 제기를 했어야 되는데 너무 우리는 인간적으로 서로를 존중을 했어
그게 조금 후회가 돼 이런 말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관료들은 아무리 친분 관계가 좋더라도 서로가 할 말을 하지 않을 때 견제와 균형 원리가 깨지면서 위기가 닥칩니다. 
지금 가계부채 문제가 그렇습니다 가계부채 올해 갑자기 늘어난 거 아니잖아요. 
지난 5년 동안 우리나라 가계부채 증가율은
세계에서 1위였습니다. 아무도 말을 안 했습니다. 
기획재정부 한국은행 금융위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주면서 하하 웃으면서 서로 상대방한테 상처 주지 않는다 점잔 빼다가 이제 와서 가계부채를 관리를 한다고 하니 원정 대출과 대출 난민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국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외환위기 때도 그랬습니다. 중요한 것은
경제의 한 축을 맡고 있는 경제 관료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의 인간적인 관계를 떠나서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의 책임과 의무를 다할 때 경제가 잘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그게 돌아가신 이경식 총재께서 저한테 여러 번 해주신 후회담이었습니다. 
이경식 총재님 제가 할 역할을 다 했습니다. 
우리 코로나 예방 주사 맞으면 회복될 때까지 끙끙 앓듯이 이제는 더 늘리지도 않고 더 줄이지도 않고 그냥 이대로 버텨가면서 경제가 조금 나아지고 경제 성장이 될 때까지 버티면 명목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조금 떨어질 테니까 그냥 그런 식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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