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8세기 청나라의 위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습니다.
중국의 마지막 제국인 청나라는 세계 gdp 약 35%를 차지하는 세계 최상위권 수준의 부국이었는데요.
서구 열강들은 청나라의 넓은 땅과 역사, 경제력과 잠재력을 내심 두려워했습니다.
한편으로 18세기는 산업혁명이 시작된 시기여서 영국과 일부 유럽국 국가들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면직물 생산량에 포텐이 터지자 이 많은 물건을 어디다 갖다 팔지 하며 해외 시장을 찾았는데, 자연스레 인구 3억의 거대한 중국 시장이 눈에 들어왔죠.
하지만 청나라는 쇄국 정책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무역 좀 하자는 서양 국가들에게 딱 한 곳, 광저우의 문만 기꺼이 열어주고 있었죠.
그런데 웬일인지 자꾸 중국만 흑자를 보는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양에서 중국산 도자기는 사회적 지위와 부의 상징이었고, 중국산 비단은 고대부터 알아주는 사치품이었습니다.
특히 영국인들에게 중국산 차는 인기 광풍이었는데요.
반대로 중국에
답할 물건은 마땅치가 않은 겁니다. 영국은 대량 생산 중인 면직물을 팔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중국 인구가 미친 듯이 만들어내는 값싼 면직물과는 애초에 가격 경쟁도 힘들었죠.
게다가 하필 광저우 같이 뜻뜻한 남부 지역이 개양됐으니 면직물이 인기 있을 리 그리고 청나라가 사실 겉만 화려했지 백성들은 여전히 가난해서 영국의 피아노 같은 물건은 꿈도 못 꿀
사치품이었습니다. 당시 무역할 때는 은으로 대금을 지불했는데요 중국은 영국에서 빨려 들어오는 엄청난 은으로 주머니를 두둑히 채웠습니다.
그래서 1700 93년 영국왕 조지 3세는 무역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메카트니 사절단을 청나라로 보냅니다.
우리 서로 동등한 조건으로 통상하자고 요구한 건데요.
청 황제 건륭제는 거만한 태도로
답했습니다.
우린 스스로
잘 먹고 잘 살아서 부족한 것도 없고 너희 물건은 필요가 없다 서구 오랑캐들이 하도 우리 물건을 원하니까 불쌍해서 은혜를 베풀어줬다 우리 물건이나 사가라 이런 입장인 거였죠.
영국은 머리를 굴렸습니다.
대체
팬들에게 뭘
팔아서 돈을
그리고 마침내
너무도 강력한 물건을 생각해냅니다. 아편, 즉 마약을 중국에 갖다 팔자는 거였죠.
영국은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아편을 대량 생산했고 이걸 중국에다가 몰래 밀수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의견 중 엄금파의 의견이 뽑혔는데 약간 극단적이었죠.
아편 흡연자는 1년 안에
아편을 끊도록
하고 그 안에 못 끊으면 사형시키자는 겁니다.
그리고 청 황제 도광제는 임칙서라는 유능한 인물에게 황제의 정권을 위임하는 흠차 대신 자리를 주고 아편을 근절하라고 명했습니다.
임칙서는 아편으로 고통받다 죽은 친동생을 생각하며 온나라 아편을 싹 다 없애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광저우에 도착한 임칙서은 서양 상인들에게 다시는 아편 무역 안 한다고 약속하라면서 각
받아냅니다. 그리고
상인들에게서 앞편 약 2만 상자를 압수하더니 바다에 폐기해버렸죠.
결국 영국의 뚜껑이 열리고 말았습니다.
돈줄이 걸린 아편 단속에 반발한 건데요.
영국 의회는 전쟁 찬반 투표를 열었습니다.
원래 아편전쟁 찬성 여론이 압도적이었는데 31세 젊은 평민 출신 의원이 뜨거운 연설
펼치자 공기의
바뀌어 버립니다. 우리는 대형제국 국기가 펄럭이는 걸 보며 피가 끌어오르고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그건 우리의 국기가 항상
민족의 영광, 공명정대한 상업을 위해 싸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깃발은 더럽혀졌고 추악한 아편 밀수를 보호하려고 나부끼고 있습니다.
이것만큼 대형제국을 불명예로 빠뜨릴 전쟁은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찬성 271표, 반대는
62표 단 9표 차이로
아시아의 역사가
뒤바뀌게 됩니다. 그리하여 1,
40년 6월 영국이 약 4천 병력을 이끌고 광저우로 진격했죠.
본격적인 1차 아편 전쟁의 막이 오른 것입니다.
막강한 해군력으로 세계를 침탈 중이던 영국과
오랜 기간 세상의 중심이 우리라고 자부해 온
중국의 전쟁 그야말로 동서양 문명의 대충돌이었습니다.
그런데 청나라군의 200년쯤 묵은 장비와 낡은 목선은 영국군의 최신식 군함과 대포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 관료들은 이 사태를 그저 일시적인 분쟁 정도로 치부했습니다.
뭐 오랑캐들이 뺏긴 나편 돌려달라고 난리 치는구나 우리의 은혜를 애걸한다니 배상 좀 해 주고 타협하면 되겠지 황제의 눈과 귀를 막는 데
같은 청나라 관료들은 도광제에게 우리가 이기고 있다며 거짓 보고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청나라 군을 처참히 무너뜨리며 진격하던 영국군이 마침내 중국 남부
거대 도시 난징 성벽을 둘러쌌는데요.
이 사실을 알게 된 도광제가
극대노했지만, 뭐 그저 굴복하는 수 밖에 없어
없었습니다. 이렇게 아편전쟁
막이 내리면서 1842년, 그 유명한 난징조약이 맺어집니다.
중국과 영국이 맺은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자 앞으로 중국 경제를 몰락시킬 조약 난징조약에 따라
홍콩 섬이
공식적으로 영국에 넘어갑니다. 또한 5개 항구를 강제로 열게 됐죠.
이렇게 아편전쟁으로 청의 무기력한 실체가 까발려졌으니 서구 열강들은 너도 나도 이빨을 드러내며 청과 조약을 맺자고 달려들었는
미국과 프랑스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내용을 신나게
추가했습니다. 아편전쟁이라는 수치 속에서 중국 근대사의 문이 열렸습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의 세계에 갇혀 살던 중국은 서구 열강에게 멱살 잡혀 혹독한 외교의 세계로 끌려 나옵니다.
중화사상은 뿌리째 흔들렸고 나라 안팎으로 빨간 경고 등이 번쩍 들면서 1850년부터는 14년 동안 대규모 내전까지 벌어지는데요.
성남민중,
부패한 청나라, 만주족을
몰아내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며 태평천국 운동을 벌인 겁니다.
총 2천만에서 3천만 명이나 사망한 최악의 내전이었는데 청나라는 서양의 도움으로 겨우 난을 진압하게 됩니다.
이렇게 어지러운
영국의 중요한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2차 아편전쟁의 원인 에로호 사건인데요.
1856년에 중국 관리가 에로호의 중국인 해적을
합니다. 이때 영국은 이 에로호의 선장이 영국인이라는 걸로 딴지를 걸었죠.
그리고 또다시 청나라 무릎을 꿇리기 위한 전쟁을 시작합니다.
1856
작년부터 5년
동안 벌어진 2차 아편전쟁입니다. 영국이 2차 아편전쟁을 일으킨 진짜 이유는 1차 편 전쟁 이후 또 무역적 적자가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청나라에 열심히 아편 팔아서 돈 벌려고 했더니 자급자족의 나라 청나라가 이젠 아편까지 자급자족해서 피우는 겁니다.
2차 아편전쟁의 특징은 프랑스까지 영국과 손잡고 나섰다는 건데요.
청나라에서 프랑스 선교사가 처형된 일을 구실로 삼았습니다.
영프 연합군 앞에
폴싹 쓰러진 청나라는 1858년 톈진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요.
이제 영국 군함은 중국 모든 항구에 드나들기로 하고 대신 영국 군은 점령하던 다구 요새에서 물러나 줍니다.
근데 영국군이 물러나자 갑자기 청나라가 배째라면서 톈진 조약을 안 지키려는 겁니다.
기가 찬 영프 연합군은 수도 베이징으로 진격
황제 함풍제는 도망을 갑니다. 황제가 떠난 베이징에서 영국군은 황제의 자존심이었던 거대한 황실 정원 원명원을 파괴했죠.
중국 정원 예술의 극지였던 원명원을 폐허로 만든 건 그동안 서양을 우습게 알던 황제의 마음을
다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도 없는 청나라는 1860년 베이징 조약을 맺게 되는데요.
이때 청나라는 현재 홍콩섬 건너편에 구룡반도까지 영국에 내줍니다.
이로써 홍콩섬과 구룡
오늘날
세계 최고의 국제금융 중심지 홍콩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러시아는 베이징 조약을 중재한 대가로 연해주를 넘겨받고 조선과 국경을 맞대결
1, 2차 아편전쟁으로 서구 위력에 탈탈 털린 청나라 이제 서양에 대한 업무, 즉 양무 운동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며 개혁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양무운동은 실패하고, 1894년에 청일전쟁에서도 패배하면서 자기 아인 줄만 알았던 일본에게도 무릎을 꿇게 청나라가 일본에 패배한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근대화를 위해 뿌리부터 갈아엎은 일본과는 달리, 청나라는 겉핥기식으로 서양의 기술만 도입했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사상
제도는 뜯어 고치지도 않고,
청 황제나 서태후 같은 권력자들은 그저 자신의 권력 지키기에만 급급했습니다.
1894년의 청일전쟁으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이제 일본 중심으로 재편돼 버렸고,
일본은 아시아에서 제일 빠르게 제국주의 국가로 자리 잡고
됩니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은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하고 식민지로 전락해 최악의 암흑 시대를 살아냈죠.
아무튼 한심한 나라 꼴을 보며 청나라 민중들은 생각했습니다.
개혁이니 뭐니 해도 결국 이 나라는 뿌리부터 썩었다.
이놈의 만조족이 세운 청나라 자체를 없애
이로써 역사의
무대 위로 혁명가들이 쏙쏙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중국의 국부 수원이 있죠.
결국 1912년 신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중국의 마지막 왕
청나라가
멸망합니다. 그 이후 수원에 의해
한민국이 건국되지만, 1949년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울 때까지도 중국 격동
역사는 쭉 이어집니다. 중국 근대사의
치욕스러운 시작점이자
영국이 타국에 마약을 뿌리며 벌어진
추악한 전쟁 아편 전쟁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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