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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순신은 왜 선조에게 버림받으면서도 신의를 끝까지 지켰을까?

by 로이인랑 2023.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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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제목은 왜 그는 혁명을 택하지 않았나입니다. 
울구도 잘 알다시피 이순신은 여러 번 생사의 고비를 겪었습니다. 
군인이었으니까요. 나라를 위해서 싸우다가 죽을 수도 있는 거죠.


하지만 이순신은 이를 떠나서 정치적으로도 굉장히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철저하게 무너졌죠. 임진왜란 때 만약에 군인 이순신과 의병이 없었다면 지금 저나 선생님들이 과연 조선어 한국어를 쓰고 있을까 하는 그런 궁금한 상상도 해봅니다. 


그 당시
공식적으로 조선이라는 국가를 이끌고 있던 지도자 이연이라는 지도자와 이 군인 이순신이 굉장히 큰 갈등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바로 선조입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 와중에서 가끔씩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던집니다.
왜 이순신은 그때 혁명 혹은 쿠데타를 꿈꾸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이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드리겠습니다. 
군인 이순신은 철저하게 무너졌습니다. 
계급장을 때리고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무계급으로 전투에 임하고 그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그 이순신이 겪은 정신적인 수모 그리고 육체적인 고통은 정말 끔찍합니다. 


그래서 의문이 생기는 거죠. 군신이라고 추앙을 받되 인간이거늘 그는 왜 항명을 하지 않았을까 라는 질문입니다. 
나라는 어지럽고 민심도 군사도 그의 편이었는데 이 우직한 군인은 전쟁터에서 그냥 죽었습니다.
그 이순신 이야기입니다. 조선 최고 지도자인 이연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하겠습니다. 


이연 조선 14대 국왕 선조의 이름이 이연입니다. 
서기 1597년 음력 2월 26일입니다. 
조선 해군 총사령관 이순신이 가덕도로 향하던 도중에 사령부인 삼도 수군통제영으로부터 귀대 명을 받습니다. 
귀대를 했죠.
통제영은 지금 현재 경상남도 통영 한산도에 있습니다. 


가봤더니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체포조가 대기 중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별 넷이죠. 대장이 이순신이 그 계급장을 때리고 서울로 압송이 됐습니다. 
단 한 차례도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는 용장이자 지장이었죠.
그 체포조 옆에는 후임 사령관이 대기 중이었습니다. 


후임은 원균입니다. 압송되기 전에 이순신은 이 후임 사령관 원균에게 군비 일체를 인계합니다. 
그 리스트를 작성해서 넘기시죠. 그때 한산도 병영 안에는 군량 및 구천구백열네 석 화약 사천 균이 있었고 각 군함마다 총통
장거리 포입니다. 300자루가 탑재돼 있었습니다. 


다섯 달 뒤 이 병력과 군수품은 거제도 앞바다 칠천량 바다에 몽땅 수장이 되고 맙니다.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그러니까 정유재란까지 포함해서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이런 이상한 풍경이 끝없이 펼쳐집니다.
그 이상한 풍경 중에 하나가 이겁니다. 
헛소문이지요. 난중일기에 이렇게 기록이 돼 있습니다. 


선전관 이순일 말이 명나라에서 공 나에게 은청금자 광록 대부자위를 내려준다는 소문이 있더라 라고 말하였다. 
필씨 헛소일 것이다.
이게 천오백구십삼년 오월 오일 그러니까 전쟁 초기에 쓴 난중일기 기록입니다. 
즉슨 이순신이 연전 연승을 거두니까 이순신을 명나라로부터 벼슬을 주기로 했다는 그런 소문이 떠돌았던 겁니다. 
이 소문이 돌고 돌아서 이순신 본인에게까지 들어온 거죠. 


전라좌수사로 전쟁에 뛰어든 지 일 년 그리고
전라 충청 경상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되기 석 달 전입니다. 
그런데 광록대부는 명나라 종일품입니다. 
그 아래로 아까 그 이름이 뒤섞여 있는 금자 광록대부와 음청광록대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문 자체가 엉터리죠. 가짜 뉴스인 거죠. 


그래서 종일품이었던 소문 속의 벼슬은 전쟁이 진행되면서 정일품이 됐다까지 진화합니다. 
가짜 뉴스가 전 증폭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중앙정부에까지 들어갑니다. 


기록까지 나옵니다.
순신의 직품은 정일품이었으니 따라서 법전에 따라 제사를 지내야겠으나 라고 선조실록에 기록이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문을 진실로 믿고 이순신이 전사한 뒤에 그 제사 방식을 어느 풍기에 맞게 치러야겠는가 라고 논의까지 하게 된 겁니다. 


또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충무공은 황조 황제의 도덕이라는 벼슬을 받았음에야 말할 나이가 있겠는가
라고 정조실록 200년이 지난 뒤 정조실록에 그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1793년에 정조가 내린 영의정 추진 교서에도 유명 수군 도독으로 시작이 됩니다. 


유명이라는 거는 유명 조선 수군 도독이 아니라 유명 수군 도독이라고 돼 있는 거죠. 
조선이 빠지고
그런데 중국의 어느 사설을 봐도 이순신이 명나라 황제로부터 정일품 도덕 볕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뜬 소문이거나 아니면 백번 양보를 해서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내린 벼슬 둘 중 하나입니다. 
볏을 비밀리에 내린 리는 없겠죠. 그렇기 때문에 이건 백 퍼센트 뜬소문입니다. 


문제는 사실 여부가 아닙니다.
지금 현대의 정치에서도 왕광 번지고 있는 그런 가짜 뉴스를 그 소문을 선조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걸 진실이라고 믿었던 거죠. 
자 그럼 선조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우리도 대충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조라는 지도자에도 양면성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질투심과 이기심입니다. 조선 십사대 국왕 이연은 유능한 인물이었습니다. 
주위 만류를 뿌리치고 정읍현감을 하고 있던 이순신을 칠 계급 특진을 시켜서 전라좌수사로 임명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만큼 사람을 볼 줄 아는 능력이 있었던 거죠. 


주변에서 말이 많았지만 이 선조라는 지도자는 이 정읍현감을
조선 해군, 일군 사령관으로 임명을 해버립니다. 
전쟁이 터지고 조선이 붕괴되니까 나라가 가망이 없음을 알고 요동으로 망명 갈 꿈을 꾼 그런 판단이 빠른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전란 초기에 조선군을 무기력하게 만든 조총 이 조총의 소리만 들어도 조선의 육군들이 모두 도망을 쳤다는 그런 신비한 무기였죠.
이 조총을 스스로 역설계를 해서 조립도 하고 그래서 그 당시 신하였던 유성용에게 내가 어디 않게 만들었는데 웃지 말고 이를 한번 실험해보기 바란다 라고 얘기도 했던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각 전투마다 각료들과 함께 전황을 토론하는 전술가이기도 했습니다.


이 영민함을 덮고도 남는 자질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이기심입니다. 전쟁이 터지고 보름이 안 된 14일 만에 중국으로 가려는 선주에게 관료들이 가시려거든 아니 가지 마시고 난세에는 일단 몸을 피하소서. 
대신에 왕세자부터 먼저 결정해 달라 라고 주장을 합니다. 


비상사태 때
대를 이을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거죠. 
왕이 떠나면 민심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고 한 겁니다. 
이틀 뒤에 선조는 둘째 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임명하고 의주까지 도주를 합니다. 


이를 목격한 하얀성 주민들은 경복궁을 불태워서 화를 다 냅니다. 
선조가
의주까지 피나에 가있는 동안에 전쟁 준비 그리고 백성의 위문은 열일곱 살 먹은 아들 광해군이 책임을 졌습니다. 
육지에서는 지도자가 팽개친 백성이 의병을 일으키고, 바다에서는 그가 낙점했던 탁월한 장수 이순신이 나라를 구했습니다. 


도주한 선조가 평남 안주에서 명나라 장수 유언혜를 만났습니다. 
유언혜가 이렇게 말합니다.
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대국이었는데 선비와 서민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에 변란을 초래했다 라고요. 
선주 이렇게 대답을 하지 오직 대인의 가르침에 따를 뿐이옵니다. 


백성한테 황제국의 장수한테 조롱과 비난을 받은 이 지도자 그 조롱과 비난 보통 사람이 받을 비난이 아닙니다.
자기가 살던 곳, 자기 사무실이 불에 홀딱 타버리고 백성에 의해서 원조를 온 원병으로 한 타국에 군인으로 장수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그런 분노를 군사에게 돌립니다. 


나라를 살린 의병장들 그리고 이순신은 나라를 버린 지도자에게 깊은 분노와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전쟁 도중에 반란죄로 처형된 의병장이 있습니다. 
전후 논공행상 때 퇴직 관리 출신을 제외하고는 의병장들은 단 한 명도 공신록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없는 모든 것을 소유한 자가 맹활약 중이었습니다. 


민심과 군사력을 갖춘
이순신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걸 갖춘 이순신이 그 사내가 조선과 조선 국왕을 비웃은 황제국 명나라로부터 정일품 벼슬을 받았다는 겁니다. 
정작 에 해군사령관 이순신 본인은 우직한 군인이었습니다. 


임명이 됐을 때 이렇게 씁니다.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뛰어넘어서 분에 넘쳤다 라고요. 
근데 문제가 많았습니다. 본인에게 문제가 많은 게 아니라 이 지도자가 볼 때는 문제가 많았던 겁니다. 
무력과 민심을 가진 군인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선조 이견에게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선조가 가지고 있는 덕목을 압도하는 그런 자원이고 덕목이었죠. 
이순신은 소문과 무관하게 적과 싸웠습니다. 


일본군은 조선 해군에게 보급선을 차단당하고 전쟁은 어느덧 소강상태에 접어듭니다. 
그리고 세월이 몇 년이 흘러서 천오백구십칠년 이월 수군 통제사 이순신이 체포됩니다.
고문 끝에 관직을 삭탈당하고 백의종군하게 됩니다. 


전쟁 초기에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 부대가 이 경상도에 수사했던 원균을 구원해줬죠. 
이 원균이 그를 모함하는데 인님은 힘을 다했다라고 유성룡이 징비록에 썼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선조와 원균에게 호기가 찾아왔습니다.


일본으로 귀국했던 일본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다시 침략한다는 그런 정보가 조선 왕실에 들어온 겁니다. 
사실은 거짓 정보였습니다. 이순신은 이미 조선에 이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상륙해 있다라고 판단을 하고 이 일본군을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을 했죠. 


출정을 하게 되면
바로 매복해 있는 기존에 와 있는 일본군으로부터 역습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선조 정부는 이 정부를 신뢰하고 공격을 명합니다. 
이순신은 거부합니다. 그래서 선조는 그에게 세 가지 죄를 묻습니다. 


첫째, 조정을 기만해서 임금을 무시한 죄 둘째, 적을 놓아줘서 나라를 저버린 죄 마지막으로 남의 공을 가로채 모함한 죄
마지막에 남의 공을 가르친 모아한 죄는 원균부대와 이순신 부대 간의 알력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순신이 자기 휘하 부대 장수에 손을 들어줬죠. 


이것까지 포함을 해서 세 가지 죄를 물어서 이 이순신을 체포를 하고 전쟁 중에 그런데 이게 천오백구십칠년 음력 삼월 십삼일 일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두 달 전에 선조는 이미 이순신에 대한 처벌을 작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정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순신 같은 사람은 갓도 기후 맛의 목을 베어오더라도 용서할 수가 없더라구요. 
1597년 1월 27일 선조실로에 적혀 있습니다. 
그 조정에서 있었던 회의의 풍경을 유성룡이 진비로 기록을 하는데,
초고에는 있었다가 완고에는 지워버린 문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초고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임금이 죽이고자 원하여 상륙 주지 그만큼 주변 사람이 보기에도 확연히 보일 만큼 선조는 능력 있고 덕이 있는 군사 지도자 이순신에 대한 질투심이 탱천하고 있었던 거죠.
결국 조선 해군 총사령관은 전쟁 한복판에 최전방에서 파열이 됩니다. 


모든 사람이 선주의 말을 들어서 죽이라고 찬성을 했습니다. 
그런데 판중추부사장 지식을 가지고 있던 정탁이 강력하게 사용 불가를 주장했습니다.
이순신을 절대 죽이지 말라고 상소문까지 작성을 했는데, 그 상소문을 제출하기 전에 이순신이 사형을 면하고 풀려납니다. 
어찌 됐든 절대적인 찬성 속에 이순신은 처벌을 겨우 면합니다. 


선조는 이순신을 수감을 하고 좌승지한테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내 왕위를 내려놓겠다 국왕 사표를 내겠다는 겁니다.
이 7년 전쟁 동안 선조가 국왕 자리를 광해군한테, 자기 아들한테 내려놓겠다고 주장한 횟수가 15번입니다. 
그만큼 자기의 의지를 관찰하는 데 약간 땡깡을 부릴 줄 아는 그런 왕이기도 했습니다.


이순신은 이덕형에 따르면 거의 죽을 만큼 매를 맞고 백일 종군 끝에 복직 명령을 받았습니다. 
8월 3일 출간 넉 달 만입니다. 얼마나 고문을 했느냐에 따라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합니다. 
이덕형은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았다라고 했지만 다른 기록을 보면 정말 형식적인 명예를 압살할 수 있을 정도만큼의 형식적인 매를 맞았다 라고
기록이 돼 있습니다. 이 이순신으로 하여금 심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런 중 고문을 받은 것 같지 않습니다. 


8월 3일 출감 넉 달 만에 이순신이 계급장이 하나도 없던 이순신이 계급장을 되찾습니다. 
경상남도 합천을 지날 때니다. 서울에서 걸어 내려갔죠. 
합천을 갈 무렵에 이순신이 꿈을 꿉니다. 


꿈 속에
시체가 많이 널려 있어서 밟기도 하고 목을 베기도 하는 그런 꿈이었습니다. 
난중일기에 이 꿈을 기록을 하지 구십칠년 칠월 십사일자 난중국입니다. 
이틀 뒤에 칠천량에서 조선 해군이 전멸합니다. 


다섯 달 전에 후임 사령관인 원군한테 넘겼던 전 병력,
전 군수품, 전 무기, 전 군함이 바다에 수장이 됐고 원균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20일이 지난 8월 3일 진주에서 산도 수군통제사 복직 명령을 받습니다. 
그때 양호라는 선정관이 문서 두 개를 가지고 옵니다.


하나는 군직 임명장인 사부유서 하나는 그 당시 백의종군 중에 이순신이 모친상을 당했는데 이 모친상을 치르지 말고 바로 탈상을 하고 사령관직에 복귀하라는 복귀 명령서 기복수직교서입니다.
이 기복수직 교수에 선조가 이렇게 써놨습니다. 


이 같이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나 무슨 할 말이 있겠나 무슨 할 말이 있겠나라는 문장이 두 번 반복이 됩니다. 
그만큼 진심이라고 얘기를 한 거죠. 이 사람이 할 말이 없다. 
그대를 전쟁터에서 이렇게 곤란에 빠뜨려서 할 말이 없다
라고 말한 이 지도자 반년 전에는 갓도 기유 맛의 목을 베오더라도 용서할 수 없다라고 얘기했던 바로 그 지도자입니다. 
또 며칠이 지난 9월 7일 이순신이 장계 보고서를 올립니다. 


그 보고서가 유명한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보고서입니다.
신에게는 배가 열두 척이 있나이다. 죽을 힘을 다해 항전하겠나이다. 
그리고 16일 명량해전에 출전해서 승리를 합니다. 
어마하게 많은 적들을 물리치죠. 그리고 그날 밤에 이순신이 일기를 씁니다. 


딱 두 자가 있습니다. 하늘 천에 도행 천행 하늘이 도왔다.
그 전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서 이러하면 이기고 저러하면 폐하리라고 가르쳐줬다고 적혀 있습니다. 
참으로 천행이었던 거죠. 열두 척 그리고 민간으로부터 증발한 한 척을 포함해서 열세 척으로 진도 울돌목에서 수많은 적을 격파한 겁니다. 


자 여기까지는
우리가 상식선이든 어떻게든 잘 알고 있는 그런 이순신과 이연 선조의 악연 이야기입니다. 
너무나도 뭐랄까요 스토리가 어찌 보면 약간 상식적이고 이순신의 덕목에 너무나도 잘 들어맞는 그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간과하고 있는 게 하나 있습니다. 


이런 일입니다. 난중일리를 보면
이순신은 백의종군 이후에 단 한번도 망궐례를 행한 적이 없습니다. 
망궐례는 국왕이 있는 궁궐을 향해서 올리는 충성 의식입니다. 


매달 초 아니면 보름 그럴 때 이 북쪽을 향해서 절을 하고 지금으로 치면 국기대화 경계 같은 그런 걸 하는 거죠.
진주에서 복직 명령서를 받은 이후 노량해전 이순신이 전사할 때까지 그 난중일기에 이 망궐례를 올렸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가 알고 있는 우직한 군인 이순신 답지 않은 기록들이 몇 군데 눈에 보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이런 자들이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에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올라가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건만
조정히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난중일기 구십칠년 팔월 십이 일 복직되고 열흘도 안 돼서 쓴 기록입니다. 
이런 정치에 대한 불만은 전쟁 초부터 있었습니다. 


이런 겁니다. 비밀 교지가 들어왔는데 수륙의 여러 장수가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볼 뿐 개체가 하나 세워서 토벌하려 들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삼 년 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나는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이게 천오백구십사 년 구월 삼일 난중일기입니다. 


또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읽어보니 개탄스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거는 천오백구십육년 오월 이십오일 일기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정치무인 같은 그런 기록들이죠. 


무언가
불만이 가득가득 쌓이고 있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이순신의 명랑 대첩을 기적적으로 하늘의 도움으로 사실은 꼼꼼하게 준비한 전쟁이었지만 전투였지만 이 하늘의 도움이라고 스스로 부를 만큼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뒤에 이순신은 작전상 후퇴 좋게 말해서 그리고 그냥 말하면 도주를 합니다.
목포를 지나서 서해 고군산 열도, 군산 앞바다 섬유도까지 도망을 갑니다. 


거대한 일본 해군 군단이 추격을 해오면 그때는 이길 수가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거든요. 
고군산군도 고군산 열도까지 선유도까지 후퇴를 하는데 영광에서 일본의 육군이 영광을 노략질하고 있는 걸 보고 보면서도
거기에 끼어들지 못하고 그냥 후퇴를 합니다. 


그러고 먼 길을 거쳐서 해남의 우수영에 돌아와 보니 참옥밖에 없었다 라고 이순신이 기록합니다. 
그 무렵에 그가 독후감을 씁니다. 책 이름은 송사 송나라 역사입니다. 
독송사라는 글입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무릇 신하된 자로 군주를 섬기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 참혹 속에 완전히 괴멸된 그런 조선 해군 그 해군이 참혹하게 붕괴된 그 참상을 목격하고 죽음으로 군주를 섬겨야한다고 다짐을 하는 겁니다. 
아주 복잡한 심리가 읽히는 겁니다.


정유재란 이후 복직 이후 한 번도 국왕에 대한 충성 의식을 치르지 않았던 잠깐 동안 정치군인으로서의 변신을 모색했던 것 같은 그런 우직한 군인이 다시 성리학적인 군인으로서 군주를 섬겨야 한다고 죽음으로 섬겨야 한다고 다짐을 하는 그런 글이
난중일기에 끼어 있는 겁니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명량대첩의 승리를 거둔 뒤 한 달쯤 뒤에 선조가 양호라는 명나라 장수를 접견을 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덕담이 오갑니다. 그리고 선조가 말문을 엽니다. 
통제사 이순신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직분의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양호가 대답합니다. 흩어진 전선을 수습해 큰 공을 세웠으니 매우 가상한 사람입니다. 
봄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했고, 여름에는 할 말이 없다고 거듭 고백했던 그래서 보직 명령을 내렸던 지도자가 한 말이 사소한 왜적을 물리친 당연한 일이다라고 한 겁니다. 


그 사소한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은 천오백구십팔년
11월 19일 노량 전투 때 전사를 합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납니다. 무력을 쓴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럼 전쟁 전과 후에 조선 사회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명나라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멸망했습니다. 
대륙은 청나라가 차지했죠.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디오씨가 죽고 정지역이었던 도쿠가 이에야스가
막부를 차지하죠. 애도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섭니다. 


천육백이십삼 년 삼도 수군통제영이 있던 한산도 주민들이 어이없이도 집단으로 연명해서 당시 통제자에게 청원서를 올립니다. 
청원서 내용이 이렇습니다. 전복과 홍삼, 진삼과 관아의 부역이 과해서 천여 가구가 넘던 인구가 삼백 명으로 줄었다.
전쟁을 치르면 시대정신이 바뀌어야 됩니다. 
목숨을 버리며 지켰던 그 나라 그리고 목숨을 버리면서 군주에게 충성을 보여줬던 군신 이순신이 기대했던 세상은 그런 세상이 아니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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