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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명성황후의 본모습을 파헤쳐 봅시다.

by 로이인랑 2023.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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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 내내 왕비가 국정에 개입을 하고 하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거라고 좀 볼 수는 있어요. 
흥선대원군의 한계점을 극복하고 나라 살리기에 매진했었던 훌륭한 인물인가 아니면 나라를 망친 정말 정말 문제가 많았던 여성인가?

명성황후에 사진이 한 몇 장 있는데 어느 거냐 일 미니 사변 때 명성왕후는 탈출하고 실제 죽은 사람은? 궁렬하는 사람 명성왕후는 정말 별 볼 일 없는 집안의 사람이었다 명성황후는 정말 별 볼 일 없는 집안의 사람이었다 이건 거짓말입니다. 
실제로 흥선대원군은 본인의 위치가 취약했었고 여전히 세도가들의 힘이 셌기 때문에 민씨 척족이 다른 집안에 비해서 조금 쇠락한 집안이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잠복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원군 입장에서는 자신의 개혁 정책과 자기 아들 고종의 실질적인 국정의 든든한 뒷받침을 삼고자

사실은 민씨 세력에게 손을 내밀었던 사건이에요. 
오히려 정략의 산물로 그녀가 간택되었다고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이거 진짜 많이 물어보거든요. 명성황후에 사진이 한 몇 장 있는데 어느 거냐

하나하나 좀 이렇게 말씀을 드리게 되면 이 사진 같은 경우는 루트르띠멍이라는 잡지에 일본의 과격 분자에 의해 살해된 한국의 황후다 그리고 테리버네트 시간의 굴레에 갇힌 코리아 뭐 이런 책에도 명성황후의 사진이다라고 남겨져 있기 하고 반대 기록 또한 똑같이 존재를 해요. 
그래서 호머 헐버트라고 해서 미국인 선교사가 썼던 대한제국 멸망사에는 국내라고 딱 표현하고 언더우드 여사의 조선 생활기라는 기록 같은 경우도 그냥 정장을 했던 귀부인이다라고 적혀 있고

현주하는 가장 그나마 명성왕으로 상징하는 사진이라곤 하지만 아닐 확률이 너무 높다 라고 해서 현재도 한국사 교과서에서 빠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단언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는 뭐가 있냐면

주소, 출판사, 발행 일자, 편집자명 이런 것들이 다 정확하게 나와 있거든요. 
그리고 흥선대원군하고 지금 고종의 모습은 그대로 나왔잖아요. 
명성왕의 모습도 맞지 않냐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는데 그 당시의 문화를 보게 되면 황후의 얼굴을 공개하는 경우가 없거든. 
그러니까 아마 이거는 시기를 좀 따져보면 정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유통되던 그림을 그린 것 같다 라고 현재 추정이 되니까 또 특정할 수 없는 거고 하나 또 뭐가 있냐면 이게 좀 재밌습니다. 
이승만이 있었던 독립정신이라는 그 책에 또 사진이 하나 실려 있어요.

그리고 사학자 장도빈의 책에서도 명성왕후의 사진이더라고 남겨져 있기도 하고 이게 또 기이 아니라고 좀 말이 많은데

또 하나가 뭐가 있냐면 흥선대원군과 또 함께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이게 최근에 가장 좀 많이 돌아다니는 사진인데

사진을 가만히 보고 계시면 속 일치잖아요 지금. 
그리고 바지가 보여요. 근데 저런 식으로 왕호가 옷을 입는다 제가 복색 사이에 대해서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불가능한 거든요. 
그리고 왕도 그렇고 왕세자도 그렇고 왕비도 그렇고 아주 특정하게 어진을 그리는 날을 제외하곤 모든 그림에서 항상 비어 있는 걸로 놔둬요.

그래서 사실은 언제나 왕의 모습은 지존이기 때문에 그림으로 안 남기고 한다는 것도 좀 검토해보면 어떻게 보면 얼굴이나 모습을 잘 모른다라는 건 자연스럽다고 좀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을미사변 때 명성왕후는 탈출하고 실제 죽은 사람은 궁교라는 설 이건 이제 기대죠 기대 이런 얘기 되게 많잖아요. 
뭐 알고 보니까 히틀러가 죽지 않았더라 몇 년 전에 에비스프로레스비가 칸 해변에서 거닐고 다니는 걸 내가 봤다 마크 잭슨이 사실은 아직도 살아있다 이런 얘기 많이 하잖아요. 
워낙 충격적인 사태고 받아들이기 힘들고 그런 사건들이니까

자꾸 저런 서랑 선례들이 나오게 되는 건데 아니다라고 얘기를 하고 싶고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명성황후의 죽음과 관련된 악성 루머는 대부분 진실은 아니에요. 
왜 진실이 아니냐 하면 이분이 어떻게 죽었는가를 정확하게 본 목격자는 없어요. 
왜 없냐 하면 그 현장 자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봤던 사람들은 함께 죽임을 당했던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그날 와서 누가 찔렀고, 누가 죽였고, 몇 시 몇 분에 어떤 일이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은 대부분 다 사실은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은

그럼 일본 쪽에 남긴 자료는 없나 아니 근데 이게 되게 중요한 게 있어요. 
유태인 팔백만 명 죽인 거 증거 내봐라 강제징용 몇백만 명 끌고 간 거 증거 내봐라 이런 얘기 하잖아요. 
원래 국가 범죄나 강력 범죄는 증거를 안 남겨요. 
그걸 왜 남기겠어요 남김은 남의 나라의 국가 원수의 아내를 죽였던 사건이니까

그러니까 문제가 될 수 있잖아요. 현재 일본 쪽에 남아 있는 자료들이라는 것은 실제로 이게 큰 스캔들이 됐고 조선 정부가 강력하게 요청을 했기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던 주모자들을 재판에 회부를 해요. 
그러니까 그 재판에 회부된 기록이 남겨져 있는 그래서 약간 영화 보듯이 정확하게 정말 결정적인 비극의 장면 자체에 대해서 우리가 완벽하게 알 수 없어요.

근데 이거는 명성황후의 죽음만이 아니라 이런 위태위태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정치 스캔들의 현장 자체가 적나라하게 공개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죠. 
그게 공개가 된다는 얘기는 실패했다는 얘기거든요.

시위주로 보면 이게 을미사변이라고 보통 그러잖아요. 
연도로 따지게 되면 1895년이거든요. 
이게 또 왜 화가 나는 장면이냐면 천팔백구십4년에 동학농민운동을 통해서 뭔가 이 사회를 바꿔보려고 하는 움직임 속에서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켜서 동학농민운동도 진압하고 조선의 국왕도 무력화시키면서 권력을 잡았고 다시 천팔백구십오 년에는 개혁이 쭉 진행되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까 일본에게 끝까지 저항하는 주체가 명성왕운인 것 같아.

명성황후를 죽이는 걸 통해서 명성황후만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 왕실의 힘도 무너뜨리는 과정이기 때문에 굉장히 좀 속상한 기억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명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되느냐가 이중적으로 나뉘어져 있어요. 
흥선대원군의 한계점을 극복하고 고종을 도와서 나라 살리기에 매진했었던 훌륭한 인물인가

아니면 실제로 나라를 망친 정말 정말 문제가 많았던 여성인가

이게 굉장히 대립되는 견해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요. 
실제로 뮤지컬 명성황후가 나온 다음에 학자들한테도 되게 영향을 줬던 것 같아요. 
내가 잘못 생각했나 이게 왜 그러냐 하면 명성왕후에 대한 대부분의 기억을 주도하는 건 그 당시에 있었던 선비가 남긴 매천야록이라는 기록이 반복되고 있는 거거든요.

역사학자들이 곰곰히 따져본 거죠. 그 당시에 바로 어떤 뉴스들인 거죠. 
그런 걸 잘 채록해서 자기의 주관을 넣어서 만든 책이거든요. 
그러면서 재검토된 논문들도 많이 나와 있는데 적어도 현재로서는 그래서 획기적으로 바뀐 건 없어요. 
그래서 그 전제에서 먼저 말씀을 드리게 되면 첫째 그녀가 의미 있는 노력을 했는가 이건 예스예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첫째는 시아버지가 갖고 있었던 굉장히 잘못된 편견을 고쳐낸 거죠. 
왜냐면 시아버지는 내정 개혁에 있어서 정말 탁월했었던 사람이지만 국제 감각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에요. 
그냥 막으면 된다고 믿었었던 거죠. 1840년에 중국이 강제로 이 아편전쟁에서 개항을 당한 다음에 그로부터 삼사십년 기간 동안에 중국은 단숨에 반식민지가 됐거든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명성황후는 대화를 해야만 한다 라는 어떤 그런 입장을 보였던 사람인 거고 과감하게 최익현을 시켜서 상소를 올리려고 하는 거죠.

그 대가로 최익현의 유배를 가고 대신에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니까 여기서 사실은 아주 과감한 정치수를 둔 거고 그때부터 비로소 대화 정책이 시작이 됐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서 탁월한 안목을 갖고 있는 거죠. 
또 하나는 손탁 호텔이라고 많이 들어보셨잖아요 손탁이 만든 호텔을 중심으로 해서 각국의 공사들과 외교를 하는데 왕비 신분으로 직접 뭔가를 할 수는 없으니까 손탕 여사와 낙후 조정을 하게 되고

또 하나 조금 덜 알려진 건 이런 게 있어요. 
미국인 선교사들의 활약을 사실 명성홍화구가 후원을 많이 했어요.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이런 문제가 아니라 미국인 선교사들이 갖고 오는 근대 의술이나 근대 교육 같은 여러 시스템들이 굉장히 유용한 거예요. 
제일 유명한 일화 중에 하나는 뭐냐면 언더우드하고 언더우드 부인 둘 다 선교사인데 둘이 결혼할 적에 명성하우가 결혼 지참금으로 백만 냥을 보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게 일개 선교사 부부가 결혼하는 것도 다 챙겨줄 정도로 아주 친하게 지내면서 선교사들을 통한 근대 문물의 수입 같은 데서도 되게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에요. 
근데 명성왕후에 대한 여러 문제점을 지적을 한다면 이게 있어요. 
명성황후의 행동을 한마디로 평가를 하면 방향은 정확한데 과정이 정확하지 못한 거예요.

일로 가려면 일로 가기 위한 어떤 과정을 정확하게 밟아나가야 되는데 그 과정을 밟아 나가는 거를 잘 못하는 거예요. 
무슨 얘기냐 단적으로 가장 심각했던 문제는 부정부패 문제 내가 매직 이게 흥선대운과 완전 대비되는 거거든요. 
대원군은 내정 개혁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국가 기강이 있어야 된다. 
그래서 그가 통치하는 십 년간의 기간 동안 국가적인 사회적 기강, 매관매직, 부정부패 같은 게

확 낮아져요. 근데 문제는 뭐냐 명성호가 권력을 잡기 시작하면서부터 민겸호, 민승호, 민영규, 민영준 민씨들이 쭉 들어오면서 이 사람들이 매관매직을 하기 시작해요.

그럼 이게 무슨 문제가 되냐면 그렇게 돈을 들여서 산 관료들은 당연히 이것들을 채우려고 할 거 아니에요 그러면서 사회가 온갖 부정부패에 시달리게 되면 국가 경쟁력은 떨어질 수 밖에 없어요. 
또 하나는 대화 정책이라는 민중들 입장에선 그다지 와닿지 않았어. 
더군다나 개화 정책을 하면 돈이 많이 들잖아요. 
그러면 그 돈을 어디서 재원을 끌어와야 되겠어요 원래는 국가 운영을 잘 해서 투명하게 돈을 마련해야 되는데 전혀 그런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결국은 민중들의 고의를 짜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들 입장에선 개화 정책이라는 건 또 다른 착취의 수단인 거지. 
이 개화 정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득이 된다 이런 게 없는 거예요. 
제일 중요한 건 이모 혼란의 배경이 되는 민겸호라는 사람이 구식군인들한테 줄 월급을 제대로 안 줬다. 
1년 동안 월급을 안 주다가 한 달치 월급을 먼저 줬는데 절반은 쌀인데 절반은 모래와 겨가 섞여 들어가 있어서 분기에서 이모 분란이 일어났던 이란은 객관적인 입증인 건 사실이죠.

거기에 대안이 있었어요. 누가 대안이 있었냐 흥선대원군이 호시탐탐 재기를 노리고 있었거든요. 
흥선대원군, 구식군인들 그리고 민중들이 득세해서 결국은 고종이 사실상 이제 흥선대원한테 권력을 넘겨주게 됐던 사건이 이모군란이거든요. 
이게 명성왕후의 가장 큰 패착인 거예요. 
대화로 가자 외교로 가자 어떻게 갈 거예요? 건전한 힘과 실력이 있어야 되는데 방향은 정확한데 건전한 힘과 실력이 없는 거예요.

이천 장호원으로 피난을 가 있었던 상황인데 한 무당을 맞나요? 이 무당을 만난다는 것이 이상하죠. 
왜냐하면 왕비가 다른 것도 아니고 일개 하층 천민 무당을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건데 여튼 만난 상태에서 이 무당이 지금 상황에 이렇게 됐지만 분명히 흑선대웅은 쫓겨나게 되고 다시 컴백합니다라고 예언을 했는데 그게 정확히 맞은 거예요. 
기가 막힌

그냥 고마우니까 뭐 이렇게 돈도 주고 이렇게 할 순 있는데 그렇게 멈춘 것이 아니라 데리고 들어온 거예요. 
그리고 심지어 구내칭으로 하사한다라든지, 또 그 무당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무 일자 무식인데 그 친구한테도 이제 또 관직을 준다라든지 정말 말도 안 되는 비선실세를 두고 국정을 운영하는 행동들을 보이게 돼요.

왜 그랬냐를 굳이 명성황후 입장에서 생각을 한다라면 이모 군란이란 사건의 큰 충격,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일까지 있었냐면 일단 홍성 대원군은 명상호가 죽었다라고 하면서 시신을 확인하지도 않고 가짜 장례식을 지내버렸었거든요. 
이때 나를 도와줬던 진령군의 도움이 얼마나 컸겠어요 그 기분은 제가 이해를 하는데 군의 칭호는 사실은 종친이 아니면 받을 수 없는 거죠.

이건 정상적인 행보라고 볼 수가 없죠. 
심지어 뭐 심지어는 병을 고친다고 금강산에다가 천냥의 돈과 무명 쌀 한 섬씩 다 갖다 놓은다라든지, 또 서울 북방에다가 관우의 사당인 북류를 건립한다라든지 이런 것들이 하루 이틀 쓴 게 아니라 십여 년을 그렇게 돈을 썼거든요. 
그러니까 그녀가 낭비가 되게 심했다 라는 얘기를 되게 많이 해요. 
명성왕을 우리가 평가할 적에 종합적으로 봤었을 때는 방향은 좋았지만 과정이 너무 문제가 많았고,

특히 집권 후반기가 되면 이런 식의 말도 안 되는 정치를 한다든지, 힘이 있는 상태에서 열강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힘이 없으면서 이에스에 기생해서 살려고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 전체적으로 봤었을 땐 그다지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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