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하순 인류는 전에 없던 놀라운 충격을 받게 됩니다.
북유럽의 선진국 스웨덴에선 집에 손님이 오더라도 식사를 대접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는데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손님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문화는 크게 다르지 않았고,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인 문화였기 때문에 전 세계 사람이 놀랐습니다.
온라인에선 스웨덴에 대한 세계인들의 조롱이 이어졌죠.
이처럼 인터넷으로 전 세계가 연결되어 있는 오늘날에도 서로 다른 문화가 접촉하고 충격이 발생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과거 우리와 교류했던 나라에선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기록했을까요? 이번 영상에선 과거 한반도와 꾸준히 교류해 왔던 중국의 역사책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은 과거부터 자신들의 민족을 중심으로 세계 질서를 구성하며, 주변 이민족을 오랑캐라고 부르며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동서남복 위치에 따라 주변 민족을 서용, 남만, 북적, 동의로 분류했는데 특이하게도 동의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내렸습니다.
동의에게서 자신들과 유사한 농경문화를 발견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면서도 동의를 우리의 조상인 예매개와 말갈과 여진족의 조상격인 숙신개로 나눠 예매개는 선진적으로
숙신계는 낙후하고 불결하며 이웃나라를 상습적으로 약탈하는 야만인으로 묘사했습니다.
진수의 삼국지나 후한서, 양서, 위서 등에는 고구려의 위치나 건국설화를 소개하며, 그와 함께 고구려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흥의 민족답게 고구려 사람들이 노래와 춤을 좋아했다는 이야기인데요.
밤마다 남녀가 귀천의 구분 없이 떼지어 모여 노래를 부르며 유일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경우가 많았는데 고구려의 습속이 음란하다고 기록했습니다.
이와 함께 아무나 지아비로 삼는다는 기록과 남녀가 사랑하면 바로 결혼시킨다는 기록도 있는데 고구려는 다른 지역에 비해 연애, 결혼이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후한 이후 완전히 유교 국가로 탈바꿈한 중국에선 이러한 풍습이 낯설고 신기했던 게 아닐까 싶네요.
이외의 기록으로 걷는 속도가 마치 뛰는 것처럼 빨랐다,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술을 잘 빚었다, 쪼그리고 앉는 것을 좋아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가 한 나라부터 시작해 후안, 조이 등 중국의 여러 나라와 마찰을 빚었기 때문인지 국가 자체에 대해선 다소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요.
고구려 사람은 성질이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해 옥조와 동래를 복속시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반면 중국과 직접적인 마찰이 없던 부여에 대해선 체격이 크고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며, 그놈 후덕해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거나 노략질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이 부여에 대해선 한 가지 특이한 문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나라에 재앙이 오거나 흉년이 들면 왕을 쫓아내거나 죽이는 문화인데요.
나라에 재앙이 오는 것은 왕이 정치를 못해서 라는 발상은 중국에도 있었지만 부여처럼 죽이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부여 사람들이 흰색을 좋아해 흰 옷을 잘 입는다는 기록도 있는데, 괜히 배그민족이라고 불린 게 아닌 것인지 이후 신라, 고려에도 흰옷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이것은 조선, 그리고 해방 후까지 이어집니다.
7세기 중반 신라는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백제의 40년에 걸친 파상 공세와 영양왕 즉위 이후 강화된 고구려의 공세 여기에 일본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고, 바다에 외구가 있었으니 사방팔방에 적밖에 없었죠.
결국 신라는 고립을 탈피하고자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는데요.
643년 신라는 당나라에 사진을 파견해 구원병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당나라에서 돌아온 답변은 신라를 무시하는 답변이었습니다.
당태종은 현실적인 이유를 들며 거절하더니, 신라의 왕이 여자라서 주변국이 만만하게 보는 것이다라고 신라의 왕이 여자인 것을 비웃었습니다.
사실 당태종의 인성과는 별개로 당나라의 입장에서 신라의 왕이 여왕인 것은 정말 생소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의 황제는 고대부터 일부 다처제에다 황제의 서자에게도 순위가 밀릴지 연정, 재위, 계승권을 인정했기 때문에 계승권자가 모자랄 이유가 없었습니다.
당나라 사람에게 있어 성골 남성이 없으니 성골 여성이 왕이 된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었겠죠.
하지만 이렇게 신라와 여왕을 비웃던 당나라는 당태종이 죽고 41년 후, 당태종의 첩이자 당 고종의 황후, 그러니까 며느리이기도 한 측천무후에게 나라를 통째로 빼앗깁니다.
690년, 측천무후는 당나라의 국호를 주나라로 바꾸고,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왕제가 됩니다.
12세기 초, 당시 외교적으로 고립된 송나라는 이를 탈피하기 위해 1123년 고려의 대규모 사진단을 파견했습니다.
사신단의 일원이던 서긍은 고려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고려 도경입니다.
현대 한국인이 중국인보다 청결에 민감하다고 여겨지는 것처럼, 12세기에도 고려인들은 중국인보다 청결에 민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도경에는 고려인들은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한 뒤 외출하며 하루에 두 차례 정도 목욕한다고 되어 있고, 흐르는 시냇물에 모여서 남녀 구별 없이 모두 옷을 벗고 목욕을 하는데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고려 사람들은 옛날부터 그러던데 지금도 그런다.
라며 과거 고구려인이 깨끗한 것을 좋아했다는 사실과 이어서 봤습니다.
서긍은 고려의 식문화에서도 차이를 느꼈는데, 고려도경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는 불교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해, 왕과 재상이 아니면 고기를 잘 먹지 않는다.
사신이 올 때면 가축을 잡아 대접하긴 하는데, 도축할 때는 가축에 손발을 묶어 불속에 던져 잡고,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잡는다.
이처럼 도축 기술이 서툴러 국으로 끓이거나 구워도 냄새가 심하다.
중국인들은 육식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이렇게 고기를 잘 먹지 않는다는 것과 제대로 도축을 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재밌는 건, 비슷한 케이스가 18세기 조선과 일본 사이에도 있었다는 것인데요 일본의 통신사로 파견된 원중권은 자신이 쓴 화곡지에서 일본인은 육식을 싫어하고, 구축 기술이 엉망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서긍의 고려도경은 전반적으로 고려와 우호 관계를 맺기 위해 왔기 때문인지, 고려의 우호적인 기록을 꽤 남겼습니다.
거란이나 서안은 정해진 땅도 없고,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관청도 없는 야만인이지만, 고려는 그렇지 않다거나, 오랑캐는 머리나 옷 관리가 엉망이고 온몸에 문신을 새겼는데, 고려는 안 그렇다고 했죠.
물론 평가 기준은 철저하게 속나라의 기준이었습니다.
고려가 야만인이 아닌 이유도 중국의 풍습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와중에 고려가 자국의 고유한 문화나 풍속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결국 문명화가 되긴 했어도 근본은 오랑캐라며 비하했습니다.
종합하자면, 중국 입장에선 우리가 그냥 봐줄 만한 오랑캐였다는 것이겠네요.
조선과 명나라는 14세기 후반 잠시 마찰이 있던 경우를 제외하면, 약 20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밀접하면서도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호적인 분위기에도 임진왜란이 터지자, 명나라가 생각하고 있던 조선에 대한 이미지는 한순간에 박살이 나버립니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에 대해 고려를 계승한 국가로, 근원을 따지면 고구려의 후손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고구려라면 그 강대했던 수나라에 100만 대군을 물리치고 당나라에게도 패배를 안겨줬던 억세고 강한 국가였고, 바로 앞에 고려라면 전성기를 누리던 요나라와 세 차례 맞붙어 승리했으니 조선 역시 강력한 국가라고 생각했죠.
이것은 명나라가 세워졌을 당시, 그 많은 군대를 갖고도 이성계의 조선을 견제했던 이유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랬기에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연전 연패를 믿을 수 없었고, 명나라 일각에선 전쟁은 핑계고,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을 치려는 것이 아니냐라는 음모론까지 돌았습니다.
어쨌든 조선을 돕기로 한 명나라는 전쟁을 겪으면서 조선을 지적했는데, 그들은 조선이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강대하던 고구려의 후손은 어쩌다가 절이 나약해졌는가에 대한 분석을 시작했는데요.
1593년 6월 선조를 만난 병부원의랑 유왕상은, 조선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었는데, 조선에 들어와 백성들이 농사와 공부에만 몰두하다가 이 지경에 왔다고 분석.
만력. 3대전고의 저자 모서징은 고구려가 수당을 물리칠 정도의 강력한 적수였는데, 이후 그 계승자들이 중국의 풍습에 빠져 나약하게 되었다라고 했으며,
같은 시기 명나라의 관리 협판권은 수당 시절의 고구려는 중국 동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는데, 조선에 들어와 명예, 문콩과 가르침에 젖어들며 나약해졌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전반적으로 그 강하던 고구려의 후예가 나약해진 이유가 글 공부에 몰두해서라고 했는데, 그러면서도 중국의 풍습과 문화, 학문을 받아들여서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다만 이러한 분석은 일종의 투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1596년 12월 일본이 조선을 재침하자 조선은 다시금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했는데, 요동순무어사 이화룡은 매번 전쟁이 날 때마다 우리가 도와줄 수는 없지 않냐 고구려 시절 강성함을 스스로 되찾아봐라.
라고 말하며 알아서 좀 해결하라는 식으로 투절됐습니다.
이후 명나라는 임진왜란에서 많은 국력을 소모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문화가 스스로를 나약하게 만들었기 때문인지 만주족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갈량과 사마의 대결 제갈량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나? (0) | 2023.06.09 |
---|---|
명성황후의 본모습을 파헤쳐 봅시다. (0) | 2023.06.09 |
수메르 문명의 탄생과 쐐기문자의 등장 (0) | 2023.06.09 |
중국 역사를 총정리해 드립니다. (0) | 2023.06.07 |
다루가치가 세운 나라 다루가치의 아들이 세운 나라 조선 그리고 그 조선의 흥망 조경단 (0) | 2023.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