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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우리 나라 역대 왕들의 재미있는 랭킹 순위

by 로이인랑 2023.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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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 속 가장 오래 산 왕은 누구일까요? 조선으로만 한정한다면 보통 영조를 많이 떠올리죠. 
하지만 범위를 우리나라 역사 전체로 확대한다면 정답은 조금 달라집니다. 
이번 영상에선 우리나라 역사 속에 등장하는 여러 왕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보겠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래 산 왕, 아니 우리 역사의 모든 인물을 통틀어 가장 오래 산 인물을 꼽자면 단군왕검이 있습니다.
한민족의 조상으로 고조선을 세우고 1천 년을 넘게 통치했죠. 
다만 출생일과 사망일, 재위 기간에 대한 기록이 정확히 남아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단군을 제외하면 한국사 역대 국왕 중 최장수 왕이며, 동시에 최고 집권 기간을 자랑하는 왕은 바로 금건가야의 수로왕입니다. 
수로왕은 42년 3월 4일에 태어나 같은 달 16일에 금강가야 초대 왕이 되었고, 199년 3월 23일 사망할 때까지 무려 158년을 통치했습니다.


물론 이를 기록한 삼국유사 자체가 전설과 역사적 사실이 뒤섞인 부분이 많기에 그대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애초에 그대로 믿어버린다면 수로왕이 황금색 아래서 부척의 키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러면 순수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난생동물이 되어버리는 참사가 일어납니다. 
수로왕 외에도 백살을 넘긴 여러 왕들이 존재합니다.


고구려 태조왕은 47년에 태어나 53년에 즉위했고, 146년까지 통치한 뒤 165년에 119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주변 기록에 시간적 혼란이 있고, 후한서에는 121년에 사망했다고 되어 있는 등 기록이 일치하지 않아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있습니다. 


백제 고의왕은 사빈왕을 이어 234년 즉위해 286년 죽을 때까지 52년간 백제를 통치했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정상으로 보이지만, 문제는 고의왕의 아버지가 4대 계루왕이라는 것인데요.
계루왕이 166년에 죽었으니 고이왕은 아무리 빨라도 167년생 이러면 나이가 120살이 넘어버립니다. 
고의왕 역시 기록상의 오류가 있거나 혹은 조작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백제의 비류왕도 이와 비슷한 경우인데, 아버지 구수왕의 3학년도로 추정할 경우, 짧게 봐도 110살까지 살았던 것이 됩니다.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오래 살았으며, 의문이 남는 왕들을 제외하면, 현실적으로 가장 오래 장수한 왕은 고구려 장수왕입니다. 
그는 394년에 태어나 491년까지 98세까지 장수했고, 각종 사료를 통해 교차 검증까지 되기 때문에 그의 나이는 이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오래 통치한 왕은 누구일까요? 이 역시 앞에서 나온 고구려 장수왕입니다.
98세까지 살았는데, 재위 기간만 79년, 인생의 대부분을 왕으로 보냈죠.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그는 광개토대왕이 412년 38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을 생각한다면, 고구려의 전성기로 불린 5세기 자체가 사실상 그의 시대나 다름없었습니다. 


장수왕은 나이가 들어서도 정정했는데, 그의 커리어 하이로 꼽히는 백제 계르왕 사살과 수도 위례성 함락이 475년, 그의 나이 81세 때였습니다.
또한 직접 군을 이끌진 않았겠지만, 죽기 2년 전에도 신라를 공격해 성을 함락시켰던 것으로 보아 왕성하게 활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장수왕이 너무 오래 사는 바람에 아들이 아닌 손자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장수왕보다 먼저 죽은 아들 고조다의 이름이 어리석고 사람 구실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쪼다의 어원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 태자의 이름을 욕으로 썼다고 보기 어렵고, 학문적 근거 또한 전혀 없기 때문에 낭설로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장수왕 외에 오랜 기간 통치한 왕으로 발의 존속 기간 228년 중 4분의 1가량을 통치하며 국제적 위상을 공고히 했던 발의 문왕이 있고, 신라엔 54년간 통치한 26대 왕 진평왕이 있습니다. 


다만 진평왕은 재위 중기부터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이 벌어지고 말려낸 반란이 일어나는 등 그다지 행복한 장기 집권은 아니었습니다. 
이 외에 앞서 나온, 태어난 지 2주도 안 되어 즉위한 수로왕이나 주작이 의심되는 고구려 태조왕 아래서 태어난 신라 박격, 거세 기록이 미비한 가야 20품왕 등은 제외되었습니다.


왕위에 올랐지만 어린 나이에 죽은 왕은 누가 있을까요? 가장 어린 나이에 죽은 왕은 고려 33대 왕 창왕입니다. 
1380년에 태어난 그는 아버지 우왕이 위화도 회군으로 퇴위당하며 직위했지만 고작 1년을 조금 넘기고 퇴위당했고, 왕 씨가 아니라 신씨로 몰리며 1389년 12월 31일 참수당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가 만으로 9살이었습니다. 


이외에도 12살의 나이로 병사한 고려 충목왕이 있고, 신문왕의 아들인 신라 효소왕은 16살에 사망했습니다.
전설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가장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은 바로 앞에서 본 신라 효소왕입니다. 
그는 햇수로 11년을 통치했는데, 재위 기간이 짧은 편은 아니었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직위했기 때문에 재위 기간 내내 청소년이었습니다. 


신라 24대 왕인 진흥왕은 7살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마치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인물이었는데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뛰어난 통치 능력과 정복 전쟁으로 신라의 영토를 2배 이상 확장하며 통일 이전 신라 국력의 절정기를 달성했습니다. 


그는 약 36년간 통치하고 죽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만으로 42세였습니다. 
이 외에 어린 나이에 직위한 왕은 8살에 직위한 신라 해공왕, 고려 충목왕, 조선 헌종이 있고, 9살에 직위한 고려 창왕이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부인이 가장 많은 왕은 너무나도 유명한 태조 왕건입니다. 
그는 난세에 29번의 혼인을 통해서 자신의 세력을 늘렸죠. 


그런데 그것이 꼭 동맹 때문만이 아니라는 재밌는 주장도 있습니다. 
부인 중엔 당장 동맹으로서 가치가 의문인 집안이 있고, 출생년도부터 3학년도 가족 관계까지 전부 알 수 없는 부인도 존재하며,
해종의 어머니인 장화왕후 오 씨의 경우 단순한 불장난 상대였는데 덜컥 임신해버리는 바람에 결혼했다는 내용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죠. 


이곳을 봤을 때 그냥 여자를 엄청 좋아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 외에 두 번째로 부인이 많은 왕은 왕비와 후공을 합쳐 13명인 고려 현종이 있고, 조선 태종과 성종이 각각 12명으로 세 번째로 많습니다.
성종의 경우 특이한 점이 부인이 많은 것에 대해 정치적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썰조차 없고, 오히려 낮에는 성분이었지만 밤에는 술과 여색을 밝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앞에 부인이 많은 왕에 삼천 궁녀로 유명한 의자왕이 들어가야 하지 않나 싶은데, 그 이야기는 허구로 추정되기 때문에 부인이 많은 왕에선 제외했습니다. 
다만 자식이 많은 왕에서 뺄 수 없었는데요 그는 부인에게서 얻은 적자가 9명이 있고, 삼국사기 기록상 첩이 낳은 서자만 최소 41명이 있습니다.


다만 이 부분은 아들이 아니라 남자, 왕족 등으로 해석을 달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외엔 앞에서 본 부인이 많은 왕과 겹치는데, 25남 구녀를 둔 고려 왕건과 12남 17년을 둔 조선 태종이 있습니다. 
왕이 여러 직책이나 자위를 겸하는 것은 유럽이나 중동에 비하면 동아시아 문화권에선 흔한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경우는 아닙니다. 


원 간섭기의 충으로 시작되는 왕들과 공민왕은 특이하게도 왕이면서 다른 직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원나라 지방행정기구인 정동행성의 승상 직책인데요 원세조 쿠빌라이가 일본 원정을 위해 고려에 설치하고 이후 형식상으로 남아 있었는데, 이 승상 자리를 고려 국왕이 독점했기 때문에 정동행성의 승상은 국왕 승상이라고도 불렸습니다.
한편 이들 중 가장 많은 직책을 가진 왕은 충선왕입니다. 


충선왕은 충렬왕의 아들이자 쿠빌라이의 외손자인데, 그 스스로 고려인이면서 몽골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되며, 원나라 정치에 적극 개입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원무종 옹립에 기여하는 등 성과를 거둬, 무종에게 심양과 요동 일대를 관할로 하는 심명왕의 자기를 받았습니다.
결국 그는 고려의 왕이면서 심양의 왕 정동행성의 승상이 되었는데, 한때 원나라 우승상 자기를 제안받기도 했지만, 본인이 늙어서 힘들다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조선시대엔 신하가 왕에게 유학을 강연하고 서로 논의하는 경연이란 제도가 정착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경연을 얼마나 했느냐에 따라 공부를 안 한 왕을 알 수 있습니다. 
경연을 싫어했던 왕으로 세조, 연산군, 광해군 등이 있는데요


이 중 세조와 연산군은 경연을 싫어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폐지시켜버렸고, 연산군은 폐지하기 전 내시를 대리 출석시키기도 했습니다. 
또한 광해군은 폐지하진 않았지만, 재위 기간 15년 동안 경연을 개최한 날이 고작 10일이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경연의 중요성을 인정해 직접 경연청을 설치하기까지 했지만, 나이가 들어 공부는 좀 그렇다며 경연을 기피한 이성계가 있고, 세종은 세제 시절이나 지위초에는 경연을 좀 열었는데, 이후엔 경연을 별로 안 좋아해 잔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한편 반대로 경연을 좋아했던 왕도 있습니다. 
경연을 공식적으로 정례화하며 경연의 기틀을 마련한 세종과 9천 회 이상 경연을 연 성종인데요. 
보통 이런 왕들은 좋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잦은 경연을 통해 신하들과 소통하고 독선적인 통치를 하지 않아 그랬던 것이 아닐까 싶네요. 


재밌는 건 학문이 깊었던 정조의 경우인데, 그는 신하들의 수준이 낮아 경연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 경연의 횟수를 줄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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