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일본의 진주만 공습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에 대해

by 로이인랑 2023. 6. 13.
반응형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 함대기지 진주만을 기습적으로 공습합니다.
일본의 순간적인 기습 공격을 받은 미국은 전함 다섯 척이 침몰하였고, 3천여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300여 대 이상의 항공기가 파괴되었습니다. 


이렇게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전술적으로 빼어난 성공으로 볼 수 있었지만, 거시적인 전략면으로 봤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요. 
바로 2차 세계대전을 계속해서 지켜보기만 했던 미국을 건드려 2차 세계대전의 참전국으로 만든 것이, 일본과 그 동맹국들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일본은 도대체 왜 진주만 공습이라는, 지금으로서 도무지 알 수 없는 히데의 무리수를 두었던 것일까요? 그때 일본의 상황에 대해서 다 같이 알아보겠습니다.
1905년,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 간의 18개월에 걸친 러일 전쟁은 마침내 일본 제국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서양 국가들의 산업혁명 이후 지난 수세기 동안 멸시받았던 동양의 국가들이었지만, 아시아의 한 작은 섬 나라가 거대한 러시아 제국을 이겼다는 소식은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일본은 러일 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 세계의 무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십여 년 뒤,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과거 192년에 맺었던 영일동맹을 계기로 연합국의 참전해 중국에 있던 독일의 식민지들을 몰아내었고, 세계대전의 승전국이라는 타이틀까지 갖게 됩니다. 


하지만 1차 대전 중에 크고 중요했던 전투들은 대부분 유럽에서 일어났던 것과 달리, 아시아에서의 작은 전투들만 진행했던 일본은 그만큼 승전국들 사이에서 큰 발언권은 없었지만, 전후 협상 테이블에 참석하게 되었고, 전쟁의 승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일본은 전후 조약의 일부로 과거 아시아에서의 독일 식민지들을 자신들이 소유하기를 원했고, 이는 승전국들에게 흔쾌히 수락되었지만, 자신의 동맹국들인 영국과 미국 같은 서양 국가로 자국민들의 자유로운 이민을 요청했던 것은 단칼에 거절당했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의 태도는 상당히 인종차별적이었는데요 미국은 백인이 아닌 인종들의 미국 이민을 금지했고, 일본인들은 물론 이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서방 국가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길 원했던 일본은 미국인들에게 황색 위협 등의 취급을 당하며, 아주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당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일본 정부와 국민들은 매우 분괴하기 시작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여전히 차별 받으며 약소국 대우를 받는다고 느꼈습니다. 
때문에 일본인들의 이러한 분노들은 점점 서방 국가들을 향한 원망으로 쌓여갔고, 그들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기를 갈망했습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자 일본은 고대 사물화의 기율과 전통에서 비롯된 극우 민족주의 운동이 활력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이 움직임은 처음에 군에서만 퍼졌지만, 곧 일본 전체에 퍼져 본격적으로 군국주의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이러한 사상에 광신적으로 매료된 도조 히데키라는 한 명의 악마를 탄생시킵니다. 


그는 매우 호전적이고 과격한 군인이었는데, 서방의 국가들에게 무시받는 일본을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로 변화시키겠다는 야심찬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도조 히데키는 당시 일본의 주류 의견이었던 서방의 국가들에게 강경책을 취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우기 했습니다. 


당시 서방 국가들의 아시아 식민지는 영국의 홍콩, 버마,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그리고 미국의 필리핀 등 어마어마하게 많았는데요.
도조히데키는 자신들과 동양인들이 거주하는 아시아의 서방 국가들의 식민지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고, 동양인들이 사는 아시아는 동양인들의 것이어야 한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일본인들에게 유리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는데요. 
일본이 서방 국가들의 아시아 식민지를 노리는 진정한 속셈은 바로 이 지역들에서 나오는 귀중한 천연 자원들 때문이었고, 이러한 자원들은 강대국이 되기 위한 일본의 군사력 유지와 국가 번영에 꼭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당시의 일본 제국은 점점 무력을 통해 아시아의 주변국들을 침략하기 위한 궁극주의의 광기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1931년, 만주를 침공하며 본격적인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석탄과 철이 풍부했던 만주 지역은 실제로 일본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고, 막강한 군사력을 확보하는 데 기반이 되어줬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태평양 지역에 관심을 갖고 있던 서방의 국가들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는데요.
1932년에 개최된 국제연맹 이사회는 영국과 미국 등 여러 나라들이 중국을 도와 일본을 맡기로 동의했습니다. 
이 소식은 일본에게 정말 끔찍한 소식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서방의 국가들이 과거서부터 아시아의 식민지를 건설해 수차례 자원을 수탈해 온 것을 지켜보았던 일본은, 자신들도 이제 서방의 국가들과 동등한 이득을 누릴 권리를 거부당하자, 예전보다 더욱더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천구백삼십칠년 확장을 멈추라는 서방 국가들의 모든 요청을 무시한 일본은 중일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군함과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던 일본은, 단 한 대의 전투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중국을 상대로 3 개월 내에 빠르게 점령할 거라 예상했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전쟁은 장기전으로 변해갔고, 일본의 중요한 군수물자인 목재와 석유는 점점 떨어져 갔습니다. 


이제 일본의 가장 큰 목표는 중일 전쟁을 끝내 중국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중일 전쟁을 유지하기 위한 안정적인 군수물자 보급으로 바뀌었고, 그 해결책은 바로 석유 매장량이 풍부한 인도 차이나 반도와 인도네시아의 점령이었습니다. 
한편, 같은 시각, 유럽의 상황도 만만치 않았는데요. 


유럽에서 또한 극우 민족주의 지도자인 히틀러가 나타나서 자신의 편찬주의 야망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고 히틀러의 무시무시한 군대는 전 유럽을 휩쓸며 유럽의 국가들을 차례차례 점령해 나갔습니다.
이렇게 유럽이 위기에 빠지게 되자, 일본은 이러한 혼란을 기회로 삼아, 자신들과 처지가 비슷했던 독일, 이탈리아와 손을 잡아 서로의 제 주의적인 야망을 돕기로 한 삼국동맹 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1940년 유럽에서의 히틀러가 네덜란드와 프랑스까지 무너뜨리자, 일본은 프랑스령의 인도 차이나, 즉 지금의 베트남 지역을 침공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군국주의적 팽창에 제재를 가하고 싶어 하는 일본과 멀고 먼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일본의 지속적인 팽창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미국 정부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일본에게 아주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내게 되었는데 루즈벨트 대통령과 미국 정부는 석유를 포함해 일본을 향한 모든 전략자원 수출을 중단시키고,
일본이 지금까지 점령한 모든 영토를 포기해야 이러한 수출 금지 조치를 해제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특히 미국에게 석유의 80% 이상을 공급받던 일본은 자국의 군사와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이제는 석유 없이 더 이상 전쟁을 이어나갈 수조차 없는 상황에 치닫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미국의 요구대로 전쟁을 멈추고 영토를 반환할지, 아니면 미국의 요구에 불응하여 계속해서 전쟁을 이어갈지에 대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고
미국은 일본의 순종적인 반응을 예상했지만, 미국의 예상과는 다르게 일본은 전쟁을 지속하여 네덜란드의 식민지이자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유전 중 하나인 인도네시아의 석유를 얻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1941년 10월, 군국주의를 대표하는 전쟁광 도조 히드 일본의 총리로 임명되어 나라를 장악하자, 일본은 아예 전쟁을 확대시켜, 언젠가 싸울 수밖에 없는 미국을 이참에 선제 공격해버리겠다는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과의 전쟁을 결사 반대하던 한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일본 해군의 수장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코 제독이었습니다. 


그는 과거 미 대사관에서 근무하며 하버드 대학에서의 연수까지 진행했을 당시, 미국의 어마어마한 산업적 잠재력을 목격하였고, 미국과의 전쟁에 대해 승산이 없다며 상당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정세는 이미 미국과의 전면전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었으며, 야마모토 제도 또한 더 이상 전쟁을 반대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고, 그는 할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바꾸어 미국과의 전쟁을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곧이어 야마모토 이스로프 제독은 미국과의 전쟁은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전쟁을 초반에 끝내겠다는 대담한 작전을 구상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하와이의 진주만에 주둔 되어 있는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제거하자는 계획인 진주만 공습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겠다는 발상은 상당히 도박성이 짙으면서도 군사적으로 매우 대담한 시도였는데요. 
일본 본토에서 4천 8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고, 가는 데만 2일이 걸렸으니, 언제라도 도중에 발각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패할 수 있는 요인이 너무 많았지만, 야마모토 이소르코 제독은 자신의 계획을 성공하기 위해 미국의 진주만 공격을 강하게 주장하고, 철저한 준비와 훈련에 매달렸습니다.


반면, 진주만의 상황은 이와 많이 달랐는데요. 
진주만의 지리적인 위치는 일본과 수천 킬로미터가 떨어져 있었기에, 미군들은 자신들에게 닥칠 공습 걱정이 전혀 없이 지내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곳의 특성상, 향기로운 바람 냄새와 수많은 야자수, 그리고 드넓은 에메랄드빛 바다는 마치 군인들에게 자신들이 열대 지방 휴가를 나온 것 같은 아주 좋은 기분이 느껴지게 하였습니다. 


신주만의 미군들은 근무 시간이 아닐 때, 소풍을 가고, 클럽에 가서 춤을 추며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혹시 만약에라도 일본이 기습을 한다면, 그들과 수천 킬로미터가 떨어진 이곳 진주만이 아닌, 상대적으로 가까웠던 미국영 필리핀이 기습 당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 함대가 하와이 북부 해안 근처에 도달했고, 그들은 자신들의 최종 목적지에 서서히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공격 준비를 마치었던 일본군에게 미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이 단 한 척도 보이지 않는다는 최신 정보를 받게 됩니다.
원래 일본의 제1 목표는 진주만에 있을 미국의 항공모함들이었으나, 당시 미국의 항공모함들은 공교롭게도 대서양에 파견을 갔거나 다른 곳에서 훈련 중이었던 탓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일본 항모기동대 지휘관이었던 나구모 주치는 주 목표를 놓칠 걸 알면서, 공습을 감행할지, 아니면 공격을 취소하고 때를 기다릴지에 대한 중대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지만,
현장에서 최종 결정을 내렸던 나구모 g위치는 결국 미 항공모함의 정보를 다시 확인한 후에 움직일 여유가 없다고 판단하였고, 더 이상 지체된다면 미군이 눈치를 챌 수도 있었기에, 곧바로 공습을 개시하였습니다. 


사실, 태평양 함대의 미군들은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습한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는데요 공습 약 한 시간 전, 진주만에 설치되어 있던 미군의 방공 레이더에는 수백 대의 비행기가 자신들에게 오고 있는 것이 포착되었지만, 상부에서 돌아오는 답변은 아군의 비행기들일 테니 신경 쓰지 말도록 이었습니다.


이렇게 상부의 오판으로 인해 일본의 기습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미 해군의 선원들은 여느 일요일과 마찬가지로 진주만에서 자유 시간을 즐기고 있었고, 곧이어 자신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일본군의 함재기들을 본 미군은,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아군의 항공기들이 일요일에도 훈련을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당시 일본군은 공습 직전까지도 단 한 번의 피해도 없이 진주만의 상공에 도착했고, 곧바로 엄청난 공습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일본부는 미군의 요격기가 반격에 나서는 상황을 없애기 위해 비행장을 노렸고, 활주로에 모여 있던 미군의 비행기들은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지상에 있던 미군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살기 위해, 그리고 반격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어다녔습니다. 
그리고 단 몇 분 만에 수백 대의 비행기를 파괴한 일본군은 그들의 진짜 목표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는데, 곧이어 일본군의 내겹기들은 진주만에 있던 미국의 전함과 순양함의 어뢰를 발사했고, 미군의 전함 중 다섯 척이 순식간에 폭파되었습니다.


그 중 진주만 공습의 상징이 되어 버린 미군의 전한 애리조나 호는 일본군이 떨어뜨린 폭탄에 탄약고가 유폭되면서 두 동강이 나는 지경에 이르렀고, 불과 몇 초 만에 천백 명이 넘는 선원들이 사망했습니다.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되었던 미군들은, 무적인 것처럼 보였던 자신의 전함들이 불타오르는 것과, 자신의 동료들이 허무하게 죽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악몽과도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오전 9시 45분경, 일본군의 공습이 끝났습니다. 
일본군은 불과 2시간 만에 수백 개의 폭탄과 수십 발의 어뢰를 투하해서, 미군 태평양 함대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328대의 미군 항공기가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총 19척의 해군 함선이 파괴되었으며, 미군의 총 사망자 숫자는 2천400명이었습니다. 


이제 자신들의 위험 요소를 대부분 제거했다고 생각한 일본군은 남태평양 쪽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게 되었고,
일본군은 24시간 만에 홍콩과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을 침공하며 재빨리 남하했으며, 불과 몇 주 만에 수천 킬로미터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의 최종 목표였던 네덜란드 식민지의 유전 또한 확보했습니다. 
진주만 공습의 성공과 새로 얻은 영토, 그리고 군대에 필요한 석유를 손에 넣어 대담해진 일본군은 자신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해진 것 같다고 느꼈지만, 사실 그들은 매우 치명적인 실수들을 저질렀습니다.


첫째, 이 태평양 함대의 주력인 항공모함에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한 것입니다. 

해전의 개념이 현대전에 오게 되어, 해군들의 주력 함선이 전함에서 항공모함으로 변하였지만, 진주만 공습 작전 당시 현장의 지휘관이었던 나구모 주위치 등 주요 계획들의 목표를 여전히 미국의 전함에 집중하여 실행하였고, 이리하여 일본은 미 함대의 주요 항공모함들을 공격할 기회가 사라지게 됩니다.


둘째, 진주만의 각종 항만 시설과 유류 저장시설에 피해를 주지 못한 것입니다. 
일본은 실제로 전투에서 싸우는 전함과 비행기들이 있는 비행장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미국의 태평양 함대가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정작 진주만에 있는 각종 항만시설과 유류 저장시설은 멀쩡했습니다.


때문에 진주만 공습으로 손상된 미군의 함선 중 18척의 함선은 일본군에게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진주만의 정비시설과 항만 시설로 인해 불과 몇 달 만에 인양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진주만의 유류 저장 시설에는 태평양 한 대의 연료를 10달간 공급할 수 있는 6억 리터의 유류가 있었는데, 만약 일본군이 진주만에 있는 유류 저장 시설 또한 제대로 공격했다면, 미 태평양 함대에게 지속되는 누적 피해를 입혔을 겁니다.


그래서 당시에 미. 태평양 함대 지휘관이었던 니미츠 제국은, 일본이 진주만에 유류 저장 시설을 공격했다면, 미국이 2년 동안 연료 부족으로 고전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본이 선전포고 없는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사실,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감행할 당시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긴 했지만, 일본의 선전 포고문이 워낙 길고 복잡한 탓에, 주미 일본 대사관이 이를 해독하는 데 오래 걸려,
결국 미국은 진주만 공습이 시작되고 난 한 시간 뒤에 일본의 선전 포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약 5천 명의 사상자와 수십 척의 군함, 300여 기의 항공기를 잃게 된 미국은 당연히 크게 분노하였는데, 특히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된 일본의 비겁한 기습 공격은 미국을 더더욱 분노케 하였습니다. 
유럽에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데도 온건한 고립주의 의견을 펼쳤던 미국의 정치인들과 시민들은, 진주만 공습 직후 일본에게 반격을 가하자는 의견으로 변모하였고,
일본에게 분노한 수많은 미국의 시민들은 모병소로 몰려들어 자원 입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한 이 날을 치욕의 날로 선포했고, 미국 하원이 압도적인 찬성표로 일본과의 전쟁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루즈벨트 대통령이 일본의 전쟁을 선포한 지 4일이 지난 뒤에는, 일본의 동맹이었던 히틀러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로써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국이 되었습니다.


이후, 진주만 공습을 계획했던 일본의 야마모토 이스로쿠 제독은, 우리가 잠자던 거인을 깨운 것은 아닐까 라며 미국의 엄청난 잠재력을 우려했고, 야마모토 제독의 우려처럼, 이호의 전쟁은 결코 일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세계 최강의 미국을 적으로 상대해야 하는 최악의 악수가 되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