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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송나라와 몽골의 전쟁

by 로이인랑 2023.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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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를 중도에서 멀리 계봉으로 옮기는 등 위축돼 있던 금나라는 몽골이 서쪽으로 원정을 떠나자 잠시 여유를 갖게 됐습니다. 
금은 군사력 증강을 위해 송을 쳐 중단된 쇠패를 받으려 했습니다. 
금군이 몽골은 칠 수 없으나, 송군에 이기고도 남을 만 하다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이 때문에 금은

남북의 2개의 전설을 만드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금이 쳐들어오자, 송은 명장 맹공을 보내 막도록 했습니다. 
금은 무려 7년 동안이나 송을 공격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아까운 전력만 낭비했죠. 
그리고 몽골군이 돌아왔습니다. 오고타이카는 전군을 동원해 금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금은 사실상 남아 있는 정예군의 전부인 15만 명으로, 한수에서 적을 저지하려 했습니다. 
많은 장수들이 몽골군이 강을 건널 때 공격하자고 주장했지만, 지휘관은 다 건넌 뒤 모래밭에 빠졌을 때 공격하자고 고집했죠. 
드디어 한수를 건넌 몽골군을 공격하려 했더니,

갑자기 적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몽골군이 금나라군 주력을 피해 수도 개봉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금 황제의 다급한 회군 지시에 허겁지겁 군대를 이동하는데, 몽골군이 소규모 병력으로 계속 공격해와 병사들이 지쳐갔습니다. 
또한 주변을 철저하게 파괴해, 금나라군은 식량을 구하지 못해 굶주렸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날이 추워지면서 눈이 내렸습니다. 
삼봉상 부근에 이르렀을 때,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폭설이 내렸습니다. 
금나라군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사흘을 보냈죠. 
그 사이 병사와 군마 절반이 동상에 걸렸습니다. 
반면에 몽골군은 땅을 파고 들어가 추위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금나라 여진족이 오랜 농경생활 때문에

유목민의 지혜를 잊었던 것이지요. 날이 갠 뒤, 몽골군 3만 명은 금나라군 15만 명을 무참하게 학살했습니다. 
다급해진 금은 송의 사신을 보내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송의 반응은 싸늘했죠. 금 사신은 순망치한 금이 망하면 다음 차례는 반드시 송이라고 호소했지만, 송은 이미 몽골과 군사동맹을 맺은 상황이었습니다.

금은 개봉에서 채주로 다시 후두를 옮기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습니다. 
몽골은 송에게 금을 함께 공격하자고 제안했고, 송은 100년의 원수 금을 멸망시키는 데 기꺼이 협력했습니다. 
송 조정은 맹공에게 병사 2만 명과 군량 30만 석을 주어 체주를 포위한 몽골군을 돕도록 했죠.

송군은 몽골군과 연합해 성을 함락시켰고, 이로써 금나라는 멸망했습니다. 
송나라 백성들은 체주에서 돌아온 병사들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축제 분위기 속에 화북의 옛 영토를 되찾자는 주장이 거세졌죠. 
특히 북성의 수도였던 개봉의 탈환은

국가적 숙원이었습니다. 갑자기 원정을 하기에는 군량 등 준비가 부족했지만, 풍요로웠던 옛 개봉의 기억에 황제나 대신들 모두 별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송은 무려 20만 명을 보내 텅 빈 개봉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몽골군의 철저한 파괴로 식량은커녕 살아있는 사람 구경하기도 쉽지 않았죠.

예의주시하던 몽골군이 접근해오자 송나라 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주했습니다. 
몽골은 송나라가 먼저 도발했다는 개전 명분을 얻었습니다. 
오고타이칸은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좌군은 회남, 중군은 양양, 우군은 사천을 향해 공격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몽골군 기세는 무서웠습니다.

1년여 만에 성도, 이주, 동천, 양양 등 주요 도시들이 함락됐습니다. 
몽골의 중군과 좌군이 황주에서 합류해 양치강을 넘어갈 준비를 했습니다. 
송해 조정은 맹공을 보내 이를 막도록 했죠. 
송나라군이 접근해오자, 몽골군은 서쪽으로 천천히 이동하며 도강 지점을 물색했습니다. 
맹공은 병사들에게

낮에는 부대 깃발과 군복을 수시로 바꾸고, 밤에는 수십 킬로미터 거리의 횃불을 피워 병력을 부풀려 보이도록 했습니다. 
강 건너에 엄청난 대군이 있다고 생각한 몽골 병사들은 겁을 먹었습니다. 
송나라 군이 강을 건너 기습하자, 몽골군은 제대로 맞서 싸우지 못하고 달아났습니다. 
몽골군이 다시 황주를 향해 남하하자,

송 조정은 맹공에게 이를 지원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맹공은 수군을 이끌고 황주로 향하다 몽골 산단을 만나 이를 섬멸했습니다. 
맹공이 황주성에 들어가니, 공포에 떨던 백성들이 아버지가 오셨다며 환호했습니다. 
맹공은 양찌강에서 수군이 공격하고, 밤에는 소규모 습격 부대를 내보내 적을 교란시켰습니다.

견디다 못한 몽골군은 몇 달 만에 성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했습니다. 
서부전선에서는 몽골군 80만 명이 사천을 강타하고 불길처럼 남하하고 있었습니다. 
맹공은 이를 막기 위해 기병대를 이끌고 급히 기주에 도착했습니다. 
적의 숫자는 10배 정면 승부로는 절대 이길 수 없었죠. 
맹공은 전 지역 방어를 포기하고,

몽골군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지점 몇 곳에 군대를 집중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이성이 공격을 받으면 저성이, 저성이 공격을 받으면 다른 성이 서로 협공하도록 조치했습니다. 
결국 공격하다 지친 몽골군은 퇴각하기 시작했고, 송나라 군은 옛 금나라 땅까지 추격해 몽골군의 군사시설들을 파괴했습니다. 
그런데 국망의 위기에서 잠시 벗어나자,

송황제, 이종이 맹공의 권력 확대를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맹공이 기뻐하며 보고한 화북의 한 유력 장군의 귀순을 배신자라는 이유로 거부했죠. 
맹공이 항의의 뜻으로 사직서를 제출하자 기다렸다는 듯 수리해 버렸습니다. 
맹공은 좌절감 때문인지 갑자기 병이 깊어져

다음 해 가을 숨을 거두었습니다. 향년 51세 아직은 송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했어야 할 나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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