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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면 유용한 상식

철학적 관점에서 본 수학의 정의 수리철학

by 로이인랑 2023.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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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큰 주제는 수리 철학이죠. 수리 철학이라는 말도 있고 수학 철학 이런 말도 있는데
구분이 되는 건가요? 보통은 이제 혼용해서 쓰고 있죠. 


그래서 쓰고 있는데 저는 이제 굉장히 정의나 이런 데펜션에 민감하기 때문에 좀 구분해서 쓰고 있는 편입니다. 
그래서 수리 철학이라고 하면 수학적인 원리를 철학 연구에 동원하는 그런 관점으로 저는 이해를 하고 있고요. 
그리고 수학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수학에 대해서 수학이 과연 무엇인가 어떤 지식인가
그런 것에 대해서 철학적인 관점 철학자의 입장에서 들여다보는 그런 걸 수학철학이라는 용어로 쓰고 있고요. 


그래서 영어로도 보면 수학 철학은 필로소피 메트릭스 이렇게 돼 있고요. 
그리고 수리 철학은 메트메티컬 필로소피 그게 이렇게 번역이 된 개념인데 실제 그거를 그렇게 구분해서 일반 사람들이 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근데 이제 제가 볼 때는 그런 용어도 약간의 구분이 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고요. 
아무렇게나 쓰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수학 철학에 대한 몇 가지 입장이 있지 않습니까?


이제 조류가 있죠 한 세 가지 크게 한 세 가지 정도의 수학 철학을 대하는 그러니까 수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 세 가지의 조류가 있다고 봐야 되겠죠. 
그래서 물론 다 20세기에 와서 활발하게 연구가 된 분야들인데요. 
크게 보면 우리가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게 수학은 논리학이다. 


이런 이미지가 떠오르죠.
왜냐하면 이제 수학 연구라는 게 거의 논리학처럼 이렇게 논리의 연속이기 때문에 그래서 수학은 논리학이다. 
이런 입장이 쉽게 이야기하면 그게 논리주의자들이고요. 


칸토어라든지 또 버틀란드 러셀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피아노라든지 그런 사람들이 이제 그런 수리 철학 논리주의자들의 입장이고요.
수학의 기반을 논리학으로 만들려는 사람들 의 입장이라고 볼 수 있죠.


그래서 주로 이제 방법론 수학을 연구하는 방법론적인 관점에 좀 포커스를 한 게 아닌가 저는 그렇게 보고 있고요. 
그다음에 이제 더 칸트로부터 거슬러 올라가겠지만 수학은 어떤 직관의 도움을 받아서 직관에 의해서 움직여 나가야 된다. 
작동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이 자연 철학이나 자연과학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수학이 되는 것이지
자연에 토대를 두지 않으면 엉뚱한 수학이 될 수가 있다. 


이제 그렇게 보고 수학의 기본적인 공리체계 다시 말하면 수학적인 토대 그런 것들을 인간의 직관으로부터 우리가 가져와서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 그렇게 보는 것들이 이제 직관주의입니다. 
그래서 가장 뭐 우리가 대표적인 직관주의자는 이제 칸트를 이야기할 수 있을 거고요. 


현대에 와서는 이제 신직관주의라고 그래서
브라우어나 헤이팅이나 이런 철학자들이 그런 칸트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직관주의를 강하게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원조는 누굽니까? 직관적 원조라는 게 있습니까?


그거는 이제 사람마다 학자마다 조금씩 다른 관점을 가질 텐데요. 
제가 보는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로 거슬러 올라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약간 형식주의의 입장을 띠는 것도 있어요. 


어 현실에서 이제 그 모델을 찾아가지고 그거를 이제 추상화해서
기호로서 논하는 그런 관점으로 보면 형식주의에도 가깝다.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 직관론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현실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그 핵심 본질을 직관하고 그 본질에 대한 거를 갖다가 추상화해서 수학의 기초로 삼는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좀 직관에 의존하는 직관주의라고 설명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워낙 이게 보는 시각에 따라서 좀 다르기 때문에 아이스트레스를 직관주의의 효시다 이런 표현까지는 쓰지 않죠
논리주의는 그런 논리주의도 계보가 주
개보를 한번 제가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자면 이 논리주의자들의 입장이 뭐냐 하면 그 논리적인 대상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이 허우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뭔가 실제하는 세계를 대상으로 그것을 논리적인 접근을 한다. 


그게 실질적인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 존재 대상을 가지고 하는 것을 논리라고 보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말씀을 드리자면 플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플라톤이 이제 이 이데아의 세계를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이 대화의 세계를 또
대학을 이 대학 위에 올려놨죠


그거 존재의 세계로 끌어올려서 존재하는 세계로 본 거죠 그렇죠?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논리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존재적인 대상을 가지고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거 하고 굉장히 통하는 점이 있겠죠. 


물론 이제 아리스토텔레스도
삼단논법 같은 논리학을 굉장히 대하기 때문에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그래서 그렇게 딱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철학자들마다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알아두면 좋겠죠.
또 마지막 입장이 뭐라고 그래서
그다음에 이제 하나 남은 것이 제 형식주의죠 형식주의. 


형식주의는 어떻게 보면 가장 그것이 현실적인 세계와 이렇게 자유로운 현실적인 세계에서 자유로운 관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출발은 이제 현실적인 대상을 가지고 아이디어를 얻어서 출발을 하지만
결국 현실적인 대상들을 기호로 전환을 시켜서 그다음부터는 이 기호를 가지고 노는 거죠. 


그래서 뭐 점이라든지 면이라든지 선이라든지 이런 거를 용어는 아무렇게나 바꿔도 괜찮은 거죠. 
의사나 책이나 이런 식으로 바꿔서 수학을 하더라도 역시 수학은 된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이제 키워드를 가지고 노는 키워드를 가지고 노는 게임과 같은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는 것이 이제 형식주의입니다. 
그러면
현실과 무관하게 주어진 레고 장난감처럼 노는 게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론 실질적으로 수확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토대를 두고 출발하는 건 맞지만 어 우리가 유클리드 계약도 구성할 수 있고 비유클리드 계약도 구성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듯이 그런 데에 대해서 굉장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걸 전제를 깔고
제한이 없네요.


그래서 사실은 제가 수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현대 수학을 공부해 보면 그래도 형식주의적인 입장이 물론 힐베르트가 수학자로서 그런 주장을 했지만 현대 수학 추상수학에 가장 가까운 주장이 아닐까 저는 나름대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대략 세 가지 입장 정도를 말씀하셨는데요. 
형식주의 수학은 장난감이다. 그다음에 논리주의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한 수학은 논리다.
실제에 관한 논리다.


아 실제에 관한 논리다. 그다음에 직관주의 수학은 경험적 인간이
선엄적인 순수한 직관에서 뿌리를 봤다.
순수한 직관으로 순수한 직관의 뿌리를 두고 있는 입장이다. 


그렇죠 그래서 선생님 논문이 칸트와 직관주의에 관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면 직관주의에 대해서 칸트의 입장과 어떤 부분에 의해서
사실은 칸트의 직관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이라기보다는 약간 비판적인 입장에서 칸트와 신직관주의라고 할 수 있는 브라우어 서로 비교도 하면서 직관주의가 지금 오늘날의 현대 추상수학과는 조금 이렇게 매치가 거리가 있다. 


이런 주장 그리고 조금 더 형식주의 관점에 가까운 설명 주장 그런 것들이 제 논문의 핵심입니다마는
일단 칸트의 직관주의를 들여다보면 굉장히 재밌는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막연히 알고 있었던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그 책 안에서 또 우리가 선엄적 종합 판단이라는 우리가 칸트 용어가 많이 유명하죠. 
그래서 선엄적 종합 판단이라는 거 안에
수학이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그게 굉장히 흥미로웠고
아니 우리 저기 독자들을 시청자를 위해서 선원적 조합 판단이 뭔지부터 간단하게 설명을 좀 해
좋습니다. 그런데 그 선험적 종합 판단을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휴의 분류부터 의 지식 분류부터 더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지식이라고 하는 것을 명제적인 지식 이런 지식이라고 하는 것을 이제 흉 같은 경우에는 칸트보다 조금 전이죠 흉 같은 경우에는 이제 두 갈래 포크론이라 이론이라고도 하는데 우리 지식을 두 가지로 분류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는 메르스 팩트 사실에 관한 거 우리가 경험에서 부딪히면서 사실에 관한 진리를 이제 하나를 보고 그다음에 이제 경험적인 지식이죠 그거는 그렇고 그다음 또 하나는 mars ov concert 릴레이션십 콘셉트 그러니까 개념들의 관계에 관한 그런 지식
그래서 수학을 이제 전자 후자로 본 거죠. 


우리가 경험적인 지식과 팩트에 대한 지식과 그리고 개념들의 관계에 관한 지식으로 구분을 한 겁니다. 
그래서 개념들의 관계에 관한 지식을 우리가 줌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선엄적인 지식이라고 얘기를 했고요. 
그리고 팩트에 대한
선험적 분석적 지식 예예.
그리고 이제 팩트에 대한 거는 이제 경험적인 지식이다.


경험적.
그래서 선엄적인 지식은 필연적이고 아주 확실하고 우리가 수학적인 지식을 그렇게 보듯이요. 
분석적이고 이렇게 설명을 하고 경험적인 지식은 확실치는 않지만 존재론 존재와 관련이 있는 그리고 경험적이고 우유적이고 이런 식으로 두 개를 구분을 합니다. 


거기서 흠이
최종적으로 비판한 것은 형의 사학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이상학은 팩트에 대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수학처럼 명확한 그런 어떤 개념들의 관계에 대한 지식도 아니기 때문에 탁상공론에 가깝다. 


그렇죠 따라서 이제 이거를 불에 던져야 된다. 
그렇죠 그래서 이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칸트가 그래서 이제 독단에 자면서 깨어났다고 그래서 이제 순수 이성빈 니다.


맞습니다.
어떻게 썼든지
이제 말씀해 주시면
칸트가 형의 사학을 왜냐하면 최초의 어쨌든 어쨌든 직업적인 철학자로서 칸트는 형이상학을 버려야 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그래서 그거를 가지고 선언적인 지식 선험적 지식을 가지고 다시 두 개로 분류를 한 거죠.
그래서 선험적 지식을 분석적 지식과 선험적 종합 판단이라는 두 가지로 다시 분류를 더 합니다. 
그러면 분석적인 지식은 뭐냐 분석적인 지식은 문장 안에서 어떤 언어적인 개념을 가지고 개념을 가지고 그냥 다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매우 아주 단순한 그런 것들을 분석적인 지식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자이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여자이다. 
엄마 안에는 여자라는 속성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단어의 정의를 제대로 알면 개념을 알면 곧바로 이것이 참과 거짓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그래서
별도로 경험적인 지식이 요구되지 않는 그런 것들을 우리가 이제 선험적 지식 중에서도 분석적인 지식이라고 이야기했고요. 


흉 관점에서 보면 수학도 다 거기에 들어가는데 cont는 수확을 거기에 넣지 않았습니다.
수학은 분석적이기만 한 지식은 아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선엄적 종합 판단이라고 이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선엄적인 지식은 좋은데 왜 종합 판단이냐 무슨 말이죠 그러니까 원래 수학을 분석적인 개념으로만 시대만 만 하더라도 그렇게 받아들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그걸 왜 종합적이라고 하면 종합적이라고 하는 건 하나의 관점이 아니고 여러 가지 관점이 모인 거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수학을 예를 들어보면 실제 순수 이성 비판에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칠다기 오는 12다. 이런 수학적인 명절을 봤을 때

칸트는 어떻게 그걸 해석했느냐 하면 7이라는 숫자의 개념과 5라는 숫자의 개념은 아무리 뒤져봐도 7 더하기 5를 하면 12가 된다는 그런 것들이 산출되지가 않는다.


지속적으로는 나오지 않는 거요.
나 다. 그래서 앞에서 총각은 남자아이다 하고 다르다는 거죠. 


그래서 그러면 칠다오가 10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어떻게 아는가 그거는 우리가 시공간적인 직관력이 거기서 동원이 돼서 일곱개다 다섯개를 더하면 12개가 된다는 것을 이렇게 일대일로 이렇게 공간적으로 이렇게 매치를 시킨다든지 손가락을 세워본다든지 해서
그런 것들을 우리 직관적인 요소가 동원이 돼서 7다이오가 10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 형식을 통해서 들어오기 때문에 칠더하교가 12라는 어떤 말하자면 지식이 산출된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종합 판단이다.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개념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죠. 
개념에서 직관 요소가 더 가해져야만 그것이 판단이 될 수 있다는
그게 이제 직관주의이네요.


그렇죠? 그래서 그걸 합쳐서 이제 종합 판단이라고 이야기를 한 거고요. 
그래서 거기서 이제 직관이라는 개념이 수학에서 동원이 된다고 해서 직관주의라는 이제 시작이 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시면 직관주의에 대한 입장이 굉장히 좀 좁아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요. 


거기에 대한 비판이나 이런 건
비판이 굉장히 많았죠. 그래서 저도 저 자신도 거기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서 논문을 썼습니다마는 일단은 우리의 수학적 지식의 토대가 직관의 뿌리를 받고 있다. 


그거는 굉장히 일리가 있습니다. 있는데 그 당시만 하더라도 오늘날 현대의 어떤 추상수학처럼
어떤 공이나 정의로부터 아주 체계적으로 모든 것이 이렇게 수학이 모든 체계로부터 쌓아진 것이 아니고 굉장히 모호한 표현들도 그 당시에는 많았어요. 


그래서 뭐 카트 시대만 하더라도 직선은 정의를 어떻게 직선은 똑바른 선이다. 
굉장히 모호하죠. 그래서 똑바로선은 굉장히 직관적이죠. 
똑바르다는 게 그렇죠 그렇지만은
그거는 이제 수학의 본질이라고 볼 수는 없고요. 


수학이 현대 수학에서는 절대로 그렇게 정리를 하지 않거든요. 
그리고 이제 칸트는 개념에다가 직관 요소가 동원이 돼야만 수확이 가능하다. 
이렇게 보기는 했지만 그 후 라이프니츠 같은 수학자는 거기에 대해서 큰 반발을 합니다. 


뭐냐 하면 플러스 1이라고 하는 개념도 왜 거기에 넣지 않느냐
수라는 5라는 숫자와 7이라는 숫자의 개념만 이야기하지 플러스를 하지 않습니까? 그 플러스 1이라는 개념을 또다시 수학적으로 정의를 하고 넘어가면 그 정의로부터 모든 게 7다교가 시비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밝혀질 수 있다는 거죠.


제 말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5 더하기 1이 6이라고 정의를 하고 6 더하기 1을 7이라고 정의를 한다고 하면 말하자면 7 더하기 5가 10이라는 것도 정의에 의해서 나오기 때문에 습니다. 
그것도 분석 명제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예 그게 바로 라이프리치의 이야기 예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예 그렇게 되고요.
짠 겁니다. 이거
궁금해서 정확한 표현이 있어요. 그래서 그래서 방금 말씀하셨듯이 다음 수 5에다 1다수죠 5 다음 수를 우리가 6이라고 말을 하고 정의를 하지 않습니까? 6하고 다음 수는 7이라고 정의하고
논리주의가 뭔지 알겠네 그게 바로 논리주의 입장인 거죠.


그렇습니다.
일시적으로 정리가 된 거네요. 체계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렇게 정리를 제대로 정리를 하고 가야지 직선은 똑바로 성이다. 
이런 식으로 정리를 해버리면 직관주의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거죠.


제가 논리 주의를 이제
예전에
영상을 만들게 만들었었는데 뭔지도 모르고 만들었었는데 최충 이해가 된 것 같아.
철저하게 대피션부터 정의부터 출발하는 것이 논리
플라톤부터 시작을 하네요. 플라톤의 기약이 이제 정의로부터 시작을 해서 이제 하나하나 쌓아 올라가는 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이제 설명을 하는 것이 이제 라이프니츠의 입장이고 그래서 라이프니츠를 이제 논리주의의 효시라고 보는 사람도 있는 거죠. 
그렇게 하고 밀 같은 실용적인 철학자들은 아예 선험적 지식 자체가 없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것은 다 경험적인 지식이다.
심지어는 직관이라고 말하는 거 그 논리적인 토대라고 말하는 이런 것들도 사실은 우리 경험적인 세계에서 필요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 아니냐


그거는 논리주의도 아니고 직관주의도 아니야
아니죠 그건 아무 데도 속하지는 않습니다.
경험 과학처럼
그렇습니다. 그냥 경험적인 관점으로 그냥 그걸 본 거죠.


그러면 말하자면 수확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자연 속에서 발견하는 거다. 
이렇게 보는
본 겁니다. 표현을 아주 정확하게 잘해 주시는데요. 


그래서 미는 그런 경험주의적인 입장이고 수학
찾아내는 거라고 보는 입장인 거
그래서 수학의 3대 조류에 넣을 수 있는 그런 상황은 아닌데
마이너의 입장이네요. 약간 동의하기는 좀 어려운
나중에 이제 그 현대로 와서는 이제 브라워라고 하는 그 수학자이자 철학자인데요. 


그분이 이제 칸트의 직관주의를 다시 끄집어내서 직관주의의 뿌리를 박고 우리가 수확을 해야 한다. 
그래서 무한을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무한은 인정할 수가 없잖아. 포착이 안 되죠.
예 포착이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유한적이고 직관적인 방법으로만 수확을 해야 한다. 


이런 주장을 펼쳐서 그런 걸 신직관주의라고
칸토인가요 힐베르트인가요? 우리를 무한이라는 낙원에서 쫓아내지 말라고 이야기를 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한 수학에서 무한 버리기가 어렵잖아요. 


어렵죠.
실제로 현실에서 그게 많이 활용이 되고 있고요. 
실질적으로 금융에도 활용이 되고 있고 말이죠. 
그래서
너무 멀리 나가시면 안 돼
니다. 지금
우한의 얘기는 조금 나중에 이제 기회가 되면 다시 얘기하고 그 정도로 하시죠. 


그러면 일단은
직관주의 칸트 직관주의 설명을 좀 드린 걸로 하고요.
논리주의도 대충 이해가 좀 된 것 같고요. 
더 이야기를 그다음에 이제 마지막에 형식적
주의 이야기 그걸 아시죠? 형식주의를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이야기했던 분은 이제 힐베르트죠. 


힐베르트고 힐베르트는 워낙 유명한 수학자이기도 하죠. 
그래서 20세기 들어와서 현대 수학 추상 수학들을 들여다보면
저는 이제 형식주의 관점에 굉장히 가까운 걸로 흘러가고 있다고 보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어떤 현실이나 자연에 반드시 뿌리를 둘 필요는 없다. 
그런 관점인 거죠.
그래서 네 마음대로 상상해라.


마음대로 우리가 정의를 하고 그래서 형식주의를 다르게 표현하면 이프데니즘이라고 표현도 하죠. 
연역주의기도 하고 그러니까 어떤 전제를 가지고 하는 것이 이제 수학이죠.
리 직관이나 경험에 관계없이 어떻게 전제를 하면 그렇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온다.
그 구조만 밝히는 거죠.
조만 밝히겠다.


물론 직관에 기반을 둬도 괜찮아요. 상관이 없는데 출발점을 어떻게든 전제를 딱 잡고 나면 그 전제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이 되는 논리적으로 필연적으로 도출이 되는 구조들을 우리가 말 그대로 장난감
그렇습니다.
그래서 형식주의도 이제 거기에 대해서 이제 비판하는 수학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현대 수학자라고 왜냐하면 이게 순수 수학으로 순수 수학이 그런 입장인데요. 
사실은 오늘날에
수 수학이 그러니까
입장이 왜냐하면 구속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죠. 


현실에 그렇지만 수학이라고 하는 게 우리가 체스 하는 거 하고 다르지 않느냐 체스 연구해서 술을 아무리 연구해도 우리 인류의 그 자체가 기여가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수학은 우리가 하면서 자연과학에 많은 영감을 주고 실제로 많은 어떤 혜택을 주죠. 


그래서
반드시 응용수학이라고 하지는 않더라도 순수 수학도 뭔가 현실에 토대를 두고 연구를 해주고 거기에 관련된 생각을 하는 것이 수학이 아닌가 그래서 게임이라고 하는 건 좀 과하지 않느냐 그런 입장이 또 많습니다. 


비판적으로
기본적으로는 직관주의나 논리주의 같은 경우는 현실 세계에 기반을 둔 스타트 자체가 인간이라는 직관 인간의 직관에 기반을 두기도 하고 이런 입장이라고 본 반면에 형식주의는 어쨌든 자유롭게 출발을 이프덴이라고 말씀하셨으니까 출발을 하던 것이지만 그래도 어떤 현실적인 뿌리를 둬야 되지 않느냐라는
이 있지
있다라는 말씀이요. 그게 수학에 대한 세 가지 입장 수학 철학에 대한 세 가지 입장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셨는데요. 


간단하게 한번 정리를 조금
역사적으로 시기적인 관점 중심으로 이렇게 분류를 하면 가장 먼저 어떻게 보면 수학의 입장은 자연에 뿌리를 둬야 된다 하는 직관주의가 가장 시기적으로는 앞서 있었던 관점이고요. 


그리고 이제 현대 20세기 오면서 현대 수학으로 넘어오면서
수학은 그런 자연에 꼭 토대를 둘 필요를 배제하면서 순수하게 논리적인 관점으로만 수학을 봐야 된다 하는 그런 논리주의 그쪽으로 흘러왔고 그다음에 이제 수학이 그 논리주의는 사실 그 토대 자체가
마치 어떤 존재의 세계에 대해서만 논해야 되는 그런 것처럼 입장이 돼 있었거든요. 


마치 이대화 세계처럼 말이죠. 그렇죠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좀 반감을 가지고 수학은 어떻게 보면 그런 데 대한 구속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마치 기호를 가지고 하는 게임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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