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동설을 포기하면 곧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그 당시의 증세에 특정한 사람들을 보고 우리가 그런 거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신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한 3040년만 지나도 절대다수의 개신교인들이 진화론을 과학의 이론으로 수용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때 돌이켜보면 왜 그때 분들은 진화론을 과학 이론을 수용하는 걸 가지고 신앙의 위협을 느꼈을까 그렇게 생각할 때가 올 것 같습니다.
생명에 관련되고 생명이 창조냐 지하냐 이런 물음들 앞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취해야 할 태도는 겸손한 겁니다.
한 목사님이 자신은 진화론에 반대한다 진화론이라는 게 원숭이가 사람이 됐다는 얘기고 오늘날 원숭이 보면 하나도 사람으로 되는 원숭이가 없지 않냐 그래서 자기는 진화론을 믿을 수 없다 이렇게 이제 얘기를 하는 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은요 어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배웠던 모든 사람들이 저건 진화론 잘못 알고 있는 거네 그렇게 얘기할 겁니다.
지금 이 방송을 보는 분들에게 한 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진화가 뭔지 한번 정의 내려 보시라고.
뭔가 알 것 같긴 한데 쉽게 입에서 나오질 않아요 그렇죠? 왜냐하면
진화론이라는 것은요 사실은 어떤 특정한 사상이나 어떤 이데올로기나 어떤 종교가 개입된 것이 아니라 생명 집단이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변화를 축적해서 종 전체의 특성을 변화시키거나 이것이 더 나아가서 다른 종을 낳게 하는 그런 것을 이 생물학자들이 관찰을 하는 거예요.
그걸 화석을 통해서든 어 디엔에이나 유전자를 추적할 수 있으니까 그것을 보고
이런 현상들을 추적해서 진화론이라는 과학용으로 서술한 겁니다.
설명한 겁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물리학 같은 데서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다 만류 인력의 법칙이 있다 어떤 자연 현상을 관찰하고 그것 배후에 있는 어떤 원리들을 이론으로 정식화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보수적인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질량 보존의 법칙을 시비 걸지 않아요.
반박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아요. 그런데 진화의 진화론에 관련돼서는 시비 걸려고 하고 반박하려고 하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성서에 아 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로 됐다고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문자 그대로 과학적 사실로 읽는 분들은 진화론과 이른바 창조론은 서로 양립할 수 없고 성서의 말씀이 문자적으로 과학적으로 사실이기 때문에 진화론은 틀렸고
창 이른바 창조론 저는 창조론이라는 말하고 창조과학이라는 말을 구분해서 쓰는데요.
조론 이른바 창조론이에요. 제가 말할 때는 창조과학의 주장을 옳은 것으로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제가 이제부터 거기에 대해서 몇 가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진화론과 창세기에 있는 창조 이야기를 둘이 대립되는 것으로 읽는 이 시각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는 얘기를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009년도
이 통계에 따르면 개신교는 사십 퍼센트가 조금 안 되는 숫자가 진화론을 수용해요.
그런데 2019년 통계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자기가 개신교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진화론을 반대한다고 얘기하는 분이
사십오 퍼센트 정도 됐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을 바꾸면 진화론을 과학이론으로 수용하면서 동시에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다고 고백하는 분들이 오십오 퍼센트가 됐다는 거예요.
달리 말해서 기독교 신앙, 창조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과 과학 이론으로서의 진화론을 수용하는 것 사이에 모순이 없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분이 55%가 됐다 이게 첫 번째 얘기입니다.
그럼 두 번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전 세계에 있는 성서학자들, 구약학자들, 성서학자들 다 모아서 손 들려고 한 번 시켜보면 됩니다.
창세기 12장은 과학적 서술인가요? 하고 오를 들 성서학자들은 몇 명이나 될까요? 거의 없을 거라는 건 확실합니다.
창세기 1장과 이장에 있는 창조 이야기는 이 세상이 어떻게 과학적으로 발생했는가를 말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제가 이렇게 얘기하고 성서학자들에게 이 말이 옳습니까? ox를 들려고 그러면 거의 모든 성서학자들이 오를 줄 겁니다.
성서 창세기 1장과 2장을 과학적으로 서술된 것으로 믿고 하는 이른바 창조과학을 지지하는 전 세계의 과학자들 손 들고 나오라고 그러면 생물학자들 손 들고 나오라고 그러면 거의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창조과학이 과학적으로 인정받는 저널에 실린 논문이 거의 없어요.
다른 한편
이 세상에 성서학자들을 다 모아놓고서 창세기 1장과 2장을 과학적으로 쓴 것이 맞다라고 하는 논문이 나온 게 있느냐 없습니다.
그래서 창조과학은 과학적으로 비과학이라고 생각하고, 성사학자들은 창조과학이 하는 창세기 읽기를 적절하지 않은 창세기 읽기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어떤 분들은, 어떤 분들은
성서학자들이 타락했다고 주장하실지 모르겠는데요 그런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같이 겸허하게 생각해보자고 얘기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진화론을 반박할 학문적 능력이 없죠.
우리 솔직히 얘기해서 진화론 논문을 한 편 읽어본 적도 없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분들은 창세기 1장과 2장을 히브리어로 읽고, 창세기가 기록될 당시의 고대 신화와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상황과 언어적 관습을 성서학자들만큼 전문적으로 연구한 분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생명 현상을 다루는 생물학자들, 그다음에 성서를 연구한 성서학자들이 양심적으로 오랜 세월을 거쳐서 연구한 결과를 그렇게 한마디로 쉽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혹은 신앙이 없다 라고 얘기하는 것은 적절한 반응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정말 하나님이 창조를 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 그냥 한 얘기냐 스펙트럼이 여럿이거든요.
과학자들 중에서도요 신앙을 가진 과학자들이 많고, 어떤 분은, 어떤 분은 천체 물리학자인데 자신이 공부하는 천체 물리학을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신앙이 깊어진다고 고백을 하시면서 빅뱅이 오늘날까지 밝혀진 우주 창조의 가설인데 그 과학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역시 생물학자 중에서도 아주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있거든요.
신앙 가진 사람들이 이 분들은 스펙트럼이 또 나뉘나뉘어요.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이 생명의 이 과정 자체를 이미 설계했기 때문에 진화 과정 자체가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 과정 중에 어떤 학자들은
이렇게 진행시키고 놔뒀다라고 하는 분도 있고 어떤 분들은 세세하게 개입했다라고 하는 분들도 있고요.
그러니까 그리고 이제 어떤 분들은 그걸 유신진화론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고 여러 입장들이 있어요.
그러면 창세기 일이 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가 뭘 말하는지 그거를 얘기해야 되잖아요.
이렇게 운영할 수 있거든요.
우리가 홍길동전이라는 이야기가 있어요.
홍길동전 이야기가 있으면 이 홍길동전 이야기가 내세우거나 혹은 가지고 있는 이념이 있습니다.
홍길동은 적자와 서자를 차별하는 문화에 화를 내면서 적서 차별에 반대하는 이념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야기가 있고요. 그 이야기를 만들어낸 이념이 있고요.
그 이념을 자기의 신념으로 삼아서 적서 차별에 나서는 적서 차별 운동가들이 있죠.
창세기 이야기가 있어요.
그 이야기 배후에 창조 이념이 있어요.
그리고 그 창조 이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자기 삶에 실현하려고 하는 창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요.
창조과학은 이것과 다른 거예요. 창조과학은 이 창조 이야기를 과학적으로 읽겠다는 건데 그것은 성수학자들이 볼 때는
이것은 신학이 아니에요. 성서학적으로 적절하게 이긴 게 아니에요.
그러면 창조 이야기가 갖고 있는 하고 싶은 말 창조 이념은 뭔가 저는 이 창조 이념을 창조론이라고 부릅니다.
이 창조론은 진화론하고 부딪히지 않아요.
이게 부딪힌다고 생각한 분들은 제 질문 한번 들어보시면 됩니다.
이제 이 세상을 마하 5로 나는
어마어마한 속도의 비행기가 발명됐으니 베토벤은 더 이상 필요 없다.
그렇게 들으면 어 이게 무슨 말이야 마하 오의 제트기계가 발명된 거 하고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하고 서로 부딪히지 않잖아요.
부딪히지 않아요. 진화론은 과학 이론이에요.
창세기 이야기가 말하는 창조 이념은 매우 매우 아름답고 정말 매력적인 겁니다.
베레슈트 바라 이렇게 하잖아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냐 하면 이 세상이 하나님 창조하기 전에는 혼란과 공호와 어둠과 기품이 이 세상이라는 거에요.
근데 창조라는 건 뭐냐면 그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고 분간이 되지 않는 어둠의 빛을 부여하고
깊은 어둠 그러니까 땅바닥이 없이 그냥 허우적거리고 어떤 곳도 없는 곳에 사람이 발 디딛고 살 수 있는 아주 굳건한 지지대를 땅을 근거를 제공했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어둠에서 빛으로 혼돈에서 질서로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운영하는 방식이고 이 세상의 창조라고 얘기하고 그것이 아름답다고 얘기하고 공허한 데에서 하나님께서 지으시잖아요.
만물을 지으시잖아요. 없음이 아니라 있음이 정말 아름다운 곳이고 하나님이 이 지은 모든 것을 보고 토브라고 그러셨다고 그러잖아요.
이야 아름답다.
토브라는 말은 아름다움이라는 말과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말이 동시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존재하는 것을 보고 야 너는 참 아름답고 존재하는 그 자체로 선하다라고 하는 그 선언을 그 선언 그게 창조 이념입니다.
창조 이야기 배우의 숨은 그러니까
창조 신앙이라는 건 뭐냐면 혼돈에서 질서로, 비존재에서 존재로,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이 모든 창조의 과정을 하나님과 더불어 아 그것이 참으로 아름답고 멋지고 좋은 일입니다.
하는 존재에 대한 긍정입니다. 그러니까 어둠과 공오와 혼돈과 기품이 주는 무의미와 허무에 굴복하지 않고
이 삶의 질서를 지켜내려고 하는 거 우리의 존재를 긍정하려고 하는 거 갈피 못 잡는 무지에서 벗어나서 빛으로 우리 앞에 있는 인생을 헤쳐나가고 분간하려고 하는 이 모든 노력, 그것이 창조 이념이고, 그 창조 이념을 우리의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창조 신앙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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