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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칼 융 동시성 현상양자역학

by 로이인랑 2023.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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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칼 융 그에게 어느 날 등산가 한 명이 찾아와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꿈 속에서 등산가는 높은 산에 올랐는데, 그 정상에서 그만 발을 잘못 디뎌서 추락했다는 것.
융은 곧바로 이 꿈이 현실에 대한 경고임을 직감하고, 그 등산가에게 당분간은 등산을 자제해야 한다고 권장했죠. 


하지만 며칠 후 유은 이 사람이 등산 중 발을 헛디뎌 추락사했다는 소식을 실제로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저의 사례인데, 군 복무 중 오전에 심하게 다친 적이 있었어요. 
근데 그날 저녁에 부대로 전화 한 통이 걸려옵니다.


이 전화를 건 분은 우리 어머니였는데, 어젯밤 꿈에 제가 크게 다치는 장면을 봤다고 하면서 우리 아들 괜찮냐고 물어보셨다는 거죠. 
예지몽 본시 이것은 현실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주는 꿈을 뜻하죠. 
과학적으로는 분석하기 힘든 비인과적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무시해버릴 수도 없는 현상. 


누군가에게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칼 융에게 이런 현상은 의미심장한 일치이며, 인간의 무의식과 깊게 연관되어 있는 현상이라는 것.
그래서 그는 이런 현상을 동시성이라 부르면서 특별히 연구했는데, 오늘 우리는 바로 이 개념에 대해 살펴볼 겁니다. 


그리고 양자 역학과 이 동시성 사이에서 발견되는 유사한 성격이 있으니, 우리는 이를 통해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는지 함께 확인해보고자 하니까요. 
지금부터 재밌게 시청해 주세요.


칼 융이 치료하던 환자들 중 젊은 여성이 한 명 있었는데, 그녀는 매우 지적이며 이 세계와 인간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데 익숙한 인물이었다고 해요. 
그러니까 원인과 결과로 맺어진 인과율의 과학적 법칙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성격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융이 그녀의 심리를 분석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하는데, 본시 심리란 눈에 보이는 물질에 비해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이라서
그녀의 완강한 저항이 있었던 거죠.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심리 치료실에서 자기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 속에서 풍뎅이 모양이 비싼 보석을 선물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죠. 


그때 융은 이 이야기를 창가에 기댄 채 듣고 있었는데, 그 순간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풍뎅이와 비슷하게 생긴 곤충이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곤충을 손으로 잡은 후 곧바로 그녀에게 보여주면서 당신이 선물 받은 그 풍뎅이가 지금 여기 있습니다 라고 했다는 거죠. 


이 일은 우연의 일치입니다. 인간의 주관적 심리 상태와 객관적 사건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의미심장하죠. 
이렇게 인간에게 일어나는 우연의 일치 중 무의미한 우연의 일치 말고, 인간의 내면에서 겪는 체험과 외부에서 발생한 물리적 사건 사이에 의미를 가지는 일지
이것이 이뤄지는 것을 융은 동시성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니, 이제부터 이 개념을 잘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이러한 일을 겪게 된 융의 그 환자는 이후로 심리 분석에 대한 지적인 반응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보다 유연한 마음 상태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리하여 융은 이렇게 바뀐 그녀를 성공적으로 치료했다고 알려져 있죠.
환자의 지적인 태도에 대한 변화 그리고 이것에 주목한 융 이러한 유이 활동하고 있던 당시의 서양은 그들의 전통이기도 했었던 이성 중심주의가 무너지고 있던 때이기도 했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 세계와 우주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과도한 자신감에 기초해 있는 이성 중심주의
그러나 19세기 말, 20세기 초가 되면 이성에 대한 이런 믿음이 서서히 깨지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사건의 원인이 된 대표적인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심리학에서는 무의식을 발견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과학 분야에서 양자 역학이 등장한 것이었죠. 
여기서 양자 역학에 대한 얘기는 이제 좀 이따 따로 하기로 하고, 무의식에 대한 얘기부터 간단하게 먼저 하겠습니다.


본시 이것은 인간의 의식보다 더 근원적이며 심층적인 것으로 간주되는데, 지금 보는 것처럼 의식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거죠. 
그러니 이성이 속한 저 의식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이러한 무의식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프로이트가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하겠으니, 융 또한 이러한 프로이트 이론에 크게 공감하면서 한때 직접 교류하기까지 했었죠.
하지만 1913년을 기준으로 융은 프로이트에 대한 사상적 차이로 인해 결별하며, 분석심리학이라고 하는 자신의 학파를 따로 만들죠. 


이처럼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무의식에 대한 입장 차이가 분명하다는 건데, 프로이트가 의식에서 억압 기제를 통해 무의식이 형성된다고 본 것과 달리, 융은 무의식이 먼저 생겼고, 이로부터 의식이 형성된다고 봤어요. 
그래서 융에게 무의식은 의식보다 오래된 것이며, 이는 인간의 개인적 차원을 벗어나서 집단의 성격으로 있다고 봤다는 겁니다.


가령 갓 태어난 아기들은 의식이 아닌 무의식적 상태에서 그 삶을 시작하는데, 이는 집단 무의식이 유전된 결과라는 거죠. 
그래서 융액의 무의식은 집단 무의식과 개인무의식으로 구분되는 두 층위를 가진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집단 무의식은 인종 간의 전혀 교류가 없었던 서로 다른 두 부족 사이에서, 그 유형이 거의 동일한 신화 속,
그러니까 신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동일한 형태로 발견된다는 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이러한 집단 무의식이 인간, 즉 각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이것은 우리 모두가 원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본시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는 정신적 요인을 뜻하는데, 가령 새는 배우지 않고도 타고난 본성으로 비바람에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둥지를
아주 정교한 형태로 만들어 내잖아요. 


우리 인간도 집단 무의식에 따른 원형으로 인하여 서로 비슷한 심리적 충동들을 복잡하고 정교한 형태로 뚜렷하게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처럼 각 개인은 서로 고유한 개인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집단 무의식에 따른 원형을 공유하고 있는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것
이는 마치 각 파도들이 서로 떨어져 있는 듯해도 바다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은 위치입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인간의 심리 세계, 특히 무의식의 영역은 시간과 공간에 따른 인과율에 따라 작동하는 물리적 세계와는 성격이 다르다고 해요. 
가령 내 눈에 보이는 이 사과를 포착하여 정보를 얻으려면 포착 가능한 거리, 즉 공간이 필요하죠.
그리고 시각적 파악을 하는 동안에 시간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는 사건의 원인, 그 원인에 따라 사과를 포착한다는 결과가 나온다는 얘기인데, 무의식에서는 원인과 결과에 따른 시간의 선후 없이 원형과 같은 것을 미리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상식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즉 예측하기 힘든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융은 앞서 우리가 얘기했던 저런 동시성 현상이 무의식의 작용일 거라고 본 겁니다. 


왜냐
이 동시성 역시도 시간과 공간을 매개로 하는 인과율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니까요. 
가령 동시성에 대한 사례들 중 하나로 스웨덴 보르크라는 인물에 대한 얘기가 있는데, 그는 자신이 있던 곳으로부터 50마일이나 떨어진 스터클럼에서 화재 사건이 발생한 것을 마음으로 봤다는 겁니다. 


따라서 스웨덴 브로크는 공간과 시간을 매개하지 않고도 이런 걸 건너뛰고 저런 사건에 대한 지식을 가졌다는 것인데,
마찬가지로 앞서 만났던 예지몽들 또한 시간과 공간을 매개하지 않고 작용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꿈이 먼저 보여주고 시간을 역행하는 거죠. 
이후에 그 사건이 발생하니까요. 이처럼 융이 말하는 동시성 현상이란 인간론적 법칙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의식의 관점에서 볼 때는 서로 분리된 두 독자적 영역이 인간적 연결 없이 만나는 하나의 신비 현상처럼 보이지만,
무의식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가령 융은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가 서로를 보완해주는 관계라고 보는데, 이러한 관계를 통해 전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곧 자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자기를 구성하는 무의식과 의식의 그 관계에 있어서 그 균형이 깨질 때가 있다고 해요. 
이를 이제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제가 이제 이 장면을 보여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이렇게 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초점을 맞추면,
나머지 영역들은 흐릿해지죠. 이처럼 인간의 의식에도 집중을 하는 특성이 있어서, 집중을 시작하게 되면 막연하게 인식되었던 세계를 뚜렷하게 하지만, 이제 특정 부분만 식별할 수 있게 되지만, 그 대신에 전체적인 수용의 정도는 약해진다

 

는 것 그래서 의식의 집중이 과도하게 강해지면, 상대적으로 색에 대한 전체적인 수용 능력이 이제 약해지게 되므로, 이게 이제 너무 심해질 때 무의식과 의식의 균형이 깨진다는 것
그리고 보편적이며 전체성을 지향하고 있는 이 무의식은 의식을 향해서 보편적인 방향으로, 전체적인 성격으로 가라고, 다시 돌아오라고 메시지를 보내게 된다는 건데, 이때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가 바로 동시성 현상이라고 융은 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동시성 현상은 주로 꿈 또는 예감 등과 같이 무의식이 의식의 메시지를 보낼 때 발생하는 그런 현상과 관련된 방식으로만 나타니
이런 무의식이 시간과 공간의 인과율에서 벗어나 있듯이, 동시성 현상도 그런 인과율의 지배를 받지 않은 채 특정 사건에 국한되는 것을 벗어나 전체적으로 파악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즉, 융액의 동시성이란 무의식과 의식의 상호 관계에 있어서 그 보완 기재라는 것이죠.
이렇게 동시성 현상을 분석하는 융 그는 본시 이 어휘를 1930년에 리하르트 빌렐름을 위한 회고 연설에서 처음 사용했다고 밝힌 바 있는데요 여기서 빌헬름이 누구냐 하면, 주역을 독일어로 탁월하게 번역한 그런 인물입니다. 


그리고 융은 바로 이 인물과 교류를 통해서 주육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가 볼 때 이 주역은 재미있게도 과학적 인간에서 벗어나 있는 시스템, 즉 비인과적 시스템으로 되어 있어서 자기가 말하는 동시성의 원리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는 겁니다. 


왜냐 주역에는 64개의 도상들이 있는데, 이 도상들마다 인간의 삶과 운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거든요. 
그리고 자기 운세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 이러한 주역의 여러 도상들을 정해진 절차에 따라서 이제 뽑게 되는데
여기서 도상을 뽑는 행위와 이 사람의 심리 상태 이 둘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성도 없지만, 내가 간절히 알고자 하는 것과 그것을 설명하는 이 도상을 뽑는 행위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 즉 동시성이 작용하고 있다는 거죠. 


이처럼 고대의 중국에서는 인과율이 아닌 그와는 다른 방식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융은 큰 흥미를 느꼈다는 얘기인데
그는 그만큼 인과론적 과학 분석으로 인간의 특히 무의식적 영역을 해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봤던 그런 인물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여러 연구 방법론을 찾던 중, 그 과정에서 이런 주욕에도 흥미를 느꼈던 것이며, 특히 자신이 직접 경험하기도 했었고, 또 전해 듣기도 한 여러 동시성 현상들에 대해서도 주목을 하면서, 인과론적으로 포착되지 않는 인간의 심리를 알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는 것이니
이리하여 그는 1951년에 동시성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먼저 봤다 발표하고, 다시 이 연구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전을 시켜서 비인과적 연결 원리로서의 동시성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던 거죠. 


이렇게 이제 융의 입장을 정리를 좀 해보면, 그는 동시성 현상처럼 인간론적 법칙에서 벗어나는 현상을 인간이 이제 나타낸다는 것이고
이것은 이성중심주의에 입각한 과학으로는 풀어낼 수가 없는 인간의 고유한 또 한 영역이니 이를 보다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처럼 동시적 현상에 주목했던 것이다 라고 말씀드릴 수 있다는 겁니다.


앞서 우리는 이성 중심주의가 위기를 맞게 된 이유 중 하나로 무의식을 이제 거론했는데 이외에도 하나가 더 있다고 했으니 그게 바로 양자 역학이며 놀랍게도 이 물리학적 세계관을 잘 들여다보게 되면 동시성 현상과 유사한 현상이 물리적으로 관찰이 되기에 우리의 관심사가 된답니다.


본시 이 양자 역학이란 미시세계에 대한 물리학인데 양자 역학에서 이제 양자라는 말도 물리학이 취할 수 있는 최소량을 뜻하죠. 
이처럼 미시 영역, 그러니까 원자보다 작은 세계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연구하고 설명하는 이런 양자 역학이 어떤 점에서 융이 말하는 동시성 현상과 유사한 면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이제부터는 제가 여러분이 이해하기 좋도록 최대한 쉽게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양자 역학에는 양자 중첩이라는 현상이 있고
양자 얽힘이라는 현상이 있는데 이 두 개가 양자 역학의 기본 원리거든요. 
먼저 양자 중첩부터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가장 여기 보이는 이 축구공은 이 공간 안에서 특정 위치를 차지하고 있죠 뭐 내려놓게 되면 바닥에 있을 것이고, 뛰어나온 공중에 잠깐 떠 있을 수 있는 것이고요. 
하지만 전제와 같이 아주 작은 존재는 저 축구 공간은 존재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럼 이 상자 안에 전자가 하나 들어있다고 해볼게요.


이때 이 전자는 관측되기 전까지는 확률적으로 존재 가능한 모든 위치에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뭐 이런 식으로 볼 수 있다는 거예요. 
즉 전자는 위에 있을 확률, 아래에 있을 확률 등등이 중첩되어 있으면서 파동처럼 물결의 파동처럼 서로 간섭하기 때문에 이 상태에 대한 확률은 파동함수를 통해 얻어지는데 이러한 전자를 관측하는 순간 이것을 미치는 어느 한 곳으로 결정되면서 다른 곳에 존재할 모든 확률들은 제로로 수렴이 되고 파동함수는 그렇게 해서 붕괴된다는
이렇게 전자는 인과율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확률에 따라서만 해석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원인과 결과의 구조로 세계와 우주의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던 데카르티의 전통적인 이성 중심주의와 그에 따른 고전역학적 세계관은 위태로워지는 거죠. 
그리고 양자 얽힘이라는 현상이 있는데
이것은 쉽게 말해서 한 번 서로 상호작용을 했던 적이 있는 이 두 입자는 서로 떨어져 있어도 얽혀 있는 것처럼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이런 현상을 말해요. 


쉽게 예시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이 노란 입자하고 이제 여기 붉은 입자가 있는데 이 둘이 이제 양자 상태처럼 아주 미세한 색의 입자들입니다. 
근데 이 두 입자가 양자 얽힌 상태에 있다고 했을 때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면 이 두 입자를 각각의 상자에 한번 넣어보도록 하자고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이 두 상자 중 어느 상자에 노란 입자가 있고 어느 상자에 붉은 입자가 있는지 이제 알지 못하는 겁니다. 
왜냐 가려져 있기 때문에 이제 이게 우리의 상식이지만 지금 여기서는 그게 아니고 이 두 입자는 관측되기 전까지는 중첩 상태로 있기 때문에 붉은 입자일 수도 있고 노란 입자일 수도 있고 이제 결정되지 않았다 비결정론적인 거예요. 
신기하죠? 그래서 확률 상태로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쪽 상자를 딱 열어서 관측을 하는 순간
이 입자가 노란 입자로 이제 딱 성격 규정이 된다면 동시에 바로 저 상자 속에 있는 입자는 무조건 붉은 입자로 결정된다는 거 이게 양자 얽힘이라는 것이고 이제 양자 역학에서 기본이 되는 원리인데 우리의 일반 상식에서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죠. 


그리고 이 두 상자의 거리를 심지어 십만 광년이나 떨어뜨려 놓았다고 이제 해볼 때 여기서 그러면 양자 얽히는 현상이 발생하느냐 예를 들어 한쪽 상자 속에 있는 양자의 입자를 탁 하고 관측하는 순간 이것이 하나의 성격으로 확정되면서
나머지 상자가 십만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데도 동시에 결정이 되느냐 그렇다면 광속을 뛰어넘어서 빛의 속도도 빠르게 서로 정보를 주고 받았다는 얘기가 되니까 엄청난 이익이 될 텐데 이 양자 역학 세계관에서는 이제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전제를 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이 현상은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다시 말해서 광속보다 빠르게 정보 전달이 이루어진다는 얘기가 되니까 이거 자체가 엄청난 충격이고,
아인슈타인의 특수성대성 이론에 위배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이론에 따르면 빛보다 빠른 물질이 있을 수가 없는 거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 양자 역학의 세계관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잖아요. 
그리고 지금의 이런 내용들이 양자 역학에 대한 코페나간 하파의 해석이기 때문에 대개는 이제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해석은 인과율에 따라 이 세계를 설명할 수가 없고 확률이 기대어 있다는 게 이제 특징이잖아요.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코펜하겐 해석에 따른 양자 역학을 굉장히 싫어했어요.


그는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을 하면서 확실하게 이 세계관을 설명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이런 불완전한 이론을 가지고서 얘기하는 건 잘못됐다 이렇게 이제 입장을 취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과학사에서 그 유명한 이피아 역사를 발표하는데 여기서 이 pr이란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로젠의 이름 첫 글자를 딴 거예요. 


어쨌든 이 논문을 통해서 그는 양자 얽힘에 대한 이런 해석이
국소송의 원리에 위배된다고 지적을 하죠. 
여기서 국소송의 원리란 떨어져 있는 두 물체가 그 거리로 인해서 곧바로 상호 작용할 수는 없다는 원리입니다. 


이게 이제 고전 역학적 세계관에서의 기초 원리이기도 한데 즉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정보를 주려면 반드시 그 사이에 공간을 매개로 해서 정보 전달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얘기죠. 


하지만 코페나겐 해석에 따른 양자 역학은 이러한 국소송의 원리에 위배되므로 완전한 이론이라 할 수가 없고, 따라서 아인슈타인은
이 두 입자 사이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그에 대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숨겨진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는 이 변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코페에겐 해석이 오른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라고 주장을 했던 것이죠. 


그렇다면 왜 아인슈타인은 이페아 역설까지 발표를 하면서, 이렇게 코페나겐 학파의 해석에 따른 양자의 역할과 반대를 했던 걸까요?
그는 확률에 기초해서 이 세계를 분석하는 이런 행위 자체가 믿음직하지 못하다고 하는, 아까 말씀드렸던 그런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반대로 고전 역학적 관점, 즉 인간론적으로 이 세계를 정밀하게 다 해명하고 분석할 수 있을 거란 그런 믿음을 자기 철학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아이슈타인의 이 이피알 역설과 코펜하겐의 해석에 따른 양자 역학의 이 두 이론은 서로 양립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는데 그러던 중 북 아일랜드 출신의 과학자 존 스튜오트 벨이
아이슈타인의 입장이 옳음을 입증을 한번 해보려고 나름의 부등식을 하나 만들어서 발표를 하는데, 이게 그 유명한 벨의 부등식입니다. 


과학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다 아실 거예요. 
여기서 이 부등식이 실험을 통해 입증이 된다면, 아인슈타인의 논리가 맞게 되고, 양자의 역할은 이제 틀리게 된다 이렇게 이제 정리가 되는 거죠. 


그런데 정작 이 부등식에 대한 실험은 이 당시엔 제대로 수행이 되질 못해요. 
그래서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 있다가,
1982년 알렉 아스페가 실험을 통해서 베렉 부등식에서 위반된 내용들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리 하여 과학사에서 오래된 이 논쟁은 종식되고, 양자 역학이 옳았음을 확인하게 되죠. 


이렇게 양자 역학의 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인과율에서 벗어난 그런 현상이 존재한다는 건데, 마찬가지로 융이 말하는 이 동시성 현상 역시도 인과율에서 벗어난 현상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는, 이 아까 본 저 양자 얽힘 현상과 스웨덴 브로커의 동시성 현상,
이 둘 사이에서도 이제 저런 공간을 매개로 하지 않으면서 정보가 교환되는 그런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이러한 유사성은 지금 우리만 느끼는 게 아니고, 1945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니, 이런 이유로 해서 그는 융의 동시성 개념을 물리학적으로 지지하려고 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과시광선이라 해서, 대략 380나노미터에서 칠백팔십나노미터의 범위를 파장으로 가지는 이 전자파 외에는 보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세계가 진치단 세계, 있는 그대로의 세계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의 세계, 이를 실제라고 하는데, 본이 이것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고 베르나를 데스파냐는 주장이기도 했습니다. 


앞서 소개해드렸던 아스페이 실험에 직접 참여했던 또 다른 과학자가 바로 이 베르나르테스 파냐이고, 제가 상당히 관심을 가지는 과학자이자 철학자이기도 한데, 그는 신비를 비논리적이고 비가용에서 벗어나 있다는 이유로 해서,
제거해야 할 그런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즉, 과학은 존재의 본성에 대해 확실하게 드러낼 수 없으므로, 오로지 이 영역에 의지해서만 인간과 세계의 실체를 파악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필요에 따라서는 신비한 것들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을 한 것이죠. 
또 데이비드 본과 같은 이런 인물은, 인간이 우주의 특정 처함만 보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이 세계 속 모든 것들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라고 하면서, 이 우주에는 나름의 숨겨진 질서가 있고,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다고 해서, 또 동시성 이론하고 비슷한 입장의 우주론을 펼치기도 했죠. 


그리고 불교의 화엄 사상에 또 보면 일찍 딱 다지길이라 해서 하나 속에 전체가 들어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들어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를 이제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 한 송이의 꽃이 꺾이는 소리에도 전 우주가 진동한다 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제 사상을 학자들은 융의 무의식의 동시성 현상이나 양자 역학과 관련 지어 논의하기도 하고요. 


또 불교하고 불교의 전체적인 철학적 세계관과 양자 역학적 세계관을 비교 논의하는 일들도 많이 벌어지거든요. 
다음에는 이 주제를 가지고도 제가 한번 강의를 해드릴 텐데 이런 모든 것들이 어쨌든 우리가 상식으로 여겨왔던 그간의 과학적 세계관 그러니까 인간으로 모든 것이 해명될 거라는 그런 과학적 세계관으로는 이 세상과 우주에 대한 실체를 다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논의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꼭 볼 수 있겠는데요. 우리는 이러한 학술적 지식 없이도 이미 예지몽이나 또는 불기라는 예감이 여지없이 드러맞는 현실 속 경험을 통해서 과하게 설명 못하는 세계가 있음을 막연하게 지감한 채로 살고 있기도 합니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과율에 따른 과학적 분석이 인간 문명을 이루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점을 그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또 이건 이것대로 열심히 발전시켜 나가야겠으나 이러한 과학적 관점만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는 독전론에 빠지는 순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현상들 지금 우리 눈에는 신비한 것처럼 보이지만
또 잘 알고 보면 인간의 고유한 능력일 수도 있는 그런 나름의 어떤 동시성 같은 현상들 이런 것들을 그저 미신으로 치부한 채 분석할 기회를 상실시켜버린 이런 우를 범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니냐 하는 것이고 따라서 베나르테스파냐의 주장처럼 고전 역학적 세계관에 경도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인과율에 위해되는 현상을 무조건 무시하기보다는 보다 열린 자세로 접근하고 관찰해보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을까 라는 통사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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