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우선 어머니 아버지 말 절대로 듣지 마라.
어머니 아버지 말 들으면 너희들 개고생해가 여기 들어온 거 거기서 거기로 끝난다.
어머니 아버지들이야. 고도 압축 성장기에 화려하고 찬란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저도
그 끝자락보다는 약간 앞이겠죠. 중간에서 끝자락 사이에 있었던 사람인데 대학만 졸업하면 얼마든지 길이 열려 있었고 그래서 좋은 대학 나와서 삼성 현대 같은 대기업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고시 공부를 하거나 이렇게 해서 정답이 딱 있는 그런 삶을 사는
부모들의 이야기는 이제는 전혀 맞지가 않다.
그런 고도 압축 성장기는 끝났고 이제 세상은 이미 저성장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엄청난 전환기에 살고 있는데 낡은 패러다임에 빠져 있는 어머니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거는 이거는 땅 망하기 좋은 거다.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 거
스타트업 도전하고 싶은 거 일단 질러보면 거기에 답이 상상하지도 못한 것에서 있을 수 있다.
저는 사실은 하원 강사로 본격적으로 살게 된 거는 전혀 뜻밖의 어떤 삶의 과정에서 학원 강사의 어떤 삶을 살게 됩니다.
91년 9월 15일이었는데요 이날은 이제
저한테는 엄청난 충격적인 날입니다. 교회 갔다가 평소에 이제 그 당시에 집에 차가 한 대 있었는데 일요일 날은 와이프를 줬는데 그날따라 피곤해서 제가 수업하러 가면서 제가 운전하고 갔어요.
그리고 이제 와이프하고 아들 딸 둘이가 태어나 있었는데 택시 타고 예배 마치고 집에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이제 아들이 일주일 만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와이프하고 딸은
한 달 만에 기적적으로 깨어났어요. 근데 이제 그 딸이 또 그다음에 92년 6월 11일 날 죽었어요.
그래서 9개월 사이에 아들하고 딸하고 둘을 잃어버린 거죠.
처음에는 아들을 잃었을 때는 엄청나게 힘들었었는데 두 번째 딸이 딱 죽고 나니까 망해도 다 망했구나
이제 더 이상 망할 게 없다는 생각이 딱 들더라고 그래서 새벽 4시 반에 죽었는데 오후 3시에 청원에 있는 공원묘지에 갖다 묶고 돌아와서 너무 힘들어서 조금 잤어요.
자고 생각해보니까 수업해야 되겠다는 생각밖에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그날 저녁 7시부터 제가 수업을
진짜 본격적으로 했어요. 어떻게 했냐면 일주일에 60시간을 강의한 거 일주일에 60시간이면 학교 선생님들의 강의의 4배입니다.
근데 여기에는 설명회나 이런 건 다 빠져 있는 거고요.
그래서 내가 한때 계산을 해보니까 6만 5천 시간 이상 강의를 했더라고요.
그러니까 강연 이런 건 다 빼고 학생들 수업으로만 이게 학교 선생님으로 계산해 보니까
한 109년 정도 강의를 했더라고 고등학교 열다섯 시간 강의하는 선생님을 기준으로 해보니까 그렇게 해서 이제 죽으라고 가기만 했던 거예요.
살아남기 위해서 애들에 대한 읽기 위해서 그리고 이제 93년에 한 놈 태어나고 96년에 한 놈 태어나고 해서 지금은 1남 1년입니다.
96년 둘째 태어나고 나서 약간 안정이 되면서 어떻게 살 거냐 하는 문제가 크게 다가온 겁니다.
그걸 어떻게 살 거냐라는 문제에 대한 답이 결국은 창업이었어요.
저는 어떤 계기에서 창업은 할 수 있지만은 궁극적으로 창업에서 성공하려고 하면 또는 창업이 제대로 되려고 하면 결국은 무엇을 할 거냐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 거냐가 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 우리 인생은 딱 한 번 주어졌는데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얼마나 많은 걸 얻느냐 이것보다는 결국은 마지막 죽는 순간에 내가 내 관 뚜껑을 닫을 때 자기가 알겠죠.
물론 뻔뻔한 사람들은 자기 잘 살았다고 송덕비 막 쓰고 난리 치겠지만은 저는 생각을 해보니까
잘 살았다라고 이야기할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게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버나더시처럼 머무머뭇거리다가 내 인생 이렇게 끝날 줄 알았다 그 정도면 꽤 양심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니까 이 어떻게 살 거냐 하는 문제는 정말로 중요한 문제죠.
이제 저는 살아남고 나서 생각을 해보니까 일단 이 운명적인 고통에서는 벗어났지만은
여기서 이 과정에 계속되는 윤리적인 고민이 하나 있었어요.
어떤 윤리적인 고민이 있었냐면 손 선생하고 학생하고 사이에는 목숨을 다해서 가르치고 충분한 대가를 받았으니까 이건 개인 윤리적으로 선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내가 여기서 한 10년간 한 행위는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거죠.
결국은 강남에 부잣집 애들 여기 좀 밑에서 헤맨 놈들을 여 위에 공부는 잘하는데 돈이 좀 부족한 애들보다 내가 수단과 방골을 가리지 않고 여기로 끄집어 올렸다.
그러면 얘는 밀린 거잖아요.
이런 불평등한에서 희생당하는 애들까지도 강의를 들을 수 있는 대중 강의 한 2, 3만 원 원이면 들을 수 있는 대중 강의로 인생을 바꾸자고 생각 서른여섯 살에 그것도 96년에 4, 5천이면 상당히 큰 돈입니다.
근데 대중 강의하면 얼마 벌지는 몰라요.
그러나 이 문제 해결해야 되겠다. 그렇게 해가지고 97년 2월 2일 날
제가 대중 강의 또 학원가에 나가니까 아무도 안 받아줘요.
너 들어본 적 없다고 안 써주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제가 백을 써서 들어갔어요.
아는 사람 아는 사람 전화가 두세 통화밖에 안 옵니다.
10개 반을 개설했는데 일곱 개 반은 한 명도 등록을 안 했어요.
세 개 반에 두 명 세 명 세 명 제가
한 5천 벌던 사람이 딱 이렇게 해서 첫 달 월급 삼십이만 원 갖다 주니까 이번에는 마누라가 정신을 차렸는지 너 돌았네 이러더라고요.
근데 저는 어떻게 살 거냐 하는 걸 미루고 있었던 거고 하여튼 이제 둘째 아들도 태어나고 해서 제대로 이제 윤리적인 고민을 좀 해결하면서 떳떳하게 살려고 선택한 겁니다.
저는
학생 8명밖에 없어도 하나도 힘들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기적같이 이 8명의 학생이 5개월 만에 2천 명으로 그다음에는 5천 명으로 터져버린 거예요.
그렇게 해서 월 강사료가 한 4억 정도 들어왔어요.
그러면 월 45억을 벌면 창업할 이유가 없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창업하겠습니까? 저도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왜 그때 미친 자꾸 온라인 강의하려고 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 거 지금 같으면 지금 나의 이 보수적인 태도 같으면 저 절대로 안 했어.
돈은 그냥 깔꾸리로 꺾는데 무엇 때문에 제가 메가스타디란 온라인 회사를 만드는 줄 아십니까? 99년입니다.
정확하게 강남에 가서 대치동에서 새벽 1시에 강의를 딱 마쳤는데 학부모가
케이크를 들고 온 거예요. 그런 일이 흔히 있거든요.
옆에 따님하고 딱 둘이 왔더라고. 이 어머니가 뭐라 그랬냐면 선생님 선생님 때문에 제가 너무나 행복해졌고 정말 저는 너무나 큰 덕을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선물을 가져 그러면 딸 성적이 올랐던 게 뻔하죠.
따님이 성적이 많이 올랐겠냐 성적이 많이 올랐 것도 있지만은
우리 형편에 대치동에 이사 오기 어려웠는데 선생님 강의 꼭 그때 저 강의를 들으려면 하루 이틀씩 줄 서야 됐거든요.
강의도 듣고 모험을 해가지고 은행 대출을 해가지고 엄마 아파트를 샀는데 6개월 만에 3억이 올랐대요.
자기는 40만 원 세 달짜리 그 당시에 수업료가 40만 원이었거든요.
40만 원 수업료 썼는데
3억을 벌었으니까 이게 다 선생님 때문에 내 때문이 아니죠.
그 당시에 imf 이후에 회복되는 것도 있고 대치동 사교육 현상으로 한 때 아파트 값이 폭등한 적이 있어요.
너무 고맙다고 케이크를 주고 가는데 그날 밤에 제가 뒤통수를 크게 맞았다는 느낌이 들었어.
내가 또 나쁜 놈이 됐구나.
내 의도와 관계없이 대치동 사교육 현상에 해서 아파트값이 올라가는 거는 이 사회 바람직하지 않은 거잖아요.
이런 윤리적인 문제는 해결했지만은 또 내 강의가 사교육의 지역적 불평등을 심화시켰구나.
그러면 이 지역적 불평등 계층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했다 치면 지역의 불평등은 어떻게 해결할까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강의가 뭘까 거기서 내린 결론이 홈쇼핑을 보다가
아 백화점이 집으로 오구나. 그렇다면 학생이 학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학원이 학교가 집으로 오는 시대가 충분히 열릴 수 있겠구나.
그래서 그 해에 제가 유니텔이라는 데서 그 당시 천리안 유니텔 시절 있었죠 거기에서 음성 강의를 잠깐 했습니다.
근데 생각보다 반응이 크게 오는 거예요.
그래서 2천년에
메가스타디라는 기업을 창업하게 된 겁니다.
처음에 동영상 강의를 창업하고 1년 뒤에 한 8개월 뒤에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이 동영상 강의를 어떻게 만들까를 가지고 엄청나게 논란이 심했어요.
동영상 강의 만들려고 하니까 교육공학과 애들을 많이 채용했어요.
이화여대 한양대 출신들 자기들 다 수업해서 만들어 봤대요.
동영상 강의로 효과가 있는 게 15분에서 20분 넘어가면 효과가 떨어진대요.
강의를 15분에서 20분 해야 되고 플래시도 넣어야 되고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
근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제가 이거 50분 강의 하라면 정말 짜증 나거든요.
한 1시간 반에서 2시간 해야 내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는데 강의 분위기 좀 올라가가지고 뭔가 감동도 되고 전달이 되려고 하는 데도 1시간 걸리는데
어떻게 개념 하나 설명하려 해도 20분 걸리는 것들도 많은데 그래서 내가 안 된다.
최소한 한 시간짜리는 해야 된다니까 여직원들 그 젊은 직원들 대학가 졸업하는 애들 대표님 이거 기본이 안 돼 있습니다.
하면서 동영상 강의의 본질을 모르셔서 그 죽도록 싸우다가 나중에 안 되겠어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현장을 있는 그대로 하고 차라리 강의 시간은
강사가 원하는 대로 다 맡기자. 미쳤다는 거야.
맨날 싸우다가 할 수 없어. 주식 수대로 해야 되니까 내가 결정한다.
내가 70% 가지고 있었으니까 주식회사잖아요.
근데 사실은 그렇게 해서 현장 강의를 그대로 라이브로 옮긴 게 저희 회사가 상당히 한번 도약하는 계기가 됐고요.
그런데 그런 데까지는 내가 능력이 있는데
지금 사교육의 변화에서 전혀 새로운 쪽으로 전환을 못하고 있는 게 한계인 거예요.
그래서 2~3년 고민하다가 최근에 내린 결론이 고민하다가 고민만 하다가 인생 끝날 것 같아서 재작년에 작년이죠 작년 재작년부터 고민하다가 작년에 뭘 1차 고민했냐면 빚부터 좀 갚아야 되겠다.
저는 사회에 빚을 많이 지고 있다고 생각해.
저는 대한민국에서 물론 이재용 이런 친구가 훨씬 저보다 돈을 쉽게 벌었겠지만은 일반인들 중에서는 저만큼 돈을 쉽게 번 사람은 없어요.
너무 쉽게 벌었기 때문에 그러면 타인에 대한 빚이잖아요.
그래서 재단을 우선 하나 만들자. 그리고 이때 죽은
우리 자식들이 큰 뜻을 가지고 이름을 지어줬거든요.
그중에서 우리 딸 이름이 윤민인데 이 윤민이 무슨 뜻이냐면 온 백성을 윤택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 아들은 광욱인데 널리 밝은 빛을 비추어서 온 백성을 윤택하게 하라.
그래서 얘들 그래도 내가 이름은 이 세상에 남겨줘야 되겠다.
해서 재단 이름을 윤민재단이라고 만든 겁니다.
그래서 일단 빚을 하나 갚는 걸 먼저 했고
최근에는 결론을 내려보니까 아직은 쓸 만한 것 같아요.
제가 한 3년 고민해 보니까 그래서 저도 여러분과 같이 최근에 올해 1월부터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어떤 도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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