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 콜로세움 같은 것들이 들어가기도 하고, 시대별 불가사이를 따로 언급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세계 불가 사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원조는 기원전 2세기에 살던 그리스인 안티파트로스입니다.
안티파트로스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닌 여행가이자 시인이었는데요.
이 사람이 살던 시기가 마침 딱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에 힘입어 아나톨리아와 이집트, 레반트, 레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인더스강 유역까지
그리스인들의 문명권으로 통합되어 있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안티 파트로스의 원조 세계 7대 불가 사이의 라인업은 헬레니즘 세계 안에 동시에 존재하던 7개의 거대 건축물들로 이루어져 있죠.
안티파트로스의 여행을 상상해 보면 불가 사이의 원조 맛집 우대 헬레니즘 세계 7대 불가 사이에 대해 간단히 알아봅니다.
안티파트로스가 살던 시대 7대 불가 사이의 멤버 중 가장 신참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알렉산드리아 등대 일명 파로스의 등대라고도 불리는 160미터의 거대 구조물로 전 세계 모든 등대들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건설된 거대한 등대죠.
지붕에는 이시스 여신의 신상이 조각되어 있었고, 꼭대기층에는 거울이 있어서 불을 피운
이걸 반사시켜 선박들을 유도했는데 이게 사십 킬로미터 밖에서도 보였다고 합니다.
워낙 그 규모가 기 때문에 기단부에 수많은 방들이 있어서 등대를 지키는 병사들이 여기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고요.
알렉산드리아는 이름 그대로 알렉산드로스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기원전 4세기에 건설한 그리스식 항구 도시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가 됐는데요.
이집트의 해안선이 그리스와는 달리 너무나 평탄했던 바람에, 그때까지 없던 거대한 등대가 필요했습니다.
때문에 알렉산드리아 앞바다에 있는 파로스라고 하는 작은 섬을 제방으로 연결해 그 동쪽 끝에 등대를 건설하니, 그게 바로 알렉산드리아 등대, aka 파로스의 등대예요.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는 이후에도 거의 1천 년간 사용돼,
이집트가 이슬람에 정복된 뒤인 796년에 꼭대기 부분이 파괴된 걸 시작으로 연이은 지진으로 훼손되어 14세기에 이르면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고, 1480년에는 등대의 잔해를 이용해 해안 요세가 만들어지면서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두 번째 불가 사이는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보다 살짝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로도스의 거상입니다.
아이디아의 남동부 로도스 섬에 있던 청동거상으로,
높이가 30m에 이르렀죠.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항구의 양쪽 끝에 발을 딛고 서 있었다는 전승이 유명한데요.
알렉산드리아 등대와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고 난 직후에 만들어, 로도스 섬은 그리스인들의 도시 국가로, 예로부터 무역의 요충지이자 용병의 산실로 유명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이 분열되고, 계승자들끼리의 전쟁이 일어나자, 로도스 섬은 당연하게도
모든 세력들의 목표물이 됐죠. 그런 상황에 마케도니아를 근거지로 하는 안티고노스의 군대가 아이디아의 연안과 해상에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장악하며 공격해 오게 되고, 로도스는 10년이 넘는 항전 끝에 이를 막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이후 이 승리를 기념하고, 태양신 헬리오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로도스 항구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모도스의 거상이에요. 그러나 거상은 안타깝게도 56년 만에 지진을 쓰러져 버리게 되는데요.
이에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신탁을 받으니, 다시 세우지 말라고 그래서 그냥 쓰러진 채로 800년 동안 방치되게 됩니다.
그리고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 제국이 로도스 섬을 정복한 기원 후, 6백4십5년에, 칼리파 무아위아 1세에 의해 유대인 상인들에게 고철로 팔려나가며 완전히 사라지게 됐죠.
세 번째 불가 사이는 로도스의 거상으로부터 조금 더 이른 시기인 기원전 4세기 말에 만들어졌습니다.
기독교 신약 성서에도 등장하여 널리 알려진 아르테미스 신전 바로 그 주인공이죠.
너비 약 65m, 길이 약 20미터의 거대한 그리스식 신전으로, 이름 그대로 아르테미스 여신을 모시는 성스러운 장소였습니다.
기원전 9세기에 건립된 에페소스는 에게해 동부 연안에 위치한
그리스인들의 도시로, 아르테니스를 수호신으로 삼아, 기원전 6세기에 첫 번째 신전을 지었는데요 이후 홍수로 한 번 파괴됐다 재건되었고, 화재로 다시 한 번 파괴되었다 또 재건되었습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알렉산드로스 제국이 분열하고, 로마가 지중해를 제패한 뒤에도 별일 없이 잘 살아남았으나, 기독교가 등장하여 세를 불리면서부터 쇠퇴하기 시작, 기원 후 3세기에는 고트족의 침략으로 물리적으로 파괴됐죠.
이때까지는 아직 기능이 남아 있어서
초기 교회의 예배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후 6세기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소피아 대성당을 재건할 때, 떼어가서 재료로 사용하면서 약간의 흔적만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네 번째 불가 사이는 마우스 로스의 영묘 아르테미스 신전과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4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거대한 구조물입니다. 그 둘레가 120m를 넘는 사각형의 무덤으로, 오늘날 그 정확한 형상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높은 기단 위에 36개의 기둥과 피라미드, 지붕이 얹어져, 꼭대기에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 조각상이 있었다고 전해지죠.
이 무덤의 주인인 마우솔로스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태수로, 아나톨리아의 남서쪽 해안 카리아 지방을 통치하는 지방의 실권자였는데요 여동생이었던 아르테미시아 2세와 결혼하여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우솔로스의 죽음을 너무 슬퍼한 아르테미시아가 장인들을 불러서 그 묘를 만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할리카르나소스에 지어진 마우솔로스의 영묘였어요.
영묘는 아르테미시아까지 죽은 다음에 완공돼서 부부가 함께 묻혔고, 이후로도 천 년이 넘게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웅장한 무덤에 대명사로 전해져 내려오며,
이후 마우솔레움이라는 단어가 아예 영묘를 뜻하는 단어로 굳어졌죠.
그러나 이 무덤은 대략 14세기가 되기 전에 지진으로 파괴됐습니다.
도굴되거나 성벽의 건축 자재가 되어 흩어졌어요.
무덤을 장식하던 조각 일부만이 영국의 대형 박물관 등에 보관되어 있죠.
다섯 번째 불가 사이는 마우솔로스의 시대로부터 한 세기 전에 만들어졌습니다.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안에 있던 제우스 신상으로,
높이가 13m나 되는 거대한 좌상이었죠.
삼나무를 조각했니 그 위에 황금과 상아를 덮은 형태의 유리로 만든 로브를 걸치고 있었으며, 오른손에는 승리의 여신 니케가, 발치에는 황금으로 된 독수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기단과 왕좌는 흑단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신화적인 내용들이
새겨져 있었고요. 도시 국가 올림피아는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이 열리는 곳이었는데요 라이벌이였던 아테네가 상공업으로 잘 나가자, 우리도 질 수 없다며 조각가 페이디아스에게 의뢰해 이 신상을 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800여 년 뒤, 기독교가 주류 종교로 치고 올라오면서 신전이 폐쇄, 신상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지게 되고, 100여 년 뒤 지진과 화재가 콘스탄티폴리스를 덮치면서 파괴되어 지금은 실물을 볼 수가 없죠.
여섯 번째 불가 사이는 메소포타미아에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을 정복하고 새로운 수도로 삼은 곳 바로 바빌론의 말이죠.
안티파트로스가 본 것은 바빌론의 성벽이었는데요 이 가운데서도 왕궁의 동쪽에 만들어진 이 슈타르의 문은 고귀한 보석 라피스, 라줄리를 재현하기 위해 푸른색의 유약을 발라
돌을 구워내 지어졌고, 성문과 지붕은 백향목으로 깎아 만들었습니다.
기둥에는 마르두크와 아다드, 이슈타르신을 상징하는 무슈슈, 소, 사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운으로 향하는 길에도 성벽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는데, 이 벽면에는 황금색 벽돌로 조각돼
예순 마리의 사자들이 아빠를 내밀고 있었고요.
이슈타르의 문은 기원전 7세기 말, 신 바빌로니아 제국의 이대 왕이었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에소포타미아 전체를 평정한 뒤, 바빌론의 영광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100여 년 만에 등장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 의해 제국이 멸망하면서, 퀴로스 2세의 군대가
이 문을 통해 들어와 바빌론을 함락시켰죠.
이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쳐들어오며 바빌론의 주인은 다시 한 번 바뀌지만, 그로부터 한 세기 정도가 지난 시기의 안티파트로스가 봤다고 하니, 헬레니즘 시대에도 바빌론의 상징으로 남아 있었던 듯 싶습니다.
이후 수백 년간 잊혀지고, 바빌론 성벽이 버려지면서 이슈타르의 문도 무너져 폐허가 되어 버렸죠.
네브카드네자리 이세가 건설한 불가 사이는 하나 더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바빌론의 공중정원. 여러 층의 테라스 형식으로 지어진 거대 구조물로, 사막에서 보기 힘든 여러 식물들을 층마다 심어, 멀리서 보면 마치 산과 같이 보였다고 하죠.
유프라테스 강의 강물을 끌어와 인공적인 폭포수를 만들어내 각층으로 공급했다고 하는데, 정확히 어떤 원리로 이게 가능했는지
아직까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레브카드네자르 2세가 아치리아를 멸망시킬 때, 이웃나라 메디아와 힘을 합치기 위해 메디아의 공주 아미티스와 결혼했는데요 아미티스가 고향에서 보던 산악지대의 풍경을 그리워하자, 사막 한가운데에 이런 엄청난 걸 지어 전해져요.
불가사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아무런 물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실존 자체가 의문인 상황인데, 언젠가 그 증거가 밝혀질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안티 파트로스가 기록한 7대 불가 사이 가운데 마지막은 다른 모든 불가 사이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오래된 기원전 26세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으로부터는 약 4천6백여 년 전, 안티파트로스의 시대로부터 약 2천300여 년 전이니까 사실상 그때도 이미 초고대 건축물이었던 거죠.
다름 아닌 쿠푸 왕의 피라미드. 이집트 피라미드 중 가장 거대해서 대피라미드라고도
불립니다. 밑변의 길이가 약 230미터, 높이는 약 147미터로, 3천8백 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본래는 석회암으로 마감이 돼 있어서 매끈한 흰색이었어요.
꼭대기에는 황금으로 덮인 마감석이 올라가 있었는데 피라미디온이라고 불렸고요.
내부에 있는 두 개의 빈 공간은 오래전부터 그 존재가 알려져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정확한 용도를 알 수가 없는데요.
최근에 숨겨져 있던 다른 공간들의 존재가 확인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 시대가 저물어 가면서 점점 버려진 유물이 되어 가다가 알렉산드로스의 시대, 로마 시대를 거치며 다른 신전을 위한 채석장처럼 사용되기도 했고 중세의 이슬람 시기로 들어서면서 고굴 등 여러 수난을 당하기도 했지만 워낙 거대하고 튼튼한 구조물이었기에 지금까지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대피라미드는 현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건너편에 기자라는 도시에 있는데요.
사실 안티파트로스가 언급한 불가사이들 가운데 가장 오래됐으면서도 유일하게 오늘날까지 거의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끝한 왕이라고 할 수 있죠.
아, 지금 기준으로도 압도적인데 기원전 2세기에 살았던 안티파트로스가 볼 때는 어땠을까요? 사실 안티파트로스의 시에서는 알렉산드리아 등대가 없고 공중정원이 들어가 있었는데요.
안티파트로스 본인이 알렉산드리아의 과지진이었어서 매일 보니까 별로 놀랍지 않아 그냥 제외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오늘날 최신 공법으로 지어지는
거대 건물들 우리도 매일 보니까 별로 대단하다 생각지 않는데 수백, 수천 년이 지나면 불가 사이라고 일컬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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