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엔 넓고 기름진 평야가 존재하지 않았다.
평야를 타고 흐르는 거대한 강도 없었다.
국토의 칠십오 퍼센트 이상이 험준한 산으로 이루어져 있는 산악 국가 그리스.
그러나 이곳에서 이룩한 문명은 현대인에게 가장 많은 유산을 남겼다.
독특한 형태의 국가인 폴리스가 생겨났고,
인류 최초의 투표가 행해졌으며,
철학과 문학, 예술의 눈부신 발전을 이룬다.
그리 넓지도 않은 척박한 땅 그리스.
어떻게 현대 서구 문명의 뿌리인 그리스 문명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유럽 대륙에서 꽃힌 그리스 문명 아테네는 그리스 문명의 상징이다.
아크로폴리스
도심 중앙에 우뚝 솟아 있어 고대 아테네가 문명의 도시였음을 상징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에 세워진 웅장한 건축물 파르테논 신전.
세계 문화유산 일호이자 고대 그리스 문명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최고급 대리석을 동그란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 올린 기둥은 그 높이가 십여 미터
그 규모만으로도 과거 화려했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거대한 규모의 화려한 색까지 입혀져 있었던 아크로폴리스
그 중심에 있던 파르테논 신전엔 머리가 천장까지 닿았던 십이미터 높이의 아테나 신상이 세워져 있었다.
험난했던 그리스 역사 속에 지금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지만, 파르테논 신자는 영화로웠던 고대 그리스 문명을 기록보다 더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파르테논 신전에 새겨져 있던 조각에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모습도 기록돼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신전으로 향하는 제례 행렬의 모습이다.
신에게 제물로 바칠 소와 양을 끌고 간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1년 내내 신을 위한 제례 의식이 끊이지 않았다.
그만큼 신은 그들의 삶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부조는 그리스 남자들이 모여 토론하는 모습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유난히 토론하는 걸 좋아했다.
시민들이 매일 모여 뜨거운 토론을 벌였던 곳은 도심에 자리한 너른 광장인 아고라.
아고라는 원래 시장이었다. 기둥이 길게 늘어서 있는 이 건물은 상점이 들어서 있던 주랑이었다.
상점에는 옷감과 음식을 비롯해 책, 도자기 등 온갖 다양한 물건들이 전시식돼 있었다.
그런데 시장이었던 아고라는 왜 토론의 광장이 됐을까? 고대 아고라토 옆에 자리하고 있는 이 재래시장은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 중에 유난히 남자들이 많다.
남자들이 장을 보는 건 고대 그리스의 풍습이었다.
바깥 활동이 극히 제한돼 있던 여자들과는 달리 남자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집 밖에서 보냈는데 그들이 모인 곳이 시장이었다.
그들은 시장에 나와 장도 보고 삼삼오오 모여 토론도 했다.
아고라에는 주랑과 함께 특별한 장소들이 있었다.
주랑 바로 앞에 위치한 광장에 연설대가 있었다.
누구나 이곳에 서서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국회의사당인 오백인단 회의소도 있었다.
추첨으로 뽑힌 시민대표단 오백명이 모여 회의를 하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시민들이 재판관이 돼 재판을 진행하던 시민 법정터도 있다.
수많은 상점이 들어서 있던 주랑이 길게 서 있고 그 앞으로 연설 때가 있었으며 주랑 옆으론 시민 법정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아고라는 시민들이 모여 자유롭게 토론을 벌이고 정치 활동을 하던 시민 광장이었다.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가 있었던 아테네 이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에서만 볼 수 있었던 작은 도시국가 콜리스다.
고대 그리스에는 이러한 폴리스들이 수백여 개에 이르렀다.
그리스에서는 왜 이런 독특한 형태의 도시국가가 등장한 걸까? 그리스에도 강성한 왕국이 존재했었다.
펠레포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미케네 왕궁 거대한 왕궁터가 지금도 남아있다.
이십 톤이 넘는 돌들을 견고하게 쌓아 올린 성곽엔 강성했던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인 호메로스는 미케네를 황금으로 가득한 곳이라고 했다.
실제 미케네는 비씨 천사백 년부터 비씨 천백년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왕궁타다.
번영을 상징하듯 왕궁도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왕궁 아래쪽에 동그랗게 돌벽으로 에워싸여 있는 곳은 무덤이었다.
왕족들이 묻혔던 원형 에이 무덤에서는 지난 십구세기 발굴 당시 무려 십칠 킬로그램에 달하는 황금이 나와 호메로스의 기록이 사실임이 밝혀졌다.
황금은 번영의 상징이자 교역의 흔적이다.
어린 왕족의 몸을 덮었던 황금수이와 죽은 왕의 얼굴에 씌웠던 황금 마스크도 여러 점 나왔다.
문명을 꽃 피우던 미케네는 비씨 천백년 무렵, 최후의 순간을 맞게 된다.
도리아인의 침략에 왕국은 무너지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무려 삼백여년간 민족의 대이동이 이어졌다.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진 암흑기였다.
국토의 칠십오 퍼센트 이상이 산으로 돼 있는 산악 국가 그리스에서 새 정착지를 찾아 헤맨 고대 그리스 사람들.
골짜기마다 사람들은 모여들어, 높고 험한 산은 도시와 도시를 가르는 국경이 됐다.
아테네도 수백여 개 도시 국가 중 하나였다.
도시 국가를 세우면서
그들은 먼저 도심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아크로폴리스를 지었다.
도시국가 코린트에도 아크로폴리스의 흔적이 남아있다.
폴리스의 대표적인 구조물인 아크로폴리스는 유사시 시민들이 대피하기 위한 성이었다.
험준한 산맥에 막혀 골짜기마다 도시가 들어섰고,
그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각자 독립된 국가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최강의 군대를 가지고 있던 스파르타에도 아크로폴리스가 존재한다.
스파르타와 함께 폴리스를 대표하는 양대 세력이었던 아테네.
실제 곡물이 거의 나지 않던 아테네의 주요 농작물은 올리브와 포도.
볼리브는 메마른 자갈밭에서도 잘 자라고, 지중해 지역의 뜨거운 햇살에도 잘 견디는 식물이다.
그리스 신화에도 등장하는 올리브는 고대부터 아테네의 상징이자 신이 준 선물로 여겨졌다.
척박한 땅에서 식량 확보가 어려웠던 아테네인들은 지중해 도처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올리브유를 내다 팔고 식량을 들여왔다.
활발한 무역 활동은 상공업 발달로 이어졌고, 이는 아테네가 자유롭고 개방적인 국가로 발전하는 밑거름이 된다.
그리스 문명은 바다에서 비롯된 문명이었다.
유럽과 소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푸른 바다 베개 일개 해에 떠있는 수많은 섬과 해안가, 마을에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애계 문명이 시작된 것이다. 애계해엔 세계의 문명이 자리 잡았는데, 그 중 가장 번성했던 문명이 그레타.
그리스 남단에 위치한 그리스 최대의 섬 크레타 비씨.
이천년 무렵, 이곳엔 강성한 왕국이 존재했었다.
무성한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 크레타 문명의 중심지인 크노소스.
크노소스의 전설적인 왕 미노스 왕이 거처했던 곳으로, 그리스 신화에서는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미궁으로 소개돼 있다.
실제 미호같이 뻗은 복도에 방이 천오백여개나 됐다고 한다.
치밀한 설계와 궁 곳곳에 남겨져 있는 화려한 벽화 장식은 크레타 왕국의 번영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풍요로운 생활의 흔적은 화려한 문양의 도자기로도 남아있다.
자신들만의 문자를 가진 고도로 발달된 문명사회 그레타 사람들이 잔뜩 타고 있는 배 모양의 장식품도 있다.
그림 속에는
크레타 섬의 해안가를 항해하는 배가 그려져 있다.
고대 크레타 사람들이 탔던 배는 어떤 벨까? 한 조선소에서는 유물 속에 그려져 있던 배를 직접 복원해 놓았다.
고대 크레타의 배는 무역을 위한 상선이었다.
배의 모든 연결 부분은 줄로 고정돼 있다.
가판은 비교적 높게 올라와 있었는데, 이는 갑판 아래 물건 실을 공간을 넓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크레타의 배에서 볼 수 있는 또 한 가지 특징은 배 가장자리에 천을 대놨다는 것이다.
바닷물이 배로 들어와 물건이 상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또 배 양옆으로 대져 있는 나무는 물건의 무게 때문에 배가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견고한 상선을 타고 그들은 무역을 했다.
크레타는 동지중해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세 대륙을 잇는 무역의 거점이었다.
크레타에서 발견된 이집트 상인의 그림은 크레타가 해상왕국이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크레타를 중심으로 바다에서 시작된 애계 문명이 그리스 본토로 이어져 그리스 문명을 이룬다.
펠레포네소스 반도 북서쪽에 자리한 올림피아 겹겹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산골 도시다.
기원전 8세기 이 깊은 산중은 그리스 전역에서 온 사람들로 붐볐다.
사 년마다 한 번씩 거행되는 올림피아 제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제전에서는 제우스 신을 모시는 제례의식과 함께 운동 경기가 펼쳐졌다.
각종 육상 경기가 벌어졌던 스타디움엔 출발선도 표시돼 있다.
운동 경기도 신에게 바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운동 경기엔
모든 폴리스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었는데, 거기엔 단 한 가지 엄격한 조건이 있었다.
오직 그리스마를 쓰는 그리스 사람이어야만 했다.
때론 경쟁하고 때론 화합하던 폴리스들 중 아테네가 최강자로 부상한 건 기원전 5세기 초 아테네 북부에 위치한 테르모필레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동서양의 첫 격돌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이었다.
당시 오리엔트의 최강자였던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일세가 삼십오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해 온 것이다.
일 이차 원정의 실패에 이은 삼차 원정길이었다.
이에 맞서 삼십여 개의 폴리스들이 연합해 그리스 동맹군을 결성했다.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육지 방어에 나섰고, 아테네는 해군을 결성해 바다를 지켰다.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군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삼일째 되는 날,
육지 방어를 맡았던 스파르타군은 무너지고 만다.
테르모필레를 뚫은 페르시아군은 거침없이 아테네를 향해 진격해 왔다.
절제절명의 순간, 아테네인들은 도시를 버리고 살라미스 섬으로 향했다.
살라미스 섬은
아테네에서 동쪽으로 십육 킬로미터 해상에 떠있는 섬이다.
바다에서의 결전을 위해 페르시아군을 유인한 것이다.
페르시아군이 좁은 해협으로 들어오자, 숨어있던 아테네 함대가 그들을 포위해 공격했다.
해협에 갇힌 페르시아군은 그 자리에서 모두 전멸한다.
아테네 군 전술의 승리였다.
아테네가 기적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아테네 해군이 가지고 있던 특별한 전함 때문이었다.
노가 삼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삼단 노선이다.
일반 배에 비해 세 배나 많은 녹아 있는 것이다.
장정 백칠십여 명의 힘으로 나아가는 무서운 추진력에 강력한 무기까지 달려 있는 삼단 노선.
위기의 그리스를 구한 건 아테네의 뛰어난 해군력이었다.
전쟁의 승리는 아테네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준다.
새로운 계층이 대두된 것이다.
노젓는 사람들은 원래 사회 최하위층인 태태체층으로 정치에 참여할 만한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전쟁 승리의 주역으로 떠오르면서 아테네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계층으로 성장하게 된다.
사회 최하위층까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면서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게 된다.
고대 상점들이 들어서 있던 건물인 주랑은 지금 아고라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이곳에 고도로 발달했던 아테네 민주정치의 흔적들이 있다.
도편추방제에 쓰였던 도자기 조각들이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인물들을 적어서 냈다.
페르시아 전쟁 영웅이었던 테미스토 클래스, 그리스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키몬,
아테네의 황금기를 이끈 정치가 페리클래스 누구나 아무 거리낌 없이 당대를 주름잡던 인물을 써서 낼 수 있었다.
전쟁이나 세금 같은 사회 정치적인 현안도 시민 투표로 결정했다.
투표는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거수로 결정하기도 하고 이렇게 돌을 이용하기도 했다.
흰돌은 찬성을, 검은돌은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재판도 시민들이 직접 했다. 배심원은 추첨기를 이용해 뽑았는데 그리스 시민 누구나 배심원이 될 수 있었다.
시민 법정에 쓰였던 독특한 모양의 단지는 물시계다.
위쪽에 놓인 단지에 구멍을 하나 낸 뒤 위쪽 단지의 물을 아래쪽으로 흘려보냈다.
물이 모두 옮겨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육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졌던 변론 시간이다.
비록 여성과 노예는 참여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지만 아테네는 시민 스스로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던 민주사회였다.
민주정치의 발달로 아테네에는 새로운 문화들이 생겨났다.
활발한 토론 문화 속에 철학이 발달했다.
시민들이 모여 토론을 벌이던 아고라는 철학 발달의 중심지가 됐다.
그리스 최고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도 아고라 광장에 매일 나와 토론을 벌였다.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보편적인 진리를 찾고자 했던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플라톤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그리스 철학의 토대가 됐다.
플라톤은 철학과 과학을 가르치는 학교인 아카데미아를 세웠다.
그리스 전역에서 청년들이 모여들었고, 로마 시대에까지 그 명성이 이어져 로마 귀족의 자제들도 아카데미아에서 철학을 배웠다.
정치, 경제 발달에 이어 문화까지 번영을 이룬 아테네는 그리스 문명의 중심지가 됐다.
문명의 모태인 너른 강도, 비옥한 땅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리스
그러나 험준한 산맥의 골짜기에도 인류는 뿌리를 내렸고,
그들은 인류사에 큰 발자국을 남길 문명 하나를 탄생시켰다.
그들이 뿌리를 내린 땅은 척박했지만 그들이 일군 문명은 기름지고 비옥했다.
기적의 문명을 일궈낸 비밀은 바다에 있었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리스 사람들은 바다로 나갔고, 바다는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줬다.
바다에서 일군 경제적 풍요와 바다에서 체득한 자유롭고 개방적인 문화는 그리스의 정치, 철학, 예술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서구 문명의 뿌리가 된 그리스 문명 바다는 또 하나의 인류 문명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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