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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훈민정음은 어떤 원리로 만들어 졌나

by 로이인랑 2022.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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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상의 문자는 얼마나 될까 기원전 삼천여년 전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전 문자를 사용한 이래 수많은 문자들이 생겨나고 없어졌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문자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눠진다. 
하나는 이집트 상형 문자에서 영향을 받은 페니키아 계열의 문자들이 있다.
기원전 천 오백 년 경에 만들어진 페니키아 문자는 그리스와 로마로 전해지고 아라비아와 중앙아시아까지 영향을 미쳤다. 
또 한편으론 홍해를 끼고 인도양을 건너 인도와 티벳까지 전파됐다
동아시아에는 갑골문에서 출발해 수천 년 동안 중화 세계의 보편으로 소뿌리를 내린 한자 계열의 문자들이 있다. 
그런데 한글은 어떤 문자 계열에도 속하지 않는다 육백 년 전 세종에 의해 독창적으로 만들어진 문자 훈민정음 훈민정음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현재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언어는 약 7천여 개 하지만 문자는 고작 삼십여 개에 불과합니다. 
지구촌 오지에 살고 있는 아주 작은 부족이라 할지라도 자신들만의 언어를 갖고 있지만 고유한 문자를 사용하는 민족은 그리 많지 않다는 얘기죠
그래서 문자가 없는 민족들은 이웃 나라에서 빌려 쓰거나 조금씩 변형을 해서 자신들의 문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의 나무에서 가지가 뻗어 나가듯 세 개의 문자는 페니키아 문자와 갑골문자에서 진화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훈민정음은 그 어느 문자 계열에도 속하지 않는 독창적인 문자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육백 년 전 세종대왕은 어떻게 훈민정음을 만들어 냈을까요. 
먼저 세계 어느 나라의 문자와 견줘봐도 부족함이 없는 우리 훈민정음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훈민정음을 반포할 때 펴낸 책인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문자를 만든 취지와 제자 원리 그리고 훈민정음의 특징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그런데 그 내용 중에 군민정은 배우기가 매우 쉬운 글자임을 강조하는 대목이 있다.
알아봐 알아
과연 그런지 우리 말을 배우러 온 외국인 학생들을 만나 보았다.
한글 알파벳은 얼마 만에 배웠어요. 하루 하루요 예 일주 이주 정도 일주 이주
일주일 일주일 걸렸어요. 그냥 한 타 한 달 며칠밖에 안 걸린 것 같아요. 
뭐 한 이틀
외국인 학생들이 느끼는 한글의 또 다른 장점은 자신들 나라 말을 소리 나는 대로 적기에 한글이 편하다는 점이다.
한국에 온지 일년도 안 된 외국인 학생들은 불과 서너 달의 짧은 한국어 교육을 받고도 능숙하게 한글을 표기했다.
한국어도 재미있고 쉬워요.
쉬워요.
중국어 한자도
어렵고 발음도 어려워요.
다른 나라 문자와의 비교를 통해한글의 특징을 알아보기 위해 각 나라의 문자를 적어보게 했다. 
일본의 가나와 인도 문자 이란 문자는 음절 문자다 자음과 모음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고 한 음절이 한 글자로 되어 있어 소리를 적는데 어려움이 있다.
이에 비해 우리 한국을 비롯한 유럽의 로마자는 음소 문자다 한음절이 자음과 몸으로 나뉘어져 있어 다양한 소리의 표기가 가능하다
우리나라의 한
한글 그리고 프랑스의 로마자 오스트리아의 로마 자는 대표적인 음소 문자입니다. 
그리고 아랍 문자 일본의 가나 문자 그리고 인도 문자는 대표적인 음절 문자죠 그리고 중국의 한자는 대표적인 단어 문자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문자들이 있는데 우리 한글은 자연이 단순하고 제자 원리가 체계적이고 명확해서 외국인들이 배우기 쉽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글은
문자가 다양하게 있기 때문에 외국어에 다양한 소리들을 그 음가에 맞춰서 적을 수 있는 아주 큰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 한글은 인도네시아의 한 부족에 의해 자신들의 문자로 채택됐다 인도네시아 슬라웨시 섬 남동쪽에 위치한 부톤섬의 찌아찌아 부족 지난해 7월부터 부족 고유의 말을 적는데 한글을 사용하고 있다.
일 년 동안의 사용 결과 한글은 찌아찌아의 문자로 순조롭게 정착해 가고 있다. 
찌아찌아의 모든 말을 한글로 옮겨 적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린 학생들도 어렵지 않게 한글을 깨우치고 있다.
지하
한글을 채택하기 이전엔 찌아찌아 사람들도 다른 인도네시아 사람들처럼 로마자와 아라비아 문자를 이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족 고유의 말을 표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이상 대학생들이 일단
아 아이 니 서울대 언어학과의 이호영 교수는 찌아찌아에게 한글을 보급하는 일에 깊이 관여해 왔다 야 찌아찌아의 말에 한글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찌아찌아 말의 소리에 대한 분석 작업에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기본적으로 이 찌아찌어하고 우리 한국어하고 발음이 상당히 유사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래서 아 우리 한글로 만든 찌아찌어 교과서를 우리 한국 사람이 그냥 우리 한국 한국어 발음으로 읽으면 그러면 찌아찌아 사람들이 다 알아듣습니다. 
그 뭐 좀 가난하긴 하지만 굉장히 해맑은 표정을 볼 수
이호영 교수는 찌아찌아의 한글 교과서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이 교과서에는 우리의 전래 동화인 토끼와 자라 이야기도 실려 있다.
마바의 핫 이기다 하루스 세게라 그런데
교과서에 실린 글자 중에 우리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순경음 비읍이 보인다. 
우리 말에 없는 부와 부 같은 파열음을 표현하기 위해 추가한 글자다 이처럼 한글은 다양한 조합을 통해 다양한 소리의 표기가 가능하다
기본적으로 로마자보다는 한글이 더 많은 문자를 그 표기를 할 수 있습니다. 
로마 자의 가장 큰 약점은 뭔가 하면 로마 자는 모음이 다섯 개밖에 없죠. 
아에이오우 이 다섯개 가지고 문자를 표기해야 되니까 상당히 어려운 거죠. 
그러니까 하나의 모험을 두 개의
로마 자 모음으로 표기한다든가 그래야 됩니다. 
그리고 자음의 경우도 한글보다는 자음의 숫자가 적기 때문에 한 소리를 하나의 문자로 대응해서 표기하기가 좀 어렵죠. 
그런 면에서 우리 한글이 월등하게 유리합니다.
훈민정음이 다양한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는 건 훈민정음 해례본에도 언급돼 있다. 
바람 소리와 하구름 소리 등 무엇이든 적을 수 있는 문자임을 밝혀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배에 보내는 그 해답도 적혀 있다. 
소리에 따라 글자를 만드니 그 어떤 소리도 적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훈민정음은 소리가 나는 원리에 따라 글자를 만들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제자 해에는 글자를 만든 원리가 상세히 설명돼 있다. 
기본자 다섯 글자는 발음기관을 형상화해 만들었는데 기역과 니은 혀에 움직이는 모양을 본 땄고
입술 소리인 미음은 입술 모양을 이 사이로 새는 소리인 시옷은 이 모양을
그리고 목구멍 깊은 곳에서 나는 소리인 이응은 목구멍 모양을 본땄다
기본 자음의 글자꼴이 발음기관의 모양을 얼마나 정확히 본 딴 것인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기존 엑스레이와는 달리 동영상을 볼 수 있는 씨의 레디오그라프라는 장비를 통해 보다 선명하게 혀와 목구멍 등 발음기관의 움직임을 볼 수 있다.
해례본의 설명대로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이 선명하다
그럼 니은은 어떤가
세밀하게 살펴보면 혀끝이 윗 잇몸에 닿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니은의 글자 모습에서 입천장 닿는 모습을 충분히 연상할 수 있다. 
우리가
발성하는 기역자는 혀의 모양이 기억자로 구부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사 소리나 된소리 건선 소리를 하게 되면은 혀가 점점 뒤로 밀려나면서 숨구멍을 막아가지고 전우경이 좁아지게 됩니다. 
아마도 육백 년 전에 세종대왕님께서는 이런 과학적인 배경을 충분히 잘 이해하시고 한글을 창제한 것으로 보이고 지금 의학적으로 잘 규명이 되고 있습니다.
소리의 원리는 기본 자음에만 적용된 건 아니다. 
발성 위치에 따라 아살 순치 후에 기본 다섯음을 정하고 발음 기관을 형상화해 모양을 정한 다음 기본자와 발성 위치가 비슷한 거센 소리를 가획의 원칙에 의해 체계적으로 모양을 부여해 열일곱 자의 자음 체계를 만들어 냈다.
그래서 글자만 보고도 소리의 성질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기본자에다가 소리가 특정한 음성 자질이 들어가면 그 점을 하나 더 하는 그런 가요액의 원칙 원칙을 가지고 후민정을 만들었죠. 
그래서 이제 서양의 학자들은 이 한글은 음소 문자보다 한 단계 더 진화된 자질 문자다라고 이렇게 분류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한글은 문자 역사상 가장 진화된 문자다 이렇게 말할 수 있죠
문자는 대개 뜻 글자와 소리 글자로 구분합니다. 
또 소리 문자는 음절 문자와 음소 문자로 나누는데 음소 문자는 한음절에 자음과 모음의 소리 체계로 이루어진 문자를 말합니다. 
우리 훈민정음은 음절 문자보다 한 단계 앞선 음소 문자입니다. 
또 문자의 모양에 소리의 특성까지 담고 있는 자질 문자로 가장 진화된 문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논란이 있어왔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문자를 만들 수 있었겠나
주변의 문자를 본 뜬 건 아니었나 하는 논란이었죠.
특히 훈민정음의 창제를 알리는 세종실록의 첫 기사에 옛 글자를 본떴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임금께서 친히 언문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는데 자방고전 말 그대로 해석하면 옛 글자를 본떴다는 것입니다. 
과연 훈민정음은 옛 글자를 그대로 본 뜬 것일까요.
당시 주변에서는 한자와 몽고자 만주 문자 등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과연 훈민정음이 만들어질 때 참고가 된 주변 문자는 없었을까요.
훈민정음 창제 당시 이웃나라 문자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조선시대 사역원이 있던 터다
이곳은 외교부 청사 남편에 있는 곳인데 옛날 사역원이 있던 터입니다. 
사여고는 통번역을 담당하는 통역관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기도 하고 외교 임무를 기르는 그런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이 바로 북편에 승문원이라고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관청이 함께 있었는데 이곳이 약 오백오십이칸 정도니까 상당히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세종은 왕위에 오르면서 사역원의 기능을 대폭 강화한다 중국어만 가르치던 사역원이 세종 때 와서는 만주어가 추가돼 몽골과 일본까지 모두 네 나라의 외국어를 가르치게 된다. 
이 네 나라는 모두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까우면서도 스스로의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 중기에 사역원에서 교재로 쓰인 교과서를 보면 당시의 외국어 교육 수준이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세종은 역대 어느 임금보다 이웃나라의 언어와 문자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사역원에서 가르친 네 개의 외국어 외에도 조선에 알려진 외국 문자는 또 있다. 
돈황 막고굴 비문엔 당시 주변 나라의 문자들이 새겨져 있는데 산스크리트 문자와 티벳 문자 그리고 중국 서북지역에 있던 서하의 문자가 그것이다.
그 중 한글 자모의 기원으로 많이 거론된 것이 원나라의 파스파 문자다
파스파 문자 기원서를 제일 먼저 언급한 사람은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기였다. 
이익은 그의 저서인 성호사설에서 훈민정음은 몽골 문자인 파스파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백여 년 뒤 실학자이자 의문학자였던 유희도 그의 저서 언문지에서 한글이 파스파 문자의 글자 모양에 의지했다고 했다. 
파스파 문자란 어떤 문자인가
원나라 제국이 상당히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는데 영토 내에 있는 그 언어를 표기하기 위해서 당시의 국사였던 라마승 파스파한테 명령을 내려서 만든 그러한 표음문자가 되겠습니다. 
그것은 티벳 문자를 조금 변형을 해서 만든 아주 모양은 조금 유사하긴 하지만 조금 다른 그러한 자연이 되겠습니다.
훈민정음과 파스파 문자를 직접 비교해 보기로 했다.
다라고 했는데 이거 이전에 미은 같은 경우는 전혀 다르거든요. 
네 다 네 그 다음에 나 다 파 그다음에 요거의 유상음인 바 네 이 파스파 문자는 표음 문자라고는 하지만은 아 완벽한 우리 말에 그 음절 단위의 음소 단위 그런 표 문자는 아닙니다. 
자형상 이 그 비슷한 것들이 이제 보이기는 하죠. 
그런데 모방을 했다고 하면은
진짜 그 전반적인 그 체계적으로 체계에 있어 가지고도 유사성이 있어야 되는데 낮 글자에 있가지고 이제 유사성은 발견할 수 있지만 체상으로 전반적인 체계에 있어가지고는 그 유사성을 유사성을 전혀 찾을 수가 없거든요.
옛 문자를 본떴다는 자방 고전의 옛 글자로 거론됐던 또 하나의 문자가 있다. 
월악산에 자리한 유서 깊은 사찰 덕주사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가 머물렀다고 하여 덕주사가 되었다.
그때는 언제든지는 불확실
그런데 사찰 뒤쪽에 독특한 모양의 문자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산스크리어트를 우리가
스님들이 공부하던 불경을 새겨놓은 비석인데 인도 문자인 산스크리트 문자로 돼 있다. 
이미 통일신라 시대부터 불경서적을 통해 이 땅에 들어온 문자다
이 비문은 산스크리트로 된 대불정수농음신주란 경인데 이 비문을 봤을 때는 통일신라부터 고려말까지 스님들께서 많이 공부를 하시고 연구를 하신 자료인 것 같습니다.
조선 중기 학자인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한글의 산스크리트 문자 기원서를 제기했다.
페니키아 상인에 의해 전 세계로 뻗어나간 페니키아 문자가 인도로 전해지면서 산스크리트 문자가 되었다. 
알파벳 계열인 산스크리트 문자는 훈민정음과는 전혀 다른 모양새와 글자 체계를 가졌다.
국민정음이 근본적으로 음소 문자입니다. 
에 그래서 산스크리트하고는 거리가 있고요 해서 사실상 훈민정음이 그쪽과의 어떤 관련성 이것은 맥락을 짚기가 매우 어렵다는 얘기죠
구체적으로 훈민정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런 문자들의 모양을 본 땄다거나 그런 문자들의 원리를 직접 받아들였다고 하는 적극적인 증거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주변 문자와의 연관성이 적어 보이자 자방고전의 천은 한자의 글씨체인 전서체를 의미한다는 주장이 최근까지 힘을 얻기도 했다.
문자는 원래 이제 상형 문제잖아요. 근데 이제 이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면서 각 나라마다 아 각기 다른 자양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진시황이 천국을 통일하고 난 다음에 이러한 복잡한 자양을 이제 하나로 통일할 필요성을 느꼈겠죠. 
그래서 자기네들 진나라가 고유히 써오던 그러한 문자를 위주로 해서 어 그 통일한 문자의 자형이 바로 이 전서체가 되겠습니다.
전서체의 자전을 통해 글씨 모양을 확인할 수 있다. 
황제의 글씨 답게 선의 곡선을 살린 글씨체로 화려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 전각이라 하여 예로부터 오늘날까지도 전서체 글씨로 도장을 새기는 풍습이 이어져 오고 있다.
서해의 전문가를 찾아 한자의 전서체와 훈민정음 글씨체를 직접 비교해 보기로 했다.
과연 훈민정음과 한자의 전서체 사이에 어떤 유사한 점이 있는 걸까
판문 서체에서 이 해서와 예서 전서가 있는데 훈민정음에 에서는 각이 그 획과 혁이 연결되는 부분이 각이 져 있고 수직과 수평을 항상 유지를 했습니다. 
그리고 효과 혈육이 연결되는 부분들에서는 가격이 딱딱 항상 저 있는 반면에 훈민정음과는 달리 전선에 있어서는 흙과 흙이 연결되는 부분이 둥글게 돼 있고
또 어 회개의 어떤 것이 전체가 둥글면서 부드럽게 돼 있다는 것이 훈민정음과는 좀 다른 점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두 글씨체의 닮은 점은 회의 굵기가 일정하다는 것 뿐이다. 
자방 고전의 전자를 전소체로 보는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당시의 정황을 봤을 때 세종대왕이 주변 문자에 대해서 인식을 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글자의 모양이나 체계 그 어떤 것을 두고 보더라도 주변 문자와의 연관성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전서체라는 글씨와 비교해도 마찬가지죠 그렇다면 자방 고전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자방고전이란 표현은 훈민정웅 관련 기록에 여러 차례 나옵니다. 
훈민정음을 알리는 첫 기록인 세종실록 이십오 년 십이월 기록에 나오고요 훈민정음 해를 본 서문에도 상형이 자방 고전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유난히 자방 고전을 강조했던 세종대왕
거기엔 세종대왕의 또 다른 속내가 숨겨져 있었던 건 아닐까요.
훈민정음이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건 세종 이십오 년 십이월 실록에는 훈민정음이 완성됐음을 알리는 아주 간략한 기사만이 남아 있다. 
왕실의 작은 사건까지도 세밀하게 적은 신록에 국가의 중대사인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사전 기록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그로부터 이 개월 뒤 세종은 집편전 학자들에게 운회의 번역을 명한다 훈민정음의 사용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세종의 계획은 벽에 부딪힌다 신하들이 집단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반대 상소를 올린 신하들은 당대 최고 학자였던 집편전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한 지편전의 원로 학자들이었다.
상소에 담긴 반대 논리 중 하나는 풍속을 바꾸는 국가의 대사를 여러 신하와 상의도 하지 않고 독단으로 추진했다는 것이다.
세종은 왜 신하들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훈민정음 창제를 감행한 것일까
일종의 보편문자로서의 한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독창적인 그런 문자 체계를 만들어 낸다는 것 자체가 결국은 그런 그 중앙 문명의 정통성을 에 이제 도전하는 중화 중심적인 질서에 위배되는 그런 측면이 분명히 있었던 거고 그래서 조선 안에서도 사실은 아 그 문화적인 정통성을 통해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보수층의 반발을 살 염려가 있기 때문에 결국은 비밀리에 진행이 된 거라고 생각됩니다.
조선의 건국보다 이십사 년 앞서 명나라가 건국된다 조선 초기 중원 대륙도 격변기였다. 
중국을 통일한 주 원장이 황제가 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중국의 한자음을 통일하는 것이었다. 
홍무정운은 중국의 표준 한자임을 표기한 자전이자 일종의 음운서다
주 원장은 왜 건국 후 서둘러 한자음부터 동일한 것일까
주 원장이 처음. 그 원을 건국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한자의 음을 통일하는 거였습니다 한자 음을 통해서 과거제를 실시하고 또 그 인재들을 양성해서 그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일단 한 짬을 통일하기 위한 거였죠. 
또 무엇보다도 그 전에 그 원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원나라의 그 요소를 다 배제하기 위해서 새로운 한 장을 만들어서 시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에 그 홍무전을 편찬하게 되었던 거죠.
명은 조공관계에 있던 조선에까지 문자를 이용해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조선의 외교 문서인 표전문이 경박하고 모욕적이라며 트집을 잡아 태조 이성계의 책봉을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국가가 안 한 게 특히 문자가 권력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그런 것이 일종의 표전문 사건에서 볼 수가 있는데요. 
그 이면에는 바로 정도전이라는 바로 그 중국의 조선의 독자적 그런 그 말하자면 문명의 독자적인 그런 건국을 하려는 사람을 잡아들여서 길들이려는 그런 목표를 가지고 표준문 문제를 제기했었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소중화를 지향한 보수적인 양반 지배층이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고 나선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명과의 충돌은 나라의 근본을 위협하는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반대 상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 역시 명과의 관계를 의식한 내용이었다.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섬기는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때 중국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명나라라는 패권국 외에 중화문명이라는 우리나라 많은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그 문명 세계에 대한 도전이 아니냐 라는 두 가지 의미가 최만리의 사대 속에 들어있는데 어 사실 그 문제는 실질적으로 불다가 위험한 큰 문제였고 훈민정음 창제 프로젝트가 무산될 수 있는 그런 요소를 담고 있었죠.
상소에는 다소 거친 표현까지도 쓰여 있었다.
언문을 만드는 일은 스스로 오랑케임을 자처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상소에서 얘기한 내용은 세종 당신이 오랑캐들이 하는 짓을 하려고 한다라는 문맥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사실은 그 오랑캐라고 지칭했던 존재들은 다 사실은 황제국을 칭했던 존재들입니다. 
그러니까 감히 사실은 아 명의 황제와 같은 위치에 버금갈려고 하느냐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 라고 사실은 경고하는 입장이었던 거죠.
심혈을 기울여 만든 훈민정음이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될지도 모르는 긴박한 상황
신하들의 반대를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던 세종은 언문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함인데 무엇이 그러냐며 신하들을 강하게 압박한다
첫 번째는 이것이 중화 질서를 위배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설득하는 것이었죠.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최만리의 상소가 올라왔을 때 바로 그 세종이 했던 답변 중에서 언문으로 어 삼강행실도를 펴내면 결국 이 보통 사람들 중에서도 결국은 충신이나 효자가 많이 나올 것이다.
결국 이 얘기는 아 훈민정음을 통해서 사실은 유교적인 규범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더 공고화될 수 있고 그 바탕 위에서 왕권이 강화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었던 것이죠. 
결국 이런 논리에 사실은 지배층이 쉽게 반박을 할 수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고요
또한 세종은 반대하는 신하들을 옥에 가두고 정창손 등의 관직을 박탈한다 신하들의 반대가 확산돼 명과의 외교적인 마찰로까지 이어질 것을 염려한 세종의 고육지책이었다.
훈민정음에서 기자방 고전이라고 하는 이 말은 소위 그 거대한 명명에 대한 중국에 대한 외교적인 수사였지 그것이 실제 전문과 어떤 관련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저는 봅니다. 
당시 명초는 영락제라 하는 이런 사람들은 거대학에
멀리 서인도까지 진입하고 이런 것인데 사실 조선으로서는 굉장히 두려운 존재죠 그래서 세 문자를 만들고 이래 하는 상황에서 자연이 외색하는 그것을 무시할 수 없는 그 입장에서 아마 그런 표현을 썼지 않나
이렇게 보는 것이죠.
명분에 구해받지 않는 세종의 실용주의와 강력한 리더십 덕분으로 군민정음은 중화질서의 두터운 벽을 뚫고 빛을 보게 되었다.
결국 자방고전이란 거대한 명나라를 의식한 수사적 표현이었습니다. 
명을 자극하지 않고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어낸 세종대왕의 모습에서 실용적이고 치밀한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데요. 
소중화를 지향했던 양반 지배층의 반대가 확산되고 이를 빌미로 명이 개입해 들어올 경우 훈민정음은 세상에 빛도 보지 못하고 무산될 수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세종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도 크게 흔들릴 수 있던 상황이었는데요. 
세종은 왜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훈민정음 창제에 매달렸던 걸까요.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문자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비석이 고양시에 남아 있다. 
조선시대 다리를 건설하고 난 뒤 공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비석이다. 
그런데 공사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순수 우리말 이름을 가진 일반 백성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을 어떻게 표기했을까
다리를 만들며 참여했던 백성들의 이름이 아주 보기 드물게 이두식 표기로 1천여 명이 되는 사람들의 이름이 중국식의 이름을 따서 이두식 표기로 되어 있다는 점이 좀 특이하고요
처음은 차 씨인데
차 이름이 두리가
그다음에
지응해 이 응해라고 하는 건 이제 어린 아이가 응해 응에 운다는 뜻인데 그것을 중국 중국 발음으로 해서 쓴 이름이 되겠고요
비석에는 소박하고도 정겨운 일반 백성들의 우리말 이름들이 기록돼 있는데 한자에서 음을 따거나 뜻을 빌어 우리말 이름을 나타내고 있다.
일종의 자자 표기인 이두식 표기는 조선시대 말까지 문자 생활의 한 축을 이루었다.
양반 사대부들은 주로 한문을 사용했고 그 일반 백성들을 상대하는 하급 관리들이 이두라고 부르는 차자 표기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은 에 한 문도 차자 표기도 사용하지 못하고 문자 생활을 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두식 표기는 이미 통일신라 시대부터 활발하게 쓰였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통일신라 시대의 향가 모죽지랑가를 보면 거은춘 계림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가는 봄 그리며를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 쓴 것이다. 
조선시대의 이두식 표기는 백성을 단속하는 법률문이나 노비 문서 등 실생활에서도 널리 사용됐다
그러나 이도는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여전히 어려운 문자였다. 
중국 말에 없는 우리 말에 다양한 어미 변화까지 표기하자니 매우 복잡했다.
백성들이 문자를 몰라서 생기는 폐단을 세종은 일찌감치 인식하고 있었다. 
세종 십오 년 칠월 십구 일 세종은 한 옥사 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는다
당시 사형에 해당하는 중한 사건은 임금이 직접 전결을 내렸다. 
그런데 사건 내용이 미심쩍었다. 옥산에 거주하는 양노란 여인이 주문을 외워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다. 
세종은 좌부승지를 의금부에 내려보내 사건을 직접 재조사하라고 지시한다
결국 양노라는 여인은 매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하게 됐다고 실토한다
재판을 통해서 백성들의 상황들을 민생을 상황을 자세히 이제 많이 접하게 되었고 그래서 특히 이 글자를 몰라가지고 그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를 여러 번 접하고서는 아 이건 백성들한테 계속 법을 단속해서가 아니고 그들에게 법을 가르켜주어서 으로 피하게 하는 것만이 최선이다라는 판단을 하게 됐죠.
세종은 옥사 사건에서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건 문자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옥사 사건을 다루면서 글 모르는 백성에 대한 세종의 고민도 깊어갔다. 
당시 세종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기록이 남아 있다.
세종은 법전에 큰 죄목만이라도 이두로 번역해 민간의 반포하라고 명한
백성들이 법을 알 수 있게 이두로라도 번역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또 다시 반대를 하고 나섰다. 
이조판서 허조의 반대 논리는 이러했다.
간악한 백성들이 법을 알면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생길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세종은 백성들에게 법을 알려주지 않고 벌을 주는 건 옳지 않다며 반박을 한다
백성에 대한 인식이 신뢰 같은 게 신하들하고 세종이 아예 다른 것 같아요. 
신하들은 백성을 우선 불신의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백성을 믿을 수가 없다는 논쟁이 인식이 깔려 있었고 신하들한테는 세종은 그렇지 않다. 
부당하게 평민을 의심하지 마라 그래서 백성들을 말하자면 믿고 그들이 잘 올라올 수 있도록 민도가 향상되도록 하는 것이 곧
나라의 국격도 함께 발전할 수 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 이도에 대한 생각도 서로 상반됐다 만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세종과 막힘이 없는 문자라는 신하들과의 차이는 백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였다.
최말리 등은 관리자의 입장에서 보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두 문을 아전이 사용하고 법문을 법리문으로 올리는 데는 아무 소통하는 지장 없습니다. 
그건 다 한자를 알고 있고 그다음에 이 부문을 활용하는 정도이거든요. 
관리자의 입장이고 관리의 입장이고 세종이 보기에는 백성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두문도 어렵다는 것이에요. 
그걸 배우기가 한참 모르면 모르기 때문에 백성의 입장에서 어 이두문은 한계가 있다 라고 보는 것이죠.
관리들에게조차 이두문이 어려웠다는 건 유서필지라는 책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유생과 서리가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 의미의 유서 필지엔 이두로 쓴 각종 공문 양식이 모아져 있다. 
이시건을 이슈 없고 이시어 등 다양한 어미 변화에 따른 표기법이 소개돼 있다.
이두 표기법을 따로 책으로 묶어 익혀야 할 정도로 간단치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이도의 한계 때문에 세종은 그림을 그려서라도 백성과 소통을 하고자 했다.
그림으로 그려서 책을 발간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그들과 바로 소통할 수 있는 절대의 문자가 필요했겠다. 
해서 세 문제가 만들어진다라고 하는 이제 그런 측면도 충분히 있을 수 있고요
백성들과의 소통을 꿈꾸었던 세종에게 백성들이 쉽게 쓸 수 있는 문자를 만드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업이었다.
실제 세종은 백성의 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세종 십오 년 예조로 하여금 홀로 된 사내나 한맥신 여인의 노래 가사까지도 수집할 것을 명한다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와의 일화에서 세종이 지방의 사투리까지도 연구하게 했음을 짐작케 하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매우 총명하고 산법에도 밝았던 정의공주를 통해 사투리 문제를 연구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세종대왕께서는 그 백성들의 사투리인 그 변음과 토착음을 가지고 많이 고민하시다가 저희 정의공주님에게 에 풀어보라고 지시를 하셨는데 공주님께서 이 문제를 아주 썩 잘 연구하셔서
대왕께서 크게 상을 받은 기록이 저희 문중 기록에 나오고 있습니다.
죽산 안씨 족보엔 재능이 많았던 정의공주에 대해 자세히 정리해 놓고 있다. 
그런데 그 중에 세종이 정의공주에게 변음과 토착지방의 사투리 문제까지도 풀도록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아이들 말이나 사투리까지 표현할 수 있는 백성의 문자 훈민정음은 그렇게 탄생했다. 
백성들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문자를 만들어 소통을 하고 싶었던 세종 그것이 어렵고도 험난한 과정을 거치면서까지 훈민정음을 만들고자 했던 이유
어린 아이의 말까지도 염두에 둘 정도로 백성이 하는 말은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는 문자를 만들고 싶었던 세종대왕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그래서 배우기에 아주 쉬운 소리 문자의 제작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문자를 만드는 일은 의혹이나 의지만 갖고 되는 일은 아닙니다.
소리와 문자에 대한 고도의 전문 지식과 능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과연 세종대왕에게는 문자 창제를 위한 전문 지식과 능력이 있었을까요.
세종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던 왕이다. 
역대 왕과 왕비의 제례 때 사용되던 종묘제례약도 세종이 직접 작곡한 것이다. 
세종이 음악에 관심을 가진 건 유교사회에서 음악은 백성들의 심성을 올바르게 교화하는 수단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유교 이념을 집대성한 성리대전에 송나라 때 편찬된 음악 이론서인 윤리어신서가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세종은 윤리 신서를 탐독했다. 그리고 그 이론을 바탕으로 정간보라는 악보의 곡을 적는 방법을 창안하고 우리 실정에 맞게 조선의 음악 체계를 새로이 정립했다.
세종대왕께서는 왕이 되시자마자 음악에 관심을 가지시고 어 윤리어신서 등 그 음악 이론을 공부를 하십니다. 
그런 것을 바탕으로 악기를 제작하시고 악보를 만드시고 음악을 다시 정립하시는 등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세종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보여주는 일화가 실록에 남아 있다. 
그 동안 중국에서 수입해오던 편경을 처음으로 조선에서 제작해 시연을 하는 자리에서 세종은 아홉 번째 매 소리가 높다고 지적한다 실제 살펴보니 경석을 자를 때 표시해 놓은 먹줄 부분이 덜 깎여 있었다.
편경은 두께에 따라서 음의 높낮이가 결정이 되는데 아직 먹줄이 남아 있다는 것은 음이 높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어 그 정도의 그 음을 감지하는 것은 매우 민감한 귀를 가졌다는 것인데 그 음료를 현재의 관점으로 해석을 하자면 반음의 오분의 일 정도 오분의 일 음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세종은 음악 뿐 아니라 음운학에서도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 특히 그 음운론에 있어가지고서는 중국의 운서를 가지고 공부를 하면서도 우리나라 운서를 편찬하는데 응용을 하였는데 아 이 비록 중국의 그러한 용어인 오음과 치름의 개념을 사용하긴 했지만 세종대왕의 그런 중국 음문학 이론에 관한 지식은 상당히 높았다고 보입니다.
훈민정은 반대 상소를 올린 신하들에게 너희가 운수를 아느냐며 호통을 치는 대목에서도 세종의 의문학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
이 때 세종이 신하들에게 다그쳐 물은 사성과 치름이 중국 음문학의 핵심 개념이다.
사성 치름이란 무엇인가 성리대전의 한 부분인 성음 청화도에 보면 사성은 음의 높낮이에 따라 평성 상성 거성 입성의 사성으로 나눈 것이고 시름은 발성 위치에 따라 아설 순치 후로 소리를 구분한 것이다.
세종은 중국의 음문학 공부를 통해 소리의 원리를 깨우쳤다.
중국 음운론의 특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제 음절의 그 분석 방법인데요. 
에 분석 방법은 바로 이제 그 하나의 음절을 성모와 운모로 이제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래 성모는 우리 말에 초성에 해당되는 거고 운모는 종성 중성과 종성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죠 그래서 이게 중국은 원래 이 표의문자이기 때문에 음을 표기하는 방법이 없죠. 
그래서 음을 표기하는 방법으로 바로 이 이러한 이분법 즉 성모와 운모를 응용해서 만든 이 반절법이 이 그
하나의 특징으로 되겠습니다.
반절법이란 뜻 글자인 한자에 음을 붙여 읽는 방법을 말한다 동이라는 한자음의 경우 다에서 등을 따고 동에서 옹음을 따서 읽는 것이다. 
성모와 운모의 이분법으로 음절을 나눈 것이다.
이와 달리 훈민정음은 한음자를 초성과 중성 종성 삼분법으로 나누었다. 
중국 의문학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 낸 것이다.
훈민정음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초성과 종성을 함께 쓴다는 것이다.
초성과 종성이 같은 소리라고 하는 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었을까 찾아 표기라든지 우리 말의 구조를 보면 쉽게 그 답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말에서 그 물이라고 하는 명사를 보면 끝소리 종성에 리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물 다음에 2라고 하는 축격 조사가 연결이 되면 이 리을이 자연스럽게 뒤 음절로 넘어가서 무리와 같이 발음이 됩니다. 
이 초상에 있는 리을이 이 끝소리에서 이렇게 넘어온 것이죠. 
간단한 현상이야말로 끝소리가 중성하고 분리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음절의 3분법에 해당하는 우리 말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말의 특성은 이두식 표기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밤과 시름을 뜻하는 야와 우에 불필요해 보이는 음을 덧붙였는데 이는 종성에 해당하는 미음을 표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거운춘이라는 표현도 보이는데 이는 우리 말 간 봄 즉 지나간 봄을 뜻한다 갈 거에서 가을 은에서 니은을 따서 간을 표시한 것이다.
이미 차자 표기를 통해서 그들이 받친 글자를 따로 따로 챙겼다고 하는 것은요 뭘 말하는가 음소 개념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바탕이 된 것이 국민정에서 소위 삼성 체제를 가졌다 하는 것은 바로 차자 폐기를 통해서 쌓아온
결과가 아니냐 이렇게 봐지는 것이죠.
세종 역시 이두식 표기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타고난 절대 음감과 음문학 지식이 덧붙여져 세종은 우리 말을 그대로 옮겨 적을 수 있는 소리 문자 훈민정음을 만들 수 있었다.
발성 위치에 따라 기본 자음 다섯 개를 정하고 소리의 세기에 따라 획을 덧붙여 자음 열일곱 개를 만들었다. 
비슷한 소리는 비슷한 모양을 갖는 합리적인 체계를 통해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게 한 것이다.
모음도 다음과 같은 원리로 만들어졌다. 
천지인을 형상화해 아의의 세 글자를 정한 뒤 센 소리는 획을 더해 체계적이고 간단하게 열한 개의 몸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초성 중성 종성 세 소리를 합해 우리 말에 한 소리 즉 한음조를 표현해 냈다. 
우리의 말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은 소리 문자 훈민정음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완성한 뒤 서둘러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취한다 언문청을 설치해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각종 서적을 펴내고 하급 관리 시험은 물론 각종 취재에도 훈민정음을 시험 과목으로 채택한다
문이 난 게
훈민정음이 반포되고 불과 3년 뒤 한글이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사건이 벌어진다. 
서울 외곽의 한 저작거리에 당시 세도가였던 정승 하연을 비판하는 벽서가 붙은 것이다. 
그런데 그 벽서의 내용이 언문으로 되어 있었다. 
언문이 백성들의 삶 속에 파고든 것이다.
세종의 바람대로 훈민정음은 양반과 백성 그리고 임금과 백성을 소통시켜주는 가교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백성들에게 배우기 쉽고 알기 쉬운 문자를 만들어 주겠다는 세종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 본부에서는 매년 가을 유네스코 세종대왕상 시상식이 열린다 유네스코 세종대왕상은 세계의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나 단체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올해는 이민자 자녀 교육을 하는 독일의 한 교육기관 등이 상을 받았다.
한글의 우수성은 이미 세계적으로도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세계적 과학잡지 디스커버는 지난 구십사 년 칠월 호에 문자에 대한 특집 기사를 실었는데 한글이 세계 어떤 문자보다도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문자라고 평가했다.
조선에 영향을 미칠 가장 큰 영향을 미치던 나라가 중국이고 중국은 뜬 문자 표의 문자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제 단어 문자란 말이죠.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다 공부한 사람들은 다 한자를 배웠는데 그런 상황에서 음소 문자를 만들어서 썼다 하는 것은 굉장히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죠.
문자는 유구한 역사 발전을 통해 진화해 온 문명의 산물이다. 
중화체제의 두터운 벽을 뚫고 독창적인 문자로 탄생한 훈민정음은 어찌 보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그 기적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백성의 문자를 향한 세종의 집념이었다.
신하들에게 너희가 운서를 아느냐 라고 호통을 칠 정도로 세종대왕은 당내 최고의 의문 학자였습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이런 음운학에 대한 지식 때문만은 아닙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 말에 대한 철저하고도 치밀한 분석이었을 겁니다.
사투리나 어린 나이의 말까지 세심하게 관찰했고 백성들의 말이라면 무엇이나 그대로 옮겨 적고자 했던 그래서 백성 누구라도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를 만들고자 했던 세종대왕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 곳곳에는 백성들에 대한 세종의 마음이 배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훈민정음을 되새겨보는 이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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