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욕망입니다.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고 학위를 따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인정을 받기 위해서 루이비통을 삽니다.
형태는 다 다르지만 우리가 하는 행위의 대부분은 사실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의 욕망은 채워질 수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의 욕망이 채워진다면 정말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에피쿠로스는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입니다.
그는 인간의 감정이 두 가지로 나뉜다고 보았습니다.
행복과 불행 즐거움과 괴로움 쾌락과 고통이 바로 그것이죠.
에피크루스가 추구한 것은 행복 즐거움 쾌락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에피쿠로스는 행복은 갖고 싶은 것뿐에 가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갖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은 돈일 수도 있고 명성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습니다.
돈을 예로 들어봅시다. 내가 1천만 원을 가지고 싶은데 수중에 100만 원밖에 없다고 합시다.
그러면 나의 행복도는 10%가 되겠죠 내가 행복해지려면 나는 천만 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힘들게 일해서 천만 원을 벌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나는 이제 1천만 원 가지고는 만족이 안 됩니다.
이때 내가 원하는 건 1억이에요. 그래서 나의 행복도는 여전히 10퍼센트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나는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방법을 바꾸어야 해요.
그것은 내가 천만 원을 가지고 있을 때 천만 원으로 만족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1천만 원만 가지고 서도 행복도 100%가 되는 거죠.
결론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을 해야 하고 그러한 만족이 행복이고 즐거움이고 쾌락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에피쿠로스의 결론입니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쾌락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쾌락을 회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과도한 쾌락은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물과 빵만 있으면 나는 신도 부럽지 않다.
당시에 치즈도 있었는데 치즈는 가끔씩만 먹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매일 먹으면 치즈가 주는 쾌락을 만끽할 수 없으니까.
결국 행복해지기 위한 에피크로스의 전략은 최소한의 쾌락으로 최대한의 쾌락 효과를 얻으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에피쿠로스는 쾌락의 행복이라고 하면서 최소한의 쾌락에 만족하라고 한 것일까요? 그것은 쾌락은 결코 채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쾌락을 추구하면 추할수록 더욱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죠.
그런데 쾌락은 정말로 채워지지 않는 것일까요? 이제부터 이 이야기를 해봅시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락강은 욕구와 요구와 욕망을 구분합니다.
욕구는 식욕, 수면욕, 배설욕을 말하는데요.
우리는 욕구가 채워지면 쾌락을 느끼고 채워지지 않으면 불쾌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아기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배가 고프면 젖을 달라고 울고 잠이 오면 재워달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을 요구라고 합니다. 이처럼 요구는 자신의 욕구를 채워달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면 엄마는 아기에게 젖을 주거나 토닥토닥 재워줄 겁니다.
그러면 아기의 욕구는 금세 채워지죠.
그런데 어느 순간 아기는 배가 고픈 것도 아니고 졸린 것도 아닌데 그냥 짜증을 냅니다.
어떤 구체적인 욕구가 생긴 것이 아닌데도 무언가를 요구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때 아기가 요구하는 것은 젖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재워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아기가 요구하는 것은 엄마의 제약 없는 사랑이에요.
엄마가 자기 옆에 24시간 붙어서 자기의 욕구를 그때그때 채워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욕구는 그 어느 누구도 채워줄 수 없습니다.
식욕이나 수면욕은 엄마가 그때그때 채워줄 수 있지만 이런 제약 없는 사랑은 그 어느 누구도 채워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바로 욕망입니다.
욕망은 절대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착각을 하죠.
저 차만 타면 저 신발만 신으면 저 여자만 애인으로 만들면 저 책만 이해하면 자신의 욕망이 채워질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런데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죠. 채워지지 않는 욕망 즉 결핍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른 차를 타고 또 다른 신발을 사고 또 다른 여자를 찾고 또 다른 책을 읽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항상 망각합니다.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가지는 욕망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에 그것은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앞에서 아기는 엄마에게 제약 없는 사랑을 욕망한다고 했죠 하지만 그러한 욕망은 절대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아기는 자신이 엄마로부터 인정받으면 그러한 욕망이 채워질 수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인정해달라고 아우성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목숨을 건 인정투쟁이 시작된 겁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인정 투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 자신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보여주는 거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거울이 바로 다른 사람들 즉 타자입니다.
인간은 타자를 통해서 비로소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타자가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자신을 본다는 말이죠.
예컨대 타자가 자기를 긍정적으로 보면 자기 스스로 긍정적 존재가 되고 타자가 자기를 멸시하면 자기 스스로 멸시받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즉 인간은 타자의 인정 여부에 따라서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타자로부터 자신을 인정받기 위해서 투쟁을 벌입니다.
목숨을 걸고 나를 인정해 달라고 투쟁을 하는 겁니다.
목숨을 건 인정투쟁, 그것이 바로 해결의 핵심 개념입니다.
호네트는 해결의 인정투쟁 개념을 조금 더 발전시킵니다.
호네트는 현대사회에는 우리는 어떤 특정한 타자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다수의 타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 투쟁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방 끈 길게 좀 매보겠다고, 죽어라고 공부하고, 뭐 먹을 때마다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고, 좋아요 숫자를 확인하고, 승진하겠다고 머리에 넥타이 졸라메고, 본부장님 앞에서 재롱을 뜹니다.
o네트는 우리가 이처럼 사회적 평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우리가 바로 다수의 타자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여러 형태의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욕망의 원천은 제가 보기에 자신을 인정해달라는 욕망인 겁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달라고 투쟁을 벌이는 거죠.
현대 자본 사회에 들어와서 이러한 인정의 욕구는 이제 소유의 욕구로 왜곡됩니다.
무언가를 소유하면 내가 인정받는 존재가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식에 대한 욕구는 책에 대한 소유 욕구로 바뀌고, 사랑에 대한 욕구는 예쁜 얼굴과 날씬한 몸매에 대한 소유 욕구로 바뀌며, 자기 인정에 대한 욕구는 명품에 대한 소유욕으로 바뀝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진짜 욕구와 가짜 욕구인 소유욕이 뒤엉켜 버립니다.
구루스 후드는 현대사회가 겪는 많은 경제적, 사회적 문제가 이러한 소유역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새로 나온 신간 우리는 모든 것의 주인이기를 원한다.
해서, 브루스 후도는 인간이 가지는 소유의 심리에 대한 번뜩이는 통찰을 보여줍니다.
저자는 사치품을 과시하라는 블링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가난한 집단의 구성원들은
부유한 집단의 구성원들보다 사치품을 사는 경향이 더 강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집단에서는 사치품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과시할 수 있지만, 부유한 집단에서는 윽각 사지품만으로는 자신의 존재를 과시할 수 없기 때문이죠.
가난한 집단의 구성원들은 사치품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저자는 소유권은 자연적 권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만들어진 권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소유권은 이제 자본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권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유권은 사람들의 심리 상태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게 됩니다.
무언가를 소유함으로써 심리적 안정감을 가지게 되는 거죠.
자본주의 메카니즘은 이것을 놓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소유하라고 부추기고 그 결과 극단적인 소비 문화가 나타납니다.
자본가들은 상품이 더 이상 팔리지 않자
이제 기호를 만들어내고 팔기 시작합니다.
디즈니랜드라는 환상의 기호를 만들고 할리우드라는 화려함의 기호를 만들고, 마릴린 몬노라는 섹스의 호를 만들고, 스타벅스라는 세련됨의 기를 만들고 나이키라는 도전의 기호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 기호에다가 엄청난 가격을 매깁니다.
이제 상품의 가격은 그 상품의 기호적 가치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사람들은 이제 상품을 소비하지 않고 기호를 소비합니다.
수백만 원짜리 가방을 들고 수천만 원짜리 시계를 사고 수억 원짜리 차를 타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자신들의 부자임을 나타내는 기우이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은 자신들이 부자임을 보여주려고 루이비통이라는 기호를 사고,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난함을 숨기려고 루이비통이라는 기호를 삽니다.
개나소나 루이비통이라는 기호를 들고 다니자
부자들은 이제 더 비싼 에르메스라는 기호를 사고,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함을 숨기려고 에르메스라는 기후를 살려고 아둥바둥거립니다.
끝없는 기호 경쟁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를 굴러가게 만드는 동력인 겁니다.
사람들은 이런 기호를 사는데 엄청난 돈을 씁니다.
왜냐하면 이 기호를 통해서 자신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기호가 목숨을 건 인전 투쟁의 수단이 된 겁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생각이 나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말이겠죠.
하지만 보드리아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소비한다 보로 존재한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나의 정체성이 규정된다는 것이겠죠.
쇼페나워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인간은 결핍을 느끼죠.
그래서 인생은 고통스러운 겁니다. 물론 욕망이 일시적으로 채워질 수는 있지만 욕망이 채워지는 순간 인간은 이번에는 또 다른 권태라는 고통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다시 다른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죠.
그래서 인간은 또다시 결핍을 느끼고 고통에 빠집니다.
이처럼 인간은 욕망이 안 채워지면 결핍으로 고통스럽고 욕망이 채워지면 권태로 고통스러운 존재입니다.
이처럼 인생이란 결핍과 권태를 왔다 갔다 하는 고통일 뿐인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쇼페나와는 일체의 욕망을 끊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죠.
쇼페나후의 이런 해법은 에피크로스의 쾌락주의를 연상시킵니다.
에피쿠로스는 과도한 쾌락은 고통이기에 쾌락을 절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최소한의 쾌락으로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이었죠.
기원전 4세기 에피쿠로스는 과도한 쾌락은 결국 고통이므로 최소한의 쾌락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18세기 슈페노원는
욕망은 결국 고통을 일으킬 뿐이므로 일체 욕망을 끊어야 한다고 말했죠.
그리고 21세기 블루스 후드는 인간의 소유욕이 불행의 근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결론은 이겁니다.
욕망이 채워진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릅니다.
욕망이 채워진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멈출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실천한 사람이 있긴 합니다.
그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디오게네스입니다.
디오게네스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이 산 사람입니다.
나무로 만든 통 속에서 혼자 살았죠.
그가 가진 것이라곤 옷한벌과 물컵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개가 혀로 물을 마시는 걸 보고 잠깐 그러고 보니 물컵도 필요 없는 것이었네라고 하면서 물컵도 갖다 버렸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디오게네스는 개를 스승으로 삼고 스스로를 개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를 찾아온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디오게네스가 햇볕에 앉아서 따뜻하니 졸고 있었는데요 알렉산더 대형이 찾아와서 뭐 필요한 거 없냐고 하면서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소원이 하나 있는데 햇빛 가리지 말고 제발 좀 비켜달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부하들이 칼을 뽑아 들었겠죠.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이 오히려 말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만일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라면 나도 디오게네스처럼 살고 싶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내가 디오게네스가 아니라면 나도 디오게네스처럼 되고 싶네.
나는 두 가지 질문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욕망이 채워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욕망이 채워진다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령 욕망이 일시적으로 채워진다고 해도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욕망하게 되어 결국은 행복해질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갈증이 나서 바닷물을 마시면 일시적으로는 해갈이 되지만 결국 더 강한 갈증으로 죽음에 이르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것을 안 에피쿠로스는 물과 빵만 있으면 신도 부럽지 않다고 말했고, 디오게네스는 하나 남은 물컵마저도 갖다 버린 겁니다.
하지만 아무나 에피쿠로스나 디오게네스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욕망을 포기한 그들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은 욕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고, 학위를 따기 위해서 공부를 하며, 인정을 받기 위해서 루이비통을 사는 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진짜 욕망을 욕망하기도 하지만 소유욕과 같은 가짜 욕망을 욕망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리고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설령 욕망이 채워진다고 해도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욕망을 쫓아가고,
욕망을 채운다고 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는 것 이것은 명백한 모순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절망적이라는 것은 알지만 희망적인 척 하면서 사는 것 나는 이것도 훌륭한 삶의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심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들은 왜 자퇴를 하려고 할까? (0) | 2023.06.30 |
---|---|
실존주의에 대해 설명해 드립니다. (0) | 2023.06.28 |
헤겔의 인정투쟁 (0) | 2023.06.23 |
메타 인지 소크라테스 에피메니데스 (0) | 2023.06.22 |
배우자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질문 한개.. 심리 테스트 (0) | 2023.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