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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메타 인지 소크라테스 에피메니데스

by 로이인랑 2023.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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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는 메타인지 학습법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메타인지 열풍에 트리거가 된 것은 한 방송사에서 한 실험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실험에서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과 보통 성적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iq, 성장 환경, 공부하는 시간 등을 비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차이를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메타 인지 능력이라는 겁니다. 
메타인지란 간단히 말해서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인지 능력을 말합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고려하면서 전략적으로 공부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메타인지 능력은 공부를 잘하는 데에만 필요한 능력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메타인지 능력은 일을 할 때에도 필요한 능력이죠. 
일을 할 때에도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알고 그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분배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일을 전략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메타인지 능력이 필요하다는 거죠. 
공부나 일을 할 때에만 메타인지 능력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도 이러한 메타인지 능력이 필요하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알고

내게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알며,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를 아는 것, 그것이 바로 메타 인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메타인지 능력이란 단순히 공부를 잘하기 위한 하나의 학습법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메타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메타인지,

이것이 바로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글들은 자세히 읽어보아도 그 주장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힘든 글들이 있습니다. 
물론 글의 내용이 어렵거나 혹은 내가 가지고 있는 배경 지식이 적어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글들은 문장이 현란하거나 논쟁이 복잡하거나 결론이 애매모호해서 이해하기 힘든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글이 어려운 이유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정확하게 한다면 문장이 현란할 이유도, 논쟁이 복잡할 이유도, 언론이 애매모호할 이유는 없겠죠. 
그렇다고 해서 그 글을 쓴 사람이 자신이 모르는 걸 아는 척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사실 자신이 그것을 모르는데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꽤 많았나 봅니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의 친구였던 카이레 폰이 벨포이신전에 가서 그리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던 이 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무녀는 그리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소크라테스이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카이레포는 소크라테스를 찾아가서 야, 네가 그리스에서 제일 현명하다고 하던데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 어이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왜 자기가 제일 현명하냐는 거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현명하다고 알려진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찾아다니면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데요. 
주로 철학자, 정치가, 시인, 장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들이 뭐 많이 안다고 떠드는데 가만히 하는 말을 들어보니까 이 양반들 뭐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겁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깨달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도 모르지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적어도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델포이신전에서 소크라테스가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신탁이 내려왔던 겁니다. 
이처럼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을 무지의 지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즉 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좀 알아라라는 말이겠죠. 
이처럼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것, 그것이 바로 메타인지입니다. 
그러고 보면 소크라테스야말로 메타인지 능력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들이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기 시작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 시작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무엇을 질문을 하면 대화 상대자는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다시 대답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또 그 반론에 대해서 대답을 하고 이런 식입니다. 
오늘은 기분이 좀 어떠냐?

아 좀 우울하다. 우울하다는 게 무슨 말이야? 아이 좀 치물하다고 치물하다는 건 무슨 말이야? 아이 씨 기분 더럽다고? 기분이 더럽다는게 무슨 말이냐? 아이 몰라 그래도 자네는 좀 낫네. 
자네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다 보면 대화 상대자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거죠.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입니다. 
그러고 보면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메타인지 능력을 향상시키는 훈련법이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어떻게 메타인지 능력을 향상시키는 걸까요?

그 이유는 대화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밖으로 꺼내어 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꺼내어 보아야 그 생각이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다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죠. 
즉 메타 인지 능력의 본질은 자신의 생각을 다시 생각하는 능력인 겁니다. 
자신의 생각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자기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보면 자신의 생각을 다시 생각하면 이상한 역설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런지 설명해보죠.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문장을 봅시다. 
이것을 문장 엑스라고 해보죠. 그런데 이 문장 엑스는 조금 이상한 문장입니다.

왜냐하면 문장 x가 참이라면 이 문장은 거짓이다에서의 이 문장은 참이므로 문장 x는 거짓이어야 하고 문장 엑스가 거짓이라면 이 문장은 거짓이다 에서의 이 문장은 거짓이므로 문장 x는 참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문장 x가 참이라고 하면 문장 x는 거짓이 되고 문장 x가 거짓이라고 하면 문장 x는 참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문장 x는 참도 거짓도 될 수 없는 문장이 됩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을 하는 걸까요? 이것은 이 문장은 거짓이다에서의 이 문장이 바로 문장 x이기 때문입니다. 
문장 x의 부분인 이 문장이 전체인 문장 엑스를 지시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 문장을 대상 문장이라고 한다면 문장 x는 대상 문장에 관한 문장, 즉 메타 문장인 셈입니다. 
이때 대상 문장은 부분이고 메타 문장은 전체인 셈이죠. 
역설이 생기는 이유는 부분이 전체를 지시하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뱀 윗 부분인 머리가 뱀 전체를 잡아먹는 문장인 겁니다. 
그러니 역설이 생길 수밖에 없죠.

이러한 역사를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이라고 합니다. 
메타인디도 이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대상에 대한 생각을 대상 인지라고 하면 그 대상인지에 대한 인지를 메타 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내가 테이블 위에 있는 사과를 하나 발견하고 이것은 사과이다라고 생각을 했다고 합시다. 
이것은 바로 사과에 대한 배상인지죠.

그런데 나는 이러한 대상 인지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이것을 사과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메타인지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과라고 나는 생각한다라는 메타인지는 왜 이 문장은 거짓이다는 문장 x처럼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에 빠지지 않는 걸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메타 인지를 하는 순간 메타 메타 인지를 하고 메타 메타 인지를 하는 순간 메타 메 메타 인지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 역설의 차원이 메타적으로 이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이것은 사과이다라는 생각을 대상인지, 이것을 사과라고 나는 생각한다는 생각을 메타인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이것을 사과라고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메타 메타 인지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사과라고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이것을 사과라고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메타 메타 메타 인지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메타 인지를 하는 순간 메타 메타 인지를 하게 되면 다시 메타 메타 인지를 하는 순간 메타메타메 인지를 하게 되면 메타메타메타 인지를 하는 순간 메타메 메타 메타 인지를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을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은 메타인지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메타 메 메타 메타 메타적 인지는 무한히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면서 역설도 또한 계속해서 메타적으로 유예가 됩니다. 
메타인지 차원에서 발생하는 역설은 메타 메타 인지의 차원으로 올라가고, 메타메타 인지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역살은 메타메타메타 인지의 차원으로 올라갑니다.

즉 역설은 근본적으로는 해소가 되지 않지만 계속해서 유예가 되기 때문에 역설이 발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어떤 화가가 세계 전체를 그리려고 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자기 자신도 세계의 일부죠. 
그래서 화가는 자기를 그림 속에 그려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까 세계를 그리는 자기가 빠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세계를 그리는 자기를 그려넣었습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까 세개를 그리는 자기를 그리는 자기가 또 빠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세계를 그리는 자기를 그리는 자기를 또 그려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까 세계를 그리는 자기를 그리는 자기를 그리는 자기가 빠져 있는 겁니다. 
이렇듯 무한이 계속해서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화가는 결국 세계 전체를 그리려다가

무한 퇴행에 빠져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화가는 세계 전체를 그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화가는 여전히 세계 속의 자신을 계속해서 그려 넣었습니다. 
빠그는 자신이 세계 전체를 그릴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그려넣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화가의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메타인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메타인지에 대한 메타 메타인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메타메타 인지에 대한 메타 메타메타 인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메타 메 메타 메타 메타 메타 인지를 가진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가장 높은 차원에서 인지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가장 높은 차원에서 인지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인지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화가가 자신을 그리면 그릴수록 무한 퇴행에 빠져버리듯이, 우리도 이러한 질문을 하면 할수록 무한 퇴행에 빠져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끊임없이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회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물음을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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