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개봉한 스타트랙의 극장판 영화 모션 픽처의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300년 후 어느 미래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지구 함대 본부에서는 엄청난 크기의 괴물체가 지구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괴물체를 그대로 두면 지구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구 함대 본부에서는 엔터프라이즈를 급파합니다.
이 괴물체가 왜 지구를 향해 오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죠.
엔터프라이즈는 우여곡절 끝에 괴물체의 내부로 들어가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놀랍게도 이 괴물체는 비저라고 불리는 의식이 있는 생명체였습니다.
이 생명체는 엔터프라이즈호의 한 선원의 몸으로 들어와 커크 선장과 대화를 하게 됩니다.
비전은 자신을 창조한 창조자를 만나서 그 창조자와 하나가 되기 위하여 이곳에 왔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합니다.
커크 선장은 정확한 사실을 알아내기 위하여 비저의 중심부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중심부에서 낡은 우주선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 우주선에서 커크 선장은 아주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냅니다.
비전은 1970년도에 나사에서 쏘아 올린 보이저 유호였던 겁니다.
보이저 유호는 나사의 명령대로 우주로 날아가면서 계속해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보이저 유코가 엄청난 정보를 축적하자 스스로 진화해서 의식을 가지게 된 겁니다.
의식을 가지게 된 보이저 유커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게 되었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하여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를 찾아 다시 직으로 돌아온 겁니다.
그리고 보이조이코는 자신의 창조주인 인간과 하나가 되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제가 왜 갑자기 이런 sf 영화 이야기를 했을까요? 그것은 이 영화의 스토리 구조와 해결이 말하는 정신의 변증법적 운동의 구조가 매우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정신이 자신의 내부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는 상태죠.
그런데 즉자 존재인 정신이 이제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타자화합니다.
그리고 그 타자 존재와 관계를 맺는 대자 존재가 되죠.
그리고 타자의 상태인 대자 존재는 또다시 자기를 부정하면서 원래의 자기로 귀환을 합니다.
그래서 즉자 대자 존재가 됩니다.
별거 아니에요.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독거함이 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자신의 골방에서 홀로 지냅니다.
그런데 그 골방에는 자신을 비출 수 있는 거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그에게는 친구도 가족도 없습니다.
아는 지인도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이름조차 모릅니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기 때문이죠.
너무나 심심했던 그는 어느 날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무엇을 그릴까? 낙타를 타고 있는 노인을 그려야지.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림을 완성하고 보니까 그것이 바로 자화상이었던 겁니다.
이제 그는 자화상을 통해서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해결의 변증법적 운동으로 이것을 설명해보죠.
그림을 그리기 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즉자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대자 존재이고요.
그림을 완성하고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바로 즉자 대자 존재인 겁니다.
이 스토리의 구조를 스타트럭의 스토리에 맞춰 봅시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 바로 적자 존재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우리 존재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 보이저 육호를 쏘아 올렸죠.
스스로를 소외시켜 스스로를 타자화하여 태양계 밖으로 보낸 겁니다.
이때 우리의 일부분인 보이저 6호가 대자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보이저 유코는 스스로 발전하고 귀환하여 창조주인 인간과 하나인 즉자 대자 존재가 된 겁니다.
신세계 에반게리오는 1990년에 방영되어 전설이 된 일본의 애니메이션입니다.
신세계 에반게리오는 지구를 공격하는 정체불명의 적을 묻지르는 인류의 비밀 병기 로봇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편부터 24편까지는 그냥 평범한 로봇 만화영화였습니다.
그런데 25편부터 갑자기 이상해집니다.
민망한 수준의 병맛 같은 스케치 몇 장을 보여주면서 주인공 신지가 갑자기 넋두리를 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때부터 수많은 오타쿠들이 맨붕에 빠졌습니다.
이게 도대체 뭐지? 장난하나
그런데 이 넋두리로 인하여 신세기 에반게리오는 오타쿠들의 성경이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아무것도 없는 세계의 새 신지가 바로 즉자 존재입니다.
즉자 존재는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어떤 형태인지 알 수가 없죠.
다른 사람이 없으면 자신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자 존재는 어떤 대상을 타자화하여 자신 앞에 세우고 대자 존재가 됩니다.
보카나시도가 이럴거라 지은마 이라 이르는 자나이카 비토리가 보고 마도 이때 시토리잖나이카 세카이 미남 보크다기라
그리고 자신을 확인하면서 즉자 대자 존재가 됩니다.
이 즉자 대자 존재가 바로 자기 의식인 겁니다.
그런데 자기 의식은 다른 자기 의식에 의해서 인정받을 때 알아야 존재할 수 있습니다.
나 때
도데모 이토모 코토데 닝의 테르데 시바이스르노가 고아인데 도카라 기라와레르노가 고아인데 요와의 제부 미르노가 고아인데
소나 미사도 사무 원하시잖아이까
도니 나리타이노네 도와
모로그요와이모노 데키테이
고르노 가라다 모르크 요하이 모노 키 다가라 오가이니 호시아나 게리바나라.
왜냐하면 자기 의식은 항상 어떤 다른 자기 의식에 대한 자기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의식을 가진 존재들은 끊임없이 자신이 인정받기를 욕망합니다.
자기 의식을 가진 인간은 타자를 통해서 자신을 봅니다.
타자가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자신을 본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타자가 자기를 긍정적으로 보면 자기 스스로 긍정적 존재가 되고, 타자가 자기를 멸시하면 자기 스스로 멸시하는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자기 의식을 가진 인간은 타자의 인정 여부에 따라서 자신의 정체성이 결정이 된다는 겁니다.
이제 자기 의식을 가진 인간들이 타자로부터 자신을 인정받기 위해서 투쟁을 벌입니다.
목숨을 걸고 자기를 인정해달라고 투쟁을 하는 겁니다.
목숨을 건 인정투쟁 이것이 바로 해결이 정신 현상에서 말하는 자기 의식의 핵심 개념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호네트는 해결의 인정투쟁 개념을 조금 더 발전시킵니다.
호네트는 우리는 어느 특정한 타자에게 인정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일반적인 다수의 타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방끈 길게 매보겠다고, 죽어라 공부하고 승진하겠다고 머리에 넥타이 졸라매고 본부장님 앞에서 재롱을 뜹니다.
그리고 뭐 먹을 때마다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고
이거 다 대부분 제 이야기입니다. 호네트는 우리가 이처럼 사회적 평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일반화된 타자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호네트는 임정에 대한 우리의 요구가 거부될 때 심한 모욕감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욕을 자신의 인정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타자와의 인정투쟁에서 자신이 인정받지 못할 때 타자에게 모욕감을 줌으로써 자신의 인정 욕구가 채워지는 듯한 효과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갑질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갑질을 함으로써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인정을 받겠다는 거죠.
이러한 과도한 인정 요건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인정 욕구는 채워지지도 않을 뿐더러 한 번 채워진다고 해도 더 많은 인정을 욕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갈증이 난다고 바닷물을 마시면 더 강한 갈증이 나는 것과 같은 겁니다.
퀵 엔드에드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자신이 빠른 통잡이라는 것을 아버지에게서 인정받기 위해서 아버지와 결투를 벌입니다.
결국 아버지의 손에 있죠.
아버지 또한 자신이 빠른 총잡이라는 것을 타자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아들과 결투를 벌인 겁니다.
그리고 아들을 죽이죠. 과도한 인정 욕구의 결과가 죽음인 셈이죠.
그렇다면 인정 욕구를 버려야 할까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타인의 인정과 타인의 평가를 무시하라고 말합니다.
타인으로부터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로 가능할까요? 제가 보기에 그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인정 요건은 본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젊은 시절에 나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몸을 갈아 이랬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했죠.
그러다 어느 날 선배가 나에게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내가 너무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 한다는 겁니다.
그냥 51대 49만 유지하라는 겁니다.
내가 친구를 51명을 만들면 나머지 49명은 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당시에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그것이 무슨 말인지 깨달았습니다.
어차피 네 개 친구가 생기면 또 그 수만큼 적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적어도 회사라는 경쟁사회에서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모두에게서 인정을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누군가에게만 인정을 받으면 됩니다. 그것이 한 사람이든 가족이든 커뮤니티든 상관없습니다.
심지어 동시대의 사람일 필요도 없습니다.
니체는 동시대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니체는 후대 사람들은 자신의 책을 읽지 않고서는 철학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맞았습니다. 그는 동시대 사람들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의 인정을 요구했던 겁니다.
나는 이것을 일종의 삶의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정 욕구를 버릴 순 없지만 인정 욕구의 대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
나에게 모욕을 주는 타자가 인정 욕구의 대상이 아닐 때 그것을 가볍게 무시하면 되는 겁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 자신을 증명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더 레슬러는 퇴물이 된 프로 레슬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랜디는 나이가 들어 심장에 문제가 생겨서 더 이상 경기를 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경고를 받습니다.
하지만 랜디는 의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경기장을 나서죠.
그때 애인이 달려와 경기를 하지 말아달라고 말리지만, 랜디는 자신의 세상으로 나아가야 된다고 말합니다.
랜디는 자신의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것이 비록 싸구려 삼류 레슬링 경기장이지만, 그는 그곳에서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링에 오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자신의 세상이고, 그 세상을 통해서 자신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군가의 인정이 필요하지만 모두의 인정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자신이 선택할 문제이죠.
그 누군가의 인정을 위해서 링에 올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면 됩니다.
'심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존주의에 대해 설명해 드립니다. (0) | 2023.06.28 |
---|---|
철학자들이 말하는 욕망이란 (0) | 2023.06.23 |
메타 인지 소크라테스 에피메니데스 (0) | 2023.06.22 |
배우자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질문 한개.. 심리 테스트 (0) | 2023.06.15 |
죽음을 바라보는 두 시선 물리학과 생물학 (0) | 2023.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