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사르트르, 야스파스 그리고 마르세 20세기 초반을 강타했던 철학 사조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이들은 오늘날까지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요.
오늘 우리는 실존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통해서 그동안 학자들만의 개별적 특성을 이해해 왔던 것과는 달리
이 철학 사조가 가진 기본적인 특징 및 그 성격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향후 우리 채널에서 지속적으로 다루게 될 관련 사상가들을 이해하는 그 근간으로 삼고자 합니다.
실존주의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내가 살고 있는 주변 환경에 대해 생각해보는 게 좋습니다.
나의 주변을 이루는 것들, 가령 tv나 노트북 또는 에어컨 등등 이런 것들은 전부 완제품이죠.
그런데 이러한 완제품들 사이로 미완의 존재, 즉 완성되지 않은 존재가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완제품들은 언제나 본질을 가지지만 이 미완의 존재인 인간은 그 어떠한 본질도 가질 수가 없다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죠.
지금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가령 에어컨은 더운 공간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
이렇게 본질이 규정되며 이것에 부합하지 못하는 에어컨은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뭘까요?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미완의 존재라는 거죠.
즉 완성이 되지 않은 상태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약에 이 강의를 보고 계신 분들 중 어떤 분이 말씀하시기를 난 완성된 존재야 라고 한다면 이제부터 그분은 그 완성된 성격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규정된 존재로 살아가야 할 겁니다. 여기서 자유라고 하는 것은 상실되는 거죠.
인간은 미완의 존재이기 때문에 오히려 완성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자기를 형성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이때 이 완성을 향한 구체적 방향이나 성격, 그리고 내용 등은 자기가 결정할 수 있다는 그 나름의 자유도 가지게 되는 것이죠.
쉽게 말해서 인간이 tv나 에어컨처럼 하나의 본질에 묶인 채, 또는 그런 본질을 외부로부터 규정받은 채 그 외의 모든 가능성들을 다 차단당한 상태로 살게 되면 그게 그 사람의 본질로 이해되는 것이고, 그에 따른 삶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완성된 삶이 되는 거라고 얘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게 말이 되나요?
이처럼 인간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개방적 존재이므로 어떠한 규정이나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존재이지만, 완제품에 해당하는 저런 것들은 주어진 본질에 따라 닫혀 있는 폐쇄적 존재라는 것, 언제나 그 기능이나 역할에 대해 평가를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자, 그런데 학생의 경우는 성적의 기준을 두고 평가를 받으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텐데,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이런 의문이 여기서 들 수가 있죠.
이때 이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한다라고 하는 학생에 대한 본질로부터 자기를 규정받고 있는 것이죠.
이런 상황 속에서는 그 학생도 완제품이 되기 위한 공정 과정에 놓인 사물과 비슷한 것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순간,
이 학생은 다시 있는 그 자체로서의 인간일 뿐입니다.
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또는 특정 사유로 그 학교를 그만두는 순간, 더는 학생이 아니며, 이 사람은 다시 다른 무엇으로 되어가는 존재로 있을 뿐이라는 얘기죠.
다시 말해서 앞서 생긴 의문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의문이 아니고, 특정 상황 속에서 부여받은 그 역할에 대한 의문에 불과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도 가끔 이러한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뒤집어서 보는 분들이 있죠. 학생 시절 공부 못하면 살 필요가 없다 직장생활 중 진급 못한 사람들은 못난 사람들이다 이런 식의 생각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못 본 겁니까? 인간은 원래 미완의 존재라는 것을 놓친 채, 특정 상황 속에서 일시적으로 부여받은 그 역할을 인간 그 자체의 본질로 착각해버렸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놓쳤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겁니다.
실존주의란 바로 이러한 착각을 예리하게 간파하면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의 진실을 밝혀보려고 했던 철학 사조를 말하는데, 인간에게도 본질이 있다고 보았던 고전철학과는 달리, 20세기 초엽을 강도했던 이 실종주의는 이러한 전통을 뒤집고 인간에게 본질이 없다고 하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 철학 사조다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제는 이러한 실존주의가 서양 철학에서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나 하는 것을 좀 살펴보면서 유신론과 무신론으로 구분된다는 점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요약을 해서 말씀드려볼게요.
우선 실존주의의 맹아는 이미 저 중세 철학 때 싹 뜨기 시작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 여기서 우리는 실존이라는 이 말의 뜻을 좀 알아봐야 하는데요.
본시 이것은 고대와 중세에서는 본질과 구분하여 사용했던 개념이에요.
쉽게 말해서 본질은 어떤 존재를 있게 하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고 따라서 많은 철학자들은 저 본질을 찾고자 했지 우연적인 성질을 가진 이 실존에 주목하지는 않았다는 거죠.
그리고 이렇게 본질을 찾고자 하는 저런 지적 전통은 제가 지난 강의 때 상세히 설명해드린 저 탈레스로부터 시작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철학사적 기초가 약한 분들은 이 강의와 별도로 저 강의도 꼭 보셔야 하는데요.
어쨌든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는
오로지 신만의 본질과 실존이 그 자체로 일치되어 있으며, 이 모든 피조물들은 본질과 실존이 일치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본질로서의 신이 필요하다라는 이런 주장을 하게 만드는 것인데 이는 인간은 신이 아니라서 실존은 하되 본질은 없다라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거잖아요.
바로 여기에 실존주의가 싹 들 수 있는 그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신의 본질로부터 인간이 끊어져 버린다면 이제부터는 인간은 실존은 하되 본질이 없는 상태가 되는 거죠.
그렇다면 이렇게 실존하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걸까요? 네 우연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며, 확고한 존재 이유를 갖지 못했으므로 불안에 휩싸인 존재로 있게 된다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훗날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 하이데거는
인간의 근본적인 기분 상태와 관련하여서 불안에 대한 문제를 얘기했으며, 사르트레 역시도 인간은 결국 우연히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논설을 펼쳤던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 인간은 이러한 상태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신이라고 하는 본질에 묶여 있어야 한다 라고 보았던 저 중세 철학적 논의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 힘을 상실해가기 시작을 한다는 사실에 주목을 해야 하는데, 이러한 시작이 언제부터 본격화되었나 하면, 수학의 발전에 기초한 과학 문명이 꽃을 피우는 근대부터였다는 거죠.
인간이 신의 품 속에서 순진하게 세계를 바라보았을 때는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도는 것이었지만, 과학의 눈으로 분석하면서 세계를 바라보았을 는 지구가 도는 거였죠.
이렇게 과학의 발전은 신에 대한 맹목적 믿음의 균열을 내기 시작을 했고,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태어난 인물 중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는 파스카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인물은 케플러나 갈릴리에와도 뒤지지 않는 위대한 수학자 반열에 오른 인물이었는데, 그가 보기에 과학은 위대하지만,
이것으로 우리는 세계와 우주의 정부를 설명할 수가 없으며, 오히려 그 한계를 더 명확하게 느끼게 된다고 그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광대무변한 세계 속에서 나약한 갈대에 불과하다고 얘기를 했었죠.
하지만 다른 존재들과 달리 이 갈대는 생각하는 갈대이기 때문에 그 고유한 특징을 가지며, 이러한 인간은 타고난 본성 때문에 특별한 이유 없이도 권태를 느낄 만큼 불행하다고 그는 말한 바 있습니다.
세계에 대한 확실성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이것은 결코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보통 는 그 권태 따라서 파스카는 신에게 의지하여서 그 신앙 속에서 이 권태를 극복하고 확실성을 얻고자 노력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파스카는 다시 신에게로 돌아갔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남는 게 있죠 과연 인간은 신이라는 본질에 따라서 실존하는 걸까 라는 이런 의문
만약 저 본질이 허울하면 그때부터 인간은 어떻게 되는 걸까 라고 하는 이 근본적인 불안 이러한 불안 속에서도 철학의 역사는 계속 흘러갔으며, 이러한 흐름이 19세기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에게 가 닿았을 때 본격적으로 실존주의라고 하는 철학이 등장을 하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이러한 논의 중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해서 요약해서 말씀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신 또는 그에 필적할 만한 어떠한 지고한 원리를 본질로 떠받은 채 이것으로부터 나는 실존한다라고 하면 마음도 편하고 나의 존재 이유도 필연적으로 잘 설명이 되기 때문에 좋지만, 문제는 이러한 본질의 허구일 수도 있다는 불안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는 데 있는 것인데, 실존주의란 바로 이러한 의문으로부터 출발한 사상이라고 볼 수 있어서 근원적으로 이 사상은 믿음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실존철학자로 우리는
휴 키에르케고르를 꽂고 있으니,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또 그 자신의 철학 또한 신학적인 것이었어요.
그러니 어떤 면에서 보자면 참으로 이것은 역설적이다 라고 할 수 있겠는데, 케에르케고로는 왜 본질이 아닌 실존에 관심을 가졌으면서도 기독교적 철학을 전개했던 걸까요? 우선 이러한 의문에 답하기에 앞서서
해일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간단하게라도 좀 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케에르케고르는 이 해일 철학에 큰 반감을 가지면서 자기의 실존철학을 펼쳤거든요.
우선 헤겔은 문화라는 것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문화란 인간이 창조한 것들 속에서 인간이 사는 상태를 말해요.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정신 활동을 펼치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만들었죠.
국가, 제도, 법률, 종교, 예술 등등.
그런 후 다시 이런 것들로 구성된 그 세계 속에서 사는데, 재밌는 것은 이러한 인간이 자기가 창조한 그 결과물들로부터 오히려 구속당한다는 점입니다.
아, 국가나 법률이 인간을 지배하잖아요 바로 이렇게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인간의 정신이 만든 저런 세계에서 사는 상태를 어 해일은 문화라고 불렀다는 겁니다.
근데 해일은 여기서 좀 더 나아갔어요.
그가 보기에는 법률이나 제도, 학문이나 종교와 같은 것들 말고도 자연적으로 발생한 모든 것, 그리고 더 넓게는 자연 그 자체도 정신의 산물이라고 보았습니다.
바로 이 지점부터가 이제 우리의 상식에는 잘 안 맞는 지점이죠.
어쨌든 이러한 해결의 철학은 자연 전체마저 정신으로 보면서 이 모두를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해명하는 자기 철학을 펼쳤는데, 이러한 거대한 철학적 담론 속에서 정작 무엇이 소외되느냐 하면 바로 개인이라는 겁니다.
당장 사랑했던 여인과 헤어져 신뢰에 빠져 있는 당신에게 이런 거대 담론은 무슨 의미를 가지냐 하는 것이죠.
당장 내가 살 곳을 구하지 못한 경제적으로 어려운 당신에게, 그 실존적 고뇌 속에 빠져 있는 당신에게 저런 거대 담론이 무슨 의미를 가지냐 하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케에르케고로는 이러한 거대 담론으로부터 내가 당장 처한 현실적 고뇌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라고 물었을 때,
저 땅의 것은 정말로 쓸모가 없다라고 보았던 사상가라는 거죠.
따라서 그는 방하는 개인의 삶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저런 거대 담론 말고, 그 대신에 신 앞에서 홀로 선 내가 그 신으로부터 그러한 문제의 답들을 구해야 한다 라고 주장했었습니다.
이때 그가 말한 기독교는 오늘날의 대형 교회에서 보는 그런 기독교가 아니고, 자신이 홀로 신 앞에 서서 만나는 그런 기독교, 즉 원시 기독교를 말하는 거였어요.
다시 말해서 거대한 세계로부터 개인은 소외가 되는데,
그가 살았던 덴마크에서도 기독교는 이미 국가화되어 있었고, 전체주의적인 성격으로 변질되어 있었다는 얘기고요.
이러한 기독교가 개인의 문제를 놓치고 있었다 라고 이제 이 슈에렌 키에르케곤을 바라보면서 비판을 했었거든요.
따라서 그는 소외된 그 개인을 직접 만나는 신 그 신으로부터 자기의 존재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라는 식의 철학을 펼쳤다는 것인데 이러한 그의 철학을 오늘날 우리는 유신론적 실존주의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로부터 현대 실존주의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꼭 보고 있으니 여기에는 카이 아스퍼스나 가브레 마르셀과 같은 인물들이 속한다 이렇게 분류할 수 있고요.
반면에 하이데거나 사르트르 또는 멜로 퐁테와 같은 인물들은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분류가 된다는 겁니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신이라는 존재를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고 입증 가능한 대상으로 보면서 그렇게 믿는다기보다는, 이 세계에 대한 의미를 상실한 채 자기 존재에 대해 불안에 떠는 그 실존으로서의 개인을 위해 다시 요청해야 할 것으로 그렇게 본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물론 이러한 입장은 다분히 또 크러그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칼 야스퍼스나 가브리 마르셀 등 등은 또 따로 얘기를 해야 하는 부분도 가지고 있어서
여기서는 이 정도로만 얘기를 할 텐데요.
어쨌든 이에 비해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말 그대로 신을 전제하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리고 대개 이러한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시작은 니체로부터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니체 그 자신은 여기서 왜 나를 불러내냐 하고 당황스러워 하겠지만 말이에요.
어쨌든 니체는 신을 전제로 했던 서양의 지성적 전통에 반기를 들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있는 그 자체로 드러내려고 했던 사상가였기 때문에 무신유적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를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신에 대한 전제가 없기 때문에 인간의 역할을 강하게 부각을 시키거나 아니면 다소 비관주의적인 그런 흐름으로 빠지거나 하는 모습들을 보여왔는데
사르트의 경우는 신이 없는 이 세계에서 인간은 아무런 본질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우연히 태어났다 이렇게 이제 봤고 따라서 이제 이러한 인간에게는 그야말로 이제 자유가 주어진다.
왜냐하면 본질이 없으니까 어떠한 규정도 받지 않으니까 자유 그 자체라는 거죠.
이렇게 이제 풀이를 했지만 여기서 자유를 마냥 기뻐하는 그런 것으로 본 게 아니고 자유롭도록 선고를 받았다
는 식으로 해서 자유로부터 인간은 벗어날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이제 어둡게 묘사를 했다는 얘기구요.
또 반면 까미의 경우는 어 반항하는 인간을 얘기하면서 부조리한 세계로부터 인간의 역할을 거기에 부각시키면서 그 인간에 대해서 논했던 그런 방향으로 또 이 철학 사조가 흘러갔다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러한 실존주의는 유신론과 무신론이라고 하는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면서 흐르게 되는데
사실 그 앞에 칸트 철학의 반기를 들었던 독일의 사상과 하만과 야코비의 실존에 대한 그리고 이를 수용해서 발전시켰던 휠링에 대한 논의 등을 보다 디테일하게 전개하면서 이 실존주의의 흐름을 설명하면 좋지만 이렇게 되면 처음 듣는 분들에게는 다소 부담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세부적 논의는
다음에 실존주의 철학의 역사 이런 제목으로 제가 따로 진행을 하는 게 좋을 듯하고요.
여기서는 이렇게 실존주의가 중세 철학에서부터 그 사상적 씨앗을 품고 있었으며 이것이 파스칼에 의해서 이제 얼핏 그러한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세월이 흘러가지고 키에르케고로 와서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형태로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실존주의 철학은 그 특성상 본질에 대한 허구성을 폭로하려고 하는 기지를 강하게 갖고 있기 때문에 신을 배제한 채 실존을 논하려고 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 또한 한 축을 형성하면서 그렇게 발전을 해왔다 라고 하는 이런 내용을 잘 정리해 놓으면 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오늘 강의 마지막으로 실존주의 철학이 가지는 근본적 특징에 대해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무신론에 속하는 분들이거나 유신론에 속하는 분들이거나 할 것 없이 이들이 펼친 실존주의 철학은 실존적 근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을 탐구 주제로 삼고 있다 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 말을 처음 듣는 분들은 다소 어려워할 수 있으므로 다시 쉽게 풀이를 해드려야겠는데요.
이것을 쉽게 하는 방법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기분에 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분은 대상화할 수 있는 게 아니죠.
현재 내가 느끼는 기분, 가령 불안, 초조 또는 기쁨 등등은 대상화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나의 내면에서 내가 느끼는 주관적인 것이자 직접적인 것이고, 이를 간접적인 방식으로 언어를 통해 표현은 할 수 있어도,
그 표현에 내가 느끼는 기분 상들을 직접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예를 들어 나의 키나 몸무게는 대상화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치화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개념화해가지고 그렇게 이제 객관화시킬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나의 기분을 저런 키나 몸무게처럼 수치화해서 대상화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얘기죠.
그래서 이렇게 객관화할 수 없는 인간의 기분은 오랜 세월 동안 서양철학에서 다뤄지지 않았고
무시당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실존철학에서는 바로 이 기분을 가진 인간의 그 근본적인 경험, 즉 실존의 경험을 무시하지 않은 채 그대로 직시한다는 파격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따라서 실존주의는 실존을 연구하고 표현할 때 그것을 수학적 공식으로 적립하는 방식을 쓰거나 논리학에서 보듯이 개념화하는 방식을 쓰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인간의 기분은 주간 위의 지평에서 펼쳐지는 것이고,
이것은 기하학적 진리처럼 언제나 동일한 값을 가지는 게 아닌, 시시각각 변화하는 불완전한 것이잖아요.
따라서 실존주의는 유독 문학이나 연극 등과 같은 예술적 형식을 빌려서 표현하는 일이 많았던 겁니다.
사르트가 유명한 극작가라는 것 또 실존주의 문학의 거장 감이나 다음에 다루게 될 카프카와 같은 인물들 왜 이들이 예술의 현식을 빌려서 인간의 실종을 표현하고 있는지 이제는 좀 이해가 되셨죠? 그렇다면 이렇게 기분을 가진 인간은 이 세계 속에서 어떤 경험을 먼저 하게 될까요?
나의 외부에서 발생한 사건 아니면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건? 네 당연히 나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사건, 즉 나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의식하는 이 사건을 먼저 겪게 되는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의식하면서 살죠.
그리고 이 의식에 기초해서 세계의 모든 것들을 바라봅니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경우는 현존재의 각자성이라는 말을 했는데
인간은 누구나 자기라고 하는 존재에 관심을 가진다라는 의미에요.
이것이 실존적 근본 경험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하는 그 실존은 언제나 시간의 지평 위에서 자기에게 문제 의식을 느끼면서, 자기를 느끼면서, 자기를 의식하면서 그게 개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존재하고 있는데 우리 강의 초반에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완제품의 형태로 있는 게 아니고
원제는 무엇으로 되어가고 있으며 그것에 자기 자신이 직접 관여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얘기죠.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은 언제나 무엇으로 되어버린 현실성일 때가 많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학교나 직장이 나에게 현실로 주어질 수 있는데 이것은 이미 어떤 형태로
갖춰진 형태로 그게 주어진 현실성이잖아요.
물론 이러한 현실성이 부분적으로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고 때론 큰 변화를 일으킬 때도 있지만 그렇게 드물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는 이렇게 만들어져 있는 그 현실성 속에서 늘 무엇으로 되어가고 있는 인간, 즉 그 실존은 언제나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를 보다 실존주의적으로 말해보자면
시간적으로 개방된 실존의 가능성이 이미 무엇으로 되어 버린 폐쇄적 현실성보다 언제나 크기 때문에 만족을 느낄 수가 없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현실 존재보다 가능 존재로 열려 있는 실존의 이러한 모습이 인간 존재의 진정한 근거라고 보았던 대표적인 철학자가 앞서 소개해드린 칼 야스퍼스나 사르트르 그리고 하이데거와 같은 인물들이었던 거죠.
이렇듯 실존주의가 바라보는 인간은 본질이 없는 한낱 실존이며,
그것은 칸트가 놓였던 저 이성적 존재,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이 주간에 마련된 아주 정교한 선언적 프로그램에 따라서 세계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보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객체화할 수 없는 기분을 가진 그런 주관적 존재라는 것 따라서 나를 설명하기 위해 이 존재를 객체화하는 순간 맥박이 멈춰버린 사물, 즉 숨결이 없는 개념과도 같은 것이 되고 만다고 이 철학 사전은 보았다는 겁니다.
이런 실존주의를 견제한 철학자들은 대체로 현상학이라고 하는 방법론을 가지고서 그 나름의 존재론적 사상을 펼쳤는데, 여기서 현상학이란 후선이 창시한 것이고, 이 후선의 제재가 하이데거였죠.
따라서 스승의 사상을 적극 활용하여 자기 철학을 수립한 하이데거의 철학 속에서 현상학적 방법론을 찾아보기란 아주 쉬운 일입니다.
또 사르트르 역시도 후설과 하이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현상학을 활용을 하고 있으며, 메를로 봉트 역시 마찬가지죠.
그런데 여기서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하고 제가 설명을 하기 시작하면
너무 길어질 뿐만 아니라, 이미 이 강의에서 충분히 말씀을 드려놨기 때문에 필요하신 분들은 이것을 보는 게 더 효율적일 것 같고요.
여기서는 왜 이들이 현상학에 주목을 했는가와 관련하여 아주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오늘 강의를 마무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우선 현상학이란 인간의 의식에 집중하는 철학인데, 그러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편견들을 다 내려놓고, 순수하게 남은 그 의식으로 이 세계를 바라볼 것을 주장을 했거든요.
따라서 이 현상학은 쉽게 말하자면 인간의 의식이 가지는 특징과 구조를 깊게 파악하고자 했던 그런 철학이라고 보면 되는데, 실존주의는 그 관심사가 세계에 대한 거대 담론이 아니고, 인간, 특히 나라고 하는 개인에게 쏠려 있잖아요.
따라서 지극히 주관적인 그 나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의식의 특징을 파악을 하여서, 그것으로부터 인간이라고 하는 이름의 이 실존이
어떤 성격을 가지는가 하고 분석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러한 철학자들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현상을 활용을 해야 한다 라고 보면 되는 것이고 또 실존주의는 개인에 대한 문제만 집중을 해서 얘기를 많이 하기 때문에 이러한 개인으로서의 실존이 세계하고는 또 어떻게 관계를 맺나 여기까지 해명을 하려면 아 또 다른 방법론을 동원해야 될 거 아닙니까 실존에 대한 얘기만 하고 그 실존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관계에 대한 얘기를 안 해버리면 철학에 반쪽만 남게 되는
그래서 이러한 부분을 얘기할 때도 현상학을 동원합니다.
왜냐하면 현상학은 의식을 가지고 인간이 세계와 어떠한 관련을 맺는가 하는 것을 지향성 개념이라는 걸 가지고 풀이해 나가거든요.
따라서 이런 것을 동원해서 이런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그 나름대로 활용을 했다 이렇게 보면 된다는 거죠.
특히 사르트르가 현상을 어떻게 활용을 하였는가 하는 것은 이 강의에서 제가 또 설명을 해둔 바가 있으니 참고하실 분들은 참고하시면 이해에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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