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건강했던 현미가 숨진 채 발견된 시각은 아침 9시 37분 팬클럽 회장인 73세 김 모 씨가 현미의 자택에 들어갔다가 싱크대 앞에서 쓰러져 있었던 그녀를 발견했던 것인데요.
일부 사람들은 아무리 팬클럽 회장이라지만 어떻게 현미의 자택 비밀번호까지 알고 있었고, 왜 아침 9시라는 이른 시각에 그곳을 방문했으며,
쓰러진 현미를 발견 후 왜 119가 아닌 112에 신고를 했느냐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정말 듣고 보니, 고령의 여성이 혼자 살고 있다면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일은 웬만해선 없을 것이고, 또한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이른 아침에 남의 집을 방문하는 경우는 통상적으로 드문 케이스인 데다가,
그리고 사람이 쓰러졌으면 보통은 119에 신고를 하는데, 왜 119가 아닌 경찰에 신고를 했던 건지 다소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인데요.
현재 팬클럽 회장 김 모 씨는 당시 받은 충격으로 모든 언론과의 인터뷰를 거절하고 있는데, 일부 사람들은 김 모 씨가 왜 인터뷰를 거절하고 있는지, 잘못한 게 없다면 최초 목격자로서 당당하게 인터뷰에 응하면 될 것인데,
굳이 인터뷰를 거절할 것까지 있는지, 그의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현미는 85세의 고령이었던 데다가, 2년 전 발목이 크게 다쳐 철심을 11개나 박는 대수술을 했기 때문에, 한 번 다치면 반복적으로 다시 다치는 경우가 많은 발목 부위의 특성상, 오전에 주방에서 뭔가를 하다가
발목이 다시 접질러 넘어지면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이라는 게 현재까지 알려진 사인인데요.
다시 말해, 현미는 누군가가 일부러 해를 가한 것이 아닌, 스스로 안타깝게 별세한 것으로 봐야 하는데, 저희 채널도 앞서 언급한 일부 사람들의 타살 의혹에 대해서는 다소 과하게 추측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새 믿지 못할 일들이 너무나 많이 벌어지는 세상이고, 또한 건강했던 연기가 너무 갑자기 일찍 떠났기 때문에, 일본 네티즌들이 안타까운 마음에 그렇게 생각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요.
일부에서는 현미가 과거의 방송에 나와 띠동갑, 연하, 남친이 있다고 밝혔기 때문에,
해당 팬클럽 회장이 당시 밝혔던 연하남친일 수도 있어서 비밀번호를 알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어쨌든 간에, 90세 이상, 충분히 더 오래 살 수도 있었을 정도로 건강을 유지했던 현미가 다소 이르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만큼은 너무나 안타까운 사실인 건 분명한 것 같은데요.
현미는 별세 하루 전에도 무려 두 건의 지방 행사를 소화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대구에서 팬들과 함께 노래 교실 행사를 가졌고, 대구 스케줄을 마친 후에는 경북 김천으로 넘어가 무료 봉사로 김천효 콘서트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 것으로, 많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해 확인이 되고 있는데요
저희 채널의 댓글에서도 당시 현미와 같은 장소에 있었던 분들의 댓글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현미는 별세 전날, 사단법인 한국나눔연맹이 경북 김천 효 문화관에서 펼친 실버 효도 콘서트 무대에서 노래했는데, 한국나눔연맹 관계자는 당시 콘서트 때 목소리에 에너지가 넘치고 건강한 모습이어서 마지막 무대가 될 줄 몰랐다고 전했는데요
비록 팔순이 훌쩍 넘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활력이 넘쳤고, 게다가 독거노인들을 위해 무료로 콘서트 무대에 오를 정도로 선한 마음씨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한 시청자분의 댓글을 통해 불과 일주일 전까지도 사우나에도 출입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은 두 아들들이 왜 현미를 홀로 떠나게 만들었는지, 왜 어머니를 모시지 않고 따로 살고 있고, 그것도 국내가 아닌 머나먼 미국에 살고 있어서, 별세한 지 이틀이나 지나서야 한국에 들어올 수 있는 거냐며 답답해하고 있는데요.
외국이라도 인접한 아시아권 나라였다면 당일 만에 올 수도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비행기를 타도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미국에 있었고, 게다가 직항 항공편도 없어서 다른 곳을 경유해서 오느라 어머니의 비보를 접한 뒤 즉시 항공권을 구입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바람에 현미는 이틀 이상 빈소도 꾸려지지 못하고, 중앙대 병원의 차가운 냉장고 안에서 아들들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만일 아들들이 국내에 있었다면 벌써 3일장을 치르고 오늘쯤 발인을 진행했을 텐데 이에 대해 네티즌들은 뼈빠지게 공부시켰더니, 다 왜곡 나가 살아버리면 부모가 어떻게 되든 나몰라라 하는 것이냐며 다소 격앙된 반응을 보였는데요.
하지만 두 아들들이 미국으로 가서 살게 된 건 과거 어린 시절 학생 때 유학을 떠나면서 시작된 것이었고,
미국 유학은 모두 모친인 현미 에지시로 떠나게 된 것이었지, 아들들이 먼저 원해서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현미는 이봉주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지만, 후에 이봉주가 본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본초에게는 현미보다 먼저 낳은 자식들이 있었는데, 후에 이봉조가 현미와 두 아들을 낳은 뒤, 다시 본처에게 가서 또 딸을 낳아, 그 광경을 보다 못한 현미가 이봉조와 갈라서게 되는데요.
그 일로 인해 현미의 두 아들은 아버지가 없는 자식들이 되어 버렸고, 그래서 두 아들이 국내에서는 많은 이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것을 걱정해, 현미는 아들들을 미국으로 보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게 참으로 어려웠던 시절이었는데, 현미는 허영이 아닌 아들들을 보호해주고자 하는 모종에 그렇게 타국으로 보내게 되었던 것인데요.
아들들은 어릴 적부터 미국에서 커왔다 보니 미국 생활에 더 적응이 되었고,
현재 모든 생업의 본거지가 미국에 있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미국에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인 이영준 씨는 현재 미국에서 부동산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그의 부인인 가수 원준이는 친정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은 바람에 홀로 한국에 들어와 어머니를 간병하고 있다는데요.
결국 아들들을 어린 시절 미국으로 보냈던 것이 오늘날 현미가 혼자 살 수밖에 없게 된 이유가 됐고,
나아가 곁에 아무도 없이 홀로 싱크대에서 넘어져 쓸쓸한 고독사를 맞이했던 이유가 되기도 했으니, 현미는 이런 자신의 사고에 대해 누구의 탓도 할 수가 없고, 오로지 사실혼 관계였던 이봉조를 탓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전 현미는 항상 이봉조가 너무 그립고, 평생 가장 후회되는 일이
바로 이봉조가 다시 합치자고 끈질기게 애원했을 때, 그것을 거절한 것이라고 하는데요.
생전에 이봉조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매번 눈시울을 붉힐 정도로 미안하고, 죄수로 온 마음이 강했던 현미는, 과거 이봉조가 다시 합치자고 울고 매달렸을 때,
본처와 또 딸을 낳았으니, 양심상 본처에게 가서 살라고 끝까지 거절을 했었다고 합니다.
만일 자신이 양심 없는 나쁜 여자였으면 이봉조와 살았겠지만, 본처의 입장을 고려해 그렇게 이봉조를 보냈다고 하는데요.
후에 이봉조가 당뇨 합병증으로 쓰러지자, 현미는 이봉조를 보러 가게 되는데, 당시 이봉조는 위에 런닝만 입고 있었고,
아래, 위, 틀리를 모두 뽑아 현미에게 보여주고는, 당신이 다시 나를 받아주면 나는 옛날에 이봉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틀리를 다시 착용하고 악기를 불어 보이기도 했다는데요.
한때 대 작곡가로 이름을 알렸던 이봉조가 그렇게 홀로 병들어 누워 있자, 그 모습이 너무나 불쌍했던 현미는 눈물을 펑펑 쏟았고, 이봉조가 너무나 간절하게 현미에게 애원했지만, 현미는 그래도 본처에게 가시라고 했다는데
그러고 얼마 안 있어 이봉조가 세상을 떠나자, 현미는 그때 이봉조를 거부했던 것이 평생에 가장 큰, 너무나 한스러운 후예로 남아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녀는 이봉조가 56세라는 너무나 젊은 나이로 작고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고, 자신과 다시 합쳤더라면 마지막 떠날 때 눈이라도 감겨줄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해 너무나 한이 된다고 하는데요.
이봉조는 투병 중에도 작곡해 놓은 곡들이 있었는데, 87년에 이봉조를 하늘로 보낸 현미는 2년 후인 89년에 그의 유작들을 모아 노래를 녹음해 음반으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녹음실에서 노래를 부르던 현미는 이봉조의 모습이 너무 눈에서 내서 쉼 없이 울음이 터지는 바람에
녹음을 한 번에 끝내지 못하고 10번 이상 계속 엔진을 낸 끝에 겨우 마칠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녀는 지난해까지도 한 방송에 나와 아직까지도 내가 이봉조를 많이 사랑한다며, 젊은 시절 20년을 함께 했던 그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봉조의 본처인 노전숙 씨는 2013년에 별세했는데, 당시 자녀들이 어머니를 이봉조 곁에 묻자, 현미는 잘했다 죽어서라도 같이 있어야지라고 고전하며, 자신은 나쁜 여자가 아니라고 했는데요.
사실 생각해보면 이봉조는 희대의 바람둥이였기에 현미에게는 참으로 나쁜 남자였지만, 그럼에도 현미는 그런 이봉조가 몇 번을 합치자고 매달렸는데, 자신이 들어주지 않았던 것이 너무나 불쌍하고, 후회가 될 정도로
넘치는 인정으로 자신과 아들들의 인생을 망친 남자를 용서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봉주로 인해 아들들을 미국으로 보내게 되었고, 그로 인해 현미는 충분히 더 살 수 있었던 인생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병원에서 투병하다 별세한 것이 아니라 집에서 조용히 떠난 것도
그나마 다행이고, 많은 이들은 그래도 아프지 않고 간 거면 잘 살다 간 거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그녀는 생전에 한 영화 감독의 제의로 자신이 60년대부터 활동했던 일생을 영화화할 예정이라고도 했고 구순이 되면 데뷔 70주년 콘서트를 꼭 할 것이라고도 말했지만 그 꿈들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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