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해 진격하자 1950년 10월 2일 소련은 중공군의 개입을 승인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준공군은 11월부터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했죠.
북한군을 압록강까지 밀어낸 상황에서 이렇게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러한 와중에 우리나라 정부는 한 가지 대책을 내놓는데요
그것은 바로 국민방위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국민방위군에서 대한민국 역사에 남을 엄청난 사건이 발생합니다.
중공군의 참전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를 시작하며 정부는 그들의 공격에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나 고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중공군의 공격에 따른 후퇴와 전쟁의 과정, 그리고 결과를 알고 있지만 당시 우리 정부는 이 상황에 굉장한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평양 철수 이후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되었고, 미국은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어 휴전을 고려하기도 했죠.
휴전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는 전쟁을 확대하자는 확전론, 그리고 철군을 하자는 말까지 오갔던 상황이었습니다.
아마 누군가는 한반도에서 유엔군이 사라지고 북쪽에서는 중공군이 밀고 내려온다는 상상까지도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국민 총전력으로 극복하겠다고 중대 성명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처음엔 준군사조직으로 활용했던 대한청년단을 무장시키려고 했지만 미국이 장비 지원을 거절해 포기했고 국민방위군을 창설하게 됩니다.
국민방위군이 세워진 가장 큰 이유는 인력 확보였습니다.
미국의 추가 지원을 확보하지 못한 이상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전투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었죠.
얼마 뒤 현역 군인, 군무원, 경찰관, 혁무관 등을 제외한 나머지 만 17세에서 40세의 남자들을 제2 국민병으로 편입하여 국민방위군으로 모집할 수 있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국회에 제출되었습니다.
곧 1950년 12월 21일 법령이 공포되었고 그에 따라 국민방위군이 창설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전쟁 이전부터 준군사 조직으로 치안 유지, 공비소탕, 모병 업무 등을 해온 우익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이 해체되어 국민방위군에 통합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민방위군은 대한청년단을 중심으로 사령부를 설치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한청년단 단장 김윤근을 준장으로 임관시키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문제는 그가 민간인 출신이며, 사령부의 다른 간부들도 청년단 출신 방위 장교 뿐이라는 것입니다.
방위장교는 방위사관학교에서 훈련받고 장교가 된 사람들인데, 단 2주간의 짧은 군사교육을 받았을 뿐이었습니다.
물론 대한청년단이 준 군사 조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들을 2주차 훈련병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군 경험은 매우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문제는 많아 보이지만, 일단 지휘체계까지 마련된 국민방위군은 사람들을 교육시킬 교육대를 후방인 경상도 일대와 제주 지역에 설치했습니다.
국민방위군이 설치되자, 국방부는 우선 위기 상황을 알리며 사람들이 소집에 적극 동참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징병을 시작했습니다.
군은 만 17세에서 30세의 제2 국민병은 지시에 따라 경찰서 또는 파출소로 소집에 응할 것을 공포했습니다.
당연히 이에 불응 시 처벌하겠다며 엄포를 놓았죠.
당시 서울에 피난민이 몰려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서울, 경기 지역에서 사람들이 동원되었습니다.
이렇게 징집된 국민방위군은 모이는 대로 200명에서 300명씩 묶어 중대 단위로 편성해 교육대로 보냈습니다.
그 중 일부는 뱃길을 통해 제주도로 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경상도 일대에 위치한 교육대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아주 큰 피해가 발생하게 됩니다.
중대 단위로 편성된 국민방위군은 서울에서 경상도까지 도보로 이동했습니다.
심지어 당시 대부분의 곡도는 군사작전 및 보급로로 통제 중이었기 때문에 작은 길이나 산길을 통해 이동해야만 했죠.
그런데 한겨울, 극심한 추위 속에 험한 길을 따라 먼 거리를 이동함에도 불구하고 상부에서는 겨울 피복은커녕 먹을 음식도 주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했죠. 행군에 따른 피로와 추위, 굶주림 속에 사람들이 죽거나 동상에 걸리는 등 많은 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이 죽음의 행군이 끝나고 각 교육대에 도착했을 때 출발했던 인원의 절반 이상이 사라졌습니다.
이 사라진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공식적으로 불명이지만, 보통 수만 명에서 10만여 명까지 죽었을 것으로 보며, 나머지는 대부분 다치고 병에 걸리거나 도망쳤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낙오하지 않은 약 30만 명의 사람들은 제대로 시설도, 식사도, 의약품도 갖춰지지 않은 준비 상태가 개판인 교육대에 수용되었습니다.
교육대에 도착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아, 동상,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당시의 참상은 후에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되는 최경록 준장의 일화에서 드러나는데요
헌병사령관이었던 그가 포로수용소를 시찰한 뒤 대구로 향하던 중, 어느 초등학교 앞에서 거짓 꼴인 군인을 발견하곤 군기가 빠졌다고 생각해 그들을 혼내려고 했는데, 그들은 경례는커녕 반항적인 눈으로 쳐다보며 그에게 초등학교 교실마다 굶고 병들어 죽은 시체들이 놓여 있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국민방위군이었던 것입니다. 최경록 준장은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이들보다 심한 경우에는 산골 오지에 수용한 경우도 있었고, 제주도에 있던 한 교육대에서는 건강이 나쁜 인원들이 들어와 죽어 나가자 약 3천여 명을 신체 부적합자로 쫓아내버렸습니다.
그들은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도로가에 앉아 있거나 마을과 마을을 방황했습니다.
이렇게 나오하지 않고 교육대에 도착한 사람들도 열악한 환경에 죽어나갔습니다.
일명 국민방위군 사건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은 전쟁과 겨울이라는 요인으로 장정들이 죽어나갔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민방위군 사령부와 교육계의 간부들이 공금 횡령 등의 범죄를 저지르며 벌어진 사건이었죠.
이 사건은 국회에서도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곧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이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국민방위군 참상 운운하는 것을 불순분자의 소행이라고 항변했고, 신성모 국방부 장관도 제5열의 선전이라고 답변했습니다.
여기서 제5열은 간첩 활동 등 첩보 활동을 벌이는 사람을 뜻하는 말인데, 결국 국민방위군의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덕분에 국민방위군 개선 정책은 곧바로 반영되지 못했고, 사상자 수는 계속 증가했습니다.
국회에서 조사를 계속하며 이 사건의 논란이 지속되자, 결국 헌병대에서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국방부 차관은 뒤늦게 수습책을 세우겠다고 사과했는데, 이렇게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군은 또다시 기자회견에서 백만 국민병은 편성 훈련 중에 있다 일부 불순분자들이 낭설을 퍼뜨리고 있는 것은 실로 유감이다.
라는 망언을 하게 됩니다. 이어서 신성모 장관도 공개적으로 그 말을 거들었습니다.
한편, 수사 과정에서 대한청년단 출신으로 구성된 이 국민방위군 사령부 간부들의 착복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먼저 국회 조사에서 밝혀진 부정 처분 규모는 인원수, 허위 보고에 의한 현금, 양곡 횡령액, 그리고 예하 부대의 공금 횡령액을 합쳐 총 72억8164만 원이었습니다.
방위군 간부들은 근무 태만, 정부 재산 부정처분, 횡령, 문서 위조, 비상조치령 제3조 5호 위반, 정치 관련 및 공갈이라는 죄목으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이들은 돈과 군수품을 빼돌리고, 영수증과 인원수를 위조해 자금을 빼돌렸으며, 방위군 주식인 백미, 밀가루 등을 건빵이나 젤리를 만든다는 구실로 상인에게 팔아넘기는 등의 행위를 통해 예산을 착복했습니다.
이들이 횡령한 돈의 3분의 1은 정치자금으로 쓰였고, 3분의 1은 무마비로 쓰였으며, 나머지 3분의 1은 방위군 간부들의 유흥비로 소비했습니다.
당시 사건을 담당한 헌병대 사령관 최경록 준장은 이 사건은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국회 안에 자기를 지지하는 세력을 만들기 위해 정치자금을 댄 데서 일어난 것이라고 말했고, 아쉽게도 방위군 관계자 외에 사건 핵심이나 진짜 주동 인물은 밝히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재판이 열리고 1심에서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의 기소가 각하되는 등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졌는데 당연히 난리가 났습니다.
즉시 신성모 국방부 장관과 군 내 고위 인사들이 대거 갈아치워졌죠.
사건은 재조사에 들어갔고, 신성모 장관의 압력으로 구속 수사를 하지 못했던 김윤근의 구속 수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이어진 재판에서 핵심 간부인 김윤근, 유니헌, 박기환, 강석환, 박창원 5명의 사형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죄질이 나쁜 탓도 있지만 전시 하에 벌어진 이런 사건에 대해 일벌백계 한다는 차원에서 내린 결정으로 보였습니다.
이들은 판결 2주일 뒤인 8월 13일 대구 교회 지역에서 공개총살형에 처해졌습니다.
신성모는 장관직에서 사임한 직후 일본 수석 공사로 보내졌습니다.
국회는 이 사건으로 수천 명이 굶어 죽어갔고, 귀한 장병의 20%는 생명 유지가 불가능하며, 80%는 노동이 불가능하다고 발표했습니다.
한편 국방부는 공식적으로 1234명이 사망했다고 밝혔으나 교육대를 향한 행군 중 낙오한 38만 명의 행방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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