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경제를 망쳐버린 주체 섬유 비난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영상에서 70년대 후반 북한의 경제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 대표적인 사건이 세계청년학생 축전 서해 관문 그리고 비날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죠.
세계 청년 학생 축전에 대한 이야기는 임수경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채널에 올라와 있고 오늘은 한때 민족 섬유 주체 섬유로 북한에서 각광을 받았던 비난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먹는 것 사는 것 입는 것 필수적인 요소이죠.
인류는 의식주를 개선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농업 혁명을 통해 사냥과 수렵 생활에서 벗어나 농사를 시작했고 산업 혁명을 통해 기존의 수작업으로 만들던 옷을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었죠.
국가에서도 국민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특히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국민들의 의식주를
보장하기 때문에 더 중요하죠 김일성은 북한에서는 인민 모두가 이 팝의 고깃국을 먹고 기와 집에서 비단 옷을 입고 살 수 있다.
있다고 선전하며 사람들을 현혹했습니다.
물론 실현되었던 적은 없었죠. 하지만 북한도 자신 있게 말한 분야가 있습니다.
바로 주체 섬유라 선전을 했던 비난론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비난론은 북한의 경제를 나락에 빠뜨리고 인민들을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게 한 주범이 되었죠.
그런데 비난론이란
무엇일까요. 비난로는 일제 강점기 시절에 발명된 섬입니다.
1935년 월리스 캐러더스가 세계 최초의 합성 섬유인 폴리아미드 합성 섬유를 발명하고 1938년 듀폰사가 폴리아미드 합성 섬유에 나일론이라는 이름을 붙여 생산했죠.
1939년 나일론을 이용한 여성 스타킹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나일론은 합성섬유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나일론의 성공으로 각국에서는 합성섬유 개발 열풍이 불었죠.
비단 수출국이었던 일본도 합성섬유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일로는 석유를 원료로 한 폴리아미드로 만들어졌지만 일본과 조선에서는 석유가 나지 않았죠.
그래서 일본은 석탄과 석의석을 원료로 하는 폴리비닐 알코올로 합성 섬유를 수 있는지 연구를 합니다.
교토제국대학 다카스기 화학연구소의 리승기 박사와 사쿠라다 이치로 카카미 히로시가 피브에이를 바탕으로 세계 두 번째 합성 섬유 개발에 성공하죠.
한국식 명칭으로는 이승기 박사이지만 6.25 전쟁 발발 직후
북한으로 월북해서 리승기라고 표기되는 편입니다.
리승기 박사는 자신이 개발한 새로운 합성 섬유에 비닐론이라는 이름을 붙였죠.
하지만 곧 중일전쟁과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비닐론은 상용화까지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리승기 박사도 연구 성과가 일본의 업적으로 귀속된다는 사실에 불만이 많았고 전쟁 말에는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고 이야기해서 종전할 때까지 오사카 감옥에 있었죠.
일본이 패망한 뒤 리승기 박사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자본주의를 넘어선 혁명적인 이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당대 많은 지식인들은 리승기 박사와 같이
사상에 우호적이거나 매료된 경우가 많았죠.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고 북한은 리승기 박사를 영입하기 위해 산업 대표 리종욱을 보내 설득시켰습니다.
몇 번의 설득 끝에 리승기 박사도 월북을 결심했고 7월 31일 자신의 가족과 친분이 있었던 과학자 미용옥과 리창직
그리고 서울대학교 응용화학과에서 가르쳤던 조교와 제자들까지 이끌고 북으로 넘어가죠.
당시 북한의 주요 과학자들은 모두 남한으로부터 북한 과학자들이었습니다.
북한은 리승기 박사에게 수풍댐 수풍 수력 발전소와 가까운 평안북도 삭주군 청수의 시설를 줍니다.
청수는 최북단이어서 전쟁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했고
발전소가 있어 전력도 안정적으로 공급이 가능했죠.
40만 평의 카바이드와 아세틸렌 블랙 생산 공장도 있어서 연구에 필요한 물질을 생산하거나 완성품을 생산하는 데 안성 맞춤인 곳이었습니다.
리승기 박사는 자신이 개발한 비닐론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해 1951년 첫 공업화를 이루고 전쟁이 끝난 뒤인 1958년 본격적인 공장 건설에 들어가 1961년 연간 2만 톤의 비닐론을 양산하기
시작하죠.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가자 김일성은 비닐론을 비난론으로 개명합니다.
이는 외래어인 비닐 대신 무명을 짤 때 드시 날씨이라 부르던 것에서 따와 우리 민족이 만들었다는 섬유라는 강조하기 위해서였죠.
비난로는 북한의 풍부한 석탄과 석회석을 원료로 했기 때문에 김일성이 복적으로 지원해 줬고 우리 민족이 발명하고 자체 생산한다는 점에서 대대적인 선전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북한의
특징은 저번 영상인 유경 호텔에서 이야기했죠.
군대가 투입되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끝내는 게 북한 공사의 특징입니다.
물론 안정성은 보장하지 못하죠. 북한은 비날론 공장을 민족의 대업으로 선전하며 건설 현장에 돌격대를 투입하고 속도전 운동을 벌였습니다.
흥남 비날론 공장은 8.28 돌격대가 투입되어 6일 만에 완공되었죠.
정상적이라면 건설에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규모였습니다.
난린 공사로 이루어졌음은 분명해져 100번 양보해서 운 좋게 공장은 잘 지었다고
고치고 비난로는 성공했을까요. 사실 모두 답을 알고 계실 겁니다.
초반에 북한의 경제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3대 2 중 하나라고 했으니까요.
비날론에는 치명적인 단점들이 존재했죠.
비날론은 각종 화학 화물로 만드는 생산 과정이기 때문에 대규모의 생산 시설을 지어야 했습니다.
당연히 제조 단가가 다른 섬유에 비해 쌌을 뿐더러 제조 과정에서 원자재 못지 않은 폐기물도 나왔죠 즉 한 벌의 옷을 만들려면 그만큼의 폐기물이 나와서 생산성
떨어졌습니다. 생산 과정에서 막대한 전기도 소모했죠.
그래도 1970년대까지는 북한의 전력 사정이 괜찮았기에 버틸 수 있었지만 80년대 이후 북한의 전력 사정이 악화되면서 대량으로 생산하는 데 엄청난 문제가 생깁니다.
게다가 비난로는 리승길 박사가 개발했을 당시 의도와 많이 달라져 있었죠.
리승기 박사는 비단이나 양모를 대체하려고 비난론을 개발했지만 김일성은 민족이 개발하고 민족이 생산하는 주체 섬유라며 면을 포함해 모든 천을 비난론으로
대체하려고 했습니다. 비로는 화학 약품에 강한 특성상 염색도 잘 되지 않아 색들만 있었고 그마저도 뻣뻣하여 착용감이 좋지 않고 번들거렸으며 몇 번 빨면 쉽게 줄어들어 입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죠.
하지만 김일성은 단점들이 명확했음에도 단순히 우리 민족이 만들었고 우리 원자재로 생산한다는 것을 내세워서 적인 생산을 했습니다.
물론 북한에서도 비날론 확대에 반대하는 입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생산성과 경제성을 따져 나일론이나 니트론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죠.
하지만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였다면
이 지경이 되지 않았을 겁니다. 비난로는 경제성이 없다며 김일성에게 반대 의사를 외쳤던 서울대 출신의 려경규 박사는 나일론 같은 자본주의와 귀족적인 섬유를 지지했다며 사상 검토를 받고 숙청되었죠.
심지어 리승기 박사도 비날론의 대규모 공장 건설은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비날론의 석탄 화학뿐만 아니라 나일론 같은 석유화학의 중요성도 이야기했지만 북한이 내세우는 주체 과학과 반대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북한은 1970년대 들어서 베이비 붐이 일어나 옷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기존의 생산량으로는 배급량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죠.
북한이 선택한 방법은 함흥에 있던 비날론 공장 규모의 두 배에 달하는 비날론 연합기업소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 정부와 김일성은 공장이 완공되게 되면 옷 공급도 크게 늘어날 뿐더러 400여 가지의 화학 제품 또한 생산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그동안 선전했던 이 팝의 고깃국 기와집
비단옷이라는 사회주의 낙원이 실현될 것이라 보았죠.
하지만 건설비만 100억 달러에 달했고 북한의 자력으로는 실현하기 힘든 꿈이었습니다.
결국 1단계 공사만 마무리한 채 1980 19년부터는 공사가 중단되었죠.
그동안 들어간 100억 달러라는 막대한 예산은 아무런 도둑도 없이 모두 매몰 비용이 되었습니다.
90년대 공산주의 국가들이 붕괴하고 중국
소련이 무너지면서 그동안 저렴하게 소련에게 사오던 석유가 비싸지자 북한은 전력난과 연료난을 겪게 되었고 덩달아서 비날론의 원료인 석탄 가격도 엄청 끼어버리게 됩니다.
비날론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전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고난의 행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9 14년부터는 비날론 생산도 모두 중단되게 되었죠.
건설이 중단되어 할 일이 없어진 직원들과 인부들은 설비들을 몰래 중국에다가 팔아버리면서 말 그대로 건물 뼈대만 남게 됩니다.
쓸모 없어진 비날론 공장장 자리는 김정일 시대 이후 임무를
시키는 용도로 사용되었죠. 비날론의 대시패로 북한의 섬유 산업은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고 현재는 대부분의 섬유화학 옷을 중국으로부터 수입 들여오고 있습니다.
2007년 김정일이 비날론 재건을 지시해 10년 만에 재가동에 들어갔지만 현재까지도 가동률은 30%를 넘지 못하고 있어 현재 비난로는 북한 주민들에게도 버림받아 걸레로 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인형과 주체 사상이라는 신념에 집착해 경제성을
한 강행된 결과인 피난로는 북한 지도자의 잘못된 결정이 얼마나 인민들의 삶을 파국으로 몰고 가게 했는지 폐쇄된 독재 체제인 북한 사회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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