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조선의 왕족들이 잠들어 있는 남양주엔 비운의 왕으로 알려진 고종과 그의 아내 명성황후 그리고 그의 아들이자 마지막 왕 순종 내외가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홍유릉이 그건데요. 조상에 대한 제를 중시하며 지켜온 전통적인 왕릉과 다른 모습을 갖춰 완성된 곳이기도 합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냥 왕이 아닌 황제의 무덤 홍유릉의 이야깁니다.
일제와 소속 군인이 자행하고 일본 낭인의 소행으로
조작한 비극적인 사건 의미 외변이 일어난 지 2년 2개월 만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량리에 조성한 명성황후의 능을 남양주로 이전할 계획을 세웠는데요.
안타깝게 생을 달리한 아내이자 국모에 대한 예우와 더불어 의도한 바가 있었습니다.
한일 강제 병합 전부터 간섭한 일제의 만행 중 조선 왕조의 위험을 격하시키는 규정 왕릉 조성을 막고 일반 무덤을 세우게 한 겁니다.
단 강제 병합전에 조성된 것은 해당되지 않았고 고종은 이를 피해 지울 수 있는 능을 계획했습니다.
봉분이 있는 주변의 성물이 이제 호랑이나 이렇게 양이에요.
대표적인 게 근데 그 양과 호랑이가 없어져요.
그 능침에 있던 문인과 무인도 일로 내려오고 어 그 다음에 여기에 뭐 낙타도 있고 사자도 있고 중국의 황제국과 같이 그런 생물 배치를 해놨다.
이런 얘기죠 그러나 생물의 종류는 비슷한데 크기도 다르고
그 다음에 형태도 예를 들면 다르게 했고 우리 방식으로 황제국의 이 건물의 황제국으로서의 어떤 그 틀을 만들어
가지 않았는가 이렇게 추정이 됩니다.
이렇게 탄생한 대한제국 최초의 황제릉엔 명성황후가 먼저 자리하게 됩니다.
일제의 억측 규정 이전에 죽은 자로서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이죠.
그리고 천구백십구 년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고종이 확장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는데요.
일제의 방해는 또 있었습니다.
시호부터 비문까지 수 년간 시간을 끌며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를 격하시키려 했던 건데요.
한 사람의 단행으로 비가 세워지고 책임자들의 사직으로 일단락된 홍릉 비석 사건 계속된 대치 끝에 전대한이 아닌 대안으로 지켜낼 수 있었죠.
하지만 일본식 연호를 지운 흔적이 남아 안타까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기억하는 고종은 어떤 모습인가요 악관망명과 망국의 여러 이유를 만들었다며 무능한 임금으로 폄하되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안타까운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대한제국 황제로서
근대국가를 지향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임금이었습니다.
그 중 홍유릉은 어렵게 선포한 대한제국의 위상을 죽어서도 지켜내고 싶었던 마지막 의지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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