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대감 좌상대감 우상대감 네 어린 세자를 두고 먼저 가는 게 변치만은 않구려 세자를
잘 보필해 주시오 전하 걱정 마십시오 소신 김종서 세자 저하를 훌륭한 국왕으로 보필할 것이며 어떤 정족으로부터 지켜내겠습니다.
고맙소 그리고 내 동생 수양대군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 만들어질 때 아마 가장 많이 다뤄지는 소재가 계율 정난 수양대군이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일화일 겁니다.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임에도 다뤄질 때마다 늘 대중의 흥미를 끄는 건 그만큼 수양대군의 왕위 창탈기가 극적이라는 뜻이겠죠.
세종에게 왕비 소생의 정식 아들로만 8명이
있었습니다. 장남은 이 향 어릴 때 세자로 책봉되어 나중에 5대 왕 문종으로 지위합니다.
수양대군이 둘째로 본명은 이유입니다.
대군은 세자가 되지 못한 정비 소생 왕자들을 호칭이랍니다.
원래는 진양대군이라는 호칭을 가장 오래 쓰다가 세종대왕 말년에 수양대군으로 호칭이 바뀌는데 아무래도 수양대군이 더 널리 알려져 있으니 편의상 호칭을 수양대군으로 통일하겠습니다.
조선 왕조는 초창기 왕자들의 다툼
심각했었죠. 당장의 이방원은 형제들과 싸우다가 왕이 되었고 자기의 아들들만큼은 서로 싸우게 하기 싫었지만 폐쇄자가 된 양양대군과 세종으로 지휘하게 된 충량대군 사이도 최악이었으니 말이죠.
세종대왕은 혹시 자기 아들들도 그러면 어쩌나 노심초사했으나 장남 이향이 장남 역할을 제대로 해 주어 아버지 세종을 마음 편하게 해 문종은 세자였던 시절부터 덩치도 크고 공부 잘하고 일 잘하고 주변으로부터 평판도 좋았기 때문에 장남으로서 약간 형제 자매들 사이에 늘 리더 역할을 하며 동생들에게 그렇게나
해줬습니다. 덕분에 형제 간의 우애가 좋았고 세종대왕은 자기 아들 딸들을 늘 가까이에 뒀습니다.
더군다나 세종대왕도 세자 출신의 장남이 아니라 세 번째 아들로서 대군 시절을 겪었던 기간이 길었고 그때 동안 자기 능력과 무관하게 숨죽여 살았던 시절을 몸소 겪었기 때문에 자기 자식들도 그렇게 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세종대왕은 왕자 공주들에게 자기 재주와 재능을 마음껏
있도록 수많은 일들을 두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세종대왕이 제일 가까이에 두었던 두 왕자가 둘째 아들 수양대군과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었습니다.
첫째 세자는 아버지가 한글 만들 때 아버지 대신 정사 보느라 바빴고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아버지 세종과 함께 한글 편찬 후반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세종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하나같이 유능하고 다 각자만의 주특기가 있었습니다.
이런 자식들을 보며 세종대왕은 얼마나 흐뭇해
자식 농사를 이렇게나 잘 지을 줄 알았으나 오늘의 주인공 수양대군에 대해 조금 더 깊게 살펴보자면 아까 왕자들별로 저마다의 주 특기가 있다고 했었잖아요.
수양대군의 주특기는 운동신경이었습니다.
이성계의 증손자가 아니랄까 봐 근육질 몸매에 아주 몸이 다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왕족이 싸움 잘해서 뭐 하게 자기 형 문종은 비록 운동 신경이나 무술이 뛰어나지는 않았으나 병법 군사적 지식 무기에 관한 이론 등은
당시 조선 원톱이었습니다. 물론 직접 싸움도 잘해서 나쁠 건 없지만 왕족으로서 그리고 리더로서 인정받기 위한 자질로는 문종의 재능이 그렇다고 수양대군이 힘만 쓰는 놈은 아니었습니다.
학문적 지식도 굉장히 바각다식했는데 문제는 자기 형이 훨씬 더 똑똑했던 겁니다.
수양대군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학문적 소양을 가지고 있었는데 형 문종의 존재감이
어릴 때부터 워낙 독보적이니 수양대군은 그저 늘 둘째였습니다.
더불어 수양대군이 글씨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하는데 하필 자기의 동생 안평대군이 한국 역사상 4대 명필가로 꼽히는 사람이야 수양대군도 평균 이상의 재주를 가졌지만 위 아래로 워낙 뛰어난 형제들이 서러울 만도 했겠죠.
그런데 수양대군이 그 어느 형제보다 가장 뛰어났던 거 관종 수양대군은 형제들 중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가장 컸던 관종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세종 앞에서 그나마 잘하는 말 타고 묘기 부리기나 하고 그거 잘한다고 아버지 세종대왕이 칭찬해 주면 수령대군은 또 좋아서 하고 그래도 결국 보면 세종대왕의 원픽은 장남이구나 그리고 자기 동생 안평대군의 이름은 서예 솜씨로 월드스타가 되어 있고 세종대왕의 아들들 중 가장 자유분방하게 컸던 수량대군은 세종대왕 재위 시절 늘 형제들로 인해 열등감과 피해 의식에 빠져 살았습니다.
형제들 중 가장 능력이 뛰어나지만 장남이 아니라고 차별받았던 수양대군의 할아버지 이방원과는 동일하게 볼 수 없는 이유죠 늘 형과 동생에게 눌려 살지만 그래도 쾌하려고 운동 좋아하는 수양대군을 세종대왕이 예뻐하기는 했습니다.
세종대왕은 아들 차별하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세종대왕은 정말 몸이 노쇄해지는 재위 말련 무렵 서서히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데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장남이 왕이 된 적이 없던 조선에서 세종대왕은 이번만큼은 자기 장남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으나 자기 몸이 약해질 때쯤 세자의 몸도 동시에 약해지기
갑니다. 세자는 등의 종기 때문에 고생을 했다는데 가뜩이나 세자 이향은 여자 운이 없던지라 아들을 늦둥이로 보는 바람에 언젠가 6대 왕이 될 자기 손자의 나이가 너무 어렸습니다.
그런 걱정 속에서 1450년 세종대왕은 죽습니다.
세종대왕의 우려대로 5대 왕으로 즉위한 문족은 몸이 좋아졌다가 나빠졌다를 반복하다가 1452년 얼마 못 가서
그리고 12살에 자기 어린 아들이 왕으로 즉위하니 바로 6대 왕 단종이죠.
여기서 논란이 되는 것 중 하나가 문종이 재위 시절 문종과 동생 수양대군의 사이입니다.
첫째로 문종과 수양대군의 사이는 이때까지만 해도 좋았다는 주장과 두 번째 설은 그거 전부 수양대군이 연기를 한 페이크였다는 주장 세 번째는 동생의 야심을 대충 눈치채는 문종이 동생을 달래려고 일부러 잘해준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주장
공통점은 문종 재위 시절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문종과 수양대군의 사이가 좋았다는 뜻이 됩니다.
문종이 자기의 군사적 이해도가 제갈량에게 조금 못 미친다고 하자 수양대군이 어디 감히 제갈량 따위와 우리 전화를 비교하냐며 우리 형이 더 대단하다고 립 서비스를 오지게 한 기록이 있으며 이 외에 문종 재위 시절 수양대군이 튈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튀었으면 수양대군는 일찌감치 제거되었을 거예요.
세종은 오랜 제외 기간 자기가 원하던 정치 이념을 실현
세종과 문종 기간을 거치며 여러 신하들 즉 재상들의 권한이 워낙 막강했던지라 왕자들이 설칠 틈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러한 정치 현상은 6대 왕 단종에게까지 이어지는데 원래 어린 왕이 지위하면 어머니 아니면 할머니 그리고 외척들이 권력을 잡는 법입니다.
그런데 단종의 어머니는 단종을 낳자마자 그리 권세가 있는 집안도 아니었습니다.
할머니 소헌왕후 역시 세종대왕보다 먼저 죽었으며 그 가문은 이방원이 개박살을 냈었죠.
태종 이방원 이래 한동안 조선에서 외척들이 기승을 부리지
못했습니다. 외척이 힘이 없는 상태에서 왕이 어리고 선대왕들은 능력만 있으면 재상들에게 큰 권한을 주었다.
때문에 권력은 자연스레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에게 쏠리게 되겠죠.
단종 즉위 직후 영의정은 황보인 우의정은 정부 그리고 좌의정이 바로 김종서였죠.
이 중 황보인과 정부는 성격이 소극적이고 튀는 걸 싫어해서 당시 조선의 조정은 대쪽 같은 김종서가 좌지우지하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김종선은 세종과 문종의 남부러울 만한 애정을 한 몸에 받은 사람으로 작은 6진을 개척한 영웅이 아닙니까
오죽하면 육진 개척 시 김종수의 별명이 대호였겠어요.
단종 즉위 직후에는 광보인 김종서 등이 있는 의정부에서 인사 명단에 노란색 표시를 해두면 단종은 도장만 찍어주었습니다.
이걸 이젠 유식한 말로 황표정사라고 하는데 일종의 인사 청탁이고 인사권을 왕이 아닌 의정부에서 쥐고 있었다는 건데 이게 물론 정의로운
정치 관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정부패라고 하기엔 누구나 다 하던 일이었고 진짜 썩은 권력가의 비리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교였죠.
그리고 이제 겨우 12살짜리 왕이 정치판 돌아가는 그 판을 어떻게 읽겠습니다.
그렇다고 수양대군이 쭈구리었던 건 절대 아닙니다 시르나 좋으나 세종대왕은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게 많은 업무를 부과하면서 둘의 정치적 중과 정치계 인맥은 무시 못할 정도였고 문종도 왕자들의 권력을 보호해주면서 단종이 즉위했을 때는 김종수 필두의 재상 세력 수양대군파 세력 안평대군파 세력 이렇게 3개의 세력들이 서로 대립하는
3파 구도였습니다. 이러다가 김종선은 그래도 수령대군보단 성격이 온화한 안평대군이 낫다며 일단 김종서와 안평대군이 손을 잡고 수양대군과 그의 세력은 위축될 대로 위축이 됩니다.
왕실 종친들은 수양대군을 지지 왕족의 권위가 말이 아니라면서 수양대군 편을 들어주는 중신들이 많았으나
별다른 힘이 되어주진 않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수영대군의 큰 아빠이자 세종대왕의 친형 양녕대군이 원래 정변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궁지에 몰릴 때로 몰린 사람들입니다.
김종서와 안평대군의 연합으로 찬밥 신세가 된 수 대군은 운명의 한명회를 만나게 됩니다.
이성길를 태조로 이방원을 태종으로 수양대군을 세종로 만들어준 이인자들 정도전 하륜 한명회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이들이 1인자를 주인으로 섬기기 전까진 능력은 뛰어나고 야망은 큰데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은 이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가진 게 거의 없지만 가능성이 보이는 사람을 주인으로 베팅을 크게 한명회 역시 야망은 크되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자 수양대군을 찾아갔던 거고요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참모가 되어줍니다.
또한 한명회는 자기의 친구 홍달손을 수양대군에게 소개해주었는데 하필 그 맘 때쯤 홍달손이
승진하여 궁궐수비대 일부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수양대군은 음지에서 인맥을 쌓아가면서 겉으로는 스스로 명나라 사신을 자청하지 않나 단종에게 훌인을 빨리 해서 아들을 보라고 하지 않나 단종에게 훌륭한 왕의 자질이 무엇인지 알려주질 않나 이렇게 김종서와 반수양대군파를 방심하게 만들었죠.
3년 단종 재위 1년쯤 되었을 때 수양대군은 안평대군과 김
종수에게 누명을 씌운 알리바이를 조작한 후 그 해 10월 10일 움직이기로 합니다.
사냥을 나간다는 빌미로 사냥 후 저녁에 수영대고는 한 명과 사냥에 참가했던 무사 3명 총 4명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에 찾아갑니다.
이때까지 설마 수양대군이 쿠데타이니 정변이니 절대 이런 걸 예상하지 못한 김종선은 아무 생각 없이 집을 나와 수양대군을 맞이했죠.
김종선은 왜 찾아왔느냐고 물어보자 수양대군은
꼭 하고 싶은 말을 편지로 적어왔다며 편지를 건네주었고 김종서가 편지를 펼쳐볼 때 철퇴로 김종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무사 3명이 현장에 있던 김종서의 아들과 아들의 친구들을 그 자리에서 칼로 찔러 수양대군은 곧바로 김종서의 집을 나와 홍달손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으로 빠르게 군거를
단종을 찾아가 김종서가 안평대군을 왕위에 올리려고 하는 역모 혐의가 있는데 상황이 급박해서 일단 김종서를 먼저 죽였다고 고했습니다.
단종이 바보도 아니고 누가 봐도 거짓말인 거 알지만 그 자리에서 뭐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양대군은 역모의 잔당들을 토벌해야 한다며 전 대소 신료들을 입궐하라는 어명을 내리게 했고 사태 파악을 전혀 하지 못한 대소 신료들은 왕명에 따라 입궐합니다.
세조의 브레인 한명회는 궁궐 문 안에 있었고 궁궐 문을 들어오는 사람마다 한명회는 자신의 살생도에
이름을 전부 죽이니 이 중에서는 영의정 황보인도 있었습니다 한 나라의 국무총리가 관직도 없는 사람에게 죽임을 당한 겁니다 한편 철퇴를 맞은 김종선은 아직 죽지 않았고 정신을 차린 김종선은 새벽에 여장을 한 채 사돈 집 안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다음 날 아침 관군이 들이닥쳐 김종서를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습니다.
관군이 집을 찾아왔기에 김종서는 적법한 법적 절차를 밟은 후 처결을 받으리라
당당하게 지문을 나왔으나 바로 살해당한 거죠.
그리고 수양대군은 영의정을 포함한 각종 들을 모두 역임하기로 합니다.
안평대군은 유배 보내진 후 사약이 내려졌고 이 외에도 너무 많은 대소 신료들이 유배 후 사약을 받고 사형당했죠.
이 사건이 바로 1453년 개정난입니다.
흔히들 계유정난 직후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켰다고 알려져 있으나 계유정난은 1453년
단종 폐위는 1455년입니다. 2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단종은 왕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겁니다.
물론 이 기간은 단종이 허수아비에 불과했지만 14살 15살의 단종은 의외로 수양대군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는 등 왕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려고 노력했으나 수양대군이 정말 잔인한 게 단종이 덤빌면 덤빌수록 단종이 가장 아끼는 측근들을 제거해 나갔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나와 가깝다는 이유로 계속 피해를 볼 것 같던 단종은 1455년 내 삼촌에게 왕위를 양위하겠다는
조서를 내립니다. 이렇게 1455년 수양대군은 조선의 7대왕 새 조가 되었는데 새 조는 경복궁 왕위에서 물러난 단종은 창덕궁에서 상황에 걸맞는 예우를 받았습니다.
비록 조카이지만 선대왕이라는 이유로 세조는 단종에게 꼬박꼬박 인사도 하고 사냥도 하고 다녔습니다.
단종은 엄청 불편했겠죠. 그러나 1년 후 1456년 사육신 사건이 있었고 1457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된 후 강원도 영월로 유배 갑니다.
세조는 단종 아니
노상군에게 사약을 내립니다.
그러나 사약을 전달하러 간 의금부 도사가 차마 사약을 전해주지 못하자 단종은 스스로 목을 매고 자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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