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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유의 일생 불교 유교 도교가 합쳐신 신유학이 등장하다

by 로이인랑 2022.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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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날개를 달았던 당나라 시대로 갑니다. 


집집마다 향을 피우고 속세를 벗어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황제는 부처님 사리를 궁중에 모셔놓기도 했죠. 


이것을 지켜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불교에 큰 불만을 갖고 있었죠. 


사람들이 다 같이 어울려 살지 못할 망정 수행 한답시고 산속으로 들어가 극락 세계만 꿈꾸고 있으니까요. 
그는 불교에 빠져 있는 황제에게 편지를 씁니다.
불교는 오랑케의 법도입니다. 황제께서는 어찌 외국인의 썩은 뼛조각을 궁중 안으로 들게 하십니까 이 뼛조각을 바다에 던져버리시고 천하의 폐하의 훌륭함을 드러내시옵소서 황제는 이 편지를 읽고 분노했습니다. 
내용 중에는 심기에 거슬리는 대목이 많았죠. 


결국 그는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간신히 형을 면했습니다. 


이토록 불교를 싫어했던 그는 그동안 찬밥 신세였던 유교를 부흥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승려들을 환속시키고 불교 서적을 불태우며 사찰들을 보통 사람들의 주택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죠. 
그리고 노인 고아 등 힘없는 이들을 부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불교와 도교는 허황된 종교였을 뿐이었죠. 
훗날 신유학을 예고한 그는 바로 한유입니다. 
한유는 문장가입니다. 유교를 내세운 사상가이기도 하죠. 
본관을 따서 한창려라고도 합니다. 768년부터 824년까지 살았습니다. 
당나라 시대의 인물이죠. 당송팔대가로도 유명합니다.
당나라 송나라에서 뛰어난 문장가 8명 중 한 명이죠. 
그는 뛰어난 글 솜씨로 자신의 생각을 서슴없이 표현했습니다. 
이제 그가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겠습니다. 
한유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습니다. 일찍이 부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큰 형 밑에서 자랐죠. 부루한 환경에도 한유는 공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7살 때부터 독서를 하면서 스스로 학문을 연마했죠. 
하지만 형마저 세상을 떠나 형수 밑에서 길러집니다. 
그럼에도 독서와 글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19살 때는 출세를 위해 장안으로 떠납니다.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서였죠.
당나라 때 인재를 뽑는 방법으로 과거 시험이 있었습니다. 
이전 시대까지는 귀족 중심으로 인재를 등용했지만 당나라 때는 과거 시험으로 인재를 널리 구하고자 했죠. 
물론 여전히 귀족들이 유리했지만 한유처럼 딱히 뒷배경이 없어도 시험을 잘 치르면 출세가 가능했습니다. 
학문에 자신이 있었던 한유는 자신 만만하게 시험을 치르게 되었죠. 
하지만 떨어졌습니다. 그것도 세 차례나 떨어집니다. 
네 번째 시험에서야 마침내 합격하게 되죠.
하지만 바로 관리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단계 더 시험에 통과해야만 관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매우 어려운 시험이었으며 어느 정도 인맥도 필요했죠 한유는 여기서 또 세 번 떨어집니다. 
자신을 알아봐 달라고 재상에게 편지도 썼지만 답장이 없었죠. 
그것도 세 번이나 보냈지만 역시나 답장은 없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간절했는지 알 수 있죠 수년 동안 공부했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현실에 허탈했고 그는 결국 장안을 떠납니다. 
1년 정도 낙양에서 지내다가 삶을 바꿔줄 한 사람을 만납니다. 
절도사 동진이라는 사람이죠.
절도사는 당나라 때 있었던 지방 조직입니다. 
지방의 군사와 재정을 관리했죠. 그들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특히 과거 시험에서 잘 안 된 선비들을 데려가곤 했죠. 
절도사 동진은 마침 한유가 사는 곳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회에 한유는 동진의 도움으로 절도사 망녀로 채용됩니다. 
절도사 망조 생활을 하면서부터 한유에게 제자가 생깁니다. 
그는 동료 제자들과 글을 주고받으며 친분을 다졌죠
특히 한유는 공자 맹자의 도를 마치 자신이 계승한 듯 자부했습니다. 
글 또한 화려한 문장보다 옛 뜻이 담긴 문장을 좋아했죠. 
논쟁하기 좋아했고 자존심이 강했기에 종종 비방을 듣기도 했습니다. 
한유는 절도사 망료 생활을 5년 동안 했습니다. 
이때 그의 문장과 사상은 더 다듬어줬습니다. 
중간에 변란으로 다른 절도사로 이동하기도 했죠.
한유가 34살이 되었을 때 다시 과거 시험에 도전합니다. 
벼슬기를 저버릴 수는 없었죠. 포기하지 않고 시험을 치른 결과 마침내 합격합니다. 
사문 박사로 임용되었죠. 어떤 지역에 가뭄으로 인한 기근이 생겼습니다. 
근데 이실이란 사람이 세금을 그대로 부여하려고 했습니다 한유는 이에 맞서 이실을 지적하며 과세 방침에 대해 의견을 냈다가 오히려 자신이 지방으로 전출되는 사건이 생깁니다. 
유배와 다르지 않았죠. 하지만 진짜 실현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한유는 조정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몇 차례 승진도 했지만 미움을 받아 강등되는 등 여러 일이 있었죠. 
그동안 공부도 하고 글도 꾸준히 썼습니다. 
그런데로 나름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나이 52살에 큰 사건이 하나 터집니다. 
바로 황제에게 논불골표라는 글을 올린 것이었죠. 
당시 당나라 헌종은 부처님 손가락 뼈를 궁중에 들여왔습니다.
신하와 백성들 또한 그 뼈에다 복을 빌고 기도를 했죠. 
어떤 사람은 너무 과한 시주로 파산하기도 했습니다 한유는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그래서 황제에게 글을 올립니다. 
불교는 오랑케의 법도입니다. 오래 전 요임금 순임금은 100살이 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불교가 들어온 이후 대부분의 황제는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들과 우리는 언어도 다릅니다. 
설령 외국인인 부처가 중국에 온다 한들 황제께서는 하사품을 주고 돌려보내면 그만입니다.
하물며 오래된 썩은 뼈를 어찌 신성한 궁중으로 들이십니까 이 뼛조각을 바다에 던져버리시고 천하의 폐하의 훌륭함을 드러내시옵소서 황제는 이 편지를 읽고 분노했습니다. 
불교에 지나치게 빠진 점을 지적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말하는 건 선을 넘은 것이었죠. 
결국 한유는 사형 판결을 받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간신히 사형만은 면했습니다. 
대신 먼 지방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죠.
한유는 가족들과 함께 남쪽 끝 지방으로 유배를 갑니다. 
그쪽 사람들과는 문화도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한유는 황제에게 도착 편지를 보냅니다. 
형식상 감사 편지였지만 속 뜻은 한 번 봐달라는 것이었죠. 
금방 꼬리를 내렸기에 후대 사람들의 비판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유는 그곳에서 마침 고향이 비슷해 말이 통하는 스님을 만납니다.
이 스님과 친분을 쌓게 되죠. 한유는 이 스님이 꽤 총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불교를 배척했지만 스님들과는 원만히 지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때문에 한유가 불교에 귀의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한유의 친구 중에 불교에 심취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 친구는 한유에게 편지를 씁니다. 
내심 기대한 친구는 소문 확인 차 편지를 보냈죠. 
하지만 한유는 헛소문일 뿐이라고 답장합니다.
세상에 퍼진 불교와 도교의 해악이 너무 크며 공자 맹자의 인의로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죠. 
그는 여전히 육아의 도를 추구했습니다. 
황제가 바뀌고 한유는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능력을 발휘하여 승진을 거듭하고 여러 정책을 펼칩니다. 
말년의 한유는 높은 관직에도 오르고 업적도 남기게 되죠. 
하지만 공부하느라 일찍부터 눈이 안 좋아지고 백발이 되었으며 치아까지 온전치 않았습니다.
57살이 되었을 땐 건강이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요양을 하며 몇 편의 시를 짓습니다. 
그리고 그 해 겨울에 자택에서 생을 마치게 됩니다. 
하녀의 삶은 평탄치 않았습니다. 불교와 도교 세상에서 외롭게 유학을 외쳤죠. 
이전에도 몇몇 유학자들이 목소리를 냈지만 그 힘은 본격적으로 한유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신유학의 도화선이 되었죠. 그가 주장한 사상은 무엇이었을까요.
한유는 문장가로 더 유명하지만 여기서는 유학자 한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한유는 배불론자입니다. 
불교를 배척한다는 뜻이죠. 극락 해탈을 위해 돋닦고 있는 불교나 장생불사를 추구하며 신선놀이하는 도교는 한유에게 허망한 종교였을 뿐입니다. 
진정 사회를 이끌어갈 사상이 필요했죠 불교를 억누를 방법으로 유학을 어떻게든 끌어올리려 했습니다.
그가 쓴 다섯가지 글을 모아놓은 오언이라는 작품에서 자신의 사상을 드러냅니다. 
원도 편에서는 육아의 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원성편에서는 타고난 세 가지 본성에 대해 말하죠. 
원회 편에서는 남을 비방 폄훼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원인 편에서는 인간 세상에는 인간이 주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원귀 편에서는 인간이 잘못하면 귀신이 벌을 준다고도 하죠. 
한유의 사상을 키워드로 정리했습니다 고문 도통 본속론 세 가지입니다. 
먼저 고문입니다.
옛날 그리라는 뜻입니다 한유는 뜻이 담긴 옛 문장을 좋아했습니다. 
당시엔 화려한 문장인 변려문이 유행했죠. 
하지만 한유는 그보다 문장의 뜻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별 뜻도 없으면서 현란하기만 한 문장을 싫어했죠. 
꾸밈 없는 옛날 글에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한 나라 이전의 옛 문장들을 살려내는 운동을 합니다 고문 운동이라고 하죠. 
복고주의입니다. 옛 유아 성인들의 도를 살려내는 것이 목표였죠.
불교나 도교의 도와는 다른 이이가 담긴 유아의 도입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불교와 도교를 누르고 유학을 부흥시킬지 고민했습니다. 
그 대응법으로 도통서를 말합니다. 다음 키워드로 도통이입니다 한유는 유가의 도가 누군가에게 이어져 내려왔다고 말합니다. 
마치 불교 선종의 계보와 비슷합니다 한유는 유가의 계보도 있다고 합니다. 
아주 오래전 왕인 요임금부터 순임금 우임금 탕임금 문무 주공 그리고 공자 맹자로 이어졌다고 하죠.
그런데 맹자 이후 육아의 도가 끊겼고 이것을 자신이 이어받았다고 어필합니다. 
불교에 대응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인 셈이죠. 
훗날 유학자들이 잘 써먹게 됩니다. 다음 키워드로 본성론입니다 한유는 원성 편에서 본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본성은 상중하로 세 단계가 있다고 하죠.
태어나면서부터 선한 사람은 상이고 자라면서 선도 되고 악도 될 수 있는 사람은 중이고 태어나면서부터 악한 사람은 하라고 합니다. 
성삼품설이라고 하죠. 사람마다 타고난 성품이 다 다르다는 뜻입니다. 
사실 본성을 세 단계로 나눈 것은 전한시대 동중서에서부터 나왔습니다. 
동중서는 한나라 때 유교를 부흥시킨 인물입니다. 
그도 본성을 세 단계로 구분했죠. 한유는 동중서가 주장한 본성론을 계승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그의 제자 이고가 주장한
성선 정악설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성선 정악설은 본성은 선환인데 감정 때문에 악행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 이론은 모순이 있었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본성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할 수 있다는 한유의 성삼품설이 등장한 것이죠. 
한유는 신유학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당시 불교가 나라 운영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했죠. 
하지만 신유학 또한 불교 사상에 영향을 받습니다. 
이후로 유교 불교 도교는 서로 섞여
시작합니다. 신유학의 대표인 성리학 또한 유불도가 합쳐진 사상이라는 평을 받죠. 
유학을 향한 한유의 외침은 먹혀들었고 동아시아 사상은 점점 신유학으로 탈바꿈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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