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인도에서 시작된 네 가지 신분제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그리고 쏘드라 브라만 계급은 배달을 가르치는 일과 제사를 주관한다 크샤트리아 계급은 나라를 다스리고 배달을 배우도록 한다 바이샤 계급은 가축을 기르고 장사를 하며 배달을 배우도록 한다 그리고 수드라 계급은 오직 이들에게 복종하는 일만 한다 만약 수들의 계급이 배달을 암송하거나 엿들을 경우 혀를 잘라내거나 귀에 쇳물을 부어라
베다는 기원전 1500년경부터 고대 인도를 지배한 사상입니다.
성스럽다. 여겨진 이 사상은 천한 계급인 수드라가 배워서는 안 됐죠 당시 인도를 지배하던 종교는 브라만교였습니다.
힌두교의 원형이죠. 그런데 기원전 800년경이 되자 시대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도시 국가가 발전하면서 신분제가 느슨해졌습니다.
브라만교는 우파니샤드로 변화를 시도했지만 시대 변화는 더 빨랐습니다.
도시 국가들은 점점 커져갔고 그들은 서로 다투게 됩니다.
마치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와 비슷했죠.
시대가 혼란스러워지면서 새로운 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사문이라는 수행자들이었죠. 그들은 기존 전통보다 새로운 철학과 사상을 제시합니다.
신분제를 부정했다는 특징도 있었으며 여러 가지로 브라만교와 대립하게 되죠.
사문들 사이에서도 추구하는 방향은 다양했습니다.
어떤 이는 사후세계를 부정한 쾌락주의를 추구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엄격한 고행과 불살생을 추했죠.
때마침 이들에 맞서는 또 다른 사문이 등장합니다.
그는 극한의 쾌락 혹은 고행이 너무 치우쳐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극단이 아닌 중도의 길을 택했죠. 수행 끝에 진리를 깨우친 그는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을 깨우치고자 마음 먹습니다.
신분제에 상관없이 누구나 말이죠. 불교의 창시자인 그는 바로 고타마 시타르타 즉 붓다입니다.
성은 고타마 이름은 시타르타입니다. 석가족의 성자라는 뜻으로 석가모니라고도 합니다.
부따는 깨달은 자라는 호칭입니다. 흔히 부처라고도 부르죠.
말고도 세존 석존 열애 등등 다양한 존칭이 있습니다.
부따의 생애 또한 기록이 다양합니다.
신화도 많죠. 이제 그의 삶을 쉽고 간략하게 알아보겠습니다.
기원전 624년 인도 북쪽 현재 네팔 지역에서 붓다가 태어납니다.
카필라국의 왕자였죠.
그는 태어나자마자 앞으로 일곱 걸음 걸어가더니 한 손으로는 하늘을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천하의 내가 가장 존귀하며 괴로움으로부터 편안케 하겠다는 뜻이죠.
부따가 태어날 때쯤 누군가 예언을 합니다.
미래의 나라를 다스릴 위대한 왕이 되거나 출가해 인류를 구원할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이죠.
왕이었던 아버지는 부따가 커서 위대한 왕이 되길 바랐습니다.
부따는 어려서부터 다양한 언어와 학문 그리고 무술을 배웁니다.
풍족한 환경에서 왕이 될 교육을 받고 있었죠.
12살이 되었던 부따는 어느 날 고민에 빠졌습니다.
궁 밖에서 고통받으며 일하는 농민을 보았고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모습도 보았죠.
왜 서로를 죽이며 고통을 받는지 함께 살 방법은 없는지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19살이 되었을 때는 야쇼다라 공주와 결혼합니다.
당시 결혼을 하기 위한 풍습으로 무술 대회를 개최했는데 부따는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우승해 결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죠.
20살이 된 부따는 중요한 목격을 하게 됩니다 고통을 직접 보게 된 것이죠.
성에는 동남 서 북 4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먼저 동문으로 나간 붓다는 노인을 보았습니다.
누구나 늙는다는 것을 깨달았죠. 다음으로 남문에 가니 고통받는 병자를 보았습니다.
서문에서는 죽은 자를 보았고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마지막 북문에서는 출가 수행자를 만납니다.
그리고 고통에서 벗어날 희망을 가지게 되죠.
이후로 붓다는 고통이 무엇인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부따의 아버지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아들이 자꾸만 사색에 잠겨 있으니 혹시나 출가하진 않을까 걱정했죠.
호화로운 환경을 조성해주고 환락에 빠지게 해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부따는 그런 환경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출가를 결심합니다. 그때가 29살이었습니다.
부따는 출가 후 3명의 스승을 만납니다 고행을 닦는 스승과 명상을 하는 스승이 있었습니다.
수행 방법에는 고행과 명상이 있었던 것이죠.
부따는 이들에게 배우다 스스로 수행에 나섭니다.
그리고 고행이란 방법을 택했습니다. 고통을 감내하면서 업을 걷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단식은 기본이고 오물을 먹는 등 몸이 가죽만 남을 정도로 혹독하게 수행했죠.
부따는 6년 동안 고행에 매달렸습니다.
하지만 끝내 포기합니다. 극단적인 방법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죠.
부따는 목욕을 하고 공양을 받아 몸을 가다듬습니다.
그리고 피팔라 나무 아래에서 깊은 명상에 빠져듭니다.
온갖 마음속 번네가 그를 방해했지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부따는 해가 뜨는 동쪽을 바라보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때가 35살이었습니다.
부따에게 브라흐마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브라만교의 신인 그는 부따에게 부탁을 합니다.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전해달라고 말이죠.
부따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깨달은 진리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지 말이죠.
고민 끝에 부따는 중생들에게 널리 깨달음을 전파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부따는 먼저 옛 친구 5명에게 설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부따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왔죠 또한 석가족을 교화했으며 가족들도 부따에 귀의했습니다.
교단의 규모는 점점 커져갔죠.
많은 비구들을 받아들였지만 특히 여성을 받아들이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결정을 합니다.
여성 차별이 당연시되던 시대에선 놀랄 만한 일이었죠.
마하파자파티라고 하는 사람이 최초의 여성 스님 비구니가 됩니다.
부따는 45년 동안 설법을 합니다.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이 부따에게 가르침을 받았죠.
천민부터 왕조까지 신분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똑똑하든 어리석든 상관없었습니다. 심지어 살인자도 있었죠.
특히 잘 알려진 10명의 제자는 훗날 불교 전파에 큰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부따는 생의 마지막 공양을 받게 됩니다.
춘다는 가난한 대장장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부따에게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자 감사한 마음에 부따와 제자들에게 공양을 올리게 해달라 부탁했죠.
부따는 침묵으로 승낙했고 춘다는 서둘러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얼마 후 그는 준비한 음식을 차례로 나누어 주고자 했습니다.
먼저 부따에게 나누어 주자 부따는 그 음식을 보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준다여 남은 음식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말고 땅 속에 묻도록 하라 부따는 받은 음식을 혼자서 먹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음식에는 먹어선 안 될 독버섯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죠.
가난했던 춘다는 음식 재료를 야생에서 구하다 실수했고 부다는 알고도 그 음식을 먹었던 것입니다.
담아주는 음식을 그대로 먹는 것이 원칙이었으니까요.
붓다는 얼마 후 식중독 증세를 일으켰습니다.
분노한 제자들은 춘다를 추궁했습니다.
춘다 또한 몹시 괴로웠죠 하지만 붓다는 오히려 춘단을 위로했습니다.
비록 실수였지만 그 공덕만큼은 아주 크다고 말했죠.
부따의 몸은 식중독으로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그는 곧 생을 마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설법을 합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 의지하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 의지하라 모든 것은 소멸한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부따는 두그루의 살아나무 아래에 누웠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납니다. 이때 나이가 80세였습니다.
붓다 사 후에도 제자들은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 모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후대인들의 생각은 서로 차이가 있었고 학판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그렇지만 공통된 진리는 있습니다.
이번에는 붓다가 깨우친 진리 즉 근본불교의 핵심은 무엇인지 쉽게 살펴보겠습니다.
부따는 연기법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진리죠 사람이 태어나고 살아가다 늙어 죽는 과정이 그렇습니다.
이 과정을 시비 연기로 풀어냅니다. 윤해를 뜻하기도 하죠.
괴로운 삶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 열반입니다.
수행자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윤회니 열반이니 하는 것들은 일반 사람들이 알고 체험하기는 어렵습니다.
부따는 연기법을 깨달았지만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진리를 쉽게 전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사실 붓다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 삶의 괴로움을 없애는 것이죠. 붓다의 사상을 키워드로 정리했습니다.
무아 사성제 두 가지입니다. 먼저 무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브라만 교회는 아트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트만은 윤회하는 또 다른 진짜 나라는 뜻입니다.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절대적 영혼 같은 것이죠.
부따는 아트만을 의심했습니다 고정된 내가 따로 있는 것인가 하고 말이죠.
만물은 항상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는 나를 무화라고 합니다.
하지만 무아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내가 있나 없나 하는 한가한 고민보다 괴로움을 없애기 위한 개념으로 사용되죠
내 영혼이 어디 있고 죽으면 뭐로 다시 태어나는가 하는 고민은 부따에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진리는 오직 괴로움과 괴로움의 해결에 집중되어 있죠 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독화살을 맞았으면 얼른 빼야 하는데 이 화살이 어디서 날아왔을까 고민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됩니다.
부따는 먼저 독화사를 빼라고 말합니다.
무화가 바로 독화사를 빼낸 상태입니다.
현실 속 괴로움을 빼낸 상태를 표현한 개념이죠.
영혼이나 사후 세계가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를 따지며 난해하게 접근하는 것은 독화사를 방치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것이 번내죠 부따는 결코 사람들에게 어렵게 설법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 무한은 생각 감정 오감을 나에게서 떼어낸 상태입니다.
깨달음의 상태죠 생각 감정 오감을 다섯 가지 무더기로 구분해 오온이라고 합니다.
색수상행 식으로 이루어져 있죠
색은 물질 수는 느낌 상은 인식 행은 형성 식은 의식입니다.
나 자신은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자아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이것을 버리라고 합니다.
왜 버려야 할까요. 오온에 집착하는 것은 괴롭기 때문입니다.
왜 괴로울까요. 오온은 내 마음대로 안 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항상 변하죠. 어제와 오늘의 나는 생각과 감정이 다릅니다 고온이 달라지죠
한순간 행복도 지나가고 한순간 불행도 지나갑니다.
행복한 것도 불행한 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죠.
그런데 이것들을 자꾸 붙잡으려 하니 괴롭다는 말입니다.
붙잡지 말고 내려놓은 상태가 무아입니다.
애초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죠.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니 오은에 집착하는 나는 내가 아닙니다.
때문에 그냥 내가 없다라는 해석보다는 오은에 집착하는 나는 내가 아니다가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쉽게 말해 내 생각 감정 오감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죠.
용어로 정리하면 무상 고 무아 세 가지를 3법인이라고 합니다.
영어한 것이 없는 무상 그래서 괴로울 고 이것들은 내가 아니다라는 무아죠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그 실천 방법으로 사성제를 제시합니다.
다음 키워드로 사성제입니다. 코끼리 발자국에 다른 모든 발자국이 들어가듯 사성제 안에는 모든 진리가 들어가 있죠.
사성제는 괴로움의 원인과 그 해결책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줄여서 고집멸도라고 합니다. 먼저 괴로움의 정체를 파헤치는 고성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부따는 삶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태어남과 늙음은 괴롭습니다. 병듬과 죽음도 괴롭죠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과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앞에서 살펴본 오훈에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자꾸 오온에 집착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 원인을 집성제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두 번째로 집성제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욕심입니다.
가래라고 합니다. 갈망 갈증 같은 것이죠.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가래를 불러일으킵니다.
이 세 가지를 탐진치라고 합니다. 마땅히 버려야 할 것들이죠.
특히 어리석음이 문제입니다. 사성제를 모르고 현상에 집착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합니다.
현상에 집착하는 것은 탐욕이고 탐욕이 충족되지 못하면 화가 납니다.
사성제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가래가 생기고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죠.
한마디로 정리하면 괴로움은 가래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괴로움의 사슬을 끊어내지 못하면 업이 반복된다고 합니다.
괴로운 삶을 이어가는 윤해를 말하죠.
하지만 끊어낸다면 그것이 바로 열반입니다.
세 번째로 멸성제입니다. 앞서 집성제는 버려야 할 것들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잘 버렸다면 열반에 들 수 있습니다.
멸성제 즉 열반은 수행자가 이르는 최종 목표인 셈이죠.
열반은 번뇌의 불이 꺼졌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러 더 이상 유해하지 않는다는 의미죠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 될까요.
고성제에서는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았고 집성제에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알았으며 열성제에서는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도성제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마지막으로 도성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부다는 어떤 수행을 해야만 깨달을 수 있는지 고민했습니다.
극한의 고행만이 답도 아니고 극한의 쾌락도 답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이 적절점을 찾는 것 중도의 길을 택했죠.
그 수행법으로 8정도를 제시합니다.
실천해야 할 8가지 방법이죠. 8가지나 되지만 간단히 세 그룹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먼저 바른 견해는 사성제를 아는 것입니다.
바른 사유는 사성제를 탐구해 탐진치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지혜로 묶을 수 있습니다.
해라고 합니다. 다른 말은 거짓말 폭언 욕설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행위는 살생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른 생계는 피해주면서 생계 유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계율로 묶을 수 있습니다.
개라고 합니다. 바른 정지는 해로운 법을 버리고 유익한 법을 취하는 것입니다.
바른 기억은 유익한 법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바른 집중은 마음을 하나로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선정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정이라고 합니다. 팔정도는 탐진치를 걷어내는 방법입니다.
물론 탐진치는 완전히 걷어낼 수는 없으며 다시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항상 팔정도를 실천해야 하는 것이죠.
실천으로 탐진치가 걷히기 시작하면 오온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집착이 사라지면 괴로움이 사라진다고 하죠.
부따는 깨달음을 얻은 이후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혼자 깨닫고 끝날 수도 있었는데 말이죠.
그는 괴로움에 발버둥치는 이들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고 평안함을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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