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천500년 전 춘추전국 시대입니다.
당시는 전쟁이 끊이지 않는 난세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려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속이 로 이득을 취했습니다.
때문에 속세를 떠나는 이들도 늘어났고 세상은 점점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죠.
그리고 한 사람이 태어납니다. 그는 세상을 바로잡고 싶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도덕적인 사회를 꿈꿨죠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나라들은 고상한 자세보다 강한 힘을 원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안 될 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았죠.
비록 뜻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수많은 제자들을 남깁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제자백가의 시대가 열립니다.
다양한 사상가들이 등장한 시대였죠.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많았지만 반대로 비판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대체 어떤 사상을 말했을까요. 그는 바로 공자입니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부터 기원전 479년까지 살았습니다 고대 중국의 춘추시대 노나라에서 태어났죠 그가 3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납니다.
어머니 밑에서 자란 공자는 어려서부터 제사용품으로 제사 흉내를 내며 놀았다고 합니다 가난했던 집 안에서 공자는 딱히 어디서 교육을 받지 못했죠.
그는 학문에 뜻을 두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때가 15살이었죠. 얼마 뒤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납니다.
홀로 남겨진 그는 생계 유지를 위해 온갖 잡일을 할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19살 때에는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습니다.
공자는 가축을 기르는 일도 하고 창고지기 일도 했습니다.
비천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죠. 당시 주변국에는 유능한 재상이 여럿 있었습니다.
이들을 보고 공자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죠.
그 밖에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일도 잘하고 학문도 뛰어났던 공자는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당시는 귀족 가문 삼환이 권력을 잡고 있었습니다.
계손씨 숙손씨 맹손씨 세 가문을 삼환이라고 하죠.
제후였던 노소공은 이들을 몰아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계략을 짜 계손씨를 공격했지만 실패했죠.
결국 노소공은 제 나라로 망명을 갑니다.
36살이었던 공자도 따라갔습니다. 제 나라에 도착한 공자는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공자는 몇 년 후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교육을 시작합니다.
교육 체계를 정리했으며 많은 제자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공자는 50세부터 본격적으로 나랏일을 시작합니다.
대사구에 임명되어 나라를 안정시키고 외교로 큰 명성도 얻었습니다.
또한 귀족인 사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노력했죠.
하지만 옆에 있던 제나라의 모략으로 나라는 엉망이 되어 갔습니다.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천하 유세를 마음먹습니다.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노나라를 떠났습니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유세 활동을 했죠.
하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그를 등용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들은 덕을 펼치는 것보다 군사나 돈을 늘리는 방법을 원했으니까요.
공자와 제자들은 이리저리 떠돕니다. 배고픔에 시달려 죽을 뻔한 위기도 여러 번 겪죠 그때 공자 모습은 마치 상가집 개와 같았습니다.
주인 없는 개는 밥 챙겨줄 사람도 없어 궁핍하게 지내죠 당시 공자가 처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던 중에 노나라에서 공자를 부릅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공자는 돌아가기로 마음 먹죠 그렇게 14년 동안 유세 활동은 끝이 났습니다.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가 69세였습니다.
남은 생을 제자들을 기르는 데 보냈습니다.
학문을 다듬고 책을 정리하기도 했죠.
그런데 얼마 후 불행이 하나씩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아들이 죽고 이어서 수제자 아내까지 죽었습니다.
공자 자신도 병을 얻어 들어 누웠습니다.
얼마 뒤 오랜 제자 자로가 별난으로 죽습니다.
공자는 말년의 슬픔으로 가득했죠. 그리고 얼마 후 74세의 생을 마칩니다.
공자는 세상이 혼란해지는 이유가 신분 질서가 망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엔 신하가 왕을 넘보는 하극상이 빈번히 일어났죠 또한 인간성이 점점 사라지는 잔혹한 사회를 걱정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지 고민했죠.
정치적으로는 정명사상을 강조했습니다.
명분을 바로잡는 것을 뜻합니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이 각자 위치에서 역할을 다하는 것을 말하죠.
그러한 질서 속에 서로를 위해주는 마음 덕이 넘치는 사회가 공자가 이루고 싶었던 대동사회입니다.
덕이 많은 사람을 군자 그렇지 못한 사람을 소인으로 나누기도 하죠.
중요한 것은 공자가 인간 중심 사상을 펼쳤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내려준 사명 천 명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그보다 현실 속 인간의 삶을 바라봤죠.
하늘이 내려준 도덕성으로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자 사상에는 항상 인간이 중심입니다.
여기서는 공자가 어떻게 인문 사상을 펼쳤는가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의 사상을 키워드로 쉽고 간단하게 정리
했습니다. 인과 예 두 가지입니다. 먼저 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부처는 자비 예수는 사랑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추구했다고 한다면 공자는 인이라는 것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인을 실현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습니다.
인이 대체 뭘까요. 공자는 인을 일관되게 정의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에 따라 인물에 따라 다르게 표현했지만
공통적인 의미는 있습니다. 인류애를 강조한 인간 중심 사상 정도로 볼 수 있죠 공자는 귀신같이 알 수 없는 존재를 멀리하고 인간의 삶을 더 우선시 했습니다.
당시에는 하늘에 소원을 빌거나 제사를 지내 귀신을 모시는 행위가 많았습니다.
공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에 힘쓰고 귀신은 공경하되 멀리하면 지혜롭다고 할 수 있다.
귀신이 있긴 있는 것 같으니 공경은 해야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먼저니 어느 정도는 거리를 두라는 말이죠.
제사를 지내는 이유도 귀신을 위해서라기보다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던 것이죠.
하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자는 지나치게 하늘에 의존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제자인 자공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께 여러 가르침을 들었지만
성과 천도에 대해서는 들을 수 없었다.
성과 천도는 현실에서 증명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것들입니다.
인간을 중시했던 공자는 저런 모호한 개념에 말을 아꼈죠 훗날 성리학이 천리 같은 추상적 개념을 적극 사용한 것과 대비됩니다.
물론 공자가 하늘에 의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구절도 있습니다.
하늘이 덕을 부여해 주었다든가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는 등 공자는 하늘을 도덕적 의미로서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하지만 무엇보다 주체는 인간이었습니다.
인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자세와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요.
공자는 설을 말합니다. 그는 설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내가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 이를 기소불욕 물시어인이라고 합니다.
평생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 생각했죠.
서로를 신뢰하고 부모 자식 간의 도리를 챙기는 것 또한 인을 갖추기 위한 자세입니다.
이 자세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는 예가 있습니다.
두 번째 키워드로 해입니다. 예는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간소하더라도 그 뜻이 전해진다면 충분했습니다.
화려하게 치장된 형식이 아닌 진실된 마음을 전하는 최소한의 표현 방법이었죠.
공자는 보여주기식인 허레 어식을 경계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는 사치스럽기보다 검소해야 하고 형식보다는 슬퍼하는 것이 낫다 당시에도 얘에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얘를 아첨꾼이나 하는 것처럼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공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인하지 못하면 예의를 지켜서 무엇하겠는가 공자에게 얘는 진실된 마음이 바탕이어야 했습니다.
예의 본질은 진실된 마음이지만 사회 규범으로서도 의미를 가졌습니다.
국가 간에 외교를 할 때 예는 중요했습니다.
더불어 악 즉 음악을 강조했죠. 예악은 당시 국가 통치에 있어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예가 기본적인 사회 질서라면 악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수단이었죠.
허의 허식을 비난했지만 반대로 예를 버리려는 것도 경계했습니다.
제자 자공이 제사에 바치는 양이 아까워 그 일을 없애려 하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그 양을 아끼지만 나는 그 예를 아낀다 얘가 사라지는 것을 걱정했죠.
지나치게 형식적인 것은 옳지 않지만 지나치게 배척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사회에는 최소한의 질서가 있어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얘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까요.
공자는 제자 안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를 이겨내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인이다.
이를 극기복례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공자 사상의 핵심인 인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예가 필요하고 얘는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말이죠.
다른 무엇 타인이나 미신 알 수 없는 것들에 기대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공자는 옛 것을 배움으로써 새로운 앎을 추구했습니다.
이를 온고지신이라고 하며 논어에 처음.
나오죠 단순히 옛 것만을 추종하지 않고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덜어내는 시기였습니다.
비인륜적인 순장 같은 관습은 비판했죠.
또한 미신적인 종교를 멀리하려고 했습니다.
공자는 인간 중심 사상을 널리 퍼뜨리고자 했습니다.
그 시작은 누구나 차별 없이 교육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죠.
신분제 사회였던 당시에는 파격적이었습니다.
신분 역할을 중요시했던 공자였지만 교육에서만큼은 구별이 없었죠.
많은 제자들 덕분에 공자 학문은 널리 퍼지게 됩니다.
특히 공자 이후 육아 사상은 맹자와 순자로 갈라집니다.
둘은 같은 유가 사상가이지만 사상적 차이가 있었죠.
아주 간단히 말해 맹자는 이상적 순자는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송대 성리학자들은 맹자 손을 들어줬습니다.
공자 사상의 상당 부분은 순자가 가지고 있음에도 순자는 유교의 이단아가 되어버렸죠.
때문에 공자 사상의 원형을 보기 위해서는 물론 역사적으로 오래된 유교 사상도 중요하지만 비교적 가려져 있는 손자와 같은 인물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자에 대해 조금은 다른 시각이 생길 수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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